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주은래의 큰조카딸이자 전국정협위원을 역임한 주병덕(周秉德)이 쓴 <나의 백부 주은래>의 157페이지를 보면 등영초(邓颖超)가 문혁기간 손유세(孙维世)가 박해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주병덕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병덕아, 너는 알고 있느냐? 우리의 양녀가 되면 모두 팔자가 사납구나. 사람들은 나와 백부가 양자가 몇명이고 양녀가 몇명이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일은 없다. 사실 우리가 진정 받아들인 것은 3명의 양녀뿐이다. 한명은 섭정(叶挺)장군의 큰딸 섭양미(叶扬眉)인데, 어린 나이에 부친과 비행기사고로 죽어버렸다. 하나는 연안에 있을 때 큰 비가 내려서 요동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서 깔려 죽어버렸다. 오직 손유세만이 우리와 오랜 시간을 같이 하면서 서로 감정이 깊었는데, 지금 다시 참혹하게 죽었구나!"
등영초는 섭양미와 손유세의 이름만 말했고 또 다른 양녀의 이름은 말하지 않아서, 주병덕도 명확하게 쓰질 않았다. 관련자료를 찾아보고나서 그녀의 이름이 심만리(谌曼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은래의 세 명의 양녀는 도대체 어떻게 비참하게 죽은 것일까?
첫째 양녀: 섭양미는 비행기사고로 죽었다.
섭양미는 세 명의 양녀중 첫째이다. 섭정장군의 큰딸인 섭양미는 1946년 4월 8일, 감옥에서 나온지 36일째인 신사군 군장 섭정이 처, 딸 섭양미, 아들등 일행 17명과 미군군용기를 타고 연안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사고나 나서 모두 죽어버린다.
그들의 이야기는 중국소학교 교과서에 실려있고, 많은 중국사람들은 읽어보았을 것이다: 주은래와 섭정의 딸 섭양미의 이야기.
그러나, 여기에는 3가지 의문점이 있다:
- 주은래는 섭정이 곧 석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왜 특별히 연안에서 중경으로 가서 섭양미를 찾아 부친을 맞이하도록 하였을까?
- 섭정의 일가족을 마중하러 가서 주은래는 왜 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까?
- 섭정의 일가족이 탄 비행기사고로 비행기에 타고 있던 17명이 모두 사망했는데, 어떻게 주은래는 평안하게 연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주은래와 관련있는 3건의 비행기사고를 떠올리게 만든다: "카시미르공주호"비행기사고사건, "임표전용기256"비행기사고사건, "섭정비행기"사고사건, 그리고 주은래가 시행한 "고순장(顾顺章)멸문참화", 이들을 연결시켜보면 수법이 놀랍도록 유사하다. 사전모의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사고인 것일까?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둘째 양녀: 심만리는 요동안에서 깔려죽었다.
심만리는 주은래가 천진에 있을 때의 전우인 심지독(谌志笃)의 큰딸이며, 주은래의 두번째 양녀이다.
등영초의 말한 "큰 비가 내려서 요동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서 깔려 죽어버렸다"는 양녀가 바로 그녀와 주은래부부와 5.4시기에 모두 친하게 지냈던 심지독의 큰딸 심만리이다.
심지독은 5.4운동전날 각오사(觉悟社)에 가입한다. 주은래는 5호를 뽑아서 별명을 "오호(伍豪)"로 했고, 심지독은 50호를 뽑아서 대호를 "무릉(武陵, 중국발음으로는 5,0과 같다)"으로 한다.
심만리는 1922년에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심이혜(谌贻蕙)이고, 귀주 금강에서 있던 부친을 따라 공부하다가 항일전쟁이 일어난 후, 16,7세인 그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학교를 그만두고 북으로 가는 자동차를 타고, 당시 세계반파시스트운동의 극동중심이던 중경으로 간다.
중경에 도착한 후, 그녀는 먼저 부릉(涪陵)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 나중에는 몇몇 여자친구들과 여객선을 타고 항일전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한구(汉口)로 간다. 거기서 한구를 지키고 있던 귀주출신의 국민정부 102사단 사단장인 백휘장(柏辉章)에 의탁한다. 그후 태아장대전이 발발하고, 서주를 잃으면서 심만리등 여군은 부대와 흩어지게 된다. 그녀는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면서 하남성 개봉시 동남쪽의 기현 경내까지 도망친다. 거기서 102사단의 귀주고향사람인 조 부관장을 만나게 되고, 그는 심만리 일행여군을 데리고 한구로 돌아온다.
1937년 7월 7일, 77사변이 발생한다. 심만리는 2년간 군에서 복역한 후 1939년 봄, 부친 심지독이 한구로 와서 그녀를 데리고 주은래와 등영초를 만나러 간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심만리가 미모와 재능을 모두 갖춘 것을 보고 아주 예뻐한다. 그리고 심만리를 양딸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부친 심지독도 기꺼이 동의한다.
심만리는 무한의 중공중앙 장강국에서 주은래부부의 곁에서 일한다. 그후 주은래를 따라 중경 팔로군 판사처로 가고, 1941년 주은래가 섬북공학과 노신예술학원으로 보내 공부하도록 시킨다. 졸업후에는 연안에서 경극, 곤곡등의 연구를 수행한다.
1945년 11월 1일 밤, 섬북에 가을에 보기 드문 큰 비가 내린다. 심만리가 거주하던 요동은 빗물이 들어와 무너져 버린다. 그리하여 깔려죽는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살이었다.
셋째 양녀: 손유세는 맞아죽었다.
손유세는 주은래의 세번째 양녀이다. 그들사이는 양부와 양녀의 관계보다 더 깊었다.
손유세는 1921년생으로 원래 이름은 손광영(孙光英)이고, 일찌기 이림(李琳)이라는 이름도 썼다. 사천 남계 사람이다. 손유세의 부친인 손병문(孙炳文)은 주은래의 초기 전우였는데, 1927년에 사망한다. 당시 6살이던 손유세는 주은래의 양녀가 된다.
손유세가 16살이 되던 해, 주은래는 무한에서 연안으로 데려간다. 주은래가 소련으로 가서 병치료를 할 때, 손유세도 따라간다. 그들의 관계는 보통이 아니었다. 등영초는 그 일은 엄격하게 기밀로 유지했다.
일찌기 1937년, 주은래는 손유세를 무한에서 중경의 팔로군판사처로 데려왔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등영초는 이미 주은래의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등영초와 손유세
주은래가 소련으로 가서 병치료를 할 때, 손유세는 왜 따라갔을까? 돌아온 이후에도 주은래와 함께 생활한다. 그들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단지 주은래, 손유세 두 사람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다.
1951년, 등영초는 손유세와 김산(金山)의 결혼을 주재한다. 당시 손유세는 28살, 김산은 50살이었다.
문혁때 1968년 3월 1일 깊은 밤, 손유세는 집안에서 통적반국죄(通敌叛国罪)로 체포되며 이름은 "손위사(孙伪士)"로 개명당한다. 그리고 "관사대상(关死对象)"으로 지정된다.
일찌기 호요방의 지낭이던 완명(阮铭)이 발표한 <회전무대위의 주은래>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토로한다. 문혁때 손유세가 통적반국죄로 체포되는데, 체포영장에 직접 서명한 사람이 바로 주은래라는 것이다.
손유세는 군대내에서 온갖 고생을 겪다가 같은 해 10월 14일, 맞아죽고만다. 손유세가 죽었을 때 전신이 나체였고, 상흔이 곳곳에 있었다. 사지는 수갑과 족료로 채워져 있었다. 손유세가 죽기 전에 교도관은 범죄자들을 시켜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윤간하게 했다고 한다.
주은래는 왜 직접 손유세를 통적반국죄로 체포하도록 지시한 것일까?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족들이 나중에 발견한 바에 따르면 그녀의 머리에 대못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기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문혁때 주은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누구든지 팔아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중공당수 모택동의 주요한 방조자로서 주은래는 두 손에 피를 가득 묻혔고, 죄악이 크며, 위선적이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은 모두 최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관계를 맺었던 3명의 양녀인 손유세, 심만리, 섭양미는 모두 재능과 미모를 갖추었지만 끝이 좋지 못했다. 실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주은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은래(周恩來): 장정(長征)이후 딴 사람이 되었다. (3) | 2024.10.16 |
---|---|
주은래(周恩來)의 여비서 양강(楊剛)은 왜 자살했을까? (2) | 2023.10.04 |
1963년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장징궈(蔣經國)의 비밀회담 (0) | 2012.06.12 |
주은래 사망당일의 중국고위층동향 (0) | 2012.01.08 |
주은래는 담배를 피웠는가? (0) | 2009.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