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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장춘교(張春橋): 무장정변을 계획했었다.

by 중은우시 2023. 12. 20.

글: 임휘(林輝)

모택동 사후 1개월만에, 화국봉, 섭검영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모주석을 위해 일하던 “사인방” 즉,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왕홍문을 체포했다. 이와 동시에 “사인방”의 추종자들에 대한 숙청도 전개했다.

1980년, 중국 최고인민법원에 성립된 특별법정은 “사인방”에 대하여 보여주기식의 공개재판을 진행하여, 그들 모두를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구성원으로 규정하고, 문혁의 죄책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며, 상응하는 형벌을 내렸다.

나중에 공개된 재판기록에 따르면, 북경군사정변이후에 상해에서 미수에 그친 정변이 한건 있었다.

1980년 12월 12일, 왕홍문, 장춘교는 법정에 나와 심문을 받는다. 재판장 강화(江華), 부재판장 증한주(曾漢周)등 재판관은 합계15명이었고, 재판에 출석한 검찰측인원은 부장 황화청(黃火靑), 부부장 유병(喩屛)과 검찰관 3명이었다.

법정에서는 먼저 공소장을 통해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과 마천수(馬天水), 서경현(徐景賢), 왕수진(王秀珍)등이 “상해를 기지로 하여, 무장역량을 장악하고, 타도에 직면할 때 무장반란을 책동한 건”을 제기한다. 긜고 먼저 왕홍문에 대한 심문을 진행한다.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은 모두 상해에서 당시 상해시위서기로 서열은 달랐으며, 뒤의 두 명은 혁명위원회 부주임을 겸임하고 있었다.

왕홍문은 1967년 장춘교의 지령을 받아, 상해에 그들이 통제하는 무장역량을 건립했다고 승인했다. 왕은 장춘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군대는 민병을 지휘할 수 없다. 민병의 지휘권은 상해시위의 손안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왕홍문은 상해경비구의 민병지휘권을 탈취했고, 권력은 장춘교, 왕홍문과 요문원의 손아귀에 쥐어지게 되었다.

왕홍문은 자신이 왕수진등에게 “군대에 문제가 있다. 노선이 단정하지 못하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해명도 진행했다. 당시 상해경비구에는 두 파가 있었고, 이 두 파 가운데 상해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쪽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군대가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군대내에 우리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한편으로 상해의 군대를 말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베이징의 등소평을 가리킨 것이다.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의 진술에 따르면, 왕홍문은 1975년 9월, 시민병지휘부의 지휘관을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했고, “누가 손바닥으로 민병을 때려서 쓰러뜨리면, 내가 죽지 않는 한, 20년후에 내가 다시 민병을 일으켜 세우겠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산에 들어가 유격전을 할 준비를 하라.”

장춘교를 심문할 때, 재판관이 질문하는 “상해무장반란책동”, “왕홍문에게 지시하여 상해에 자신이 통제하는 무장역량을 건립하도록 한 건” 및 마천수등의 장춘교, 왕홍문등이 “민병을 자신의 손아귀에 확실히 쥐고 있어야 하고, 경비구의 지휘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군대와 아무런 관계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한 것에 대하여 장춘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재판관의 심문과정에서 1976년 6월 27일, 모택동이 죽기 직전에 상해민병지휘부가 총기를 내줄 것을 신청하였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마천수가 그 사실을 알고, 관련자를 찾아가서 질책하며 “즉시 내주라”고 승인했다. 마천수의 진술에 따르면, 급히 총기를 내주도록 한 것은 모택동의 병이 위중할 때 내전이 발생할까 우려했기 때문에, 민병의 역량을 강화하여 사전에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결국 민병은 반자동소총 3만5천정을 수령했고, 그외에 각종 대포, 화약통, 대전차무기등도 수령했다.

서경현은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그는 1976년 9월 21일, 모택동이 죽은지 10여일만에, 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위생부가 개최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틈타, 장춘교에게 몇 가지 내용을 보고했다. 첫째는 8월 남경군구사령관 정성(丁盛)과 밀담했는데, 정성은 60군은 믿을 수 없으며, 60군을 그가 지휘해서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이 군의 위치는 마침 남경, 무석, 소주 일대여서, 상해에 대한 위협이 아주 컸다. 장춘교등이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장춘교에게 마천수는 이미 상해민병에게 총기를 추가로 내주었다고도 말했다. 서경현은 장춘교는 아주 자세히 들었고, 몇 가지 문제를 물어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며칠후, 즉 9월 28일, 장춘교는 왕홍문의 비서 초목(肖木)을 상해로 보내 시위상위에게 직접 말을 전했다. 이런 일은 이전에 전혀 없었던 일이다. 지시를 전해들은 사람은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 왕소용(王少庸), 풍국주(馮國柱), 장경표(張敬標)등 6명의 시위상위였다.

장춘교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투쟁형세를 항상 분석해야 한다. 한편으로 경계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믿음을 제고해야 한다. 당연히 곡절이 있을 것이다. 자산계급에게 아직도 역량이 있지만 문제는 누가 지도자로 나서느냐는 것이다....나는 비관파가 아니다. 그러나 약간 우려한다. 솔직히 말해서, 상해는 심각한 시험을 거친 적이 없다. 임표, 등소평이 상해를 다잡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임표가 다잡았다면 큰 시험이 될 것이고, 싸워야 했다.” 장춘교의 언사에서 당시 중곡고위층 내부의 격렬한 투쟁을 엿볼 수 있다.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서 “무장반란을 기획하는 문제에서 주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춘교는 재판기록에서 기소된 건을 인정하지 않았고, 시종 침묵을 유지했다.

재판기록을 보면, 10월 7일, 모택동사후 1달째 되는 날, 마천수와 상해경비구사령관 주순린(周純麟)이 통지를 받는데, 그들로 하여금 북경의 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마천수, 서경현과 왕수진등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통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천수, 주순린이 북경으로 떠난 후에, 서경현과 왕수진은 도처에 동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서경현은 당시 강청이 아끼던 문화부 부장 우회영(于會泳)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위생부 부장 유상병(劉湘屛)에게 전화를 걸어 북경상황을 물어보았다. 그후 다시 마천수의 비서인 방좌정(房佐庭)과 통화를 했다. 그런데, 방좌정은 중앙에서 아직 회의를 시작하지 않아서 마천수는 지금 기다리고 있으며, 회의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불안해하던 중에 10월 7일이 지나고 8일 마침일찍, 서경현과 왕수진은 장춘교의 처인 이문정(李文靜)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장춘교의 아들이 원래 8일에 북경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이문정이 장춘교에게 밤새도록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때 장춘교는 기실 이미 화국봉, 섭검영 등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이문정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내심 불안해하던 왕수진은 바로 직접 왕홍문에게 전화를 건다. 상황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경현과 왕수진은 상의후, 장춘교의 상해에 있는 비서 하수문(何秀文) 그리고 당시 상해에 있던 왕홍문의 비서 요조강(廖祖康) 및 초목을 불러서, 그들에게 함께 북경에 전화를 걸어보려고 한다. 이 몇 사람이 도착한 후, 여러 채널을 통해서 각종 번호로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서경현은 그리하여 <인민일보>의 책임자인 노영(魯瑛)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어본다. 그런데, 노영은 아주 이상한 태도를 나타낸다. 몇 마디 하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서경현과 왕수진은 다시 중공중앙군위로부터 전쟁준비를 강화하라는 전화통지를 받는다. 통지에는 특별히 국내에 잠입하고 있던 자가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상해경비구도 보고를 통해 원래 총정치부가 상해에서 개최하기로 한 전군도서공작현장회의는 개최중지한다고 결정했다고 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북경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는 서경현등을 우려하게 만들었다. 서경현은 왕수진, 왕소용, 풍국주, 장경표, 하수문, 초목, 요조강과 함께 모여 형세를 분석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추측했다.

이때 시위상위 장경표는 상해경비구의 군용전화를 통해 북경의 경서빈관(京西賓館)과 연결되어, 마천수의 비서 방좌정과 연결되었다. 방좌정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의동안 외부로 전화하는 것은 금지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들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들은 맞이했다는 것이다. 방좌정은 암어(暗語)를 남긴다: “나의 위장병이 위중해졌다.”

전화를 끊고 몇 사람은 위장병이 없는 방좌정이 그렇게 말한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지를 추측해 보았다. 왕홍문의 비서 요조강은 이렇게 말한다: “몇몇 원수들 섭수(葉帥, 섭검영을 가리킴), 서수(徐帥, 서향전을 가리킴)는 아직 영향력이 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몇몇 원로원수들이 이미 군대를 동원해서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에게 손을 쓴 것이라고 깨달았다.

몇 사람은 순식간에 형세가 아주 심각해졌다고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각 시의 민병지휘부 책임자, 시의 공안국 책임자, 신문계의 책임자를 찾아가서 무장정변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그날 저녁, 왕수진은 서경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녀와 상해혁명위원회 부주임 김조민(金祖敏)의 비서 무문금(繆文金)과 얘기를 했고, 오후에 무문금이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겟다고 했다. 만일 장춘교, 요문원, 왕훙문에게 정말 일이 터진 것이라면, 전화를 걸어 암어로 “제 어머님이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라고 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왕수진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무문금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제 어머님이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고 했다.

서경현은 그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놀라면서, “과연 정말 일이 터졌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장춘교가 9월 28일에 한 예언이 정말 현실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가 말한 큰 시험의 시각이 도래한 것이다. 그는 즉시 문화부 부부장 유경당(劉慶棠)에게 전화를 걸어, 문화부의 우회영, 전호량(錢浩亮), 유경당도 강청과 전화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하게 된다.

바로 이 때, 왕홍문이 상해에서 공안부로 데려간 공안부 부부장 축가요(祝家耀)가 전화를 걸어와 세 마디의 말을 한다: “사람이 모두 모였다. 포위하기 시작했다. 움직일 수 없다.” 이렇게 다시 한번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등 몇몇이 모조리 붙잡혀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조금 지나서, 유경당이 다시 전화를 걸어와 문화부의 몇 사람이 체포되었다고 암시한다. 그 말을 듣고 초목은 놀라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좋지 않다. 문화부에 손을 썼다면, 다음은 우리다.” 초목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 혼란에 빠진다. 누군가 잡혀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서경현등은 모여서 대책을 상의했고, 최종적으로 무장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장춘교가 9월 28일에 내린 지령에 근거하여, 즉, “누군가 상해에서 일을 벌이려고 하면 큰 시험인 것이다. 싸워야 한다. 싸우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실력은 바로 상해민병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요문원의 지시와 이론이었다.

요문원은 1976년 천안문사건이후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천안문사건에서 얻은 하나의 기본경험은 바로 반드시 혁명의 폭력으로 반혁명의 폭력을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투쟁은 피가 흐르는 것도 있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는 이후 이런 기본경혐을 견지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서경현도 크게 동의했다.

왕수진이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녀는 낮에 이미 민병지휘부의 시강영(施尙英)등 몇몇과 얘기를 해보았는데, 총을 든 무장민병은 2천5백명으로 각 공장에 집중되어 있어 언제들이 불러올 수 있다. 나머지 3만1천명은 흩어져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시위상위 왕소용은 이렇게 말했다. 민병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고 부대의 한 단(團, 우리나라의 연대에 해당함)의 역량이 있어야 비로소 주먹하나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왕홍문의 비서인 요조강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경비구의 몇몇 책임자들을 우리 곁에 ㅔ리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만으로 부대를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서만 부대를 움직일 수 있다.

금방, 서경현과 왕수진등은 상해경비구의 참모장, 부사령원 장의애(張宜愛), 상해경비구 경비사 사단장 이인재(李仁齋)등과 얘기한 후, 경비사를 주요무장역량으로 하여 상해반란을 일으키기로 기획한다.

서경현, 왕수진이 확정한 계획에 따라, 두 개의 지휘중추가 확정된다. 하나는 서경현이 책임지고 총체적인 것과 여론준비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화산로 정향화원으로 정했다. 나머지 책임자는 시위상위 왕소용, 장의애, 장경표, 주영가, 이인재등이 있었고, 경비방면은 이인재가 책임지기로 했다. 다른 하나는 왕수진이 이끌며, 민병과 부대의 군사행동지휘를 책임진다. 장소는 시민병지휘부로 정했다. 나중에 동호로초대소로 옮긴다. 나머지 참여인원은 시위상위 풍국주, 경비구 부정위 이빈산, 부사령관 양신아, 요조강, 시위경위처 처장 강녕일등이 있었다.

그외에 기획모임때, 요조강은 이렇게 건의한다. 왕홍문의 일부 의형제들 진아대, 대립청, 황금해, 마진룡, 섭창명등을 불러모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은 그가 책임을 맡기로 했다.

사람들이 상의를 마친 후, 헤어지기 전에 서경현은 왕수진이 제공한 민병숫자와 상황에 따라 친필로 제1호 “정변”명령을 내린다. 구체적인 내용은, “민병지휘부는 전쟁준비를 강화하고, 3,500명이 집중하고, 3만1천민병은 명을 대기하라(즉 저녁에 모여서 당번을 서라). 민병지휘부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방송국과 신분사의 보위를 강화하라.”

얼마 후, 서경현은 다시 제2호 명령을 내린다. 내용은 이러하다: “방송국은 이인재 동지가 방송국의 연(連, 중대)에 얘기하여 경위를 주의하고 유상현(劉像賢)동지의 지휘를 받으라. 3개의 연은 이인재 동지가 알려서 시위의 지휘를 받고록 하라.” 유상현은 원래 상해경비구 사람인데, 당시 인민라디오방송국으로 가서 당위서기를 맡고 있었다.

그 후, 이인재의 지시하에 경비구의 2개 연(중대)가 각각 상해시위와 라디오방송국에 진입하여 질서를 유지했다.

민병지휘부의 지휘소조 부조장 시상영은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0월 8일 저녁, 민병중 제1차로 집결한 3,240명과 오토바이 100대, 트럭 100대에 운전사와 조수를 배치했고, 제2차는 13,000명으로 민병101정(艇), 15와트무전기 15대를 썼으며, 비밀지휘소를 강남조선공장과 국면17공장 혹은 국면31공장에 설치했다. 그들은 각 구의 민벙지휘부의 우두머리들에게 모두 자리를 지키고 당직을 서도록 요구했고, 9일 18시까지 모두 이행완료했다.

상해의 각 지구의 민병영량이 차례로 집결을 마치고, 상해무장정변이 일촉즉발일 때, 서경현과 왕수진도 북경으로부터 “회의참석” 통지를 받는다. 이건 섭검영, 등소평등이 상해에서 변란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이다.

서경현, 왕수진이 북경으로 떠난 후, 나머지 사람들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12일 어떤 사람은 더 이상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이 돌아와서 결정을 내려주도록 기다릴 수 없다. 하려면 크게 하고 말려면 말자고 했다. 구호는 “네가지 돌려달라”는 것으로 “강청을 돌려달라. 문원을 돌려달라, 춘교를 돌려달라, 홍문을 돌려달라.” 동시에 민병이 라디오방송국에 진입하여 라디오방송으로 전체 시의 인민들에게 알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건의하기를 전력망을 파괴시켜 상해를 마비시키자고 했다.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무장정변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한일(捍一)”과 “방이(防二)”의 무장정변방안을 제정한다.

“한일”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뇌기관, 신문사, 방송국, 교량, 역, 부두, 공항과 고통요충지를 장악한다. 지휘핵임인원명단을 확정한다. 지휘소를 개설한다. 병력을 배치한다. 구령,암호,표기, 탄약보급과 무기수리, 사회통제강화등이다.

“방이”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해외곽에서 시중심구까지 3단계의 ‘통제권’을 설치한다. 상해와 강소, 절강 접경지에 6개의 통제소를 설치하여 제1통제권으로 한다; 시지역에 두 단계의 통제권을 설치한다; 그리고 각구, 현의 임무와 예비대의 구성을 규정한다.

그외에 통신보장계획도 있었다. 통신임무와 다종통신수단을 규정했다.

그러나, 확실히 이는 민의라는 기초가 없었다. 그리고 권세가 있고 고위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지지하지 않는 무장정변은 요절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즉 10월 12일, 북경의 고위층이 옥천산에서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상해문제를 토론한다. 그리고 중공중앙 정치국 후보위원인 장군 소진화와 예지복, 팽충을 핵심으로 하는 중앙공작조를 상해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10월 13일,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이 상해로 돌아온다. 그들은 시위상위회의에서 중앙에서의 회의상황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 때, “사인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각종 채널을 통해 상해에 전달된다.

1주일후, 10월 20일 저녁, 소진화등이 비밀리에 상해로 향한다. 그리고 해군상해기지사령관 두표, 정위 강장등의 호위하에, 공항을 떠나, 수전로의 해군상해기지에 도착한다. 소진화는 밤을 새워 상해경비구의 사령관 주순린과 주상해육해공군 각 부대의 책임자를 불러모아 상황을 파악하고 배치를 진행한다.

다음 날, 소진화는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을 찾아 얘기하는 외에, 남경군구 정위 요한생도 불러서, 정변에 참여한 군대인원을 모조리 전출시키도록 하고, 상해경비구사령관 주순린으로 하여금 직접 민병을 체포하게 한다. 남경군구는 다시 부참모장 장정을 보내어 공작고 구성원으로 삼아 민병지휘부를 관리감독한다.

상해무장정변은 이렇게 무산된다. 얼마후, 소진화는 상해시위 제1서기, 시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고, 예지복은 제2서기가 되고, 팽충이 제3서기가 된다. 그후 계속하여 정변에 가담한 일부 인원을 체포, 조사한다.

비록 상해무장정변은 그저 해프닝같이 끝났지만, 이는 중공고위층의 격렬한 투쟁을 보여준다. 북경은 화국봉, 섭검영, 등소평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파가 장춘교의 “상해방”과의 힘겨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마도 이는 하늘의 뜻인 것같다. 만일 강청, 장춘교등이 게속 권력을 장악하고 모택동의 독재노선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더 이상 참지못하게 된 중국인민들이 그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한 후의 소위 개혁개방은 그저 중공에게 30여년의 수명을 연장시켜주었을 뿐이다.

지금, 중공은 다시 한번 전환점에 들어섰다. 백성들의 원성이 사상유례없을 정도이다. 이때 중공의 당내에 아무도 계속 목숨을 연장시켜줄 사람이 없다. 역사무대에서 물러나는 것은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1981년, 장춘교는 사형, 2년집행유예의 판결을 받는다.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변경된다. 2005년 췌장암으로 북경 부흥의원에서 사망하니 향년 88세이다.

왕홍문은 무기징역의 판결을 받는다. 그후 1992년 간암으로 북경 부흥의원에서 사망하니 향년 56세이다.

1982년, 서경현은 유기징역 18년형을 받고, 왕수진은 유기징역 17년형을 받는다. 마천수는 반응성정신병을 알아 진술능력을 상실하여 예심을 중단한다. 마천수는 1988년 12월 상해정신병원에서 사망하니 향년 77세이다.

서경현은 1992년 6월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1995년 형기가 만료된다. 2003년, 회고록 <십년일몽>을 홍콩 시대출판유한공사에서 출판한다. 2007년 10월 31일 자택에서 심장병이 발병하여 사망한다. 2013년 <서경현최후회고>가 홍콩에서 출판된다.

왕수진은 1994년 석방된다. 지금도 건재하다면 나이가 이미 89세가 되었다.

당시 상해경비구 참모장, 부사령원 장의애는 당적을 박탈당하고, 군대계급도 박탈당한다. 2002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이다.

이인재는 당적과 군적은 유지된다. 현재 상해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고, 지금 이미 105세의 노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