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산둔정위(靠山屯政委)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중에, 우리는 자주 각양각색의 건축물을 보았다. 중서문명이 교차한 곳으로서 이슬람교가 파키스탄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는 전체 인더스강유역의 주요지역에서 성행했고, 특히 그중 대표적인 것은 간다라문화이다.
1. 무엇이 간다라문화인가?
필자의 간다라예술에 대한 이해를 얘기하자면, 2012년 파키스탄여행때 알게 된 사이푸르 라한다 박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간다라의 고대도로를 넘다>라는 책의 작자이고, 일찌기 라호르박물관 관장을 수년동안 역임했다. 필자가 파키스탄을 갔을 때 그 관장을 만났다. 74세의 역사학자는 아주 열정적으로 그가 간다라지구에서 본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지리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고대에 간다라를 지나는 옛도로는 몇 개가 있다. 그중에는 비단길의 남쪽 지선(支線)도 있다. 중국 신강의 카슈카르에서 출발하여, 북로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카불에 이르고, 남로는 훈자-길기트를 거쳐, 페샤와르로 가는 옛길이다. 중간에 길이 하나 갈라져서 지금의 인도령캐시미르의 수도인 스리나가르까지 간다. 노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 고도는 남아시아대륙에서 수천년동안 침입자들이 들어온 통로라고 한다.
당연히, 침입은 중문에서의 의미처렴 침범, 침략의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4,5천년전의 인더스문명을 연 원주민의 면목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3,500년전에 이곳에 정착한 아리아인도 침입자이다. 하물며 아리아인들보다 뒤에온 부락이나 민족은 말할 것도 없다.
사이푸르선생은 서쪽에서, 북쪽에서, 동쪽에서 온 침입자들이 누구인지를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고대중국을 얘기할 때, 나는 중국의 어느 부락이 이곳으로 왔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쿠샨왕조라고 하였다. 불교의 간다라예술을 극치로 발전시킨 쿠산왕조의 전신은 바로 선진시기의 대월지 사람이라고 한다.
당시 장건은 서역에 사신으로 갔는데, 천신만고끝에 대월지인을 만난다. 그들에게 되돌아와서 한왕조와 연합하여 흉노인들을 협공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대월지인들은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미 복수를 포기한 것이다. 노선생은 말을 마치며 크게 웃고 말했다. 그렇다. 이렇게 좋은 땅에 와서 사는데, 왜 돌아가고 싶겠는가? 중국의 승려라면 모를까.
대월지인들은 원래 고대중국 서북부의 유목민족이다. 진한교체기에는 아직 하서주랑의 기련산 일대에 살았다. 실력은 흉노보다 뛰어났다. 흉노왕은 한때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다만, 흉노의 실력이 커지면서 오히려 대월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대월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동하여, 서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갔다. 그러나 흉노 및 그들의 지지하에 오손(烏孫)인들은 계속 핍박했고, 대월지왕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밥그릇으로 삼는다. 대월지인들은 할 수 없이 파미르고원밖으로 도망치게 된다. 장건이 그들을 찾았을 때는 대월지인이 박트리아에 들어가 막 자리잡은 때였다. 이미 다시 돌아가서 옛날처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유목민족이 건립한 쿠샨왕조는 하급문명이 상급문명을 침입한 사례중 하나라 볼 수 있을 것인가? 노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대월지인은 조로아스터교를 신보했고, 나중에 불교와 힌두교를 신봉했으며 비교적 종교에 관용적이었다고 한다. 많은 폭력적인 정복자들의 통치와는 달랐고, 남아시아에서 인정(仁政)을 베풀었고, 각지 인민들이 원래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도록 허용했다. 그저 문자를 통일하여, 카로슈티문자를 쓰도록 했다.
박트리아는 대하국(大夏國)이라고도 부른다. 중앙아시아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야강의 사이에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곳에서 종교로 탄생한다. 속칭 '배화교'이다. 카로슈티문자도 이곳에서 탄생하였으며, 타림분지로 전파된 바 있다.
대월지인들은 이곳에서 백여년간 번성한 후, 남하하여 인더스강유역으로 가서 간다라지구를 수도로 삼고, 점치 펀잡평원으로 옮겨서 쿠샨왕조의 신천지를 연다. 중국-파키스탄도로로 지나온 북부지역은 모두 쿠샨왕조의 옛영토이다. 지나가지 않은 스리나가르에서 탁실라까지도 역시 쿠샨왕조의 땅이었다.
백년의 역정은 대월지인들이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접화(蝶化)과정이었다. 먼저 정착, 농경을 하며 이리저리 떠돌던 생애를 끝낸다; 동시에 비단길에 자리잡고 무역중개역할을 하며 국고를 채운다; 이어서 문자등 문화를 장악하여 사상적 준비를 마친다. 실로 금비석비(今非昔比)라 할 수 있다. 위업을 창건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었다. 기원전후로 쿠샨왕조를 건립하고 불교를 대거 홍양하며, 간다라예술이라는 그리스버전의 불교예술을 이곳에서 꽃피운다.
불교와 그 예술의 홍양에 대하여 카니슈카가 쿠샨왕으로 있을 때 최전성기에 달한다. 바로 이 와이 캐시미르에서 제4차불경대결집을 조직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원과 불상을 만들었다. 후세의 불교도들은 그를 아쇼카왕(阿育王)과 나란히 언급한다. 탁실라의 고고유적지에서 두 곳의 불교사원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그곳은 법현(法顯), 현장(玄奘)이 일찌기 들렀던 곳이다. 쿠샨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거기에는 금화와 동전이 있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고인도의 넓은 지역에서 유통되던 것이다. 국왕의 두상과 불상이 각각 동전의 양면에 주조되어 있었다.
2. 쿠샨왕조와 중국
쿠샨왕조는 번성하고 부귀했지만, 옛땅을 잊지는 않고 많은 것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사료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감정적으로 일가와 같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기원1세기하반기, 쿠샨왕은 일찌기 한(漢)나라를 도와 반란을 일으킨 슐러(疏勒)와 사처(莎車)의 반란을 진압한다. 마지막 쿠샨왕시기에도 여전히 교체된 중국왕조와 왕래를 가졌다. 229년, 조위의 위명제(魏明帝)는 쿠샨왕을 "친위대월지왕(親魏大月氏王)"에 봉한다. 원래 2천여년전에, 옛도로를 통해 양국의 우의는 선례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 더욱 의미깊은 것은 쿠샨의 강성이 비단길의 순조로운 통행을 보장해주어 중국의 대외무역내지 문화전파에 공헌을 하게 하였고,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유,불,도가 합쳐서 전통문화의 주류를 이루며, 2천여년동안 염황자손의 사상과 행동양식을 이끌었다. 그중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비단길의 대월지인 쿠샨왕조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비록 신강지구에서는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역사기록에 따르면 기원전2년, 대월지왕은 사신 이존(伊存)을 파견하여 박사제자 경로(景盧)에게 구술로 <부도경(浮屠經)>을 전해준다. 이것이 불교가 중국내지로 전해진 시초이다. 그후 서역에서 중국으로 온 불교전파자들 중에는 성이 지(支)인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대월지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지루(支婁), 지량(支亮)이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중국불교사상 유명한 인물들이다.
3세기이후, 쿠샨왕조는 쇠락한다. 5세기초, 쿠샨은 백흉노(에프탈)에 멸망당한다. 그렇다면 쿠샨사람, 혹은 대월지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분명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 융화되어 현지인들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사이푸르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성명에서 기본적으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저 서북부의 스와트에서 고대 쿠샨왕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발견했을 뿐이다.
노선생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대월지인은 관용적이어서 다른 종교문화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현지사회에 쉽게 융화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당시 대부락을 따라 이주해가지 않은 사람들을 '소월지인(小月氏人)'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점점 감숙, 청해일대의 강(羌), 한(漢)의 각족에 융합해서 없어진다. 북위이후에는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지(支)씨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아마도 모두 월지 혈통은 아닐 것이다.
쿠샨왕조의 운명은 탄식할만하지만, 역사는 원래 그렇게 흘러왔다. 쿠샨을 지나, 한,당을 지나, 천년이 흘렀고, 다시 천년이 흘렀다. 옛날의 도로는 그대로이고, 간다라는 물질과 정신의 양방향 교류로 경제와 문화가 양방향으로 융합되어, 고금의 중국에 모두 큰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 이슬람이 통치하는 파키스탄에서 간다라불교예술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간다라예술은 중국의 불교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신강에서 감숙, 다시 산서까지, 하남까지, 지금 중국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석굴예술과 조각상은 바로 간다라예술이 끊임없이 중국화한 결과이다. 중국미술사를 고쳐쓰게 하였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중국미술사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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