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단(王丹)
올해는 "6.4" 35주년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면, 여하한 회고나 반성도 모두 별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6.4"사건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35년전에 발생했던 많은 일들은 우리가 오늘날의 중국정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하고 신선한 참고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조자양은 왜 권력투쟁에서 실패했을까.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과거 35년간, "6.4"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주로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조자양은 학생운동초기의 중요한 시기에 베이징에 남아서 국면을 주재하지 않고, 오히려 원래의 일정에 따라 북한을 국사방문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그리하여 이붕(李鹏)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수파들에게 절호의 반격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소프트정변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주었다.
둘째, 그는 5월 15일 내방한 소련공산당 총서기 고르바초프를 접견했을 때, 공개적으로 중공당내의 실질상의 최고의사결정권자는 그 본인이 아니라 등소평이라고 말했다. 이 거동은 등소평에게는 자신을 팔아먹은 행위라고 보였다. 자신에게 학생운동을 처리하는 책임을 떠민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조저양과의 관계가 결렬되고 결국 조자양을 교체할 결심을 하게 된다.
이상의 두 가지 원인은 당연히 모두 정확하다. 다만 필자의 생각에 또 하나의 원인이 있는 것같다. 그것은 35년동안의 회고와 반성에서 그다지 중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조자양과 군대의 관계이다.
사실상, 2019년 대만의 인각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다큐멘터리작가인 루웨강(卢跃刚)의 <조자양전: 한 실패한 개혁가의 일생>이라는 책에 따르면, 조자양과 군대의 관계는 시종 상당히 소원했다. 이는 조자양이 '문혁'때 광동의 군대계통에 의해 비투를 당한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루웨장의 말에 따르면, '문혁'때, 광주군구는 광동에 대해 전면적인 군관(军管)을 선언하고, 광주군구사령원 황영승(黄永胜)이 군관위원회주임이 된다. 당시 광동성위서시를 맡고 있던 조자양은 군대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제1차 조자양비투대회는 광주군구 경위영 운동장에서 개최된다. 이때 조자양은 명목상으로는 광주군구의 제3정위(政委)였다. 비투를 당했다는 것은 군대측이 조자양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후 조자양은 군대에 의해 '감호(监护)'의 명목으로 감금당한다. 3년간이나. 군대측은 아마도 자신들이 호의로 조자양을 보호했다고 여기겠지만, 조자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에 원한을 품는다. 조자양은 총리가 된 후 일찌기 이렇게 누가 그에게 물은 바 있다: "총리, 문혁때 당신이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누구인가?" 조자양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가장 원망스러웠던 것은 경비구(警备区)이다" 그리고 욕설을 섞어가면서 말을 잇는다. "그 xxx들은 썩은 사과를 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그것도 나에게 억지로 먹게 했다. 군대는 나의 마음 속에 일종의 원한이다." 조자양은 군대와 이렇게 원한을 맺는다. 그래서 군대와의 관계가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고, 더더구나 군대내에 자신의 역량을 키우지 않았다.
루웨강의 분석에 따르면, 13대에서 조자양은 특별한 직위를 하나 갖게 된다: 중앙군사위제1부주석. 서열은 등소평의 바로 다음이고, 상무부주임 양상곤(杨尚昆)의 앞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군대사무에 관여한 바 없다. 등소평의 뜻은 군대는 양상곤이 관리하라는 것이다. 다만 조자양으로 하여금 양상곤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등소평의 계산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필자의 생각에 역시 조자양의 큰 실수중 하나는 바로 군대에 대해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등소평의 뜻에 따라 군대사무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89년에 그가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조자양은 너무 착실했다. 그는 총부리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은 어느 날 총부리를 군사위제1부주석인 자신에게 겨눠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조자양이 1989년의 정변때 쉽게 타도당한 세번째 원인이다.
오늘날 조자양이 실패한 이들 원인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현재의 중국정치를 분석하는데 두 가지 중요한 참고가치를 주고 있다.
첫째, 중공고위층정치에서, 군대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가 군대를 장악하느냐가 바로 누가 당내투쟁에서 불패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진핑을 포함한 정치인물의 향방을 관찰하는데 반드시 그와 군대의 관계를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런 관계는 평상시에는 아마도 그다지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일단 중요한 위기가 발생하면 이 관계는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록 중공이 이미 75년간이나 권력을 장악해왔지만, 여전히 혁망당에서 집권당으로의 변신을 완수하지 못했다. 이 당은 여전히 군사수단에 의해 정권을 탈취하고, 군사수단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75년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
둘째, 중공당내의 지도자는 중대문제에서 폭력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을 때만 민주와 법제의 방식으로 중대문제를 처리할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설사 호요방(胡耀邦), 조자양같이 최고권력의 위치에 올라간 경우에도 당내의 보수파에게 쉽게 타도당한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반민주는 중공의 정치적 유전자이다. 여하한 지도자도 정치적 레드라인을 밟아서는 안된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이것은 체제문제이다. 개인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중공에 고르파초프식의 개명한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중공정치를 이해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당의 내부에는 개명파의 생존공간이 없다. 이는 이 당이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에 나설 가능성이 거의 제로라는 것을 말해준다. 누가 총서기에 오르든 마찬가지이다.
불행한 것은, 오늘날, 중국뿐아니라 서방에서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상의 두 가지 경험과 교훈을 제대로 흡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년전 외부에서는 리커창(李克强)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 "시하리상(习下李上)"이 중국에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는 바로 35년전의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89년민주운동과 6.4진압에 대한 회고와 반성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원히 그 비극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이다. 이 기억은 역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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