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노예(陳魯豫)
(아래의 글은 진노예가 유소기의 딸 유정정을 인터뷰한 후 <노예유약(魯豫有約). 명문(名門)>에 쓴 내용이다. 유정정은 왕광미의 셋째 자식으로 1951년 베이징에서 출생했으며, 1954년 그녀는 부모를 따라 중남해로 들어가 살았다.)
노예: 가족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정정: 부친, 모친, 외할머니, 우리 자식들 6명이 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집에 살았다. 아빠에게는 모두 9명의 자식이 있다.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중남해 대원내에 대자보를 붙였다. 제목은 <포타사령부(炮打司令部) - 나의 한 장의 대자보>이다. 유소기와 왕광미에게 악몽이 시작되었다. 먼저 중공8기11중전회에서 유소기는 국가의 서열2위에서 서열8위로 내려앉는다. 이어서 중남해의 '조반파'가 자주 유소기의 집으로 들어와 재산을 몰수하고, 비투하고, 모욕하고, 유소기부부를 둘러싸고 공격했다. 중남해는 더 이상 유정정의 조용한 화원이 아니었다.
1967년 1월 6일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유소기 집의 전화기가 돌연 울렸다. 왕광미가 전화를 받았는데,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평평(劉平平)의 집입니까? 당신은 유평평의 가족입니까? 유평평이 금방 자동차에 치어서 다쳤습니다. 대퇴골이 부러져서, 우리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왕광미는 즉시 병원으로 가려고 했다. 왕광미는 딸 유정정과 경위반장(警衛班長)에게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가도록 했다. 두 사람이 막 떠난 후, 그녀는 다시 아들 유원(劉源)을 병원에 가서 살펴보게 한다. 얼마 후, 전화가 울린다. 유정정이 걸어온 것이다. 말을 망설이는 것같았다. 유정정은 말했다. 언니가 '분쇄골절'을 당했다. 그러자, 왕광미와 유소기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문을 들어서자 바로 속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청화대학의 '조반파'에게 포위되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왕광미가 바로 앞으로 나가면서 소리친다: "내가 왕광미다. 왕광미가 아니면 모두 가라!" 유소기는 앞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러나 호위병사는 바로 왕광미의 뜻을 눈치채고 즉시 유소기를 데리고 현장을 떠난다.
원래 이는 청화대학 '조반파'가 정교하게 설계한 함정이었다. 유평평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여, 왕광미를 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유정정과 유원이 간 후에 그들에게 인질로 붙잡힌다. 그들은 유정정을 핍박하여 왕광미에게 전화를 걸게 한다. 그러나 홍위병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유소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경위는 신속히 상부에 보고하였고, 얻은 답변은 '유소기는 즉시 중남해로 돌아오라, 왕광미는 청화로 가도 된다."였다. 이렇게 하여 왕광미는 홍위병의 수중에 떨어진다. 밤새도록 청화대학에서 심문당하고, 비투당한다. 유소기는 중남해로 돌아오자마자 주은래에게 전화를 건다. 주은래는 즉시 청화대학 '정강산'홍위병에게 절대명령을 전달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 새벽5시이전에 반드시 왕광미를 중남해로 돌려보내라!"
노예: 그때 매일 나팔을 불면서 너희 가족을 공격했고, 도처에 모두 너의 부모에 관한 만화가 있지 않았느냐.
정정: 맞다. 우리같은 아이들은 그래도 좀 나았다. 왜냐하면 학교로 돌아가서 비투를 당했다. 내 여동생은 아주 안좋았다. 그녀는 겨우 6,7살이었고, 길거리에서 누군가 돌로 그녀를 때렸다.
노예: 당신은 두려웠는가? 절망했는가?
정정: 아니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깊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 이 일은 정말 사람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그때 경찰도 계엄상태였다. 상황만 있음ㄴ 우리는 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성문을 타고 넘고, 지붕도 넘었다. 우리가 만일 누군가의 집에 있을 때 그들에게 발견되었다면, 그 사람에게도 큰 재난이 닥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는 너무나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 당신의 모친이 청화대학으로 속아서 끌려가 비투를 당한 것은 당신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정정: 맞다. 그 일은 내 책임이다. 당시 나는 아직 어렸다. 그들은 나에게 집에 전화를 걸라고 핍박했다. 부모를 속이라고 했다. 언니가 비투를 받고나서 자동차에 부딛쳤다고. 모친은 전화 속에서 듣고난 후, 주총리가 우리가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부친은 네가 가지 않으면 내가 가겠다고 말한다. 딸이 나때문에 비투를 당하고 자동차에 부딛쳤으니. 그러자 모친도, 그럼 나도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막 문을 들어서자마자, 유원이 소리쳤다. 엄마, 아빠. 이들이 속인 겁니다. 그들은 모친을 청화대학으로 속여서 데려가 비투하려는 겁니다. 모친은 그 말을 듣자, 돌연 부친을 뒤로 밀어냈다. 부친은 멍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 모친이 말했다. "왕광미가 아니면 모두 가라!" 그후 힘껏 우리를 끌어당겼다. 결국 부친은 중남해로 돌려보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 후 집에서 기다렸다. 나와 평평이 울었다. 부친은 말했다. 너희 잘못이 아니다. 내가 잘못을 해서 너의 모친이 가서 비판을 당하는 것이다. 내가 방법을 찾아서 모친을 데려오겠다. 나중에 아마도 부친이 주은래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같다. 다음 날 모친이 돌아왔다.
그때 나는 매일 울면서 잠에서 깼다.
청화대학 홍위병의 말에 따르면, "강청동지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그들이 어찌 감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유소기와 부인 왕광미를 비판할 생각을 했을 것인가. 소위 '지금왕광미(智擒王光美)'라는 전단은 청화대학에서 사방팔방으로 보내어지고 '폭발적인 뉴스'가 된다!
3개월후, 강청의 지지하에, 청화대학은 30만인비투왕광미대회를 연다. 왕광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제로 치파오를 입고,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해야 했다.
1967년 4월 6일, '조반파'는 유소기의 집으로 쳐들어온다. 유소기에 대하여 제1차비투를 진행한다. 다음날, 유소기는 대자보에 답변하는 글을 붙인다. 그러나 몇시간 후 찢겨지고 만다. 이때 유소기 부부는 이미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7월 18일, '조반파'는 유소기와 왕광미를 중남해의 두 개 식당으로 데려가 비투한다. 동시에 재산을 몰수한다. 투쟁회가 끝난 후, 유소기는 전원(前院, 사무실)으로 데려가고, 왕광미는 후원으로 데려간다. 두사람은 격리되어 감시받는다.
8월 5일, <포타사령부 - 나의 한장의 대자보> 발표 1주년을 경축하기 위하여 천안문광장에서 백만인비투대회를 개최한다. 이와 동시에, 중남해 내부에서 그들 부부에 대하여 2시간에 걸친 욕설과 구타가 이어진다. 유정정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얻어맞으면서, 모친은 돌연 벗어나 부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았다. 마지막 결별이었다.
노예: 당신이 부친과 모친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정정: 부친이 중남해에서 비투를 당할 때, 주위에 많은 군중이 있었다. 모친이 돌연 사람들의 손을 벗어나서 앞으로 가가 부친의 손을 꽉 잡았다. 그후 그들은 얻어맞기 시작한다. 신발도 잃어버렸다. 모친과 부친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을 때리는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옆에 서서 보라고 강요했다. 당시 우리는 모두 현장에 있었다. 나는 모친에 탄복했다. 그녀는 중요한 때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 비투회이후 그들은 부모를 격리시켰다. 부친은 모친을 찾지 못했다. 허리도 펴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와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고, 그를 때렸다. 맞아서 부친은 창문을 잡고 걸어야 했다. 어떤 때는 부친이 나와서 식사를 했고, 우리는 세수하는 척하면서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하루는 돌연 트럭이 왔고, 우리에게 통지했다. 나와 유원과 유평평을 학교로 가게 했다. 우리는 1시간안에 학교로 보내어졌다. 당시 우리는 부친이 많이 보고 싶었고, 그와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지 못하게 막고, 모두 끌고 갔다. 첫주에 나는 학교에 갇혀 있었다. 둘째주에 오빠와 언니가 몰래 나를 보러 왔다. 우리는 함께 중남해의 문앞까지 갔으나 부모를 보고 싶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어린 동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른 방법도 생각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책이나 사전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쓰는 것처럼. 모두 부친, 모친이 보내주는 물건안에 우리에게 뭔가라도 써주길 바라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오빠를 산서안북삽대(山西雁北揷隊)로 보낸다. 그는 당시 16살이었다. 언니가 끌려갈 때는 우리가 마침 식사를 준비하고, 그녀는 옷을 빨고 있을 때였다. 돌연 몇 명이 오더니, 누가 유평평인지 물었다. 언니가 나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그녀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당시에 너무 돌연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체포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언니는 머리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나 대신 옷을 빨아놓으라고. 나중에 우리는 매일 그녀가 돌아와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기를 기다렸고, 그녀의 밥그릇, 젓가락을 놓아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예: 당신은 그때 많이 울었나요?
정정: 일부러 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매일 아침에 울면서 깼다. 아마도 그때 너무 많이 울었던 것같다. 지금은 눈물이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는다. 나는 생활의 목적은 기실 아주 간단하다고 말한다. 생활의 목적은 바로 surviving(생존)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처자식이 모두 집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알고 부친은 붕괴되었다.
'문혁'이 시작된 후, 왕광미는 유소기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왜 우리를 모두 그렇게 추악하게 묘사하는가? 이는 완전히 범죄자가 아닌가." 1967년 9월 13일 오전, 왕광미와 3명의 자녀는 중남해에서 쫓겨난다. 오후에 가장 어린 딸 유소소(劉瀟瀟)는 6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보모인 조숙군(趙淑君)과 함께 쫓겨났다. 그날 저녁, 왕광미가 정식 체포되어 북경 진성감옥에 갇힌다. '미국특무'가 죄명이었다.
처음에 유소기는 돌연 발생한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는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창틀을 붙잡고 걸었다. 부상입은 다리를 끌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왕광미가 갇혀 있는 후원의 담장으로 가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으려 했다. 하루는 밤에 '조반파'가 돌연 유소기가 거처하는 집에 밤을 새워 높은 담장을 쌓았다. 유소기가 다시는 방문에서 반걸음도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처와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나야했다는 말을 들은 후, 이제는 혼자서 혈혈단신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고나자, 유소기의 정신은 거의 붕괴된다. 그는 당뇨병이 있었는데, '조반파'는 고의로 그에게 약을 주지 않았다. 강제로 그에게 생활습관을 바꾸게 했다. 매일 겨우 2,3시간만 잠을 자게 했고, 어떤 때는 밤을 꼬박 새우게 했다.
유소기의 팔은 전쟁시대에 부상을 입었었다. 구타를 당하면서 옛 상처가 다시 발작했다. 옷 한 벌을 입는데 왕왕 1,2시간씩 걸렸다.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려면 짧은 30미터 거리를 50분이 걸려 걸었다. 심지어 2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다. 앞뒤를 따르는 간호사나 호위병은 누구도 감히 나서서 부축해주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아예 걸을 수가 없었다. 그저 업무인원이 음식을 가져다가 그에게 먹였다. 나이 칠순에 그는 겨우 이빨이 7개 남아 있었다. 거친 밥같은 것은 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랫동인 위장병을 앓았고, 거기다 남는 형편없는 음식을 주니, 자주 배탈이 났었다. 손이 떨려서 손을 쓸 수 없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얼굴과 몸에 온통 음식이 묻었다. 병이 너무 심해졌다. 의사, 간호사도 잘 보살피지는 않았다. 매번 진찰을 할 때마다 먼저 비투회를 개최하여, 의사는 한편으로 병세를 검진하면서 한편으로 욕을 해댔다: "중국의 후르시쵸프!" 어떤 경우는 청진기로 때렸고, 어떤 때는 주사기로 마구 찔러댔다. 치료가 아니라 형벌같았다.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않으니, 두 다리의 근육이 점점 위축되고, 팔과 다리는 자주 주사를 맞아서 모두 헐어버린다. 간호사의 기록에 이렇게 쓰여 있다: 전신에 괜찮은 혈관이 하나도 없다.
유소기의 장남 유윤빈(劉允斌)은 내몽골에서 기차길에 몸을 누워 자살한다. 장녀 유애금(劉愛琴)은 '우붕(牛棚)'에 갇혀 심하게 두드려 맞았다. 차남 유윤약(劉允若)은 감옥에서 척추결핵을 앓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된다. 18살의 딸 유평평은 감옥에 갇힌다. 나중에 산동 연해의 한 양마장(養馬場)으로 끌려가 노동개조당한다. 17세의 아들 유원은 감옥에서 나온 후, 상산하향(上山下鄕)을 신청한다. 6살의 막내딸 유소소는 보모 조숙군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른다. 유정정은 중학을 졸업한 후, 먼저 순의비날론공장으로 보내어지고, 다시 북경의기의표창으로 가서 보통 노동자로 살아간다.
정정: 당초 오빠가 떠난 후, 무슨 사대여부중, 상산하향, 운남, 내몽골등 모두 신청했었다. 나중에 어떤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놀렸다. 너는 많이 진보했구나.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모르는 거다. 내가 진보한게 아니라, 나는 그저 그 상황하에서 농민이 되는 것이 비교적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비록 생활이 힘들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을테니까. 나는 공장으로 가는 것을 아주 겁냈다. 그러면 나는 완전히 비투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나를 공장으로 보냈다. 내 여동생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여동생때문에 그들은 나를 북경교외의 공장으로 보냈다. 공장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때의 따스함과 도움은 무조건적이었다.
1971년 가을이 되어, 임표사건이 발발하자, '문혁'에서 처음 타도된 팽진(彭眞)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허락받는다. 이는 공장에서 일하던 유정정에게 하나의 서광이었다. 그녀는 모택동에게 서신을 쓴다. 4년동안 보지 못한 부모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서신은 송경령(宋慶齡)을 통해서 전달했다. 모택동이 비시(批示)한 첫마디는 '부친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친을 만나는 것은 허락했다. 1972년 8월 18일, 유소기의 아이들은 진성감옥에서 4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모친을 만날 수 있었다.
정정: 그들은 우리에게 모친을 만나러 가도록 통지했다. 우리 형제자매중 단지 나와 소소만이 북경에 있었다. 언니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려 했지만, 붙잡혀서 기차에서 끌려내려졌다. 그녀는 항거했지만, 맞아서 기절했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유원은 알고난 후 황두를 쥐고 반대방향으로 갔다. 남쪽으로 일박이일을 걸었다. 왜냐하면 북으로 가면 누군가 그를 붙잡을까 겁났기 때문이다. 결국 기차를 타고 돌아온다.
노예: 감옥에서 모친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이었나요
정정: 당시 모친은 내 기억속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우리가 그녀와 헤어질 때는 그녀가 키도 크고, 시원시원하고, 온문이아(溫文爾雅)하다고 여겼다. 우리가 모친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검은 겉옷을 입고 있고, 허리는 구부러졌고, 머리카락은 하얬다. 반응도 약간 느렸다. 오랫동안 그녀 혼자 있어서 그랬던 것같다. 우리는 울지 않고 참으려 했지만,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결국 참지 못했다.
노예: 그때 모친은 부친이 사망한 것을 알고 있었나요?
정정: 그녀는 우리가 감옥으로 가서 그녀를 만나기 전날 저녁에 알았다. 우리와 기본적으로 같이 안 것이다.
노예: 그녀는 너희에게 그 일을 언급했는가?
정정: 아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노예: 나중에 당신은 그녀에게 물어보았는가? 그녀 혼자서 감옥에서 12년간이나 같혀 있었는데, 어떤 힘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는지.
정정: 모친은 감옥에서, 여건이 좋았을 때 겨우 6평방미터였다. 그녀는 안에서 권법을 단련했다. 허리가 굽었으니 마치 후권(猴拳)같았다. 아예 팔을 펼치지 못했다. 그녀는 벽에게 말을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재판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누군가 심문한다면, 최소한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말하는 능력조차 없게 된다. 모친은 나중에 나에게 말했다. 그녀근 부친과 헤어지기 전에, 수면제를 모아 놓았다. 그리고 부친에게 수면제를 먹을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목숨을 끊겠다는 뜻이다). 부친은 말했다. 너는 그들이 너에게 결론을 내리게 하지 말라. 안된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는 자살을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그렇게 어려웠지만 자살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녀는 말했다. 네 부친의 말이 옳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결론을 내리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내가 마치 나쁜 사람인 것처럼. 그녀는 이런 신념으로 살아남았다.
1969년 10월 17일, 유소기는 개봉으로 옮겨간다. 가기 전에 간호사가 면봉에 자색약물을 묻혀 신문에 큰 글자로 이렇게 썼다: "중앙에서 당신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유소기는 고개를 돌리고 보지 않았다. 간호사는 다시 신문을 다른 쪽으로 가져가서 그에게 보도록 했다. 그는 다시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의 수간호사가 앞으로 가서 그의 귀에 그 글을 읽어주었다. 유소기는 눈을 감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 유소기는 맨몸에 이불로 둘러싸여 들것에 실려 전용기로 개봉의 한 특별감옥에 보내어진다. 추위로 폐렴이 발작하고, 고열과 구토가 있었다. 11월 12일 새벽 6시에 그는 사망한다. 죽었을 때 그의 전신에서는 악취가 났고, 입과 코는 변형되어 있었으며, 백발은 1척가량 자랐다.
모친과 만난 그날, 유정저은 부친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유소기가 사망한 날로부터 꼬박 3년이 흐른 후이다. 그후,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유정정은 공부에 매진한다. 1978년, 그녀는 순조롭게 대학입시에 합격하여 중국인민대학에 입학한다. 같은 해 겨울, 중공11기 3중전회가 개최되고, 문화대혁명은 철저히 부정된다. 유소기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형세하에서, 왕광미는 12년간 갇혀 있던 진성감옥을 벗어나 인간세상으로 되돌아 온다.
1980년 2월 유소기는 명예회복된다. 유소기의 자녀들은 부친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의 행복했던 가정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4명의 골육이 전후로 참사하고, 6명의 가족이 감옥생활을 했다. 우리 일가의 처지 위에는 억만인민의 고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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