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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중국에 유대인의 후예가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4. 11. 7.

글: 반호설사(胖虎說史)

이 제목을 보고 아마도 여러분은 머리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56개민족 가운데 소위 '유대인'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유대민족이 중화56개 민족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은 중화민족가운데 실제로 존재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와 관련이 있으며, 심지어 이런 관련이 한때 전세계를 뒤흔들기도 했었다.

유대인과 중국인의 관계는 대체로 3개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고대유대인과 중국인의 관계이고, 둘째는 근대유대인과 중국의 관계이며, 셋째는 현대의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색하는 과정에서의 유대인과 중국인의 관계이다.

  1. 고대중국의 유대인

먼저 중국의 고대에 유대인이 있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역사상 소수민족중에 유대인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 것같기 때문이고, 무슨 민족대융합을 거치지도 않은 것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잘못되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존재했고, 다만 조용히 지냈을 뿐이다.

시간은 1605년 6월 2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만력33년으로 대명왕조시기이다.

이때 마테오 리치(利瑪竇)가 중국으로 왔고, 중국에 대해 이미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졌으므로, 적지 않은 유학자들도 그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날 북경에 과거시험을 치러 온 개봉부(開封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애전(艾田)이고, 완전한 유생이였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그의 행동거지가 전통적인 유생들과 달랐다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침례절이었고, 그 유생은 성당에서 제단에 걸린 성모마리아의 상을 보고는 즉시 허리를 숙여 성모마리아상에 예를 표했다.

그의 행동거지는 기독교도와 아주 유사했다. 이에 마테오 리치는 기이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그와 기독교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중국인이 초기기독교의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칭 일사락업(一賜樂業, 중국발음으로 이쓰러예이므로 이스라엘로 보임)교 신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모세이후의 이스라엘 12개지파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에 마테오 리치는 경악한다. 그는 상대방이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일 가능성을 배제했다. 초보적으로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중국유대인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더 있었다.

이 유생은 마테오리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은 비록 6살때부터 중국의 유학을 공부했고, 과거시험을 쳐서 공명을 얻으려 했지만, 그의 고향인 개봉에는 개략 10-12집의 신도가 있으며, 화려한 예배당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모세오경>을 보관하고 있으며, 선조들이 말하기를 개략 5,6백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항주에도 유대인이 적지 않게 있는데, 그들은 중국화가 심하게 되었고, 예배당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심도있게 얘기를 나눈 후, 그 젊은이는 마테오리치에게 그의 고향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한다. 마테오리치는 이런 내용을 그의 기록에 남겨두고, 나중에 가보겠다고 약속한다.

당시 마테오 리치는 흥분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그는 상대방의 말만으로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서필등(徐必登)이라는 사람을 개봉으로 보내어 확인하게 한다. 그 결과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된다. 그리고 <모세오경>의 일부 필사본도 가져온다.

그 모세오경은 고대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었고, 모음부호가 없었다. 이건 절대로 오래된 경문판본이다.

마테오리치는 즉시 이 소식을 유럽의 본부로 알린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이 소식은 전체 유럽을 뒤흔들게 된다.

1615년 Nicolas Trigault(金尼閣)이 <중국기사>를 간행하고, 거기에 마테오리치가 발견한 중국유대인의 상세한 상황을 소개한다.

유럽의 종교계는 깜짝 놀란다. 유대인들은 이를 중국유대인신화라 부르고, 유럽의 종교계는 "중국민족학역사상 일대기적"이라고 불렀다.

기실 그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이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세계각지로 흩어졌고, 구세주는 다시 재림할 것이다.

중국의 유대인전설은 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유대인 지도자 본 이스라엘은 자신의 저작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중국유대인은 실종된지 오래된 10개의 이스라엘부락중 하나이다.

2. 근대중국의 유대인

이는 유럽을 깜짝 놀라게 만든 대사건이었고, 유대인과 중국과의 고대관계를 드러냈다.

당연히 대명왕조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건 너무나 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명청이 교체되고,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은 혼란한 민국과 국민정부시대를 맞이한다.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면 모두 알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의 유대인을 참혹하게 학살했고, 600만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극단적인 상황하에, 유대인들은 부득이 살 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들의 신화속에 있는 노아의 방주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이 찾은 극동의 '노아의 방주'는 바로 상해였다.

모두 알다시피, 독일인이 전세계에서 유대인을 추살하고 있을 때, 중국은 유대인들에게 가슴을 열고 그들을 맞아주었을 뿐아니라, 그들을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상해는 금방 유대인의 피난처가 된다.

그리고 저명한 두 개의 "유대인집단"이 생겨난다.

하나는 환지중해연안의 유대인으로 책에서는 그들을 세파르디(Sefardi)유대인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이라크와 인도에서 건너온 유대인이다. 다른 하나는 북유럽유대인이고, 즉 러시아혈통의 유대인이다.

전자는 19세기 중엽에 중국으로 와서 정착한다. 후자는 러시아의 시월혁명이후에 상해로 피난왔다. 양자는 어느 정도 상해에 뿌리를 내렸고, 유대인의 비극이 발발하자, 더 많은 유대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이 두 개의 '집단'으로 뭉쳐서 화를 피했다.

이라크지역에서 온 이민수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유대인의 수량은 개략적인 통계가 있다.

러시아유대인이 상해로 와서 정착한 것은 두 차례의 대이동이 있었다. 제1차는 19세기말로 많은 유대인이 러시아를 강제로 떠나야 했다. 일부는 중국동북의 하르빈으로 가고, 다른 대부분은 상해로 갔다.

제2차는 시월혁명이후이다. 개략 20만의 러시아인이 중국상해로 왔는데, 그중 유대인의 수는 개략 1천여명이다. 그들의 수량은 세파르디유대인을 훨씬 넘어서게 된다.

나중에 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괴된다. 이치대로라면 유대인들도 도망쳐야 하지만, 당시의 일본인은 유대인이 들어와 사는 것을 장려했다.

원인은 아주 터무니없다.

그들은 유대인난민의 해외친척친구관계를 통해 상해로 유입되는 외환을 늘이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유대인의 장사능력으로 파괴된 상해를 회복시키길 바랐다. 이렇게 하여 상해를 동방의 비엔나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상해의 유대인집단은 3만명을 넘어가게 되고, 극동지역에서 가장 큰 유대인집단이 된다.

그러나, 일본은 어쨌든 독일과 동맹이다. 나치 케쉬타포주일본수석대표인 Josef Albert Meisinger(1899 - 1947)가 오면서, 생기넘치던 유대인집단은 사상유례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하에서 중국인들이 다시 유대인을 도와준다. 그리하여 함께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1943-1944년을 넘길 수 있었다.

자료기록에 따르면, 당시 최소 6천명의 유대인이 굶어죽을 처지에 놓였고, 9천명이 눈바람 속에서 동상에 시달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이 집이 폭격받은 난민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고, 돈도 기부했다. 난민들은 감동을 받았고, 다행히도 그들은 고난 속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항전이 끝난 후, 살아남은 유대인은 중국인들을 끌어안고, 광장에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것에 감사했고, 중국인들의 도움에 감사했다.

그러므로, 이상이 두 가지 역사내용을 보면, 유대인은 중국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민족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들과 중국인의 관계는 긴밀했고,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중국화된다. 비록 그들중 일부는 아직 전통적인 습속을 유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중국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상해와 개봉 이외에, 광동지역, 복건 천주 및 하문지역에도 적지 않은 유대인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 중국인들과 대대로 통혼할 결과 그들은 중국에 동화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3. 유대인과 중화문명의 역사적 연결

마지막 이슈는 조금 민감하다. 이 부분은 현대 중국학자의 중국문명기원에 대한 탐색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2004년, 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주장이 나타났다. 소삼(蘇三)이라고 부르는 학자가 한가지 가설을 내놓는데, 이로 인하여 그녀는 온갖 욕을 다 얻어먹게 된다.

삼성퇴(三星堆)문명이 고대유대문명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내생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화문명은 일종의 전달된 문명이며, 그 진정한 근원은 중동지역이라는 것이다. 중국에 온 이스라엘인들이 중국의 하,상,주문화를 이루었고, 중국인은 이들 유대인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이 나오자, 즉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흥분한다. 앞에서 말한 유대인지도자처럼 중국지역에 생존해 있는 유대인은 바로 "사라진 유대10대부락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녀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녀가 보기에 삼성퇴의 일부 문물은 서방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퇴에서 출토된 반인반수가면은 소의 코, 소의 눈, 소의 귀를 지니고 있다. 고대 셈족은 소를 숭상하는 관습이 있었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금왕장(金王杖)은 이집트왕실이 사용하는 왕장(王杖)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사천지역은 역대이래로 현관(懸棺)의 매장풍습이 있는데, 유대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례현상은 바로 현관이다.

그외에, 삼성퇴에서 출토된 대형제사장소에는 모두 돌을 흩어놓는 습관이 있는데, 이들 돌은 조상의 위패에 해당한다. 유대인의 풍습에서 돌숭배가 있고, 유사한 풍습이 있다.

이런 유사점을 모아보면, 양자간에는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삼은 고대셈족이 대규모이동하여 전후로 이란과 인도에 출현한 것을 빌어 4000년가량 전에 그들의 성도평원으로 왔다고 보았다.

이에 그녀는 대담한 가설을 내놓았다: 중국문명은 홍해문명에서 잉태되었다고 하면서, 그중 그녀는 문명자궁과 문명자궁외임신이라는 주장을 펼쳐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당시, 이 소식은 개략 100여개 매체에서 보도했다. 그러나 모두 비판적이었다. 어쨌든 삼성퇴문명 자체는 중국문화다원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런 현상이 기이할 것도 없는데, 서방을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주장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취할 점이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중국인민대학 중문과 교수 김원포(金元浦)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삼의 가설은 문화에 대한 설명의 일종이다. 일종의 약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다양성은 바로 역사의 본래 면모이다.

그리고, 사천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파촉사 전문가 담계화(譚繼和)도 이렇게 얘기한다: 소삼의 생각은 중국문화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났다. 이런 방법으로 중국문화와 파촉문화를 관찰하는 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이상이 유대인과 중국인간의 연결 및 발생한 적이 있는 큰 사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