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서(羅嶼)
2012년초,중공문헌연구회 유소기분회의 부회장 겸 중공중앙문헌연구실 2부 전 부주임인 황쟁(黃崢)이 쓴 두 권의 저작 <유소기원안시말(劉少奇寃案始末)>과 <유소기의 최후세월> 재판은 널리 주목을 받았다.
왜 이제까지도 유소기사건이 여전히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것일까?
황쟁이 보기에, '문화대혁명'때의 유소기사건은 이 동란과정에서 관련범위가 가장 넓고, 피해자의 직위가 가장 높고, 결과가 가장 심각한 사건이었으며, 또한 중국공산당역사상 최대의 원안(寃案)이다. 이 사건은 당시에 군내외에서 강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뿐아니라, 40여년후인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이 사건을 논의하면서 여전히 믿기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황쟁을 말하자면, 유소기를 연구한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1979년 안휘성위 성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중공중앙당교 이론반에 학습하러 파견된다. 1980년 중공중앙은 유소기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중공문헌연구실에 유소기연구조를 둔다. 황쟁은 당시 연구조의 책임자이며, 유소기의 원래 비서잉 요력문(姚力文)의 추천을 받고, 그후 황쟁은 북경으로 이동되어 유소기연구조의 연구위원이 된다.
황쟁이 보기에, 유소기의 명예가 회복된지 이미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유소기의 일생에 대한 선전과 연구는 부족하다. 3가지 면에서 상응하지 않는다. 첫째는 그가 혁명과 건설과정에서 한 공헌과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 그가 당과 국가에서 차지한 숭고한 지위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셋째, 그아 문혁때 받은 불공정한 대우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유소기사건은 문화대혁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황쟁이 보기에,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유소기사건도 없었을 것이고, 유소기사건이 없었더라면, 문화대혁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40여년전으로 되돌려 보자.
1968년 10월에 개최된 중공8기12중전회에서 유소기는 "반도(叛徒), 내간(內奸), 공적(工賊)"으로 규정되어 "영원히 당에서 제명되고", "당내외의 일체의 직위를 박탈당한다" 그때의 유소기는 이 회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소기에대한 사건입건, 조사, 사건처리의 전체 과정에서, 아무도 그에게 관련사건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더더구나 아무도 그로부터 어떤 변명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모욕, 비투(批鬪)와 몰수를 당한 후, 유소기의 처인 왕광미(王光美)는 1967년 9월 13일 정식 체포된다. 자녀들도 집에서 쫓겨난다. 그 후, 중남해 복록거(福祿居)에 있던 유소기의 곁에는 친척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단지 엄밀한 감시망이 그를 따라다녔다.
유소기는 의식했다. 그가 아무리 다투어보아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때부터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소리없는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이전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소기는 몇번 구두로 논쟁하고, 서면으로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메아리도 없었다.
여러 해 이후, 황쟁은 두 장의 1968년 10월에 찍힌 유소기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는 병상에 누워 있고, 손에는 이미 형태가 변한 플라스틱병을 두 개 꽉 쥐고 있었다." 유소기의 자녀인 유평평(劉平平)등이 나중에 얘기한 바에 따르면, 두 개의 변형된 병은 바로 부친이 중병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했다. "병으로 질식한듯한 고통을 느껴, 그는 자주 주먹을 꽉 쥐거나, 열손가락을 뻗어 아무거나 긁고 찢었다. 일단 물건을 붙잡으면 죽어라 놓지를 않았다. 업무인원과 의료인원들은 그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차마 그냥 있지 못하여 두 개의 플라스틱 병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부친이 죽을 때 두 개의 플라스틱병은 이미 완전히 변형되어 두 개의 호로(葫蘆)가 되어 있었다."
유소기에 대하여 여러 해동안 연구해 왔으므로, 황쟁은 각종 사료를 연구하고 읽었을 뿐아니라, 동시에 당시 사건을 친히 겪은 사람들과 인터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왕광미와 유소기의 몇몇 자녀등과 20여년의 교류를 가진다. 동시에 황쟁은 다른 유소기 곁의 사람들이 얘기하는 세세한 얘기를 모아서 가급적 역사를 원래의 모양대로 복원하려고 애썼다.
당시 유소기의 곁에 있던 호위병인 가란훈(賈蘭勛)의 회고에 따르면, 1968년 3월이후, 유소기는 식사하거나 걷는 것도 이미 아주 힘들게 된다. "그의 한쪽 다리는 길을 걸을 때 그저 끌려갔고, 억지로 앞으로 이동했다. 손은 벽을 붙잡고, 식사를 할 때 손과 입이 제대로 협응되지 않아서, 어떤 때는 입은 벌렸지만 음식을 입으로 넣지 못했다. 음식이 입가에 다가올 때 입을 닫아버린다. 손으로 젓가락을 집을 때는 마구 떨었다."
1968년 4월 12일에 쓰여진 <유소기상황반영>에서 황쟁은 이런 글을 보게 된다. "의사가 검사한 바에 따르면, 유소기의 정신은 맑지 못하고,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표정이 굳어 있으며,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완전한 문장을 말하지도 못한다. 두 다리로 이동하는데 힘이 들고,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 옷을 입거나 틀니를 끼울 때 여러번 아래위를 잘못끼우거나 입는 상황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해도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 의사의 판단으로, 유소기는 위장하는 것같지 않다."
그러나 확실히 의사의 판단이,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정확하다고 보이지 않았다. 5월 19일의 <상황반영>에서 유소기의 언행을 "거짓으로 멍청한 척 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빗과 비누로 양치질하고, 양말을 신발 바깥에 신고, 짧은 바지를 긴 바지 밖에 입으며, 어떤 때는 두 다리를 하나의 바지통속에 넣는데, 이는 미친 척하고 바보같은 척하는 것이며, 온갖 추태를 다 보이는 것이다. 의외의 사고를 막기 위하여 감시업무에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
그러나, 소위 "감시강화"는 유소기가 난동을 부리거나 자살하는 것을 막는데 더욱 치중되었다. 그후의 기재를 보면, 전자이건 후자이건 거의 모두 유소기의 능력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단지 감시만 했지, 치료는 해주지 않아서, 1968년 7월 9일 병세가 악화된다. 기관지염이 급성발작하여 기관지폐염으로 되고, 생명이 위독해진다. 언제든지 사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이 때, 비로소 병원에서 데려온 전문가가 진찰하고 응급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응급조치의 목적은 "살아있는 증거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자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7월 9일과 8월 6일, 관련 책임자는 두 번이나 의무인원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서 잘 치료하고, 잘 돌봐라. 그를 9차전당대회까지 살려두어야 한다. 살려서 살아있는 표적으로 비판을 받게 해야 한다"
바로 "9차전당대회까지 살려두어서 살아있는 표적이 되게 해야 한다"는 원칙때문에 당시 유소기에 대한 치료는 단지 폐염에 대하여만 이루어지고, 신경성으로 정신이 맑지 못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등에 대하여는 아무런 효과적인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다. 이후의 <병세보고>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0월 5일, 유고시는 두 번 통곡한다. 10월 9일 이후에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 10월 11일부터, 유소기에 대하여 코에 삽관하여 음식을 투입한다.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구금, 위급, 반복응급조치를 받는 유소기는 자연히 1968년 10월이후 그에게 3가지 큰 죄 즉, "반도(叛徒), 내간(內奸), 공적(工賊)"이 뒤집어씌워진 줄은 알 방법이 없었다. 더더구나 이 세가지 죄가 어떻게 씌워졌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우리는 여러 해 이후 세 가지 죄가 신원되는 과정을 역으로 추리하여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황쟁이 한 말에 따르면, "1978년 11기 3중전회이후, 계속하여 군중들이 의견을 제시하고, 당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소기의 명예회복을 청원하여, 최종적으로 중앙기율검사위와 중앙조직부가 공동으로 구성한 조사팀이 유소기사건에 대하여 재조사를 진행했다. 유소기의 420권의 자료에 왕광미등의 사건기록을 더하면 570권의 자료가 된다. 조사팀은 자료를 본 후 제공된 '증거'를 다시 조사했다." 황쟁은 기억한다. 자신은 일찌기 당시에 재조사에 참여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았는데, 그렇게 큰 죄가 신원되는데, 혹시 방해압력은 없었는지 물어보니, 그들은 없었다고 말한다. 재조사는 겨우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한상자 한상자의 자료들이 금방 부정되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고, 고문의 산물이기때문이다.
이들 위증이 나오게 된 것은 모두 유소기에 대한 일련의 "전안조사(專案調査)"에 기인한다.
유소기에 대한 전안조사를 진행하기 전인 1966년 겨울, "왕광미전안조"라는 기구가 성립된다. 사후에 보면, 성립근거는 그저 1장의 손으로 쓴 글자흔적도 희미한 '명단'이다. "그것은 제목도 없고, 일자도 없으며, 더더구나 무슨 회의에서이고, 누가 연구결정한 것인지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황쟁은 말한다. 이 손으로 쓴 "명단"에 강청(江靑)의 이름이 원을 그려 빼고, 왕동흥(汪東興)으로 바꿔놓았다. 당사자들의 회고에 다르면, 강청 자신이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실 전체 전안조는 계속하여 강청, 강생(康生)의 조종하에 있었다. 앞에 나서서 직접 책임지는 사람은 주로 사부치(謝富治)였다.
1967년 3월, "문혁"이 악성팽창하면서, 유소기문제가 업그레이드된다. 그에 대한 조사가 개시된다. "처음에는 그저 누군가가 유소기가 1927년에 반당혐의가 있다고 말했고, 그리하여 한번은 모택동, 임표 및 일부 중앙정치국상위등이 참여한 토론회에서 '왕광미전안조'가 이 일을 조사연구하게 할 것을 제출했으나, 아직 유소기전안조를 만들어야 한다고하지는 않았다. 단, 강생, 강청등은 나중에 실제 업무처리에서 상당히 방대한 '유소기전안조'를 만든다." 황쟁에 따르면, 이것이 아마도 강청, 강생등의 자신감이 없었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비록 유소기에 대한 조사가 1967년 3월부터 시작되었고, 5월에 가속화하였지만, 1968년4월 중순이전에 유소기사건에 관한 보든 보고, 회신과 대외연락업무는 여전히 '왕광미전안조'의 명의로 이루어졌다. 1968년 4월하순에야 '유소기,왕광미전안조'라는 명의를 사용한다.
전안조의 업무처리방식은 일찌기 전안조 책임자중 하나이자, 나중에 강청에 의하여 '우경'으로 비판받아 진성감옥에 5년간 갇혀 있던 초맹(肖孟)이 1979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강청, 강생)은 계속 전안조에 압력을 가했다. 조사하고 자료를 보는 중에 사실대로 어떤 상황을 기록하면, 객관주의 전안자료확산등의 죄명으로 전안인원의 업무를 정지시키고, 자료를 봉인했다. 어떤 사람은 전안조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갇히기도 했다. 전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사상부담이 아주 컸고, 정신적 압력도 컸다. 내가 진성감옥에 들어간 후, 심지어 이런 생각도 나온다. 차라리 감옥에 갈지언정, 그들의 지시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스스로 자위하곤 했다."
초맹이 말한 소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란 바로 고문하고 위증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1925년, 1927년 1929년에 유소기가 일찌기 혁명을 배반하고, 내간, 공적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강청, 강생이 보기에, 만일 유소기를철저히 타도하려면 역사에서 문제를 찾아야만 하고, 그를 반도라고 하여야 영원히 명예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황쟁이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증거를 만들도록 핍박했다."
예를 들어, 유소기가 1020년 만주에서 공작할 때 배반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안조는 유소기가 만주에 있을 때의 부하인 맹용잠(孟用潛)을 '격리심사'후 '중점돌파'할 대상으로 정한다. 초맹은 당시에 맹용잠의 심문에 참여한다. 그가 사후에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매번 심문때, 전안조는 거의 전부 출동했다. 온갖 말을 하고, 탁자를 두드리고 눈을 부라리고 위협하고 협박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갈 생각은 말아라' '끝까지 저항하면 죽는 길 뿐이다.' 그리고 진술을 지시하고, 진술을 유도했다" 이렇게 하여, 연속7일간의 주야에 걸친 심문을 통해, 맹용잠은 마음에도 없는 진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에 여러번 구두와 서면으로 신소하고, 거짓진술을 뒤집는다. 그것이 전후로 20번에 달한다. 계쏙하여 이들 진술자료는 '모두 날조된 것이며, 사실적인 근거가 없다', '진술자료는 심문소조의 도움하에 집단창작한 것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신소는 모두 무시되거나 폐기되었다. 여러번 맹용잠 본인에게 스스로 찢어없애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에게 사건을 뒤집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반혁명으로 처리하겠다고도 하였다.
계속하여 진술을 번복하다가 맹용잠은 1972년까지 갇혀 있는다. 그가 풀려났을 때는 유소기가 이미 죽은 뒤였다.
맹용잠처럼 유소기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아주 많다. 최고인민법원 1980년 9월전의 통계에 따르면, 유소기사건으로 오판을 받은 사건이 22,053건에 달한다. 이로 인하여 형사처벌을 잘못 받은 사람이 28000여명에 달한다. 나머지 비투, 심사, 격리, 관우붕(關牛棚)당한 사람은 더더구나 통계를 낼 수조차 없다.
연루된 사람 중에서 맹용잠처럼 결국 풀려나온 사람은 최소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앙감찰위원회 전직위원회 왕세영, 하북북경사범학원 교수 장중일등은 중병이 걸린 상태로 전안조의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 장중일은 심지어 왕광미, 유소기와는 몰랐고, '말 한 마디 섞어본 적이 없었다.'
1967년 10월, 전안조가 장중일을 구류할 때, 간암이 악화되어 병세가 위중했다. "언제든지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전안조는 아예 '돌격심문'을 하여, 27일동안 21번 심문한다. 장중일은 10월 24일 병세가 위급해지고 11월 1일 사망할 때까지 전안조는 더더욱 '압박조사'를 했다. 현장에서 녹음된 녹음테이프는 80개에 달한다. '보존되어 있는 20개의 테이프에서 이런 잔혹한 '돌격심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들을 수 있다. 녹음에서는 수시로 환자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나오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와 심문인원들이 온갖 말로 구슬리는 것과 소리지르는 것이 나온다." 황쟁의 말이다.
결국 위중한 환자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여러가지 말들이 전안조에 의해 '마핌내 그로 하여금 조금씩 왕광미 특무문제에 관한 몇 개의 상황을 진술하게 하였다'고 포자오딘다.
장중일이 서거하는 날, 전안조는 그에 대하여 '회광반조'식의 심문을 진행한다. 남아있는 심문기록에는 이러한 몇 마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문: "너는 왜 진술하지 않느냐? 너는 인민에 끝까지 항거할 것이냐? 왕광미는 어떤 사람이냐?" 답: "왕광미는 공산당원이다."
황쟁이 보기에 왕광미는 의지가 굳건하고 신념이 완강한 사람이다.
업무때문에 1983년부터 왕광미와 알고지내고 교류를 했던 황쟁은 기실 묵묵히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의 성격은 활달하고 명랑하다. 모든 일에서 대국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일부러 꾸며서 하질 안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아주 진심과 성의가 있다."
유소기의 유해는 하남에 있다. 왕광미는 남편이 죽은 몇년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1969년 10월, 중국북부의 변경정세가 심각해졌고, 전운이 감돌았다. 모택동은 국제형세가 돌연 악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중공중앙은 일부 중요한 조사대상을 각각 외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 유소기는 그중 첫번째로 하남개봉에 보내어진다.
10월 17일 저녁, 유소기는 들것에 실려 두 명의 전안인원의 압송하에 비행기에 태워진다. 급히 떠나는 바람에 관련인원이 그에게는 상의 하나만을 입혀 주었다. 바지와 신발 그리고 양말도 신지 못했다. 그저 이불로 둘러감았을 뿐이다.
개봉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소기의 신체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11월 12일에는 세상을 떠난다. 13일 유소기는 비밀리에 화장된다. 그후 몇년간 그의 몇몇 자녀는 여러 방면으로 부친의 사인을 알아본 후에야 알아낼 수 있었다. 1969년 11월 13일 심야, 하남 개봉의 한 화장장에서는 통지를 받는다. '열성전염병자'라는 사람을 한밤붕에 화장해야 한다고. 화장신청서에는 이름 유위황(劉衛黃), 직업 무직, 사인 병사, 가족서명난: 유원(劉原)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광미는 나중에 황쟁과 1980년 유소기의 유해를 받으러 갔던 광경을 얘기했다. 유소기가 마지막에 서거한 방에서 왕광미는 한눈에 유소기가 썼던 베개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1950년대 유소기와 왕광미가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라텍스를 생산하는 공장에 갔다가 왕광미가 호기심에 이 아주 가벼운 거품을 만져보았더니 나중에 시하누크가 차에 라텍스를 실어서 선물로 북경에 보내주었다. 이것을 국가에 바치고 선물로 쓴 외에 왕광미는 약간을 남겨서 베개 2개로 만든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지막까지 유소기와 함께한 것이 바로 그 베개였다. "광미 노인은 당시에 베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여러해동안의 교륭서 황쟁은 왕광미와의 담화를 기록하고, <왕광미방담록>을 정리한다. "많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모두 대담과정에서 얘기했다."
예를 들어, 왕광미는 강청의 성격을 얘기하면서, "청풍취시우(聽風就是雨, 자기 생각이 전혀 없다)"라고 했다. 강청도 일찌기 상해에서 왕광미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석이 말하기 어려운 말을 내가 한다. 말이 맞으면 주석의 것이고, 말이 틀리면 내가 잘못한 것이다."
왕광미는 말했다. 유소기는 '문혁'의 발발에 대하여 아무런 사상적 준비가 없었다고. 그가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것은 모택동이 쓴 그 <사령부를 포격하라 - 나의 한장의 대자보>였다고 한다.
"비록 소기동지는 사상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 후에 반성하고, <사령부를 포격하라 - 나의 한장의 대자보>의 주장대로 쓰려고 노력했다. 모주석도 유소기의 반성문에 이렇게 썼다: "기본적으로 잘 썼다. 아주 엄숙하다. 특별히 후반부는 더욱 좋다." 그러나 중앙문혁에서 유소기동지에게 반성하라고 하달할 때 고의로 주석의 지시를 삭제했고, 군중비판을 발동했다."
각양각색의 비판에 대하여, 왕광미는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유소기가 그녀와 자식들에게 말한다: "나는 과거에 항상 너희들에게 말했고, 혼자에게도 말했다. 최대이 행복은 인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오늘 나는 한가지를 추가하겠다. 바로 한 사람에 있어서 인민의 오해를 받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왕광미가 각골명심하는 것은 역시 1967년 여름에 발생한 장면일 것이다: 백만인의 "중남해포위공격, 유소기비판투쟁"이 있은 후, 백발이 성성한 유소기가 자신이 미래에 대하여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자녀들에게 이후 생활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반드시 살아가야 한다. 군중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7월 18일 저녁, 부부 두 사람은 집에서 조반파의 비판투쟁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광미가 예감했다고 한다. "이제 정말로 당신과 헤어져야겠구나"라고.
"오히려 꽃가마를 타는 것같다" 이렇게 심각한 순간에 지금까지 엄숙했던 유소기가 오히려 농담을 던졌다.
그 날 이후, 부부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서 갇힌다.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이것은 유소기가 왕광미와 헤어질 때 남긴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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