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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자성)

이자성(李自成)의 세 명의 부인: 왜 2명은 바람이 났을까?

by 중은우시 2023. 10. 10.

글: 유노사(劉老師)

 

명나라말기의 역사를 얘기하자면, 이자성은 반드시 언급해야할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자성과 그의 대순(大順)정권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의 처첩에 대하여는 논의가 비교적 적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로 관방사료에 이들 여자들에 대한 기록이 적고, 그녀들에 대한 사적은 대다수가 <수구기략(綏寇紀略)>, <명계북략(明季北略)>등 비관방사료와 지방지에 나온다. 오늘 우리가 얘기할 것은 바로 이자성의 세 명의 처, 한씨(韓氏), 형씨(邢氏)와 고씨(高氏)이다.

 

1. 한금아(韓金兒): 비록 용모가 출중했지만, 부도(婦道)를 지키지 않아, 나중에 이자성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자성의 첫번째 부인 한금아에 대하여 관방사료에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극히 적다. 심지어 어떤 사료에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수구기략>, <명계북략>, <갑신전신록(甲申傳信錄)>, <소전기년(小腆紀年)>등 비관방사료에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비록 이들 사료에는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지만, 이자성의 딸 이취미(李翠微)의 나이와 종합하여 판단해보면 한금아는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다.

 

<명계북략>의 기록에 따르면, 한금아는 창가(娼家) 출신이다. 어려서 모친을 잃은 그녀는 한마마(韓媽媽)의 양딸이 되어, 한씨성을 갖는다. 아마도 출신이나 성장배경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금아는 먹는 것을 즐기면서 게을렀고, 아름다웠으나 음탕했다.

 

한금아가 14살때, 성성(省城)의 한 늙은 관료의 첩으로 팔려간다. 상대남자의 나이가 많아서 그녀는 자주 불평을 했다. 시집간지 3,4년후에 젊은 일꾼과 정을 통해서, 젊은 일꾼은 맞아죽고, 한금아는 파혼당해서 시집에서 쫓겨나고, 예물의 절반을 돌려주게 된다.

 

얼마 후, 한금아는 다시 부성(府城)의 한 부유한 감생(監生)에게 시집간다. 감생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한금아의 앞에 이미 3명의 첩실이 있었다. 게다가 감생은 이미 30여세였다. 불만을 가진 한금아는 다시 2,3명의 잘생긴 종들과 정을 통했고, 결국 얻어맞고 쫓겨난다.

 

이자성을 살펴보면, 명나라말기에 천재지변이 잦았다. 집안이 빈곤하여, 이자성은 어려서부터 절에 들어가 화상이 된다. 그리고 같은 읍(邑)의 애(艾)씨성의 지주 집에서 양을 치면서 보낸다. 나이가 들면서, 혼인해야할 나이가 되었고, 사람에게 부탁하여 처를 구했다. 이수성(李守成)은 아들에게 그저 함께 지낼 여자를 찾으려 했는데, 이자성은 용모가 예쁜 여자만 찾았다. 당시 이자성은 도처에서 말썽을 부렸고 ,부친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 아들이 원하는대로 따르게 된다.

 

이자성은 한금아의 용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아주 좋아한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이미 두 번이나 시집갔었고, 부덕을 지키지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고 결국 한금아를 처로 취하게 된다.

 

숭정원년(1628년), 조정은 역참(驛站)을 정리하면서, 당시 역졸(驛卒)로 있던 이자성은 공문분실로 면직당한다. 그리하여 급여가 끊기게 된다. 나중에 이자성은 일이 있어 연안(延安)으로 갔는데, 적막을 견디지 못한 한금아는 같은 마을의 개호(蓋虎)와 어울리게 된다.

 

이자성이 연안에서 돌아온 후, 처가 간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를 죽이고 자수한다(<수구기략>에는 개호도 죽였다고 한다). 다만 연안부의 애동지(艾同知)는 이자성에게 곤장20대를 때리고 하옥한다. 이자성은 나중에 뇌물을 주고 감옥을 나온 후 애동지를 죽여버리고, 감숙(甘肅)으로 도망친다.

 

<갑신전언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자성이 직장을 잃은 후, 채무를 갚지 못해 애거인(艾擧人)에게 고발당한다. 이자성은 현령에게 사형선고를 받는데, 나중에 많은 돈을 뇌물로 주고 출옥했다. 한금아는 현역(縣役) 개군록(蓋君祿)과 사통했다. 그리하여, 이자성은 먼저 채권자 애거인을 죽이고, 다시 처와 개군록을 죽인후, 조카 이과(李過)와 함께 감숙으로 도망쳐서 군대에 들어간다.

 

2. 형부인(邢夫人): 원래 양가집 규수였으나 약탈당해 처가 된다. 나중에 사통후 명에 투항하고, 다시 청에 투항한다.

 

한금아와 비교하면, 형부인에 대한 기록은 훨씬 많이 남아 있다. <명사.유적열전>과 <청세조실록>등 정사에도 많이 언급되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은천역승(銀川驛丞)의 딸이고 이름은 화희(花喜)이다.(유일한 기록으로, 고증이 필요함)

 

숭정2년(1629년) 이월, 이자성은 감숙에서 군대에 들어간다. 얼마 후 파총(把總)으로 승진한다. 같은 해 명을 받아 참장(參將) 왕국(王國)을 따라 경성으로 간다. 그러나 왕국이 군량미를 횡령하여, 군대가 유중(楡中)에서 난을 일으킨다. 그후 이자성은 전후로 왕좌괘(王佐掛)등의 농민군에 가담한다. 이들이 명나라에 투항한 후, 이자성은 다시 외삼촌이며 반란군의 두목인 고영상(高迎祥)에게 의탁한다.

 

<명계북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영상은 반란군을 이끌고 몇개 성을 약탈하고, 여러번 관군을 격패시킨다. "임요부(臨洮府)의 성밖에서, 아름다운 부인 5명을 약탈한다. 형씨, 조씨, 여씨, 안씨, 오씨였다." 그중 형씨의 용모가 가장 출중했고, 고영상은 그녀를 특히 총애했다. 나중에 처인 포씨(鮑氏)가 투기하여, 형씨를 자신에게 의탁해온 이자성에게 주게 된다.

 

형씨는 용모가 출중했을 뿐아니라, 재능도 뛰어났다. 이자성에게 시집온 후, 군대내에서 재물을 관리했다. 군량을 나누어주고, 병기를 전투에 공급하는 업무를 잘해내서 이자성에게 크게 인정받는다.

 

그러나, 원래 양가집 규수인 형씨는 포로로 잡힌 후 강제로 이자성에게 시잡갔으며, 원래 농민군에 호감이 없었다. 게다가 이자성은 군대에 들어간 후 매일 여기저기 전투를 하느라 바빴고, 형씨는 혼자서 외롭게 지낸다. 그리하여 부부간의 관계가 냉담하게 된다.

 

숭정7년(1634년) 팔월, 이자성이 농주(隴州)를 공격할 때, 참장(參將) 하인룡(賀人龍)이 병력을 이끌고 구원을 왔다. 이자성은 부장(部將) 고걸(高傑)을 보내어 하인룡에게 투항을 권했다. 그러나 성을 포위하여 2달간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자성은 고걸에게 약간 의심이 들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고걸은 되돌아가서 본영을 지키도록 명한다. 고걸이 본영으로 돌아온 후, 형씨의 군영으로 가서 부(符)를 제출하여 확인받는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그후 이자성이 전방에서 전투에 바쁠 때, 형씨는 후방에서 용모가 영준한 고걸과 사통하게 된다.

 

고걸은 형씨와 간통한 후, 형씨를 버리기도 싫고, 이자성이 알게 될 것도 두려웠다. 갈등과 망설임 과정에서 결국 명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숭정8년(1635년) 칠월, 고걸은 형씨와 가족 오십여명을 데리고 하인룡에게 투항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고걸은 남하하여 주유숭(朱由崧)을 황제로 모시고, 흥평백(興平伯)의 작위를 받는다. 그리고 형씨의 권유로 사가법(史可法)을 따라 함께 청에 항거한다.

 

영창2년(1645년) 정월, 고걸은 청나라에 투항한 총병(總兵) 허정국(許定國)에 의해 저주(雎州)에서 유인살해당한다. 홍광제는 고걸의 부하장병을 모조리 형부인에게 지휘하도록 넘긴다. 그후 사가법은 여러 장수들과 회맹하면서 고걸의 아들 고원(高元)에게 흥평세자의 작위를 준다. 그리고 외조카 이본심(李本深)을 제독(提督)으로 삼는다.

 

당시 흥부인은 아들이 어려 부하들을 통솔할지 모른다고 우려했고, 사가법에게는 후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아들에게 사가법을 의부(義父)로 모시게 하려 한다. 그러나 사가법은 고걸의 부하들은 모조리 '유적(流賊)'출신이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제독으로 군량미를 관장하는 태감 고기잠(高起潛)을 의부로 삼게 한다. <가정도성기략>과 <청세조실록>에 따르면, 홍광정권은 그해 오월에 멸망한다. 형씨는 고걸의 부하를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한다. 그후의 사적은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3. 고계영(高桂英): 일찌기 친척들과 함께 명에 반란을 일으키고, 이자성이 패퇴한 후에도 계속 청에 항거한다.

 

고씨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계영"이라는 이름은 요설은(姚雪垠)의 소설 <이자성>에 나온다. 섬서 미지현 만계리 호로단촌 사람이다. <미지현지>에 따르면, 그녀는 원나라말기 농민반란군의 지도자인 고경(高慶)의 후손이다. 숭정초년, 농민군이 속속 들고 일어날 때, 고씨도 친척들과 함게 농민군에 가담한다.

 

숭정9년(1636년) 오월, 이자성이 군대를 이끌고 미지를 공격한다. 그 결과 진천보 일대에서 명나라군의 습격을 받아, 참혹한 피해를 입는다. 다행히 고계영의 남동생 고일공(高一功)이 고원(固原)에서 부대를 이끌고 구해주러 왔기 때문에 이자성은 다시 위세를 회복할 수 있었고, 연천, 수덕, 미지등지를 함락시키게 된다.

 

고씨는 총명하고 영리할 뿐아니라,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었다. 원레 세력이 약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부대를 합친 후에는 자주 이자성을 도와서 업무를 처리하게 된다. 군대내에서 그녀의 명망은 상당히 높았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기간을 함께 한 후, 이자성은 고씨를 처로 취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이자성의 세번째 부인이 된다.

 

숭정11년(1638년) 십월, 이자성은 동관(潼關) 남원(南原)에서 홍승주(洪承疇), 손전정(孫傳庭)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하고, 처와 딸과 헤어지게 된다. 겨우 유종민(劉宗敏)등 18명의 기병들과 도망칠 수 있었다. 고씨는 이자성과 헤어진 후, 잔여병력을 이끌고 효산(崤山)으로 들어가 숨는다. 나중에 이자성이 상락산(商洛山)에서 흩어진 부대를 모은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회합하게 된다.

 

숭정13년(1640년) 이자성은 수천명을 이끌고 상락을 나온 후, 명군이 장헌충을 추격하는 틈을 타서 하남을 전전하며, 굶주린 농민들을 끌어모아 규모를 키운다. 고씨도 여병을 모아서 부대를 만들어 주로 본영을 보호하고, 가끔 이자성을 도와 전투에 나섰다. 이자성의 현내조(賢內助)라 할 만하다.

 

숭정16년(1643년) 정월, 이자성이 승천(承天)을 함락시키고, "봉천창의문무대원수(奉天倡義文武大元帥)"을 칭한다. 삼월, 이자성은 양양(襄陽)을 양경(襄京)으로 개칭하고, 스스로 "신순왕(新順王)"에 오른다. 같은 해 가을, 이자성은 북상하여 손전정을 격패시키고, 동관을 통해 관중으로 쇄도해 들어간다. 얼마 후 섬서성 전체를 점령한다.

 

숭정17년(1644년) 정월 초하루, 이자성은 서안에서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순이라 한다. 연호는 영창(永昌)으로 한다. 고씨는 대순황후가 된다. 그후, 이자성은 군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쳐들어간다. 황후 고씨는 권장군(權將軍) 전견수(田見秀)등과 함께 남아서 서안을 지킨다. 

 

같은 해 사월, 이자성이 경사에서 패퇴한다. 팔월 서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황친국척"들을 크게 봉하기 시작한다. <미지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고, 이번에 이자성은 유씨(劉氏)를 대순황후로 세운다. 그러나, <청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성은 호광(湖廣)에서 청군에 추격당한 후, 처첩 여러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강물에 빠져 죽는다. 그러나, 고씨는 그 안에 없었다.

 

이자성이 패퇴하여 도망친 후, 고씨는 이과등과 여전히 섬북(섬서북부)에서 청에 항거했다. 근거지가 없어 다시 한중에서 사천으로 남하하여 호북 형주일대로 간다. 그 과정에서 대순의 패잔병들을 수습한다. 그후 고씨는 이과, 이통(李通), 이래형(李來亨), 하정(賀貞), 학영충(郝永忠)등을 데리고, 계속하여 호북, 호남등지에서 청군에 대항한다. 청순치3년(1646년) 남명 융무제(隆武帝)에 의해 '절효정의일품부인(節孝貞義一品夫人)'에 봉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부대는 '충정영(忠貞營)'으로 불린다.

 

순치6년(1649년) 대순군이 호남에서 패퇴하고, 고씨등은 광서(廣西)로 들어가, 남녕(南寧)에 주둔한다. 이과가 죽은 후, 고씨가 "그 무리를 지휘했다." 남명의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고씨와 남동생등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새로 국면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고일공이 전사하여, 고씨가 잔여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기동(夔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래형과 호광 흥산에 근거지를 설립한다.

 

강희3년(1664년) 이월, 청군이 대순군의 잔여군을 대거 소탕하기 시작한다. 고씨, 이래형은 십만청군에게 모록산(茅麓山)에서 포위당한다. 같은 해 팔월, 이래형은 여러번 패전한 후 스스로 불을 붙여 자살한다. 나이가 이미 많았던 고씨도 얼마 후 사망하게 된다.

 

이상의 세 명의 처 외에, <갑신기사.북사보유>와 <유구지>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성에게는 첩실도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경성에 들어간 후 비(妃)로 봉해진 명궁의 궁녀 두씨(竇氏)도 있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여, 이들 여자들의 구체적인 사적은 지금으로서 알기 힘들다. 그저 "범씨(范氏)를 덕비(德妃)로 삼았다" "두, 장(張), 진(陳), 두(杜)씨를 비로 삼았다"는 정도의 기록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