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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발해(渤海)와 일본(日本)의 해상교류

by 중은우시 2023. 5. 19.

글: 송정(宋靖)

 

발해국(698-926)은 '해동성국'으로 불리웠고, 나라는 200여년간 존속하면서, 동북아 여러 나라, 지역과 문화 및 경제교류를 진행했다. 발해국은 동북아에서 중요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해상교통로를 통하여 발해국 남경(북한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靑海土城))에서 출발하여 직접 신라로 가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발해국 동경(지금의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일설에는 북한 부거리)에서 출발하여, 직접 일본으로 갔다. 

 

대일항로는 비교적 안전했다.

 

발해국은 강역이 동해에 닿았고, 5개의 교통간선중 하나로서 일본도(日本道)는 발해의 제2대왕인 대무예(大武藝, 718-737)시기부터 개척되었다. 그때 일본은 신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발해와 '친인결원(親仁結援)'의 우호관계를 건립한다. 720년, 일찌기 사신을 보내어 '그 풍속을 보았다.' 727년, 대무예는 사실에게 "글과 초피(貂皮) 삼백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한다.

 

일본도는 육로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간 다음, "바다를 항해"한다. 해로항로는 3개가 있다. 북선(北線),축자선(築紫線), 남해부선(南海府線)이다. 북선은 발해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주요항해노선이다. 항로는 동경용원부의 외항인 파사특만(波謝特灣)에서 출발하여 동으로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 주부(中部)의 북해안인 능등(能登, 후쿠이(福井)), 가하(加賀, 이시카와(石川))일대에 도착한다. 항해거리는 약 200해리이다. 이 항로는 발해국에서 일본의 수도인 평성경(平城京, 나라(奈良)), 평안경(平安京, 교토(京都))간의 비교적 가까운 항로이다. 해류, 계절풍등 기상조건도 항해에 적합하다. 

 

축자선의 항해는 우연한 사건때문이다. 759년, 파사특만에서 출발한 선박이 바람을 만나 대마(對馬)까지 표류한다. 다시 난파강구(難波江口, 지금의 오사카시)로 가고, 나중에 축자(지금의 큐슈 후쿠오카시)에 도착한다. 남해부선은 남해부의 토호포(吐號浦)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서 대마해협을 건너 축자에 도착한다. 776년 187명이 출발했는데, 그중 141명이 사망한다. 그리하여 그후에는 토호포항에서 일본으로 가지 않았다.

 

발해국사신이 일본을 방문한 것은 정식방문이 34차례에 달한다.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보낸 것은 13차례이다. 발해국사신이 일본에 상륙한 지점은 모두 15곳이다. 발해국의 사신이 탄 선박은 돛을 달고 바람에 의지하여 항해하였으며, 가을에 출발하여,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부는 북풍과 서북풍을 이용했다. 서에서 동해를 우회하여 가하, 좌도(佐渡)등 주부의 해안선에 상륙했다. 귀국할 때는 봄여름의 계절풍이 대륙의 편남풍으로 부는 것을 이용하여 동에서 동해를 우회하여 안전하게 돌아갔다. 배에는 천문생(天文生)이 타고 항로를 확보했다. 비록 사고로 많은 사상자를 낸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사고발생율은 높지 않았고, 항로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대일교류는 3단계로 나뉜다

 

발해국과 일본의 바다를 통한 교류는 동북아지역 국제관계의 영향도 받고, 각국의 국내형세와도 관련이 있었다. 발해국의 대일교류는 3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무직사자시기(武職使者時期), 문직관원사자시기(文職官員使者時期), 전직사자시기(專職使者時期).

 

최초의 5번의 방문은 무직인 장군이 사자를 맡았다. 쌍방간에 정치, 군사분야의 소통과 협력을 추구했다. 당 상원2년(761년),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발해를 국으로 하고, 흠무(欽茂)를 왕으로 삼다". 즉 발해군왕이 발해국왕으로 승격된 것이고, 발해국은 대외교류의 중심을 무역으로 전환한다. 발해사자는 정당성(政堂省)과 문적원(文籍院)의 관리가 맡았다. 사신단규모는 기본적으로 105명가량으로 고정되었고, 외교인원이 전문화된다. 외교사절단에는 일반적으로 사두(使頭, 大使) 1명, 사사(嗣使, 副使) 1명, 판관(判官) 2명, 녹사(錄事) 2명, 역어(譯語) 2명, 사생(史生) 2명, 천문생 2명, 대수령(大首領) 65명, 초공(梢公) 28명.

 

일본의 발해국에 대한 외교는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727년-799년으로 일본이 발해에 13번 사신을 보내는데, 모두 이 시기에 보낸 것이다. 일본이 발해와 연락한 것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이다. 제2단계는 804년에서 926년 발해국이 멸망할 때까지로, 발해국의 사신이 오는 기간을 6년에서 12년으로 고친다. 이 단계에 일본은 발해의 사신이 오는 것에 제한을 많이 두었다. 일본의 발해국에 대한 정책이 바뀐 것이다. 이는 동북아지구의 외교정책변화와 일치한다. 9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대외사절파견을 중단한다. 810년 발해사파견을 중단하고, 816년 신라사파견을 중단하며,838년 견당사파견을 중단한다. 사신파견을 중단한 것은 일본의 천도와 대외전쟁으로 인한 곤궁과 관련이 있다.

 

경제교류는 쌍방의 수요에 부합했다.

 

발해국과 일본의 교류는 정치활동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경제적인 요소가 있었다. 발해국은 일본에 빈번하게 사신을 보낸다. 시간간격은 1년 내지 3년이 많았고, 가장 긴 때는 14년이었다. 그 내재적인 동력은 무역에 대한 수요였다. 대흠무(737=793)시기, 발해국의 방일사자는 겨울에 도착해서 봄에 돌아갔고, 연속하여 사신을 파견한다. 798년, 일본사신이 발해국으로 간다. "사신이 오는 기간을 6년으로 하자"고 말한다. 그때 발해국의 사신이 와서 "육년으로 하면 너무 늦다"고 말하며 기한을 두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824년, 일본은 발해국의 방일기한을 개정하여 "고이일기(告以一紀, 일기는 12년을 말함)"로 한다. 다음 해에 발해국은 다시 사신단을 일본으로 보낸다. 828년 일본은 <응금교관사(應禁交關事)>를 반포하여, 발해사신단과의 무역을 엄격히 제한한다. 무역이 제한을 받자, 841년 발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일본이 요구한 12년 1회의 요구를 준수한다.

 

발해국의 사신이 일본을 방문한 것은 실질적으로 관방무역이다. 발해국이 일본에 수출하는 물자는 주로 토산품으로 초피(貂皮, 담비가죽), 대충피(大蟲皮, 호랑이가죽), 웅피(熊皮, 곰가죽), 표피(豹皮, 표범가죽), 인삼, 봉밀(蜂蜜, 벌꿀)등이다. 처음에 일본측이 발해사신에 제공하는 물품은 주로 사직품(絲織品)이었다. 776년, 발해사신 사도몽(史都蒙)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회사(回賜)물품에 황금, 수은, 금칠(金漆), 칠(漆), 해석류유(海石榴油), 수정염주(水晶念珠), 빈랑선(檳榔扇)등 물품을 추가한다. 발해의 방일사신단중의 "대수령"은 말갈(靺鞨) 각부의 수령이다. 발해정부는 말갈각부를 조직하여 대일무역을 진행한 것이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지방에 대한 통제를 확보했다. 대흠무가 재위하던 시기에 여러번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보낸다. 예를 들면, 746년 발해와 철리(鐵利)의 방일사절단은 1,100여명에 달했고, 779년에는 359명에 달했다.

 

872년, 일본측은 내장료(內藏寮)와 발해객도(渤海客徒)간의 화물교역이후, 경사인, 시인, 집시전인등으로 하여금 발해객도들과 사적으로 교역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882년, 사적교역을 금지한다. 그 의도는 일본정부가 무역을 독점하기 위함이었다. 발해국과 일본의 무역은 쌍방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순서는 차례대로 조정, 경사관리, 그 다음이 민간이다. 일본조정은 발해국 민간선박이 일본으로 와서 무역을 진행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규정을 어기고, 발해상인이 어떤 때는 진실한 신분을 숨기고, 당나라사람 혹은 재당신라인의 행열에 끼어서 당나라사람이라고 하면서 일본으로 오기도 했다.

 

어쨌든 발해국과 일본의 왕래는 밀접했고, 초기에는 정치와 군사목적이 위주였지만, 후기에는 상업무역이 위주였다. 발해국과 일본의 교류 배후에는 자주 당나라와 신라의 그림자가 보인다. 예를 들어, 759년, 일본이 발해국에 선물로 보낸 무희를 나중에 발해국이 다시 당나라에 선물로 보낸다. 일본유학생, 승려, 신라사신은 발해국을 통해 출입했고, 당나라와 일본간의 물품, 서장도 자주 발해국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발해국과 일본의 교류는 동북아에서 중시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