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온백릉(溫伯陵)
1
눈을 감고 한번 상상해보자. 만일 당신이 이런 인생이력을 지녔다면 니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겠는가?
당신이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현장(縣長)을 지냈으며, 착실한 부친도 공무원을 지냈으며,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가족을 먹여살릴 만했다.
이런 집안환경에서, 당신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좋은 가풍과 개척적인 안목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신감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여건으로 보면 출발선부터 남들보다는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어렸을 때, 조부와 외조부가 사망하면서 가정이 몰락하였지만, 개인능력은 여전히 우수하고, 다른 성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닐 때에도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았다. 선생님은 이렇게 감탄했다: "가르친시 수십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뛰어난 학생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좀더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쳐야 겠다. 구심역혈(嘔心瀝血)도 마다하지 않겠다."
당신은 은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16살에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장은 "재상지재(宰相之才)"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자주 당신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했고, 아직 학생인 당신과 국가대사를 논의했다.
만일 당나라때였다면, 이런 사람은 "신동"으로 불렸을 것이다.
당신은 계속하여 노력했고, 20살에 출국유학한다. 비록 그 어느 대학의 졸업장도 받지 못했지만,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등 세계선진국을 구경했고, 각국의 풍토인정을 아주 깊이 이해했다.
경력은 같은 나이의 청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했다.
유학기간, 당신은 친구들과 하나의 이념을 믿었고, 이념을 추구하는 조직을 만든다. 이때 국내에도 동일한 유형의 조직이 성립되었다. 당신은 금방 친구들을 설득하여 국내의 조직과 연락하여 그 하급기구가 된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신은 국내대형조직의 창시자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무수한 동지들을 갖게 되었으며 사업에는 더욱 큰 발전공간이 생겼다.
조직을 창립하는 동시에, 당신은 독일에서 전쟁터를 근 10년간 누빈 장군을 만난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들은 막역지교를 맺고, 평생 우의를 유지한다.
현재로 보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삼교구류의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인격적인 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청년중의 준걸이었다.
유협이 활동하던 위진남북조라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조조, 조적(祖逖), 유곤(劉琨)같은 인물이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성취를 이루었고, 금방 조정에 들어가 관료가 되었다.
그러나 당신은 은사의 추천으로 귀국했고, 광주의 한 사관학교로 가서 지도자중 한명이 된다. 장군의 계급을 수여받고, 휘하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우수한 청년들이 있었다. 이때의 당신은 겨우 27살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루 세끼를 걱정할 때, 당신은 이미 부족한 것이 없었다. 조직, 사휘적 지위, 신앙, 업무 그리고 애정까지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다.
너무나 신기하다. 마치 소설속의 남자주인공같다.
좋다. 지금 눈을 떠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런 인생이력에 대하여 자신과 닮았다고 여기는가?
만일 닮았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한명의 전설적인 인물에게 속하는 것이다: 주은래(周恩來)
그를 식사에 초대했던 교장은 장백령(張伯苓)이다. 그가 참여하여 조직한 것은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이고, 평생 교분을 맺은 장군은 주덕(朱德)이다. 그가 귀국하여 재직한 사관학교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의 주은래는 자신만만했다. 특히 풍운이 격탕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업을 개창하고,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했다.
만일 당신이라면, 아마 매우 자신이 넘쳤을 것이다. 일종의 "하늘이 나에게 큰 임무를 맡겼다"는 사명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롤러코스트와 같다. 주은래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대한 것을 주었지만, 그에게 연이은 실패도 맛보게 했다. 운명은 정상에서 심하게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이런 실패가 청년인재 주은래에게 준 타격은 세상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2.
주은래의 첫번째 중대한 실패는 남창의거이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혁명을 배신하고, 공산당원과 국민당좌파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후 영미열강을 배경으로 삼아, 강소절강재벌과 힘을 합쳐 남경매판정부를 조직한다.
당은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혁명을 위하여, 섭정, 하룡의 2만부대를 기초로, 남창에서 무장의거를 일으킨다. 주은래는 전적위원회서기(前敵委員會書記)로 의거의 모든 사정을 지휘했다.
8월 1일 새벽, 남창의거가 발발한다.
격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지고, 의거부대는 이미 수비군 3000여명을 섬멸했고, 탄약 70만발, 각종 총기 5000여점을 노획했다. 대승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주은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의거가 기본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긴다. 이후 무슨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남창을 떠나 광동으로 진군하여, 바다로 나갈 항구를 확보한 다음 소련의 원조를 받고, 그후 실력을 키워 제2차북벌을 진행하고자 했다.
다만 얼마후 그들은 알았다. 의거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남창성을 떠나자 의거부대는 고립된다. 기본적으로 안정된 후방의 보급이 없었다. 천리행군이 의미하는 것은 우군의 협조가 없어 언제든지 적군의 기습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1달도 되지 않아, 남창의거부대는 병력과 장군을 잃어 군심에 동요가 일어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은 부대를 떠나 다른 살길을 찾아갔다.
주은래는 부득이 삼하파(三河壩)에서 부대를 나누어야 했다. 주덕에게 4000명을 남겨주어 그들에게 후방을 막도록 하여, 주력부대가 도망칠 시간적 여유를 벌려고 했다.
그러나, 주력부대도 실패한다.
10월 3일, 주은래는 남창의거후 마지막 회의를 주재한다. 그는 의거실패원인을 검토한다. 전술실수, 정보소홀, 경적 등등.
한 마디로 하자면 의가에 실패한 것이다.
섭정은 말했다. 앞으로 유구(流寇, 떠도는 도적)이 되자. 뭐 할 말이 있는가. 하룡이 직접 데려온 부대도 없어졌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는 안하겠다고 하면서 상서(湘西)로 돌아가 권토중래를 노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회의를 끝내기도 전에 적군이 들이닥쳤고, 회의장은 혼란에 빠진다. 주은래와 섭정, 섭영진(聶榮臻)은 포위망을 돌파했고, 도중에 산두지위서기(汕頭地委書記) 양석혼(楊石魂)을 만났고, 겨우 작은 배 하나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섭영진은 밧줄로 돛대에 매달려 있어서 바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보면 항해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 수 있다.
이때의 주은래는 고열에 시달리며 혼미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섭정과 섭영진이 들어서 홍콩까지 갔다.
왜 고열에 시달렸을까?
주로 두 가지 원인이다.
하나는 연속된 급행군으로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무쇠로 만든 몸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둘은 실패로 인한 심리적 타격이 너무 컸다. 당당한 2만대군이 두 달도 되지 않아 겨우 3명만 남았다. 의거의 최고지도자였던 주은래로서는 심리적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켜 전중국을 해방하겠다고 말했지만, 현재 수만명이 부추베이듯이 죽어버렸다. 그는 어떻게 그들의 열혈에 보답하고, 어떻게 수만의 남편과 자식을 잃은 가정에 얘기할 것인가.
그리고 남창의거는 당의 중요행동이었는데, 자신의 손으로 실패했으니 이후 혁명사업을 어떻게 진행한단 말인가?
이런 문제는 모두 주은래를 괴롭힌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남창의거의 실패는 주은래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묻게 만들었다: 나는 도대체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은래는 중국의 손가락에 꼽히는 청년인재였다. 한번의 실패로 그의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홍콩에서 몸을 추스린 후 주은래는 상하이로 돌아가서, 당중앙의 일상업무를 주재한다.
한번 실패했을 뿐이다. 다시 시작하자.
1928년 4월, 주은래는 모스크바로 가서 "6차당대회"에 참석하고, 정치국상위로 당선된다.
정치국주석 향충발(向忠發)은 거친 사람이고, 노동자신분때문에 소련이 그를 고른 것이다. 그는 중앙의 업무를 주재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연말에 귀국한 후, 주은래가 당중앙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그후 1년반동안이 주은래가 당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을 때이다.
그는 북방을 영도하는 순직성위(順直省委)를 재건하고, 섭영진과 하창(賀昌)을 보내어 순직의 업무를 주관하게 한다. 그리고 정강산의 홍사군에게 "구월래신"을 보내어, 모택동의 농촌포위도시와 유격전사상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른 근거지에 인원을 파견하여 당의 영도를 확립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은래는 상하이에서 전국의 혁명국면을 총괄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그 유명한 중앙특과(中央特科)를 조직한다.
중앙특과는 비밀부서이고, 비선업무를 했으며,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일을 처리했다. 그 아래에는 4개의 과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자조달을 책임지는 총무과.
정보수집과 반간첩업무를 하는 정보과
동지를 구해내고 반도를 정리하는 행동과
무선전신을 당담하는 교통과
소련에서 귀국한 이후, 향충발, 주은래와 고순장(顧順章)은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중앙특과를 영도한다. 다만 향충발은 이름만 걸려 있었고, 고순장은 명령을 받아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중앙특과의 최고책임자는 주은래였다.
그가 가장 믿었던 것은 진갱(陳賡)이 과장으로 있는 정보과와 고순장이 과장으로 있는 행동과였다.
한명은 정보를 책임지고, 한명은 암살을 책임졌다. 이들이 천의무봉으로 협력하면서 중앙특과는 상하이에서 신속히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중앙특과의 실력을 바탕으로, 주은래는 중앙기관을 영도하고, 상하이에서 자리잡아, 전국의 혁명운동을 지휘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1930년초의 이입삼(李立三)의 턀권과 1931년 왕명(王明)의 탈권에서도 모두 혁명업무를 처리하려면 주은래를 필요로 했다.
방법이 없었다. 주은래가 없으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혁명형세가 좋았을 때인 1931년 4월, 고순장은 장국도(張國濤)를 악예환(鄂豫皖)으로 보내준 후, 국민당특무에 체포된다. 그리고 금방 배신하여 국민당에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어서 향충발도 체포된 후 배신한다.
상하이의 중앙기관은 이제 비밀이랄 것도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중앙은 계속하여 상하이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누어 이전해야 한다.
같은 해 왕명은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대표가 된다. 남은 박고(博古)등이 그의 명령을 집행했다. 연말 주은래는 소비에트구로 들어가 소비에트구중앙국의 업무를 주재한다. 다시 1년반이 지나, 임시중앙은 철저히 상하이를 떠나, 중앙소비에트구로 옮겨간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아주 큰 타격이었다.
고순장은 그의 오른팔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망설임없이 배신해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없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상하이의 중앙기관이 무너진 것에 내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주은래를 괴롭힌 두번째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남창의거실패후, 상하이공작도 실패했다. 도대에 무엇때문인가? 이 일련의 문제가 주은래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혁명의 형세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반성의 시간을 주었다. 중앙소비에트구로 들어간 주은래는 다시 해보고 싶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중국혁명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는 항영(項英)을 대신하여 소비에트구중앙국서기가 되고, 중앙소비에트구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그는 모택동을 주변으로 밀어내는데 동의하지 않았고, 임시중앙에서 모택동을 비판할 때, 그는 일어나서 모택동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영도회의(寧都會議)"에서 모택동을 정식으로 비판할 때, 그는 "온화유한"한 비판을 하여 여지를 남겼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가 기실 소비에트구창시자의 위망을 깍아내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주덕, 모택동등의 도움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생각에 이것이 주은래의 중앙소비에트구에서의 업무계획이었다.
나중에 이 계획도 실패한다.
1933년 1월, 임시중앙이 소비에트구로 옮겨온다. 소비에트구중앙국과 임시중앙이 합쳐져서 직접 소비에트구의 모든 업무를 지휘한다.
주은래의 소비에트구중앙구서기직도 취소된다.
박고는 군사를 몰라서, 이덕(李德)을 군사고문으로 임명하여, 홍군을 지휘하는 작전행동의 전권을 준다. 나중에 다시 군사위원회를 설립하지만 항영을 주석으로 임명한다.
총정위(總政委) 주은래와 총사령(總司令) 주덕은 의사결정권을 잃었고, 집행권만 갖게 된다.
주은래는 정치국상위였기 때문에 그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최고집행자가 된다. 실적을 내면 임시중앙이 영도를 잘한 것이 되고, 실패를 하게 되면 주은래가 집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되니, 지위가 너무 난감하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임시중앙은 실적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소비에트구로 옮겨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개석의 "제5차위초(圍剿)"를 당하게 된다. 전문성이 없는 이덕이 마구잡이로 지휘했고, 박고는 생각이 없었다. 이덕이 하자는대로 했다.
모택동이 후방으로 돌아갔을 때, 전방에서 전보가 오면 바로 달려오겠다고 했는데, 명쳔간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앙소비에트구가 붕괴된다. 8.6만명의 홍군은 기나긴 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상강전투이후, 8.6만명의 홍군은 겨우 3만명만 남는다. 당시의 중앙지도자들의 심리상태는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중국혁명가들을 항상 무시하던 이덕은 기운이 빠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박고는 자주 권총을 꺼내 머리에 대며 자살연습을 했다. 그래도 섭영진에 그에게 총으로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박고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있었다.
주은래는 유사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다. 그건 그의 수양이 뛰어나기 때문이지, 그가 대범하여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서는 아니다.
어쨌든 수만명의 목숨이 걸려 있고, 천만인구의 근거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의사결정에 참여한 최고집행자로서 주은래는 아마도 심리적 부담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세번째 날카로운 칼날이다. 그리고 이는 주은래의 의지를 철저히 꺾어버린다.
3
주은래는 처음부터 엄마친구아들이었다. 동시에에 발군이었고, 전체 중국을 놓고 보더라도 그만큼 우수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업무를 시작한 후, 주은래는 큰 뜻이 있었다. 중국혁명에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에서 자신의 사업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자신의 동포에게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창의거때 주은래는 지휘를 마다하지 않았고, 상하이에서 전국혁명을 지휘할 때도 매우 자신있었따. 소비에크구로 들어아 창시자모택동을 그의 조수로 삼았다.
그는 굳게 믿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그러나 그의 선택은 모두 실패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 일련의 실패는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그저 업무를 바꾼 것뿐이지만, 주은래같은 인물에게 실패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고, 더더구나 자신이 여러 해동안 쌓아온 자신감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판타지소설의 세계관으로 말하자면 맨붕이 온 것이다. 앞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은래가 주재한 업무가 왜 실패했는지, 그러나 모택동은 잘 알고 있었다.
1957년, 모택동은 후르시쵸프와 얘기할 때, 국가주석의 직위를 내려놓겠다고 말한다. 후르시쵸프가 후계자가 있는지 물어보자, 모택동은 몇몇 당내동지를 거명한다.
첫번째는 유소기이다. 정치적으로 원칙을 견지하지만 신축성이 없다고 했다. 두번째는 등소평인데, 원칙성과 신축성을 겸비하고 있어 발전전망이 좋다고 말한다. 세번째는 주은래인데 각종 복잡한 갈등을 잘 처리하는데, 약점은 호인(好人)이라는 것이다. 네번째는 주덕인데 덕망이 높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고 했다.
모택동은 "호인"이라는 한 마디로 주은래를 평가했다.
주은래의 일생의 공적을 보면, 그는 확실히 호인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함께 고통을 견디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국가와 인민체 충성한다. 이런 중국에서의 미사여구는 모두 주은래에게 붙여도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특히 최고지도자로서, 왕왕 보살심장에 벽력수단을 가져야 한다. 눈앞의 허명에 신경쓰지 않고, 그저 만세의 공업만을 생각해야 한다. 곤란을 만났을 때 회피하지 말고, 용감하게 일어나서 비바람에 맞서야 한다.
전통의미에서의 "호인"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
남창의거샐피로 2만명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는 홍콩으로 갔다. 분명히 코민테른과 생각이 달랐음에도 그는 반박하지 않았고, 그저 집행하면서 완벽하게 해내려 했다. 그는 임시중앙의 의사결정에 반대했지만. 기치를 선명하게 내걸고 반대하지 않았다.
정치라는 것은 영원히 극단이 더욱 흡인력이 있다. 중간에서 조화롭게 하려면 양쪽 모두에게 좋은 소리를 못듣는다.
기치선명하게 극단에 서는 것이 지도자이다.
중간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호인"은 그저 집행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잘 알았다. 장정의 길에서 주은래도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내심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총사령관의 재목이 아니다."
수재(帥才, 총사령관재목)는 아니지만, 총사령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는 있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주은래는 여평회의(黎平會議)에서 모택동을 지지하여, 홍군을 지휘하여 귀수서부로 간다.
준의회의(遵義會議)에 이르러, 주은래는 박고, 이덕과 철저히 갈라서고, 심각한 자아비판을 한다. 그후 정치국상위의 신분으로 모택동을 지지하여 나서도록 한다.
비록 모택동의 신분은 "주은래의 조수"였지만, 사도적수(四渡赤水)"이후, 모택동과 주은래의 지위는 철저히 뒤바뀐다.
"사도적수"같이 소라껍질 속에서 돌고돌면서 싸우는 것같은 걸 주은래는 할 수 없다. 조수가 할 수 있는데, 총사령관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조수가 총사령관이 되고, 총사령관이 조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당사를 읽으면 그저 주은래가 준의회의때 손을 들어준 것만 본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왜 거기에 앉아서 손을 들었을까는 생각하지 못한다.
3차례의 중대한 실패는 주은래의 자신감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후 폐허위에서 주은래는 열반부활한 것이다. 진실한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갔다.
만일 모택동이 천생천재라면 나 주은래는 그냥 보통사람이다.
학교에서 항상 천하를 내려가보던 영웅도 사회에 나가서 얻어터진 후에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듯이, 그리고 새로운 인생단계를 걸으면서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일을 벌이듯이.
장정은 모택동성장의 연옥로이고, 주은래에게는 부활의 열반로였다.
4
장정은 주은래가 자신을 새로 수립하는 기점이 된다. 그러나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지, 이후의 인생에서 어떤 포지셔닝을 할 지는 그도 몰랐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주은래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생각을 끝낸 것은 마땅히 1940년일 것이다.
그때의 주은래는 "서안사변"을 겪었고, 국공통일전선의 이견을 겪었으며, 모택동의 <논지구전>도 읽었고, 항일근거지의 번영도 직접 목호하고, 소련으로 가서 부상치료도 근 1년동안 했다.
아마도 이 해에, 그는 중국의 번잡한 업무에서 벗어나 개인문제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포지셔닝을 모택동을 보좌하는 "재상"으로 자리잡은 것같다.
소년웅싱, 천지교자는 다 버렸다. 허황한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현실을 직시해야 혁명이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작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모택동에게 방법이 있으면, 모택동을 보좌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1940년, 소련에거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은래는 중경으로 가서 일을 한다. 그가 인원을 데리고 남하할 때, 섬서남쪽을 지나면서, 주은래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멈추게 하고, 인원들에게 함께 가서 유적을 구경하자고 한다.
그 인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시골에 무슨 볼만한 유적이 있단 말인가?
주은래도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후(留侯)가 영예리록(榮譽利祿)을 모두 버리고, 말년에 이곳에 은거했었다."
인원들은 그제서야 알았다. 이곳이 바로 유후묘(留侯廟)라는 것을.
유후는 한나라초기의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운주유악지중(運籌帷幄之中), 결책천리지외(決策千里之外)"의 조사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대장이 아니고, 진나라를 멸하고 항우를 멸한 지도자도 아니다. 그는 한고조 유방의 모사이다.
매번 유방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장량이 앞장서서 유방에게 국면을 분석해주고, 괜찮은 건의를 내놓아, 유방으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써서 천군만마를 지휘하여 천하를 얻었다. 그리고 사백년대한왕조를 열었다.
장량은 유방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공업을 이루었고, 살아서 그리고 죽어서 명성을 남긴다.
주은래는 장량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수재(帥才)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수재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분명하게 얘기할 수 없다.
주은래는 특별히 유후묘를 찾아가서, 장량의 상과 패위를 보고 아마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천년의 시공을 넘어서.
유후묘에서 나온 다음, 주은래는 인원을 이끌고 다시 소하가 한신을 추격한 유적지를 본다. 비록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은래는 고고학자가 아니고, 그저 옛 고사를 되새긴 것일 뿐이다.
한초삼걸이 유방을 보좌하여 대한왕조를 열었다. 장량과 소하가 각각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한명은 기획을 한 명은 집행을 책임진 것이다.
현재 주은래가 회의에서 계책을 내고, 국면을 붆석하는 것은 가능하고, 강력한 집행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장량과 소하를 합쳐놓은 것같다.
소하와 장량은 2천년전의 주은래이고, 주은래는 2천년후의 소하와 장량이다.
이렇게 하여 주은래의 열반부활은 완성되었다. 마치 봉황(피닉스)이 날개를 펴고 하늘에서 울부짖는 것처럼. 이제 모택동이라는 진룡을 보좌하여 사해를 뛰어다닐 것이다.
중경업무이후, 주은래는 성도로 간다. 그리고 제갈량의 무후사를 찾는다. 무후사의 관광객들 틈에 서서 주은래는 두보의 시를 읊었다:
승상사당하처심(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그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疩, 死而後已)의 제갈무후도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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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가 사망한지 이미 수십년이 지났다.
그의 후반생은 업무가 장량과 소하의 결합체와 같았다. 한편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다른 한편으로 집행했다. 모택동과 서로 파트너가 되어 신중국을 건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의 인격과 유산은 그러나 제갈량과 더욱 유사하다.
죽은 후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고, 사심없이 공헌한 것은 따로 말하지 않겠다. 여기에서는 한가지 작은 에피소드만 언급하기로 한다.
동진연간 환온(桓溫)이 촉을 정벌하러 갔다. 정벌을 마친 후, 환온은 성도에서 제갈량의 아래에서 하급관리로 있던 백세노인을 만난다. 그는 노인에게 물었다: 지금 누가 제갈승상과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한다: "제갈승상이 살아계실 때는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그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은래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총리로 있을 때, 중국인들은 모두 국가총리와 간부는 마땅히 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은래 총리가 죽은 후, 다시는 그런 총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간부도 본 적이 없다.
한 세대의 사람에게는 한 세대의 장정의 길이 있고, 한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장정의 길이 있다.
만일 주은래가 보통사람에게 무슨 유산을 남겼다면 그것은 마땅히 이러할 것이다:
이전의 노력을 배신하지 말고,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말고, 좌절과 고난을 겪은 후에는 인생의 포지셔닝을 새로 하고, 자신의 장정의 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찾아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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