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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오대십국)

후당(後唐) 실패의 교훈: "방향이 노력보다 중요하다"

by 중은우시 2020. 7. 25.

글: 엽서도(獵書徒)

 

당왕조가 멸망한 이후, 제국판도내의 수십개 할거세력중 어느 하나도 다시 한번 전국을 통일할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서로간의 전쟁을 벌인 후, 상대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지닌 할거정권이 속속 자신의 소조정(小朝廷)을 세운다. 그중 중원지구에 도읍을 정한 5개의 정권이 있다. 바로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우리는 이들 5개 정권을 통칭하여 오대(五代)라 부른다. 그리고 중원외에 존재했던 할거정권은 전촉(前蜀), 후촉(後蜀), 남오(南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閩), 초(楚), 남한(南漢), 남평(南平, 荊南), 북한(北漢)은 통칭하여 십국(十國)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학자들은 이 분열시기에 대하여 '오대십국"이라고 명명한다.

 

오대십국 가운데 강역이 가장 넓고, 실력이 가장 강했던 것은 사타인(沙陀人) 이존욱(李存勖)이 건립한 '후당'이다. 실제로 천하재통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왕조이기도 하다.

 

923년 이존욱은 위주(魏州, 지금의 하남 안양)에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동광(同光)이라 한다. 그리고 '당(唐)'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한다. 위주를 동경흥당부(東京興唐府)로 개칭한다. 같은 해 후당은 후량을 멸하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는다.

 

후당의 국세가 가장 강성했을 때는 930년전후이다. 강역은 동으로 황해, 서로는 농우(감숙동부), 천촉(사천), 북으로는 장성에 이르고 동시에 남으로 장강을 넘어, 남오, 남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후당을 정통으로 받들게 된다. 전략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북부와 서부변경은 마장(馬場)이 충분하고, 장강과 황하의 사이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경제가 발달했다. 그리하여 양식과 인력을 제공할 수 있다. 산서기지는 공고하여 북방유목민족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사타인은 원래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 전투에 용맹하다. 그래서 새로 통일국가를 만들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후당은 이처럼 지극히 유리한 형세에서 통일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신속히 멸망하게 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학습과 모방의 대상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이존욱의 부친 이극용(李克用)과 할아버지 이국창(李國昌)은 대당왕조와 관계가 밀접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이끄는 사타기병은 대당왕조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다. 그리고 대당도 투도보리(投桃報李)하여 높은 관직과 작위 그리고 산서(山西)라는 기반을 주고, 국성(國姓)인 이(李)를 하사한다. 이렇게 하여 이존욱은 스스로 당왕조의 정통으로 자처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다시 한번 대당웅풍(大唐雄風)을 떨치고자 했다. 그 예는 다음의 몇 가지에서 알 수 있다.

 

첫째, 이존욱이 후량(後梁)을 멸망시키기 전에, 직접 당소종(唐昭宗)의 '천우(天祐)' 연호를 사용하고, 후량 주온(朱溫)의 연호사용을 거절한다. 둘째, 이존욱은 전통에 따라 자신의 왕호인 '진(晋)'을 새왕조의 국호로 하지 않고, '당'을 국호로 쓴다. 셋재, 이존욱은 나라를 세운 후, 제도적으로 거의 완전하게 당나라를 본받았다.

 

그러나 이존욱 본인이건, 아니면 이국창이나 이극용이건, 대댱의 내부사무에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대당왕조가 일박서산(日薄西山)으로 몰락할 때였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대당의 흥성을 이루었던 요소가 아니라,오히려 당말의 조정의 쇠약무력한 원인을 조성했던, 환관의 조정장악, 재상을 위시한 관려집단과 번진간의 이합집산으로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게 했던 것등이다.

 

이씨가족은 군사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한(漢) 문명에 대한 이해수준이 높지 못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제도중에서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더더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올 줄밖에 몰랐다.

 

아쉬운 점은 이존욱이 따라했던 당나라제도는 당말의 것이었다. 정관지치를 만들었던 초당의 것도 아니고, 개원성세를 이끌었던 중당의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환관을 중용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세금제도를 추진하여, 보수적인 관료를 임용하고, 간신을 총애하고, 후궁의 정치관여를 방관하며, 명령을 내리는 곳이 여러 곳이 되도록 놔두었다. 그 결과 정국이 혼란되고 내외적으로 곤경에 빠져버린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방향이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 이존욱은 비록 근면하고 노력하는 좋은 학생이었지만, 학습대상을 잘못 골랐다. 그 결과 그는 실패하고 결국은 나라도 멸망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