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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은래)

1963년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장징궈(蔣經國)의 비밀회담

by 중은우시 2012. 6. 12.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저우언라이가 생전에 남해(南海)로 간 일이 있는가? 당시 국민당 지도자와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한 바 있는가? 국공양당의 회담내용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40여년이후에도 여전히 연구가 필요한 이슈이다.

 

1996년 1월, 홍콩의 <South China Morning Post(南華早報)>에는 돌연 중국대륙에서 온 뉴스가 실렸다. 그 글에 따르면: 1963년 겨울, 국공양당의 고위지도자가 중국 남해의 어느 섬에서, 절대기밀의 고위층 회담을 진행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비밀회담에 참가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는 당시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이고 수행인원은 2명이었다. 한 명은 당시 국방위원회 부주석, 전인대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장제스 부자와 모두 인연이 있는 국민당 장군출신 장즈중(張治中) 선생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국무원 대만판공실주임인 뤄칭창(羅靑長)이다. 국민당에서 참여한 사람은 장제스, 장징궈 부자중의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다.

 

곧이어 홍콩의 또 다른 잡지인 <개방>ㅡㄴ 1996년 4월호에서 "문시벽(文時碧)"이라는 이음으로 기고한 글이 발표되었다. 제목은 <저우언라이는 확실히 남해의 어느 섬에서 장징궈와 비빌회담을 했다>이다. 이 글은 저우언라이가 남해로 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을 뿐아니라, 국민당의 비밀회담 참가자가 장제스도 아니고 또 다른 국민당 원로인 천청(陳誠)도 아니며, 장제스의 아들이자, 당시 국민당 '정치위원', 대만국방부 정전부 부주임을 맡고 있던 장징궈였다는 점을 밝혔다. 이 글에 따르면, 이 중요한 정보는 국공 쌍방에게 모두 핵심기밀이다. '문시벽'은 최소한 반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를 취재했다. 그리고 '문시벽'의 글은 처음으로 저우언라이와 비밀회담을 한 국민당 인사가 장징궈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회담장소는 남해 동사군도(東沙群島)에 있는 동사도(東沙島)라고 밝혔다. 셋째로, 글에서는 처음으로 정보원이 북방의 군측인사인 펑쉬이(彭緖一)임을 밝혔다. '문시벽'의 글에 나오는 이 세 가지로 그녀는 저우언라이가 국민당인사과 비밀회담한 역사적 사건을 확인해주었고, 신뢰도가 아주 높았다.

 

저우언라이가 1963년 12월, 뤄칭창의 수행하에 남해함대사령관 우뤼린(吳瑞林)중자의 호위하에,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남해 모 섬으로 가서 국민당 주요지도자와 정치대화를 한 사실이 있는가에 대하여 1997년 마침내 추가로 확인이 이루어졌다.

 

1997년 겨울, 북경개혁출판사는 <가장 귀여운 사람>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남해함대사령관 우뤼륀이 편찬한 기념문집이다. 이 기념문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글이 있었다. 제목은 <그는 일찌기 저우총리의 항해를 호위한 바 있다 - 우뤼린동지의 두 세가지 일을 회고하다>이다. 이 글은 약 5천여자로, 작자는 바로 뤄칭창이다.

 

뤄칭창은 이 글에서 홍콩매체가 보도한 사실이 진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1995년 설날, 나는 우뤼륀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를 만났다. 옛 전우를 만나니 특히 기뻤고, 서로 무릎을 맞대고 길게 얘기를 나누었다. 옛날에 함께 일하고 전투했던 광경을 회고했다. 1963년 12월초, 저우언라이 총리와 장즈중 부위원장이 광동성 변경으로 왔고, 두 사람은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비밀리에 회담을 했다. 나는 당시 중앙에서 대만판공실 주임을 맡고 있어서,이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활동에 참가했다..."

 

뤄칭창의 말은 간략하다.그러나 그 속에서 소문이 무성했던 그 비밀회담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혔다. 동시에 국공양당고위층 인사가 당시 남해에서 비밀회담을 하였다는 것에 대한 권위있는 방증이 되었다. 뤄칭창은 저우언라이가 남해로 간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총리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나는 명을 받들어 당시 광저우군구 부사령관 겸 남해함대사령관인 우뤼륀 동지를 찾아갔다. 그에게 이번 일의 중요성과 기밀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달하고 설명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표시한다. 중앙이 부여한 사명을 견결히 집행하겠고, 즉시 배치하겠다고."

 

저우언라이가 비밀리에 광동으로 온 이후의 상황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뤄칭창은 이렇게 말했다: "회담 전날, 저우총리, 장즈중 부위원장은 광동성의 일부 지방을 순방했다. 황포군관학교 부지를 참관한 후 황포항으로 갔다. 우뤼린의 배동하에, 남해함대의 일부 관병을 검열한다. 그 후, 저우총리, 장즈중 부위원장은 해군의 호위함 1척을 타고 비밀항해를 시작했다... 광저우에서 변경의 예정회담지점까지, 해상으로 하루이상의 항해거리였다. 저우총리의 휴식을 위하여, 우뤼린 동지는 호위함을 저속으로 몰았고, 엔진소음을 최저로 감소시켰다. 마침 그날 밤에 바다는 파도가 없이 고요했다. 다음 날 목적지에 도달한 후, 저우총리는 기운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밤은 몇년동안 가장 편안하게 잔 밤이었다.' 상륙한 후, ㅓ우총리는 전체 함대의 관병들에게 친절하게 감사를 표했다....."

 

이것을 보면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저우총리는 1963년 12월초, 확실히 장즈중과 뤄칭창이 두 사람을 배동하고 광동성의 변경으로 갔다.둘째, 확실히 당시 남해함대사령관인 우뤼린 중장이 친히 호위함을 이끌고 '에정된 회담장소'로 갔다. 셋째, 해상이 항해일저이 최소한 하루밤의 시간이상이다. 그리고 뤄칭창은 글에서 저우언라이가 야간항해중 편안하게 하룻밤을 잔 것을 기록했다. 이를 보면, 모든 것은 진실이고 구체적인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뤄칭창은 저우언라이를 수행하여 시종 정확한 명칭을 말하지 않는 '회담예정지점'으로 갔다. 그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저우총리는 이번의 중요한 비밀변경회담의 며칠동안, 우뤼린 동지가 친히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와서 부근의 해역에서 수분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렇게 회담의 순조로운 진행을 엄호했고, 저우총리 일행의 안전을 확보했다."

 

뤄칭창의 이상 회고에서, 저우언라이와 국민당 고위인사는 모 섬에서 비밀회담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이전에 홍콩의 매체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회담시간은 확실히 "며칠"이었다(펑쉬이는 4일이라고 생각했고, 홍콩매체는 3일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뤄칭창은 시종 구체적인 시간을 말하지 않고 그냥 '며칠'이라고만 말했다). 그외에, 뤄칭창의 글에서, 여전히 저우언라이가 만난 국민당측이 인사가 도대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회담의 구체적인 내용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두 명의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고만 하였다.두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30여년후에도 뤄칭창이 여전히 공개하기를 꺼렸다. 이를 보면, 이번 회담의 비밀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저우언라이의 이번 국민당인사와의 회담내용은 뤄창칭의 이 글에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뤄칭창은 글에서 이런 말은 했다: "31년후인 1995년 설날, 나는 우뤼린 동지와 만났을 때,이 때의 역사를 이야기 했다. 나는 그에게 이번 회담이 당시의 대만당국(장제스, 천청, 장징궈)와 대륙이 의사소통하여 모두 하나의 중국문제에서 사실상 묵계를 달성했고, 국공양당이 일정한 기초적인 컨센서스를 이루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고도의 비밀이어서, 중앙은 우뤼린 동지에게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이 역사를 회고한 후, 우뤼린 동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그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1963년 12월의 호항으로 그는 중요한 정치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이 일은 역사적인 의의가 있을 뿐아니라, 중요한 현실적인 의의도 있다. 그는 당중앙, 저우총리가 그를 높이 신뢰하여준 것에대하여 감격해 했다."

 

저우언라이는 남해의 모 섬에서 국민당인사와 회담을 했다. 그 일이 있은 지 수십년이 지난이후에도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1992년 뤄칭창은 중국공산당 제14차당대회이후 은퇴하고, 여러해동안 그는 역사사건의 당사자로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지만,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저 우뤼린이 병ㅅ한 후에 쓴 한편의 글에서 처음으로 1963년 12월 그가 저우언라이, 장즈중과 남해로 가고, 국민당의 2명의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비밀회담을 진행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다만, 이번 국공고위층회담에서 논의한 이슈는 여러해후에도 국공양당의 그 어느 측에서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저우언라이와 당시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있는 "두 사람"은 남해의 모 섬에서 며칠간 회담을 한다. 당시에 이는 기밀유지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남해의 국공고위층회담내용에 대하여 펑쉬이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우언라이와 국민당대표는 당시 컨센서스와 묵계를 달성했다. 나중에 대륙의 '문혁' 영향으로, 컨센서스와 묵계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 외에, 당사자인 뤄칭창은 30여년후에 공개적으로 발표한 글에서 저우언라이가 남해에서 국민당 인사와 회담을 진행한 것을 "당시의 대만당국(장제스, 천청, 장징궈)와 대륙이 의사소통을 하고, 모두 하나의 중국 문제에서 묵계를 달성했으며, 국공양당이 일정한 기초적인 컨센서스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저우언라이의 남해행은 성과가 많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