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보림(李保林)
명나라말기, 이자성이 이끄는 농만군은 270여년간 이어지던 명왕조를 무너뜨린다. 다만 북경에서 겨우 49일간 머물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남겼다. 특히 이자성의 사인(死因)은 몇세기의 논쟁을 거쳤지만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그 원인은 주로 이자성이 죽을 때는 전쟁이 한창중이며, 대순군이 청군에 쫓겨 사방으로 도망쳐 다니면서 궤멸한 비상시기였고, 게다가 관방사서 및 일부 사적에 기록된 이자성의 사인은 믿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이자성의 사인은 수수께끼가 되고 복잡다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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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사인에 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명사.이자성전>의 기록일 것이다: 순치2년 구월, 이자성은 패배하여 호북(湖北) 통성(通城)의 구궁산(九宮山)으로 물러난다. "스스로 20기를 이끌고, 산속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촌민들에게 쫓겼고, 벗어나지 못해서, 목을 매어 죽는다." 다음으로는 비밀(費密)의 <황서(荒書)>에 기재된 것이다: "이자성은 직접 18기를 이끌고 통산현(通山縣)에서 구궁산을 지나다가 산민(山民)들에게 공격당해 패배한다. 산민 정구백(程九伯)은 이자성과 씨름을 했고(手搏)...그의 조카인 김씨성의 자가 삽으로 이자성을 죽여버린다." 그외에서 십여 가지의 설이 있다. 대체로 이 두 가지 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명에 약간 변화가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이 두 종류의 견해는 완전히 근거없이 날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 청나라 순치2년 정원대장군(靖遠大將軍), 화석친왕(和碩親王) 아지거(阿濟格)와 남명총독(南明總督)으로 호광등오성군무(湖廣等五省軍務)인 하등교(何騰蛟)의 보고서에 근거한다: "틈역(闖逆, 이자성을 가리킴)은 이십팔기로 구궁산을 올라 기회를 엿보고자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사방에서 복병을 만나 어지럽게 싸우는 중에 칼에 맞아 죽었다." 아지거와 하등교는 각자 모시는 주군이 달랐지만, 둘다 공통적으로 "시후난변(屍朽難辨)"(시신이 썩어서 확인하기 어려웠다)라는 말로 각자의 주군에게 이자성의 시신을 확보하지 못한 점을 변명한다.
봉건사회는 황권지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대하여 청나라의 순치제이건 남명의 융무제(隆武帝)이건 모두 아지거와 하등교의 보고서에서 헛점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자성이 확실히 구궁산에서 죽었다면, 섬북(陝北)사람의 습속에 따라 먼저 매장했을 것이고, 처가 죽으면 합장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입토위안(入土爲安)'이다. 이자성은 당시 패배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따르는 병사가 수십만명이고, 그의 곁에는 섬북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등교의 보고서대로라면 이자성을 따르던 스무명의 기병이 모두 사망했고, 도망친 것은 '참장(參將) 장쌍희(張雙喜), 수종(隨從) 유반당(劉伴當)"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자성의 부하들이 즉시 달려와서 이자성의 시신을 처리할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연히 비밀리에 매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시후난변"일 수 있겠는가? 확실히, 아지거, 하등교의 보고서는 스스로 모순되는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헛점이 많다. 아지거, 명사(明史)는 모두 이자성이 구월에 구궁산에서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대순군은 이자성의 사후에 지휘에 혼란이 일어나, "육,칠월에 고부인(高夫人, 이자성의 처), 학요기(郝搖旗)등이 남명의 하등교와 합영합의를 달성한다." 팔월에는 "이과(李過), 고일공(高一功)등 삼십여만이 호남순무 도윤석(堵胤錫)에게 투항하여" 공동으로 청에 대항했다. 이는 이때 이자성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자성을 제외하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자살자 혹은 시골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이자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없다. 이자성이 비록 하층출신이지만, 농민군세력이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도, 나머지 수령들 장헌충(張獻忠), 나여재(羅汝才)등은 모두 속속 명군에 투항했지만, 이자성은 십여기만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렸고, 오로지 견인불발의 의지로 끝까지 버텨내어 오히려 반패위승(反敗爲勝)했었다.
그때는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십만의 병력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스스로 목을 졸라 자결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남명의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 곽유경(郭維經)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자성이 오월에 구궁산에서 죽었다는 것은 소문이다" 그리고 융무제도 "이자성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고 의심이 든다"고 하면서 "하등교는 적을 섬멸한 상황, 이자성의 수급을 취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고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하등교는 제2차 <틈적복주소(闖賊伏誅疎)>를 올려 융무제를 기만한다. 당시 남명정권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조불보석(朝不保夕)의 상황이라,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순치제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처음에 집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처음에는 "목을 매어 자결했다(自縊)"고 했는데, 그후에 "시후난변"이라고 올라와 서로 달랐다. 아지거는 부득이하게 그렇게 했다고 말하면서 두번째 보고서는 다시 찾아가서 조사하고 난 후에 올린 것이라고 말한다. 아지거가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예친왕 도르곤은 질책한다. 이자성이 죽지 않았는데 먼저 죽었다고 올렸으니, 사람을 보내어 그의 죄를 책망한다. 그리고 오문에 장막을 펼치고 앉아 아지거를 불러 질책한다." 그리하여 아지거는 군왕(郡王)으로 격하된다. 건륭제때, 도르곤, 도도(多鐸)등 여러 왕들은 모두 원래의 작위로 복귀시키고, 태묘에 배향시켰는데, 유독 아지거만은 그런 지고무상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건륭제는 여전히 "아지거는 불순한 마음으로 유적(이자성)을 추격하여 거짓으로 이미 죽었다고 보고했다...비록 약간의 공로가 있기는 하지만, 그 죄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 작위를 박탈당한 것은 스스로의 잘못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청나라조정은 아지거, 하등교의 보고내용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산의 <정씨족보(程氏族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순치원년 갑신일에 "틈적 이연(李延)을 우적령(牛迹嶺) 아래에서 소탕하고 적의 수급, 주회(珠盔), 용포(龍袍)를 본성의 군문에 바친다." <통산현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순치2년, 적이 패하여 통산으로 숨어든다. 육도(六都)사람 정구백(程九伯)이 사람을 모아 적의 우두머리를 소원구(小源口)에서 죽였다." 고증에 따르면, 섬북에서 기원한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이연이라는 사람이 아니고, 이자성도 그런 별칭을 쓴 적이 없다. 이자성의 친족들 중에서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 실제상황은 순치원년 대순군이 도망쳐 섬서로 갔다. 이때 자성이 통산현까지 갔을 가능성은 없다. 만일 통산현지와 정씨족보에서 기록한 사람이 동일인이라면, 게다가 정구백이 죽은 자의 성명까지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현지의 산적이거나 혹은 떠돌아다니는 비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대순군이 호광을 지키도록 배치한 백왕(白旺)의 부하이거나 명군에도 도망친 자일 가능성도 있다. 만일 확실히 적의 수급, 주회, 용포를 본성군문에 바쳤다면 왜 하등교가 "길을 막고 소문이 나가기 않게 했지만, 수급을 얻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고 하거나, 아지거가 "다시 찾아가서 조사했다"고 했을까? 그래서 <정씨족보>에서 죽였다는 이연이라는 자는 이자성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다. 이연을 죽인 정구백은 그 공으로 '덕안부경력(德安府經歷)이 된다. 이는 관청에서 이화접목식으로 꾸민 하나의 해프닝이다. 만일 이연이 이자성이라면, 대순군의 잔여병력 수십만명은 호광, 사천, 운귀지역에서 근 20여년간 더 활동했는데, 정구백은 관직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머리가 수십개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자성이 통성지방의 단련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버전에는 농민 강대안(姜大眼)의 전언도 있다: <남명야사>에는 향채민(鄕寨民) 왕씨형제가 격살했다고 하고, <유구장편>에는 촌민 방새신(方賽神)이 머리를 추로 내리쳐 죽였다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그리하여 이자성의 죽음은 더더욱 오리무중이 되고 신비막측해진다. 청나라 동치6년 <통성현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은 무장지주에 의해 살해된 후, 그의 조카 이과가 시신을 빼앗아 풀을 묶어서 머리를 만들고, 곤룡포와 면류관을 씌워 나공산(羅公山)의 아래에 묻고, 마을 하나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떠났다." 그 내용은 <유구지>에 기록된 이자성이 검양(黔陽)에서 죽었다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유구지>권14). 다른 것이라면 죽인 사람과 장소뿐이다. <유구지>의 작자인 팽손이(彭孫貽)는 명나라 만력43년에 태어나, 강희12년에 죽었다. 그가 책을 쓴 시기를 사망한 때인 강희12년으로 잡아도, 동치제때의 <통성현지>보다 193년이 빠르다. 우연하게도 통산, 통성은 모두 구궁산의 지명이다. 그리하여 두 개 현은 이자성이 구궁산에서 죽었다는 것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기이한 점이라면 두 현 모두 이자성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중국성립후, 곽말약 및 당시 호북성위서기인 왕임중(王任重)은 통성의 이자성묘비에 제사(題詞)을 써준다. 나중에 누군가 이자성의 죽은 지명에 잘못이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곽말약은 다시 특별히 성명을 내어 제사는 무효라고 말한다. 결국 정설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실 이것을 가지고 말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아마도 이자성은 병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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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사인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록에 서로 다른 사인을 적어놓았으니, 증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먼저 이자성의 신체건강문제를 얘기해보기로 하자. 숭정10년 십월, 이자성은 농민군을 이끌고 섬서에서 사천으로 들어가 30여개 주현(州縣)을 함락시키고, 총병(總兵) 후량주(侯良柱), 오명봉(吳鳴鳳)을 죽인다. 사천순무(四川巡撫) 왕유장(王維章)은 직무유기로 참형에 처해져 조야를 들썩이게 했다. 조정에서는 부득이하게 전투에 능한 진군(秦軍, 섬서의 군대)을 사천으로 보낸다. 관군은 먼저 이자성의 식량조달통로를 막아 농민군과 말이 굶주리게 만든다. 부총병(副總兵) 하인룡(賀人龍)은 약한 병사를 이용하여 이자성의 군대를 재동(梓潼)으로 유인한 후, 매복하고 있던 진군이 사방에서 공격하여, 이자성의 군대는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민(岷), 서번(西番)으로 도망친다. 이자성은 어쩔 수 없이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해산시킨 후 백기를 이끌고 다시 종남산(終南山)으로 숨어들어간다. 관군이 산을 에워싼다. 이자성은 전건수(田建秀), 곡영(谷英), 장능(張能)등 17명과 함께 베옷을 잘라서 밧줄로 만들어, 절벽아래로 내려가 도망친다. 그리고 초(楚, 호북)로 들어가 장헌충(張獻忠)에 투신하고자 한다. 장헌충은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죽계로 가서 장헌충은 이자성을 죽이려 한다. 이자성은 혼자서 나귀를 타고 백리를 가서 상락(商洛)으로 갔고, 석천(淅川)으로 돌아가 '반년간 병으로 누워지낸다' 이는 이자성에게 병이 있다는 첫번째 기록이다. 일반적인 감기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지 않았을테니까. 요설은(姚雪垠)의 <이자성>이라는 책에도 이자성이 상락의 산속에서 병을 앓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개략 위에서 말한 상황일 것이다.
숭정16년(1643년) 여름, 이자성은 다시 재기하여 양양(襄陽)에 정권을 건립한다. 장헌충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무창(武昌)에 육정부(六政府)를 설립한다. 명나라조정은 중원에 있는데, 호광지역은 이미 대부분의 주현을 잃었다. 남경, 안경, 여주, 봉양등지는 비록 명군이 통제하고 있었지만, 창을 베고 자야했으며, 하루종일 불안에 시달렸다. 어떤 사람은 봉양총독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이자성과 싸우지 않고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자성이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다. 신사일에 왼쪽눈에 화살촉을 맞았는데, 머리 속에 박혀서 건드릴 수가 없다. 금년 봄에는 속이 썩어들어가서, 고름과 피가 계속 나온다. 몸은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나이가 겨우 서른이 넘었는데 모습은 노인같아. 아마도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가 죽고나면, 무리는 흩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자성을 폄하하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이자성이 숭정14년 제1차개봉포위공격때 이월 이십칠일 직접 개봉성 아래에 나갔다가 명군수비 진덕의(陳德義, 어떤 기록에는 陳永福이라 한다)이 쏜 화살에 왼쪽눈을 맞는다. 상처가 2촌에 이른다. 비록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의료조건으로 보면 왼쪽눈을 실명하는 외에 분명 감염되었을 것이다. 그 후유증이 생명에 위해를 가할 정도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병세가 악화되고 가중된 것은 이 화살에 맞은 상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자성이 숭정16년 칠월 양양정권을 건립한 후, 대순에 귀순한 명나라에서 흠천감 박사를 지낸 양영유(楊永裕)는 승천(承天, 지금의 호북성 종상)의 가정제의 부친 주우원(朱祐杬)의 능묘의 재료를 해체하여 대순의 양양궁전을 짓자고 건의한다. "이자성이 대전에 도착하니 머리가 어지러워 군영에서 편안히 쉴 수가 없었다." <종상현지>에서 이자성에게 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아무런 근거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자성은 거사를 일으킨 후, 고향 미지현(米脂縣)으로 두 번 돌아간다. 한번은 전략적인 필요에 따라, 숭정9년 섬북을 전전하다가 미지로 돌아가 은800냥을 내어 문묘를 수리하도록 한다; 또 한번은 숭정16년 십이월로 미지로 돌아가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 두번 모두 백성들이 막거나 입성을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자성이 미지현으로 돌아가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그의 조상묘를 파헤친 원흉을 처벌하고, 필요한 양초를 얻은 후, 미지성내에서는 이자성과 인척관계에 있는 미지성의 방어를 담당하는 풍운담(馮雲潭, 이름은 啓龍)을 추천해서 해결을 책임지도록 한다. <풍씨가보>에는 풍운담이 당시 이자성의 경내에 머물렀으며, 군중의 서찰로 성에 이렇게 연락을 보냈다고 한다: "속히 의사 2명을 군영으로 보내라. 진료를 해야 한다. 필(畢), 혜(惠) 두 사람중 한명을 고르면 된다." 이자성은 옛날에 미지의 은천역(圁川驛)에서 일한 바 있다. 그래서 성내의 중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필, 혜 두 사람중 한명을 보내라고 한 것이다. 풍운담의 글내용을 보면 이자성의 병세가 가볍지 않았던 것같다. 그가 반란에 가담하면서, 그의 친척들은 연좌될까봐 겁을 내어 성과 이름을 숨기고 여러 곳에 숨어지냈는데, 이제 금의환향한 것이다. 원래는 친척들을 방문하여 돈도 주고, 작위도 내릴 예정이었지만, 구변중진(九邊重鎭)인 유림(楡林)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저 조상에게 제사만 급히 지낸 후 되돌아가야했다. 이것도 그의 신체상황이 좋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숭전17년 삼월 십구일, 이자성은 북경으로 진입한다. 숭정제는 매산에서 목을 매 자결한다. 대순의 관리들은 사월 일일부터 이자성에게 하루빨리 등극할 것을 권한다. 새로운 황제의 등극의식은 융중하면서도 번잡하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목소리가 큰 스무명을 골라서 홍려시관(鴻臚寺官, 조회의 예절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삼는다. 이들이 입은 주포(朱袍)는 경극에서 입는 옷을 빌려온 것이다. 이를 입고 홍려시관은 등극의식을 연습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고, 날짜만 택일하면 되었다. 숭정때 좌유덕(左諭德) 양사총(楊士聰)의 일기 <갑신핵진략>에 따르면, "사월 초엿새를 선택해서 즉위하기로 한다. 초사흘에 이르러 즉위일을 초팔일로 늦추고, 초엿새에 이르러 다시 즉위일자를 십이일로 늦춘다. 그리고 십일일에 이르러 다시 즉위일을 십오일로 늦춘다. 동쪽의 전투가 시급하여 다시 고치는데 십이일을 십칠일로 고친다. 동쪽으로 진격하는 일자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계속하여 다시 고쳤다. 그래서 이를 이유로 천하인의 이목을 속이고 우롱한 것이다."
이자성은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고, 다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면서 명왕조를 무너뜨렸다. 즉위를 선포하는 것은 아주 신중하게 결정해야할 대사였다. 비록 아직 천하는 삼분상태이고, 해야할 일도 많이 남아 있으며, 남방과 전국의 여러 주현들을 아직 다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적시에 등극하는 것은 명나라관리들을 귀순하게 하고, 대순의 내부를 안정시켜서 천하통일하는데 필요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일이라 하더라도 즉위를 선포하는 것만하지는 못하다. 그런데 왜 즉위날짜를 계속하여 바꾸어야 했을까? 기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숨은 사정이 있는 것이다. 당시 "이자성은 매번 어좌(御座)에 오를 때마다 땀을 비오듯이 흘렸고, 두통이 멈추지 않았으며, 어지럽고 침침하여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그 날, 백관이 모여서 글을 올릴 때, 앉아있거나 서 있지 못하거 거의 쓰러질 뻔했다....그 후, 다시는 대전에 오르지 않는다."
<명계북략>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이자성이 자리에 앉자, 머리가 아프고 마치 도끼로 내려치는 것같다고 소리치며 혼절하여 쓰러진다." 원래 즉위일자를 계속하여 바꾼 것은 이자성의 신체건강문제때문이었다. 대순군이 패배하고 북경에서 물러나기 하루 전날인 사월 이십구일 서둘러 등극의식을 진행한다. '우금성(牛金星)이 대신하여 하늘에 예를 행한다' 이는 이자성이 병으로 등극의식에 참가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도, "이자성은 아침에 일어나서 겨우 약간의 쌀죽을 마실 뿐이었고, 다른 음식은 먹지를 못했다." "아는 사람은 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자성의 병세는 가볍지 않아 보인다.
숭정16년 겨울, 이자성은 서안에서 정권을 건립한 후, 칙명을 내려 조묘(祖廟)를 세운다. 순치원년 팔월, "조묘가 완공되고, 가서 제사지낸다. 돌연 추위로 떨려 예를 행할 수 없었다." 중국인의 전통에서 효가 으뜸이다. 이자성은 이때 겨우 38살이다. 일반적인 병으로는 그가 부모,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에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 그의 병세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입원치료가 필요하거나 병세가 위급하다는 통지를 해야할 상황인 것이다. 다만 오월하순, 이자성이 내린 명령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금성과 이암(李巖)은 원래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고, 진정(眞定)에서 패배한 후, 대순군이 하남에서 점령했던 주군들이 속속 반기를 든다. 이암이 나서서 병력을 이끌고 나가 수복하겠다고 한다. 우금성은 이암의 군사재능이 질투나서, 이암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참언을 올린다. 이자성은 이암을 죽인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이자성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화살에 맞은 상처로 인한 후유증으로 행동이 불편했다. 그러나 정신은 맑아서 병상에서도 의사결정은 내릴 수 있었다. 둘째, 이자성은 진정에서 이미 죽었지만, 군심이 동요할까봐 그것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고 비밀로 했다. 혹은 이자성은 이미 병으로 인하여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하여 이암을 죽인 명령은 아마도 우금성이 거짓으로 작성한 성지일 것이고, 이를 통해 개인적인 원한을 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이미 불리한 상황하에서 이자성이 자신의 대장을 죽일 리가 없는 것이다. 군사 송헌책(宋獻策)은 이암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안타까워하며 탄식했고, 자후(磁侯) 유종민(劉宗敏)은 검을 뽑아들고 이를 갈며 욕했다: "내가 금성을 만나면 이 검으로 참해버리겠다." 만일 이자성이 명령을 내려 이암을 죽인 것이라면, 우금성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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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개는 어느 정도 우연성이 존재한다. 우연히 감기에 걸려도 그것이 치명적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숭정11년에 반년간 요양을 한다든지, 숭정16년에 개봉에서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고 감염되었다든지, 승천의 현령침묘에서 머리가 어지러워 군영에 편안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든지, 같은 해 겨울 미지현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급히 의사를 불러서 치료하게 한 것이라든지, 북경으로 들어간 후 등극의식을 진행하지 못한 것이라든지, 진정에서 다시 화살에 상처를 입었다는등 일련의 기록을 보면, '우연히 작은 질병에 걸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같다. 이자성은 화살비를 맞으면서 십여년간 전투를 벌였고, 여색이나 술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거친 음식들을 먹으면서,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전투에서 앞장서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관의 전투는 대순의 생사존망이 걸려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서안에서 동관은 지척이었는데, 이자성은 참가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자성이 참가했다고 하여 승산이 얼마나 올라갈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당시 이자성이 중병에 걸려있었다는 것에 의문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자성이 관건적인 전투에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순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간 후, 전투력은 최고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연전연패했을까? 특히 북경을 빠져나온 후, 시종 효과적으로 체계를 갖추지 못한다. 그리고 북경성으로 진입한 후에 군기가 문란해지고, 유종민이 마음대로 '추장조향(追贓助餉)'을 확대하고,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을 범하고, 우금성과 이정부상서(吏政府尙書) 송기교(宋企郊)가 전 명나라의 투항한 관리들을 임용하면서 자신과 가까운 정도에 따라 기용하는 등 일련의 난맥상은 이자성의 병세가 위중하여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여러가지 현상들을 보면, 그는 지휘를 할 수 없거나 말을 타고 전투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이십기를 이끌고 구궁산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지형을 살펴보다가 진흙밭에 빠져서 향민들과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를 들것에 싣고 구궁산을 올랐을 수도 있다. 일찌기 청나라 순치제 초기에 상숙(常熟)사람 추의(鄒漪)는 <명계유문>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이자성은 나공산에서 병사했다. 그의 조카는 한마리 호랑이로 황제의 예로 장사지냈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이자성이 병사했다는 것은 단지 추의의 기술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렇게 이자성의 진정한 사인은 밝혀지지 못하고 지나가버리게 된다.
이자성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천입지(頂天立地,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딛고 서 있는)의 영웅이다.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백절불굴의 인물로 중국역사상 사라지지 않을 영향을 남겼다. 그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40세 가량이었다(이자성은 39살에 죽는다). 명나라떄 잘먹고 잘살았던 황제들의 평균수명도 41세를 넘기지 못한다. 이자성은 하층출신으로 10여년간 전쟁을 치렀다. 몸이 많이 망가졌을 것이다. 결국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인생의 규율이다. 통산, 통성의 이자성묘는 모두 수리를 거쳤다. 그러나, 이자성의 유해나 다른 진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자성이 섬서에서 혹은 남으로 도망치던 도중에 어느 지점에서 병사했는지는 확실히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한가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장례를 치르는 것은 군심을 안정시키는데 필요했다는 것이다. 전략적으로도 필요했다. 그래서 부하들은 이자성을 급히 묻었고, 기밀을 유지했을 것이며,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수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순군의 잔여세력은 그후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한다. 남명과 합친 후에는 천호(川湖, 사천 호북, 호남), 운귀(雲貴, 운남, 귀주), 월감(粤贑, 광동 강서)을 전전한다. 이과, 고일공이 순치8년에 차례로 죽은 후, 원종제(袁宗第), 유체순(劉體純), 이래형(李來亨), 학요기, 당수소(黨守素), 척천보(拓天寶), 하진(賀珍), 마등운(馬騰雲)등 이자성의 옛 부하들 소위 "십삼가(十三家)"는 계속하여 청나라에 항거한다. 그러나 형세가 급박해지면서, 청군에게 몰려서 사천,호북의 경계에 있는 큰 산 속으로 들어간다. 강희3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남은 이과의 양자 이래형이 부하를 이끌고 호북 흥화현 모록산에서 청군과 완강하게 격전을 벌이고 일가족과 함께 스스로 불에 타 죽는다. 이제 농민군의 비감하면서도 장렬한 항청운동은 근 20년간 지속하다가 끝을 맺는다. 일대영웅이 뜻을 다 펴지도 못하고 병으로 먼저 죽었다고 할 수 있다. 후세의 존경을 받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죽음은 수수께끼로 남아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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