글: 적수동(滴水洞)
1635년, 청태종 홍타이시는 부족의 명칭을 "제신(诸申)"에서 "만주(满洲)"로 바꾸었다. 청나라의 <태종실록.권25.만문노당>에 따르면, 천총9년 십월십삼일에 "청태종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원래 만주, 하다(哈达), 우라(乌喇), 휘파(辉发)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전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왕왕 제신이라 칭했다. 무릇 제신이라는 명칭은 석북초묵이근(席北超墨尔根)의 후예이고, 실은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다. 우리나라를 만주라고 하는 것은 역사도 깊고 오랫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사람은 우리 만주의 원래 이름을 쓰고, 이전에 헛된 명칭은 쓰지 말라.'
윗글에서 '제신'은 고대전적에서 일반적으로 주리진(朱里真) 혹은 여진(女真)이며, 더욱 초기의 고대전적에서는 숙신(肃慎) 혹은 식신(息慎)으로 불렸다. 조서에 나오는 '석북초묵이건'은 석백족(锡伯族)의 한 우두머리 이름이다. 당대 중국에는 신강에서 출생한 여자배우 퉁리야(佟丽娅)가 바로 석백족이다. 이 석백족은 아마도 고대전적의 선비족(鲜卑族)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석백족의 직접조상은 확실히 제신, 즉 여진족이다. 조서에서 청태종이 말한 만주는 실제로 명나라초기에 봉해진 건주여진부(建州女真部)이고, 추장에게는 이(李)의 성을 하사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추장은 이름이 이만주(李满住)이다. 청태종이 여진족을 만주족으로 바꾼 것은 실제로 산해관으로 진입하기 위한 정치적 준비였다. 자신의 조상이 대명과 한족과 보통관계가 아니었따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청사고(清史稿)>에는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만주족의 조상은 금나라 여진족이 동북에 남긴 부족이라고.
<청사고. 태조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太祖承天广运圣德神功肇纪立极仁孝睿武端毅钦安弘文定业高皇帝)는 성이 애신각라씨(爱新觉罗氏)이고 이름이 누르하치(努尔哈齐)이다. 만주어로 뜻은 돼지가죽이라는 것이다. 그 조상은 대체로 금(金)의 잔여부족이다."
금나라의 왕족인 여진완안부(女真完颜部)는 금나라가 멸망할 때 이미 한화(汉化)되었다. <금사>에는 금나라사람의 조상은 일찌기 옛 숙신의 땅에 살았다고 하였다. 확실히 고대 숙신인의 후예이다.
<금사.본기1>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금의 조상은 말갈씨(靺鞨氏)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물길(勿吉)이라고 불렀는데, 물길은 옛 숙신땅이다."
숙신은 당,송이후 일반적으로 여진으로 칭해진다. 요나라의 야율종진(耶律宗真, 1031부터 1055년까지 재위)이 즉위한 후, 그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하여 역사서적에서는 자주 "여직(女直)"으로 개칭해서 기록했다.
남송의 서몽신(徐梦莘)이 편찬한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会编)> 권3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진은 고 숙신국이다. 원래 이름은 주리진인데, 오랑캐어라 와전되어 여진이 되었다."
주리(朱理)는 퉁구스어로 동방(东方)을 가리킨다. 그리고 '진(真)' 혹은 '신(申)'은 한자의 준(隼)과 같은 뜻으로 새의 일종이다. 그래서 주리진의 원래 의미는 '동방의 신조'이고, 이를 토템으로 삼은 부락을 가리킨다.
여진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을 뿐아니라, 해동청(海东青)이라고 불리는 새가 많이 나왔다. 해동청은 숙신을 한어로 의역한 것이다. 즉 해동청골(海东青鹘, 해동의 푸른 송골매)이라는 뜻이다.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송나라 장계유(庄季裕)의 <계륵편(鸡肋编)> 권하로 "사나운 새는 해동에서 나왔고, 오직 푸른 새가 가장 뛰어났따. 그래서 해동청이라 불렀다(鸷禽来自海东,唯青鵁最嘉,故号海东青)"는 기록이 있다.
해동청은 동해에서 백조를 잡을 수 있는데, 백조는 해변에서 조개를 잡아먹어, 백조의 위에는 진주가 들어 있다. 해동청을 그리하여 이득을 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심지어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쟁까지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요사.권21.도종기1>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관리와 백성들이 해동청골을 기르지 못하게 금지했다."
송나라때 사람 섭융례(叶隆礼)는 <거란국지(契丹国志)> 권10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진은 동북으로 오국(五国)과 이웃하고 있다. 오국의 동쪽은 큰 바다에 접해 있는데 뛰어난 매(名鹰)가 난다. 해동에서 나오므로 해동청이라 불렀다. 작지만 날쌔고 튼튼하며, 백조와 오리를 잡을 수 있다. 발톱이 하얀 것을 더욱 귀하게 여겨 요나라사람들이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매년 여진에 해동청을 요구한다. 여진은 오국으로 가서 싸워서 얻어야 했고, 여진은 이를 아주 괴로워했다."
송나라사람들이 말한 '여진'은 주로 나중에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완안부를 가리킨다. 윗글에서 언급한 '오국'은 고숙신인의 후예들이다. 숙신은 진나라이전의 고대전적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죽서기년(竹书纪年)>에 이런 기록이 있다: "순임금 유우씨(有虞氏) 25년, 식신씨(息慎氏)가 조공을 왔고, 활과 화살을 공물로 바쳤다."
<상서(尚书)>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성왕이 동이(东夷), 숙신(肃慎)을 정벌하여 하례를 왔다."
<산해경.대황북경(山海经·大荒北经)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불함(不咸)이다. 숙신이라는 나라가 있다."
<죽서기년>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숙신인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을 뿐아니라, 활과 화살도 잘 만들었다. 그리고 활과 화살을 공물로 중화오제연맹의 맹주에게 조공을 바친다. 동이의 이(夷)는 동한 허신(许慎)의 <설문해자(说文解字)>의 해석에 따르면, "이(夷)는 대(大)와 궁(弓)에서 왔고, 동방사람이다."
숙신은 원래 동이와 관련이 있는데, 다만 동북아에 살았다. 동이는 많은 경우 나중의 연제(燕齐) 의 땅에 살았다. 상(商)의 조상은 동이에서 왔다. 그러나 무왕(武王)이 상을 멸망시키자, 숙신이 하례를 왔다 이를 보면 동이와 숙신은 관계가 밀접하지 않았다. 이는 상의 주왕이 동이를 토벌한 것처럼, 연대가 오래되면서 종족간의 연락이 이미 적어지고,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이다.
공자가 진(陈)나라에 갔을 때, 진후(陈侯)는 화살에 맞은 준(隼)이 왕정(王庭)에 죽어있는 것을 보고 이를 가지고 가서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공자는 즉시 이는 숙신이 공물로 바친 호시석노(楛矢石砮)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숙신국은 새를 토템으로 삼고, 동북에 살았다. 마땅히 오제시대의 소호(少昊)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호은 이름이 지(鸷)인데, 새를 잡는다(执鸟)는 의미이다. 사천 성도평원의 삼성퇴(三星堆)와 금사(金沙)유적지는 동이 소호족이 서쪽으로 이주해서 발전시킨 문명이고, 그중 청동인상은 변발을 하고 있다. 마치 청나라사람의 변발풍속과 크게 관련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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