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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자성)

이자성의 부인들은 왜 다른 남자와 도망갔을까?

by 중은우시 2019. 4. 5.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역사와 문화의 조작현상은 아주 두드러진다. 여러 지방에서는 모두 '역사명인'을 빌어 역사를 위조하고 있다.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이자성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중국역사 '7대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주 황당한 일이다. 이런 조작은 지방정부에서 지방이익을 위하여 만들어낸다.


민간에서는 또한 이자성을 빌어서 조작하는 일이 있는데,바로 이자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명사>권3에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자성에게는 자식이 없다(自成無子)" <명사>의 견해는 바로 청나라정부의 견해이다. 이자성에게 후손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청나라정부의 견해는 정확할 뿐아니라 엄숙한 것이다. 다른 말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자성에게 왜 후손이 없을까? 그것은 이자성에게 생육능력(성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자성이 평생동안 취한 여인으로 고증이 가능한 여인은 한씨(韓氏), 형씨(邢氏), 고씨(高氏)와 두씨(竇氏)의 4명이다.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이자성의 본부인 한씨는 이자성에게 능력이 없어서 개호(蓋虎)와 간통을 하고, 나중에 이자성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자성의 후처인 형씨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자성의 부하인 고걸(高傑)과 사통한다. 한씨와 마찬가지의 최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한씨와 고걸은 명나라군대에 투항한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형씨가 고걸과 같이 살고나서 금방 임신하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자성의 후손이라고 사칭하는 사람이 이 글을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이자성은 구궁산(九宮山)에서 죽었다. 이것은 역사에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일이다. 구체적인 사망경위는 "산민오살(山民誤殺)"설과 "산민공살(山民攻殺)"설이 있다.


청나라초기 오위업(吳偉業)의 <수구기략(綏寇紀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자성의 일행이 구궁산으로 도망친 후, 혼자서 산 위로 올라가서 현제묘(玄帝廟)를 참배한다. 산민은 그를 비적이라고 여기고, 함게 몰려가서 가래로 그를 때려 죽였다. 이자성의 몸에서 금인(金印)을 발견하고서야 잘못 죽였다는 것을 알았고, 놀라서 도망쳤다.


청나라 비밀(費密)의 <황서(荒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자성이 구궁산에서 산민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산민 정구백(程九伯)이 이자성과 싸우다가 힘이 부쳐서 정구백은 큰 소리로 외조카 김모(金某)에게 도움을 구한다. 김모는 등 뒤에서 낫으로 이자성의 머리를 내려치고, 이자성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자성의 사망시간은 영창2년(1645) 오월 십칠일이다. 비밀리에 안장한 시간은 영창2년 오월 십구일이다. <이과일기(李過日記)>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월 십구일) 미시(未時), 만세(萬歲, 즉 이자성)의 유체를 비밀리에 매장했다. 나중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다시 제사를 지내고 묘를 만들고자 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이자성이 나중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는 것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자성이 죽은 후, 이과는 <구궁유한록(九宮遺恨錄)>, <제대순황제문(祭大順皇帝文)>등을 남기고, 우금성(牛金星)은 <벌목안묘문(伐木安墓文)>,. <제틈왕시(祭闖王詩)>등을 남긴다. 대순군은 복수를 위하여, 사방에 효첩(曉帖)을 붙여 현상금을 걸고 흉수를 찾기도 했다. 효첩에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주군께서 구궁산에서 간적의 칼에 맞아 피살을 당했다. 누구든지 군대로 와서 흉수를 가리키는 자에게는 상금 만금을 주고, 3대에 작위를 내리겠다. 영창2년 오월 십구일."


흉수를 체포하지 못하자, 이과는 마을을 도살하도록 명령한다. 그 명령은 이렇게 되어 있다: "기한을 정하여 구궁산의 산민이 자수하여 흉수라고 밝히거나 혹은 붙잡아서 우리 군대에 데려오라. 삼일후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우리는 3일간 동네를 도살하겠다. 이 복수는 반드시 한다."


이과가 마을을 도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통성(通城)의 수재인 진선갑(陳先甲)등은 이과에게 글을 올렸다. 그들의 <상이후야휘과서(上李侯爺諱過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전에 강가반의 향용이 만세를 오살했고, 원흉은 죽어 마땅하다. 이미 후야께서 도살하여 징벌했다. 후야께선느 군대를 수습하여, 우리 통성의 다른 백성들은 용서해주시고 더 이상 살인은 멈추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그러면 우리 현의 백성들은 재조지은에 감사하겠다. 통성초민 수재 진선갑, 팽회승이 여러 무리들을 대표하여 아룁니다. 영창2년 오월 이십이일."


청나라초기에는 이자성에 관한 사료가 아주 풍부했다. 저명한 학자인 전징지(錢澄之)의 <소지록(所知錄)>에도 이자성이 사망한 경위를 상세히 적고 있다. <소지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때, 틈적 이자성이 패배하여 구궁산으로 도망쳐 갔다. 촌민의 호미에 맞아서 죽었다, 촌민은 그의 수급을 초독 하등교에게 바친다. 이렇게 들었다. 이자성이 패배하여 동관을 나선 후, 구궁산의 아래로 도망친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였다. 친히 십여기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서 형세를 관찰했고, 스님에게 돈을 주고 밥을 하라고 하였다. 스님은 그가 도망친 장수로 의심했다. 게다가 큰 도을 가지고 있었다. 몰래 산을 내려가 산민들에게 말한다. 그러자 호미를 들고 올라와서 마구 때려서 죽인다. 그들의 옷을 벗기니, 그 중에는 금용의를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화살촉이 눈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자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수급을 베어서 하등교에게 보고하고, 하등교는 사실대로 조정에 상소를 올린다..."


<소지록>을 보면 4가지 상황을 알 수 있다: 이자성의 사망시간은 순치2년 여름이다; 사망장소는 양광 통성의 구궁산이다; 이자성을 죽인 원흉은 구궁산 위의 스님이다; 이자성을 살해한흉기는 농민의 호미이다.


전징지의 <소지록>에 따르면, 이자성은 대전에 들어선 후, 몸이 이미 아주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대전밖의 두 위병도 역시 문지방에 앉아 깊이 잠이 들었다. 스님은 산 아래의 민간을 찾아, 절안에 도망친 장군이 있는데 적지 않은 재물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지금 깊이 잠들었으니, 때려죽이고 재물을 나누자고 말한다. 그리하여 십여명이 손에 호미를 들고 산위의 절로 달려가서, 깊이 잠들어 있던 이자성을 때려죽였다.


역사의 변화는 아주 기이하면서도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아마도 후세에 조작할 여지를 남긴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