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소기)

유소기(劉少奇) 아들의 자살에 얽힌 수수께끼.

중은우시 2013. 8. 5. 02:09

글: 풍택군(馮澤君)

 

유윤빈은 1939년 14살의 나이로 연안에서 출발하여 소련으로 간다. 18년후 32살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소련에 있을 때, 자신이 익힌 지식 즉, 조국이 필요로 하는 핵과학지식을 신중국의 원자력사업에 바치기로 뜻을 세운다.

 

유소기는 그가 배운 전공을 고려하여 친필서신을 쓴다. 그는 가장 인재가 필요한 이기부(二機部)로 보내어진다. 이기부의 전체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제2기계공업부"로 미국의 "원자력위원회"에 상당했다. 전국의 모든 핵사업단위 및 인사조정은 이기부에서 통일관리했다.

 

유윤빈은 핵화학연구실의 실장이었고, 핵화학전문가였다. 책임이 컸다. 그는 자주 사람들을 모아서 차례로 강의를 하며, 핵방사화학, 핵복사방호등을 얘기해주었다. 중국이 핵과학기술이 짧은 시간내에 신속히 발전할 수 있었고, 짭은 기간내에 성공적으로 원자폭탄, 수소폭탄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이노대신(以老帶新)의 교육방법과도 관련이 크다.

 

유윤빈의 첫번째 혼인은 국제결혼이다. 그들 부부의 애정은 괜찮았고, 한 쌍의 귀여운 자녀도 길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요소의 영향으로 그들은 자신의 조국에 각각 떨어져 살아야 했다.

 

유윤빈의 처 마라는 그가 모스크바대학에 있을 때의 동창이다. 역시 공부를 열심히하고 진취적인 여성이다. 그녀의 부친은 홍군의 노전사이며, 모친은 교사였다. 그녀는 집안의 독생녀이고,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1955년 유윤빈이 졸업하며 부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모스크바대학 화학연구소에서 일하며 고급연구원이 된다. 마라도 모스크바대학의 후보박사학위를 받고, 한 연구실의 주임이 된다. 두 사람의 수입은 괜찮았고, 생활도 아주 부유한 편이었다.

 

이 때, 유윤빈은 부친의 서신을 받는다. 조국에서 유학생들이 돌아와서 일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유윤빈은 계속하여 조국으로 돌아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처와 아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 원만했고 행복했다. 유윤빈은 시험하듯이 마라에게 물어본다. 중국에 가서 살 생각이 있는지? 그러나 마라는 똑부러지게 거절한다. 마라는 모든 방법, 친척, 동료, 친구을 동원하여 유윤빈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가 가정을 중시하여 소련에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유윤빈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1957년 10월 유윤빈이 조국으로 돌아온다. 유윤빈과 마라는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는 마라를 중국으로 데려오려고 애썼다. 그러나 중소관계가 계속 악화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배경하에서, 유윤빈과 마라의 관계도 계속되기 힘들었다. 유윤빈은 마라 모자에게 모스크바에서 집을 사주었고, 그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후 마라와 그녀의 자녀는 그 집에서 거주한다. 유윤빈은 수시로 자신의 급여를 루블로 환전하여 마라에게 보내어 주었다.

 

1958년, 마라가 마지막으로 자녀를 데리고 중국으로 왔다가, 소련으로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이 혼인은 끝이 난다. 1960년, 유소기는 중국당정대표를 이끌고 소련을 방문한다. 유소기는 마라의 부모, 마라와 그들의 두 아들을 모두 중국대표단이 머무는 레닌산 소련공산당중앙별장에서 만난다. 그는 여전히 마라의 부모를 자신의 사돈으로 여기고,마라를 자신의 며느리로 여겼다. 손자손녀를 품에 안아보았다. 그는 마라에게 말한다: "생활에 무슨 어려운 점이 있으면 중국주소련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해라." 그는 이 혼인이 실패한 것을 알았고, 그 책임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마라와 헤어진 후, 유윤빈은 일에 전심전력을 쏟는다. 어떤 때는 밤에도 남구의 숙사로 돌아오지 않았고, 실험실에서 야근을 했다. 피곤하면 옷을 입은채로 쓰러져 잤고, 깨면 다시 일을 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연구소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개인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에서도 조급해 한다. 당시 그는 35살이었다. 어찌 계속 혼자서 살겠는가. 나중에 한 아가씨기 그의 원래 무미건조한 마음에 들어온다. 그녀는 연구소의 연구원이었고, 이묘수이다. 그녀도 소련에서 돌아온 유학생이었다. 상해사람이었으며, 그녀에게는 남방사람의 온유, 문정(文靜), 세심함이 있었다. 그녀는 유윤빈의 고충을 잘 헤아려주었다. 자신의 일을 하는 외에 집안 일을 모조리 처래했고, 유윤빈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유윤빈은 핵연료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원자탄을 만들려면 가장 먼저 제대로된 핵연료가 있어야 한다. 핵연료를 만드는 것은 우라늄광에서이다. 그러나 천연우라늄에서는 겨우 함량이 0.7%인 우라늄235만 이용할 수 있고, 99%인 우라늄238은 직접 이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라늄238에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중성자와 부딛치면 플로토늄239로 바뀌는 것이고, 플로토늄239는 우라늄235보다 더욱 좋았고, 더욱 고급인 핵연료였다. 만일 플로토늄239로 원자폭탄을 만든다면, 동일한 위력하에서, 우라늄235보다 더욱 적고, 더욱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플로토늄239를 분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여하한 구가도 이를 최고기밀로 취급했다. 유윤빈이 담당한 업무는 바로 방법을 강구하여 플로토늄239를 반응로에서 태운 폐연료에서 분리해내는 것이었다.

 

이 업무는 원자폭탄의 연구개발의 성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연구실은 유윤빈의 지휘하여, 수천번의 시험분석을 거쳐 마침내 실험실에서 플로토늄239를 추출해내는데 성공한다.

 

1962년 8월, 핵심인 플로토늄분리공장이 아직 설계되지 않았는데, 소련은 모든 전문가를 철수시키고, 모든 자료를 가져가 버린다. 주은래 총리는 지시를 통하여 "스스로 한다.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중앙에서는 내몽골에 핵연료공자을 건립하기로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빠오터우202공장이다.

 

202공장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후, 이기부의 유위(劉偉) 부장은 유윤빈을 빠오터우로 보내어 일하게 한다. 원자력연구소의 전체 핵연료공예실이 이 공장에 편입되어, 제2연구실이 된다. 그리고 동위원소분리과제조의 전체 인원이 옮겨간다.

 

1963년초봄, 변방은 강남과 다르다. 강남의 춘삼월은 "나무에 꽃이 피고, 새들이 날아다닌다" 그러나 빠오터우는 여전히 천한지동(天寒地凍)이었다. 쌓인 눈은 전혀 녹을 기미가 없었다. 하늘에는 거위털깥은 큰 눈이 여전히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202공장은 표면적으로 보기에 공장같지 않고, 군사기관같다. 일망무제의 황무지위에, 커다란 건물이 여러개 들어서 있다. 공장지구의 도로는 진흙탕이어서, 하늘이 맑고 바람이 불면, 모래와 돌이 날린다. 막 심은 어린 나무는 마늘처럼 이리저리 비뚤비꿀하고, 숙사의 입구에는 두터운 면담요(棉毯)를 걸어놓았다. 창은 삼중창이다. 약간 온기가 있지만 그래도 추위가 느껴졌다. 문밖은 작은 얼음산들이 서 있다. 원래 날씨가 추우면 버린 물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점점 쌓여서 높아지면 투명한 '작은 후지산'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장의 사방은 경비가 삼엄하고, 공장에서 10리 떨어진 곳이 경계선이다. 공장에서 5리 떨어진 곳은 외부인이 절대 접근할 수 없다. 사방의 담장은 모두 고리가 달린 철조망과 고압전선이 설피되어 있어 외부인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유윤빈은 공장에 도착해서 즉시 제3연구실을 성립시킨다. 연구의 필요에 따라, 물리화학, 공예시험, 이론계산, 분석연구의 4개조를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연구원이 부족했다. 유윤빈은 사방으로 인재를 물색한다. 이기부계통의 원자력연구소등 단위에서 일련의 연구원이 온다. 그리고 북대, 청화등 대학에서도 우수한 졸업생들이 온다. 소속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소속을 옮기고, 소속을 욺길 수 없으면 빌려왔다. 이묘수는 이 때 빠오터우로 온다. 제3연구실에서 분주임을 맡는다. 당시 이기부의 인력채용은 아주 엄격했고, 해외관계와 출신이 좋지 않은 사람은 더욱 꺼려했다.

 

유윤빈은 대담하고 파격적으로 사람을 기용했다. 북대를 졸업한 출신이 좋지 않은 우수한 연구생을 외지의 한 작은 기관에서 데려왔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견을 낸다: "이 자는 출신이 좋지 않다." 그는 말했다: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만들 때 많은 과학자들은 미국인이 아니었다. 나치독일과 헝가리등의 나라에서 데려온 사람들이다.그들 중에는 심지어 히틀러의 직접 지휘하에 일을 한 사람도 있었다."

 

사후에 증명되었다. "출신"이 좋지 않은 연구원들의 성과는 아주 뛰어났다. 유윤빈의 독특한 용인방법으로, 연구원은 금방 차게 된다. 연구업무가 금방 정상궤도로 진입한다. 유윤빈은 더욱 바빠졌다.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이미 닳아버린 가죽신도 아까워 버리지 못했다. 남색옷은 밤낮으로 입고 다녔다. 누가 그를 한때 소련에서 중국유학생회주석을 맡았던 그 풍모다 비범한 청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묘수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유윤빈의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상해의 친정으로 가서 낳겠다고 한다. 둘째 아이를 낳을 때, 유윤빈은 모자가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간호원에게 부탁의 말을 남기고는 바로 의원을 빠져나가, 실험실로 들어간다. 이묘수는 자신도 이 일을 하므로, 유윤빈이 실험실을 떠날 수 없고, 실험실도 그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유윤빈은 나중에 다른 사람과 이일을 얘기하면서 처가 자신을 잘 지지해주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칭찬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최초의 원자폭탄의 폭발시험이 성공한다. 이 기쁜 소식이 202공장으로 들려온다. 유윤빈은 눈물을 흘리며, 안도의 숨을 깊이 내쉬었다. 십여년동안, 자신이 모스크바강철학원에서 모스크바대학 핵화학과로 전과한 이래, 처자와의 이별도 무릅쓰고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이 날을 위한 것이 아닌가? 곧이어 중앙에서는 결정을 내린다. 하루빨리 수소폭단을 연구, 제조하라고.

 

"문혁"의 폭풍이 밀려오자, 유윤빈이 가장 먼저 다친다. 그는 혁명의 대상이 된다. 그는 공장의 지도자간부이고, 기술권위이며, 또한 소련이 배양해낸 "수(修, 수정주의자)"자호인물이었다.

 

조반파는 그를 큰 소리로 질책했다. 과거에 너는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내려와서 열심히 노동을 해라. 유윤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과거에 실험실에서 과학연구업무를 한 것이 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인지.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노동이 가장 영광스럽고, 노동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내려가서 노동을 한다. 청소를 할 때, 그는 역시 열심히하는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놓치는 법이 없었다. 도랑을 팔 때, 다른 사람이 몰래 쉬고 있을 때도, 그는 혼자서 허리를 굽히고 흙을 한삽 한삽 파냈다.

 

202공장은 기밀단위이다. 그리고 변방에 위치해 있었고, 당시 유소기가 아직 자리에 있어서, 일부 나쁜 마음을 먹은 자들도 드러내놓고 유윤빈을 비두(批鬪)하지는 못했다. 다만, 모택동이 <나의 한 장 대자보>가 나온 이후에는 달랐다. 유소기는 자산계급의 "흑사령"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202공장은 폭탄이 떨어진 것같았다. 조반파가 여러무리 나타나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다. 유윤빈은 희생양이 된다. 각파는 유윤빈을 비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비투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더욱 악독하게 할수록 모주석에게 더욱 충성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유윤빈은 고초를 겪는다. 공장내에서의 비투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에 패를 걸어서, 공장에서 십여리 떨어진 빠오터우시로 데려가서 유투(遊鬪)도 한다. 북경성의 이기부의 조반파도 밤을 세워 공장으로 와서 그를 끌고 북경으로 가서 비투를 한다.

 

가장 유윤빈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과거 그의 도움을 받은 노동자, 동료들이 그를 보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평소에 잘 지내고 자주 서로 집을 방문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비투에 가담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머리를 잡고 그에게 "분기식(噴氣式)"을 시키고, 죽어라 그를 괴롭혔고, 그에게 유소기를 고발하라고 요구한다.

 

유윤빈은 부친이 광명정대하다고 믿었다. 조반파는 그가 유소기타도를 외치도록 요구한다. 그는 외치지 않았다. 그에게 유소기와의 부자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유소기의 죄행을 고발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런 세월 속에 유윤빈과 이묘수의 부부 두 사람은 고립무원의 나날을 보낸다. 일부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들도 도울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산동에서 온 한 부부였다. 처음에 그들을 도와서 밥을 해주고 나중에 그들을 도와 두 어린아이를 데려간 왕씨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조반파는 그들에게 유윤빈을 고발하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마음이 선량했고, 확실하게 대답한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 밥을 해주고, 아이를 돌봐주지 다른 일은 전혀 모른다. 조반파도 더 건질게 없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집을 봉쇄해 버린다. 두 노인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202공장에서 일하는 아들의 집으로 간다. 고난의 세월 속에 그들은 여전히 유윤빈의 두 아들을 곁에 데리고 있었다.

 

1967년 11월 21일 저녁 9시경, 유윤빈은 하루종일 비투를 당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몸의 상처를 안고, 비틀비틀하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유윤빈은 얼굴을 대충 씻고는 옷을 입은채로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는 중얼중얼한다: 나의 일생은 인민에 미안한 일도 하지 않았고, 당에 미안한 일도 없다. 유일하게 미안하고 걸리는 것은 여러해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갖은 억울한 일을 당한 처이다. 이묘수가 두 아들을 잘 키워주길 바란다."

 

그날 저녁 유윤빈은 여러 말을 한다. 이묘수는 그가 하루종일 억울한 일을 당해서, 마음 속의 괴로움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별히 주의하지 않았다. 집밖의 바람과 눈은 갈수록 커졌다. 이묘수는 아주 피곤함을 느끼고, 깊이 잠들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이묘수는 꿈에서 깨어난다. 그런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급히 문을 열고 나가서 사방을 찾아보았다. 아침에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가족구역 서북방향의 철궤에서 유윤빈의 시체를 찾는다. 그는 철궤에 옆으로 누워 있었고, 머리는 절반이 이미 부숴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 국외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불원천리 조국으로 돌아온, 성적이 뛰어난 핵전문가는 자신의 생명을 마쳤다. 나이 겨우 43세이다. 처인 이묘수에게 남긴 것은 깊은 밤에 집을 떠나기 전 잘 정리해서 책상에 놓아둔 손목시계와 만년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