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타이페이(台北) 원산대반점(圆山大饭店)

중은우시 2024. 5. 7. 10:30

글: 왕행복(汪幸福)

2023년 10월, 대만법원은 판결을 내려, 12년전에 사망한 공이소저(孔二小姐)의 가족들에게 그녀를 대신하여 탈루세금 1.57억NT달러를 납부하도록 명했다. 이 거액은 옛날 그녀와 송미령(宋美龄)이 원산대반점을 경영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개석(蒋介石)부부가 직접 원산대반점의 부지를 선정했다.

1950년대초, 대만에는 많은 호텔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등급이 높지 못했다. 외국의 요인들이 대만을 방문할 때, 숙식여건이 좋지 못하다는 불만이 나왔다. 체면을 중시하는 장개석, 송미령 부부는 체면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만에 그럴 듯한 대형호텔을 짓기로 결정한다.

호텔을 짓기 위하여, 장개석과 송미령은 직접 타이페이의 여러 지방을 조사한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타이페이시 기륭하(基隆河)의 강변, 원산의 산허리에 위치한 땅을 마음에 들어하여 그곳에 호텔을 짓기로 결정한다.

당시 대만의 경제는 아주 곤란했다. 호텔을 짓는데에는 큰 돈이 든다. 장개석은 대만은행(台湾银行)의 동사장인 윤중용(尹仲容)에게 자금을 조달하도록 지시한다.

원산대반점의 설계도 장개석 부부는 아주 중시한다. 당시 관련부서에서 여러 명의 설계사를 추천했고, 최종적으로 저명한 건축설계사인 양탁성(杨卓成)이 선택된다. 장개석, 송미령은 양탁성을 만나 특별히 당부했다. 원산대반점은 주로 외국요인들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니, 설계에 반드시 중국전통문화를 반영해서 고객이 호텔에 드어서면 중국문화의 박대정심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1952년 5월, 원산대반점이 정식으로 착공되고, 연말에 완공된다. 호텔은 14층 높이이고, 객실은 490실이다. 그중에는 Premier Suite 4개, Presidential Suite 1개가 있다.

1953년, 호텔은 다시 수영장, 테니스장과 회원실을 증축한다. 그후 연이어 금룡청, 취봉청, 기린청등 시설을 건설하고, 1963년에 이르러 모든 건축물이 완공된다.

송미령과 공이소저가 호텔경영을 조종하다.

원산대반점이 착공되자, 사람들이 '공이소저'라고 부르는 공상희(孔祥熙)의 차녀 공령위(孔令伟)가 호텔경영을 맡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이모인 송미령에게 얘기했고, 송미령은 그 자리에서 동의한다.

호텔이 오픈한 후, 수익이 아주 좋았다. 다만 공이소저의 신분이 특수하다보니 호텔이 매년 내는 거액의 수익에 대하여 외부에서는 알지를 못했다.

세무기관에서도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대만성 재정청장 주굉도(周宏涛)에게 해결을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굉도는 10여년간 장개석의 비서를 맡았었고, 송미령과 공이소저의 사람됨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감히 그녀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일은 이렇게 시간만 끌었다.

1961년에 이르러, 호텔 내부와 사회에서 의론이 분분했다. 공이소저는 호텔의 수입을 미국의 개인계좌로 송금했다. 이 일은 갈수록 시끄러워졌고, 주굉도는 호텔의 관리와 재무문제가 이미 장개석과 송미령의 이미지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느낀다.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개석과 송미령에게 건의를 한다.

하루는 주굉도가 송미령의 사무실로 가서, 송미령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산대반점은 정부에서 투자해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체제가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호텔의 경영을 공이소저의 한 마디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같습니다."

주굉도가 떠난 후, 송미령은 이 일을 장개석에게 보고한다. 장개석도 원산대반점은 공이소저가 계속하여 책임지고 경영했으니 형식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그후, 송미령은 주굉도를 불러 상의한다. 주굉도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재단법인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공익성격으로 경영하면, 소득세를 회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초 호텔을 건설한 목적에도 부합합니다." 송미령도 그 방안에 동의한다.

대만당국의 규정에 따르면, 재단법인을 설립하려면 발기인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송미령은 자신이 고른 5명의 발기인에게 각각 10만원을 내게 하여, "재단법인돈목연의회(财团法人敦睦联谊会)"를 설립한다.

"연의회"가 설립된 후, 송미령은 윤중용을 동사장에 앉힌다. 그러나 공이소저는 아예 윤중용을 무시했고, 그녀는 송미령의 말만 들었다. 윤중용도 그 안의 복잡한 배경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호텔에 관해서는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외국인들은 호텔을 송미령이 연 것이라고 알았다.

공이소저는 호텔에서 사람들과 얘기할 때 왕왕 먼저 "장부인(蒋夫人)"을 꺼내고, 다시 "나의 이모"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흐르자, 사람들은 호텔을 송미령이 연 것이라고 여겼다.

1963년 10월, 미국의 <포춘>잡지의 한 문장에서 원산대반점을 언급할 때, 이 호텔은 장부인의 개인호텔이라고 말한다. 송미령은 그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한다. "원산대반점은 성정부의 것이지, 어떻게 내 것이냐?"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춘>에 이런 글이 올라온 것에는 아마도 배후가 있는 것같다. 내 생각에 경영기구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

송미령은 즉시 대만성정부 주석 황걸(黄杰)을 불러 "원산대반점관리위원회"를 성립하는 문제를 상의한다. 그리고 황걸에게 "주임위원"을 맡도록 한다. 황걸은 잘 알고 있었다. 호텔에는 공이소저가 있으니, 자신이 호텔관련한 업무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굉도의 말에 따르면, 공이소저는 비교적 횡포했다. 호텔내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관여했다. 그녀는 최고권력자와 통하는 사람이어서, 호텔이 직원들도 모두 그녀를 무서워했고, 동사회의 의견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송미령이 원산대반점을 조종하는데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녀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익을 사적을 취한다고 비난한다. 그렇게 되자, 장개석은 성정부에 원산대반점의 경영에 대하여 조정하도록 지시한다.

1968년봄, 대만성정부는 전문팀을 구성하여, 원산대반점의 자산을 조사하고, 대외에 개방한 금룡청, 취봉청, 기린청의 3개청과 중서주방 및 수영장등을 인수한 후 대만성유재산으로 만든다. 인수금액은 바로 원산대반점의 6000여만원의 대출금과 이자였다.

그외에 돈목연의회도 원래의 정관을 수정하여, 성립초기의 기금 50만원을 2억NT달러로 수정한다.

주굉도는 비록 동사장으로 선임되었지만, 송미령은 여전히 공이소저를 통해서 원산대반점을 통제했다.

장경국(蒋经国)이 원산대반점의 자산을 정리하다.

1975년 4월 장개석이 병사한다. 그러나 원산대반점의 경영권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 일은 금방 장경국의 귀에 들어간다. 장경국은 이에 대해 분개한다. 그는 더 이상 공이소저가 마음대로 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동사장 주굉도를 불러서 묻는다: "원산대반점내에 부정부패가 있느냐?"

주굉도는 사실대로 대답한다: "분명히 있습니다. 단지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불명확합니다. 조사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장경국은 다시 묻는다: "이 호텔의 고객은 대부분 외국인이다. 어떤 경우는 대통령, 수상, 총리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런 상황이 나타난다면 국제적으로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너는 동사장인데 왜 그냥 두고 있느냐?"

주굉도가 말했다: "공이소저가 안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장개석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쓸 필요없다. 지금부터 네가 확실하게 책임지고 호텔을 경영해라. 공이소저가 다시 말썽을 부리면 너는 내가 시켰다고 말해라."

주굉도는 즉시 인원을 조직하여 원산대반점의 경영권을 인수한다. 그리고 공이소저의 몇몇 심복을 모두 해고한다. 그리고 별도로 유국흥(俞国兴)을 호텔의 재무총감으로 앉혀 회계감사를 진행한다.

주굉도가 원산대반점을 주관하는 동안 발생한 3억여NT달러로 원래의 대출금을 모두 갚는다.

공이소저가 다시 호텔경영권을 빼앗다.

1988년 1월, 장경국이 돌연 병사한다. 공이소저는 경영권을 탈취할 기회가 왔다고 여긴다.

1월말, 공이소저는 송미령의 지시를 받아, 미국의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페이로 온다. 그녀는 인원을 조직해서, 강제로 원산대반점의 경영권을 인수한다.

그녀가 원산대반점에 진입한 첫날, 호텔주관들의 면전에서 주굉도가 주재하여 제정한 호텔의 인사제도등 내부규정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부터, 이 호텔의 일은 내가 결정한다." 이어 그녀는 재무총감 유국흥을 쫓아낸다.

주굉도는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공이소저가 이렇게 대담하게 호텔의 경영권을 빼앗아가는 것은 배후에 송미령이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장부인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하여, 1988년 6월, 주굉도는 호텔동사장의 직위를 사임한다. 그리고 더 이상 호텔업무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같은 해 6월, 원산대반점의 동사회가 재구성된다. 공이소저는 장부인에게 그녀의 친구인 웅환(熊丸)을 동사장으로 추천한다.

송미령은 공이소저가 원산대반점을 장악하면, 계속하여, 장씨, 공씨 두 집안의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에 이르러 대만과 '수교'한 나라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대만으로 오는 외국정치인, 상인, 기자도 격감하게 되었따는 것이다. 원산대반점은 점점 손님이 줄어들었고, 게다가 공이소저가 호텔에서 마구잡이로 경영을 하다보니, 직원들이 자주 파업을 했고, 어떤 경우는 공개적으로 그녀와 욕을 하며 싸웠다. 그리하여 호텔의 수익이 예전만 못하게 된다.

나중에 송미령의 나이가 갈수록 많아지면서, 영향력도 예전만 못하게 된다. 공이소저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여겨 조용히 미국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하나 언급해야할 점은 장경국이 주굉도에게 원산대반점의 정리정돈을 지시한 후, 공이소저는 장경국을 뼛속까지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차례 송미령의 면전에서 장경국은 사람도 아니다.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욕을 했었다.

장경국이 죽은 후, 대만의 모든 기관이 장경국을 애도하는 플랭카드를 내걸었다. 유독 원산대반점만 내걸지 않았다. 호텔의 내부직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여러번 공이소저에게 건의했지만 그녀는 일축한다. 그녀는 악에받쳐 소리쳤다: "곳곳에 모두 내걸었는데, 우리 호텔은 외빈을 맞이하는 곳이다. 걸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