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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자성)

이자성(李自成)은 면전에서 들이받는 유종민(劉宗敏)을 왜 죽이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19. 5. 4.

글: 금일생활시각(今日生活視角)



유종민은 이자성 휘하여 최고용장이다.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자성을 따라다녔으며, 이자성이 북경을 취하고, 대명왕조를 무너뜨리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유종민은 자주 이자성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 여러번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자성에게 대들었다. 그렇다면, 유종민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었을까? 그는 이자성이 자신을 죽일까 겁나지 않았단 말인가?


이자성이 북경성을 공격하여 대명왕조를 무너뜨린다. 북경으로 진입한 후, 이자성은 명을 내린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재물과 부녀를 약탈하는 자는 모조리 죽인다."


처음에 농민반란군은 기율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점점, 농민군은 명나라관리들을 괴롭히고, 사방에서 재산을 약탈했다.


유종민은 명나라의 대신 팔백여명을 군영에 가두어 놓고, 이들 관리의 관직고하에 따라, 금은보화를 내놓게 했다. 만일 내놓지 않거나, 부족하면, 모조리 혹형으로 대한다. 손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불에 태우고, 주리를 틀었다. 심지어 천도만과(千刀萬剐)까지 한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군은 대거 약탈을 벌이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한다. 백성들은 견디기 힘들어 했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일시에, 북경성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낭자해진다. 이것을 앞장서서 행한 인물이 바로 유종민이다


국면이 일시에 혼란해지자, 이자성은 유종민을 책망한다: "너는 왜 나를 도와서 좋은 황제가 되도록 해주지 않는 것이냐?" 누가 알았으랴. 유종민은 그 자리에서 들이받는다: "황제의 권위는 네 것이지만, 약탈하는 위세는 내 것이다. 우리 둘은 서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자."


유종민의 이 말은 이자성의 말을 그대로 들이받는 것이다.


나중에, 유종민은 명나라 산해관총병 오삼계의 집을 약탈하는데, 오삼계의 부친을 붙잡고, 오삼계의 애첩인 진원원을 차지한다. 오삼계는 원래 이자성에게 투항하려고 생각하고 북경으로 오는 중이었드나, 집안이 약탈당하고, 부친은 붙잡혀 가고, 애첩을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듣자, 오삼계는 대노한다. 즉시 산해관으로 돌아가, 청군에 투항한다.


숭정17년(1644년) 사월 오일, 이자성은 무영전(武英殿)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한다. 유종민에게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가서 오삼계를 치도록 하려 했다. 누가 알았으랴. 유종민이 그 자리에서 들이받는다: "우리는 모두 도적인데, 왜 너는 경성에서 즐기고 있는데, 나만 전선으로 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하느냐."


유종민이 공개적으로 이자성에게 대들자 이자성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친정을 나서게 된다. 유종민은 이자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려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개길 수가 없어서, 이자성을 따라 함게 산해관으로 오삼계를 치러 떠난다.


다만, 이 전투에서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청군과 오삼계의 연합공격에 격패당한다. 농민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냈고, 이자성은 참패하여 황급히 북경으로 도망쳐 온다.


얼마 후, 청병이 추격해 오자, 이자성은 황급히 북경성을 빠져나가 서안으로 물러난다. 결국 서안도 지켜내지 못하고, 이자성은 호북의 구궁산으로 도망쳤다. 거기에서 현지 지주에게 죽임을 당한다.


승리의 과실이 거의 손에 들어왔는데, 유종민 때문에 결국은 망했다. 쥐새끼 한 마리가 모조리 망쳐버린 꼴이다. 결국 만주족 청나라가 중원으로 들어와 주인이 된다.


그렇다면, 유종민이 여러번 공개적으로 이자성에게 대들고, 하극상을 벌였는데도 이자성은 왜 유종민을 죽이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유종민이 이자성에게 큰 공을 세워주었기 대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종민이 없었더라면, 이자성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유종민은 섬서 사람이고, 철장(鐵匠) 출신이다. 아마도 힘이 좋았던 것같다. 그래서 유종민은 전투때 아주 용맹했다.


이자성은 여러번 패전을 겪었고, 위험한 지경에 첳ㅆ는데, 거의 모두 유종민이 목숨을 걸고 이자성이 곤경에서 벗어나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숭정12년(1639년) 여름, 이자성은 명나라 관군에게 사천서부의 산 속에 갇혀 있었다. 이자성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는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한다. 부하들도 대부분 영군에 투항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유종민이 앞장서서, 자신의 두 처를 죽여서서 결심을 나타낸다. 죽기를 각오하고 이자성을 따르겠다고 맹세를 한다. 결국 유종민등의 도움으로, 이자성은 말을 타고 운현에서 하남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다시 수만의 병력으로 키워내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유종민은 큰 공을 세웠고, 공이 높은 것을 가지고 오만했다. 이자성은 할 수 없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죽이지 못했다. 이자성이 유종민을 죽이지 못한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토사구팽했다는 말을 듣는게 싫었을 것이다.


이자성이 유종민을 죽이지 않는 바람에 결국 유종민이 대사를 그르친다. 민심을 잃고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