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소기)

유소기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었는가?

중은우시 2015. 1. 14. 00:53

글: 중국경영망

 

 


2012년초, 중공문헌연구회 유소기분회 부회장, 중공중앙문헌연구실2부 전 부주임 황쟁(黃崢)의 두 권의 저작 <유소기원안시말>, <유소기의 최후세월>이 재판이 나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왜 오늘날에 이르러 유소기사건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황쟁이 보기에, "문화대혁명"때 유소기사건은 이 동란에서 관련범위가 가장 넓고, 피해자의 직위가 가장 높고, 악영향이 가장 심각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역사상 최대의 원안(寃案)이다. 그것은 당시 국내외에 강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뿐아니라, 40여년후인 오늘까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황쟁에 있어서 유소기를 연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1979년 안후이성 성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중공중앙당교 이론반에 파견되어 공부하고 있었다. 1980년 중공중앙은 유소기를 평반(平反, 명예회복)하면서, 곧이어 중앙문"헌연구실에 유소기연구조를 만든다. 황쟁은 당시 연구조의 책임자였던 유소기의 전 비서 요력문(姚力文)에게 추천된다. 그후 황쟁은 북경으로 옮겨서 유소기 연구조의 연구원이 된다.


황쟁이 보기에 유소기는 평반된지 이미 30년이 흘렀다. 그러나 현재까지 유소기의 일생에 대한 선전과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3가지 상당하지 않는 점이 있다. 첫째는 그의 혁명, 건설과정에서의 공헌에 상당하지 않다. 둘째는 그의 당과 국가에서 처한 숭고한 지위와 상당하지 않다. 셋째는 그가 문혁중에 받은 불공정한 대우와 상당하지 않다.


"유소기사건과 문화대혁명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황쟁이 보기에, "문화대혁명이 없으면 유소기사건은 없었을 것이고, 유소기사건이 없었다면, 문화대혁명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40여년전으로 되돌려 보자.


1968년 10월에 개최된 중공8기의 확대12중전회에서 유소기는 '반도(叛徒), 내간(內奸), 공적(工賊)'으로 규정되고, "영원히 당에서 제적하여 출당시킨다", "그의 당내외의 일체 직무를 취소한다."고 결정했다. 그때의 유소기는 이번 회의의 상황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유소기사건의 입건, 조사, 결정의 전체 과정에서, 아무도 그에게 그의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로부터 어떤 해명도 듣지 못했다.

반복된 모욕, 비투(批鬪)와 초가(抄家, 가산몰수)후, 유소기의 처인 왕광미(王光美)는 1967년 9월 13일 정식 체포되고, 자녀들도 집에서 쫓아낸다. 이후, 중남해 복록거(福祿居)에 있는 유소기의 곁에는 가족이 한 명도 남지 않는다. 그저 엄밀한 감시만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유소기는 의식했다. 그가 아무리 변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때부터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소리없는 항의를 한 것이다. 이전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보위하기 위하여, 유소기는 여러번 구두로 해명하고, 서면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치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여러해 이후, 황쟁은 두 장의 1968년 10월에 찍은 유소기의 사진을 보았다. "그는 침대위에 누워 있는데, 손에 두 개의 이미 변형된 플라스틱병을 꽉 붙잡고 있었다." 유소기의 자녀인 유평평(劉平平)등의 진술에 따르면, 두 개의 변형된 병은 바로 부친이 중병을 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병의 통증과 질식할 것같은 고통에 그는 자주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을 뻗어 함부로 잡거나 찢고, 일단 물건을 잡으면, 죽어라 놓지를 않았다. 업무인원과 의료인원은 그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광경을 보자 실로 차마 두고 보지 못했다. 두 개의 단단한 플라스틱병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부친이 죽을 때까지 두 개의 플라스틱병은 완전히 변형되어 두 개의 작은 호로병처럼 되었다."


유소기연구에 종사하여 여러해동안 황쟁은 각종 사료를 조사 연구하였을 뿐아니라, 동시에 대량의 당시 사건을 친히 겪은 사람들을 취재했다. 그도 이로 인하여 왕광미 및 유소기의 자녀들과 20여년간 교류를 하게 되었다. 동시에 황쟁은 다른 유소기 신변의 사람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가능한 한 역사의 본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유소기의 곁에 있던 간호사 가란훈(賈蘭勛)의 회고에 따르면, 1968년 3월이후 유소기는 식사, 보행은 이미 아주 곤란했다. "그의 한 다리는 걸을 때 끌 수 밖에 없어서 억지로 앞으로 이동할 때 손은 벽을 잡아야 했다. 식사를 할 때는 손과 입이 협응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입을 벌리고 있으나 음식을 입에 가져가지 못했고 ,음식을 입에 가져가면 입이 닫겨 있었다. 손으로 젓가락을 들 면 심하게 떨렸다."


1968년 4월 12일에 쓴 <유소기상황보고>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의사의 검사에 따르면: 유소기의 정신은 멀쩡하지 못하고, 표현도 제대로 못하며, 분별력이 명확하지 않고, 표정은 멍하다. 물어보아도 대답을 하지 못하며, 문장을 하나라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두 다리는 움직일 때 아주 힘이 들었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옷을 입고, 틀니를 끼울 때 여러번 아래위를 바꿔 입거나 잘못 끼우는 일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는 바로잡지 않았다. 의사의 판단에 따르면 이것은 가장하는 것같지 않다고 한다."


의사의 판단은 일부 사람들이 보기에 정확하지 않았다. 5월 19일의 <상황보고>에는 유소기의 언행을 '멍청한 척 한다", "빗, 비누로 이를 닦고, 양말을 신발 바깥에 신으며, 속바지를 바지 바깥에 입고,  어떤 때는 두 다리를 바지의 한 다리 속에 넣어서 미친 척하고 바보인 척하며 온갖 추태를 보인다. 의외의 사고를 방비하기 위하여 감호(監護)업무에 상응한 일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소위 '감호를 강화한다'는 것은 유소기가 '사람을 공격하거나 자살하는 것을 막는 것'을 가리킨다. 그후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전자이건 후자이건 이미 당시 유소기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감호만 했지 치료는 해주지 않아서 1968년 7월 9일에는 유소기의 병세가 악화되고, 기관지염이 급성발작하여, 기관지폐염으로 되어, 생명이 위험해져, 언제든지 사고가 발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병원에서 온 전문가가 그에게 응급조치를 취했다. 응급조치의 목적은 '살아있는 증거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사후의 자료에 따르면, 7월 9일과 8월 6일, 관련책임자는 두번 의무인원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 해서 치료하고, 돌봐주어라. 그를 9대까지 끌고가서 살아있는 표적으로 비판받게 해야 한다."


바로 '9대까지 살려두어서 살아있는 표적으로 삼는다'는 원칙으로 당시 유소기에 대한 치료는 그저 폐염에 대한 것이었고, 신경계통의 병으로 인하여 정신이 모호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의 <병세보고>의 기록에 따르면, 10월 5일, 유소기는 두번 통곡을 하고, 10월 9일이후 완전히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다. 10월 11일부터, 유소기에 대하여 코에 관을 꽂아서 음식을 섭취시킨다.


이런 생명유지방식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구금, 위급, 응급조치를 반복하는 유소기는 자연히 1968년 10월후 그의 머리 위에 3가지 죄를 뒤집어 씌운다. "반도, 내간, 공적". 더더구나 그는 3가지 죄를 어떻게 날조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는 여러해 이후 이 3개의 죄가 번복되는 과정을 통하여, 거꾸로 이들 죄가 만들어진 시말을 추정해볼 수 있다. 황쟁의 말에 따르면, "1978년 11기 3중전회이후, 계속되는 군중의 요청으로 당내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유소기의 '평반'을 제안했다. 최종적으로 중앙기율검사위와 중앙조직부가 공동으로 조사조를 조직하여 유소기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벌인다. 유소기의 420여권에 달하는 사건기록에 왕광미등의 사건기록을 합하면 570권에 달하는 자료가 된다. 조사조는 기록을 본 후 제공된 '증거'를 재조사 했다." 황쟁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당시에 재조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고. 이렇게 큰 사건을 뒤집는데 저지를 많이 당하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상대방은 말했다. 없었다고 재조사에는 겨우 반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료들은 하나하나 금방 부정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두 가짜이고, 강요당한 진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들 위증은 모두 유소기에 대한 닐련의 '전안조사(專案調査)'에 나온다.


유소기에 대한 전안조사전인 1966년 겨울, '왕광미전안조'라는 기구가 성립된다. 사후에 보면, 성립된 근거는 1장의 손으로 쓴, 글자흔적이 불분명한 '명단(名單)'이다. "그것은 표제도 없고, 일자도 없으며, 어느 회의에서 나온 것인지도 명시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 연구하여 결정한 것인지도 명시하지 않았다." 황쟁은 말한다. 이 손으로 쓴 '명단'에 강청의 이름이 동그라미쳐서 빼버리고, 왕동흥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사자의 회고에 따르면, 이것은 강청이 스스로 제안한 것이고, 기실 전체 전안조는 계속 강청, 강생(康生)의 조종하에 있었다. 앞장선 직접 책임자는 주로 사부치(謝富治)였다. 


1967년 3월, '문혁'의 악성발전에 따라, 유소기 문제가 업그레이드되고, 그의 조사는 이어서 개시된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유소기가 1927년에 반당혐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한번은 모택동, 임표 및 일부 중앙정치국 상위등이 참가한 토론회에서 '왕광미전안소조'등 판사기구에서 이 일을 '조사연구'하자도 제안했다. 그리고 유소기전안조의 성립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강생, 강청등은 나중에 실제업무처리과정에서 상당히 방대한 '유소기전안조'를 설립한다." 황쟁은 말했다. 아마도 이것은 강청, 강생등이 마음 속으로 자신감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유소기조사가 1967년 3월부터 시작되고 5월에 가속화되지만 1968년 4월중순이전까지는, 유소기사건에 관한 각종 보고나 대외연락에는 여전히 '왕광미전안조'의 명의로 했다. 1968년 4월하순부터 '유소기,왕광미전안조'라는 명의를 썼다.


전안조의 업무방식에 대하여, 일찌기 전안조의 책임자중 하나이고, 나중에 강청에 의하여 우경으로 비판받으며, 진성감옥에 들어가서 5년을 지낸 초맹(肖孟)은1979년에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그들(강청,강생등)은 계속 전안조에 압력을 가하여, 반우경을 얘기했다. 조사나 자료를 보는 과정에서 어떤 상황을 사실대로 보고하면, 객관주의,전안재료확산등의 죄명을 뒤집어씌워 자료를 압수하고, 어떤 사람은 전안조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전안을 하는 사람은 사상부담이 크고, 정신압력이 컸다. 내가 진성감옥에 갇힌 후,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차라리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안위했다."


초맹의 소위 '양심에 꺼리는 일"이라는 것은 진술을 강요하고, 증거를 위조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하여 1925년, 1927년, 1929년에 유소기가 혁명을 배신하고, 내간(內奸), 공적(工賊)이 된 것을 증명하려 했다. "강청, 강생이 보기에, 유소기를 철저히 타도하려면 역사에서 문제를 찾아내야 하고, 그는 반도라고 하여야 했다. 그래야 평생 명예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황쟁은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증거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유소기가 만주에서 일할 때 반란을 일으킨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안조는 유소기가 만주에 있을 때 부하 맹용잠(孟用潛)을 '격리조사'할 때 '중점돌파대상'으로 삼았다. 초맹은 당시에 맹용잠을 심문하는데 참여했다. 그가 사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매번 심문때, 전안조는 거의 전부 출동했고, 온갖 말을 하고, 탁자를 내려치고, 눈을 부릅뜨며 위협하고 겁을 주었다. 예를 들어,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갈 생각을 말라' '끝까지 완고하게 굴면 죽음 뿐이다.' 그리고 진술내용을 가르쳐주고 유인했다."


이렇게 7일밤낮을 연속하여 심문한 끝에, 맹용잠은 마음에도 없는 진술을 하게 된다. 그는 사훙 여러번 구두와 서면으로 호소했고, 진술을 번복했는데, 전후로 20번이나 되었다. 계속하여 이들 자료는 "모두 날조된 것이며 사실근거가 없다"고 "쓴 자료는 심문소조의 도움하에 집단적으로 창작한 것이다' 이들 호소는 모두 묻히거나 찢어발겨졌다. 몇번은 맹용잠에게 스스로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에게 사건을 뒤집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반혁명죄로 처결하겠다고 겁주었다.


그는 계속 진술을 부인하여 맹용잠은 197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는데, 풀려났을 때는 유소기가 이미 사망한 후였다.


맹용잠처럼 유소기사건에 연루되어 들어간 사람은 아주 많았다. 최고인민법원 1980년 9월전의 통계에 따르면, 유소기사건으로 잘못된 판결이 나온 것은 모두 22,053건이다. 그래서 형사처분을 잘못 받은 사람이 28000여명에이른다. 다른 비투, 조사, 격리, 우붕(牛棚)에 갇힌 경우등은 숫자에 들어가지 않았다.


연루된 사람들 중에서, 맹용잠이 마침내 감옥에서 나왔다. 그래도 그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앙감찰위원회 전직위원 왕세영, 하북북경사범학원 교수 장중일 등은 중병에 들어 있을 때 전안조의 조사를 받아가 죽었다. 그들중 장중일은 심지어 왕광미, 유소기와 잘 알지도 못했고, "말도 해본 적이 없었다."


1967년 10월, 전안조는 장중일을 구류할 때, 그는 간암이 악화되어 병세가 위급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전안조는 아예 '집중심문'을 하여 27일동안 21회나 심문한다. 장중일은 10월 24일 병위위급하여 11월 1일 사망하기까지의 7일간, 전안조는 더더욱 '핍박강요'했다. 현장에 녹음된 녹음테이프가 80여개에 이른다. "보존되어있는 20개의 녹음테이프에서 이런 잔혹한 집중심문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녹음에는 수시로 병자의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나오고, 정신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뱉는 소리와 심문인원들이 온갖 말을 하면 소리치는 소리가 나온다." 


최종적으로, 한 죽어가는 위급한 환자가 정신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한 말을 전안조에서는 "마침내 그는 왕광미 특무문제에 대한 몇 가지 상황을 조금씩 조금씩 얘기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한다.


장중일이 사망한 그 날, 전안조는 다시 그에 대하여 '회광반조'식의 심문을 진행한다. 남겨진 심문조서에 따르면 이렇게 몇 마디가 나온다. 묻는다: "너는 왜 털어놓지 않느냐> 너는 인민에 완강하게 저항하는가? 왕광미는 어떤 사람인가?" 답: "그녀는 공산당원이다."


황쟁이 보기에, 왕광미는 신념이 굳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유소기사건으로 왕광미는 12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다. 1979년 출옥후에 점점 명예와 대우를 회복한다. 12년의 철창생활도 왕광미의 정신을 붕괴시키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지 못했다. 황쟁은 말한다: "왕광미는 자신의 문제가 언젠가는 바로잡혀질 것으로 알았다. 그녀는 유소기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다만 12년의 철창생애는 왕광미에게 '후유증'을 남긴다. 그녀는 시종 방범문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업무때문에, 1983년부터 왕광미와 알고 교류하기 시작한 황쟁은 기실 조용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서 대국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일부러 꾸며서 하는 일이 없고 자연스럽게 하며 매우 진심으로 성의있게 한다."


1983년 11월, 왕광미는 호남으로 가서 유소기 탄신85주년기념활동에 참가한다. 황쟁은 그녀를 수행했다. 기념활동이 끝난 후,왕광미는 소산으로 가서 모택동 고거를 참배한다. "그녀는 모택동의 명망을 유지보호하는데 주의를 기울였고, 모주석의 후인들을 그녀는 특별히 보살폈다"


"사진은 현재 집에 걸려 있다." 황쟁의 말이다. 지금 왕광미는 이미 사망하였다. 다만 문혁때 유소기 왕광미의 작은 딸을 돌봐주었던 조씨아줌마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다. 왕광미가 출옥한 후, 조씨아줌마를 집으로 불렀고, 그녀와 조씨아줌마는 가족처럼 지내고 서로 자매로 칭한다. 


1969년 10월, 중국북부 변방의 국면이 긴장되고 전운이 감돌았다. 모택동은 국제형세가 돌연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중앙은 일부 중요한 조사대상을 각각 외지로 이송하기로 결정한다. 유소기도 그 중아 하나로 하남 개봉으로 보내어 진다.


10월 17일 저녁, 유소기는 들것에 누워서, 두 명의 전안인원의 압송하에 비행기에 태워진다. 너무 급히 떠나게 되어 관련인원들은 그에게 겨우 상의 하나만을 입혔고, 바지와 신발, 양말도 신지 못했고, 그저 이불로 덮었을 뿐이다.


개봉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소기의 신체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11월 12일 사망한다. 13일 밤에 유소기는 비밀리에 화장된다. 그후 여러 해동안 그의 몇몇 자녀는 부친의 사인을 여러 모로 알아본 후에 알게 되었다. 1969년 11월 13일 깊은 밤, 하남 개봉의 한 화장장은 통지를 받는다. 한 명의 '열성전염병환자"를 한밤중에 화장하려 한다고 했다. 화장자 명단에는 "성명: 유위황(劉衛黃), 직업: 무업, 사인: 병사, 가족서명난: 유원(劉原)"이라고 되어 있었다.


왕광미는 나중에 황쟁과 1980년 유소기의 유골을 받던 광경을 얘기했다. 유소기가 마지막에 사망한 방에서 왕광미는 한 눈에 유소기가 쓰던 베개를 알아본다. 그것은 50년대 유소기와 왕광미가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라텍스공장을 방문한다. 왕광미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 가볍고 부드러운 라텍스를 만져 보았고, 나중에 시하누크는 라텍스를 1차량 포장하여 선물로 북경에 보낸다. 이 것은 정부에 바치고 일부 선물로 보낸 외에 왕광미가 약간을 남겨서 2개의 베개를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지막까지 유소기와 함께한 것이 바로 그 베개였다. "광미노인은 당시 베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


여러해동안의 교류에서 황쟁은 마음으로 왕광미의 말을 기록하여 <왕광미방담록>을 정리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는 많은 이야기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모두 얘기했다."


예를 들어, 왕광미는 강청의 서역을 얘기하면서 "바람소리가 들리면 바로 비이다." 강청은 일찌기 상해에서 왕광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주석이 말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말한다. 옳게 말한 것은 주석이 한 것이고, 틀리게 말한 것은 나 강청이 한 것이다."


왕광미는 말했다. 유소기는 '문혁'이 발발할 때 사상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를 진정으로 깨어나게 한 것은 모택동이 쓴 그 <사령부를 포격하라 - 나의 한장의 대자보>였다.


"비록 소기동지는 사상적으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후에 반성문을 쓰면서, <사령부를 포격하라 - 나의 한장의 대자보>에 나오는 내용대로 쓰려고 노력했다. 모주석도 소기동지의 서면반성문에 이렇게 비시한다: '기본적으로 잘 썼고, 아주 엄숙하다. 특별히 후반단은 더욱 좋다.' 다만 중앙문혁이 소기동지의 반성문을 하달할 때, 고의로 주석의 비시를 빠트려서, 군중비판을 발동시킨다."


왕광미는 생각한다; "소기는 모주석에 대한 열애가 진정이었다. 비록 형세가 이렇게 험악해 졌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주석과 우의가 있다고 믿는다." 왕광미 자신은 당시 '더욱 주석이 빨리 우리를 위해서 한 마디 해주기를 바랐다."


왕광미는 또한 언급했다. 유소기는 여러번 사직하겠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모든 직무를 사임하고, 처자식과 연안 혹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며 하루빨리 '문화대혁명'을 끝내서 국가의 손실을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비판에 대하여 왕광미는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유소기가 그녀와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는 과거에 자주 너희에게 얘기했다. 한 사람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인민의 신임을 얻는 것이다. 오늘, 나는 그래도 한 마디를 더 하겠다. 한 사람에 있어서 인민이 오해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고통이다."


아마도, 왕광미를 각골명심하게 만든 것은 1967년 여름에 발생한 장면일 것이다: 백만명이 '중남해를 포외공격하며 유소기를 비판했다. 그 후에 머리가 하얗게 센 유소기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고, 자녀들에게 이후 생활이 얼마나 힘들든지간에 '반드시 살아야 하고, 군중들 가운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7월 18일 저녁, 부부 두 명은 조반파의 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광미는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서로 떨어지는구나."


"꽃가마를 기다리는 것같다." 이런 심각한 순간에, 지금까지 엄숙하던 유소기가 농담을 했다.


그날 이후, 부부는 각각 떨어져 갇힌다.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이는 유소기가 왕광미와 헤어질 때 남긴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