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습사사(時拾史事)
당현종 개원(혹은 천보) 모년 팔월 초닷새, 당현종의 생일을 축하가기 위해 개최된 천추절(千秋節) 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장안 흥경궁(興慶宮) 화악루(花萼樓)의 앞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였고, 자리는 꽉 차서 물샐 틈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 중 일부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해수! 조해수!"
귀청이 찢어질 듯한 환호성 속에서 체격이 탄탄하고 근육이 발달된 남자 한 명이 두 어깨에 각각 길다란 대나무장대를 얹고 힘있는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오해하지 말라. 팬들의 응원은 이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조금 후 한 소년이 공중회전을 하며 나왔다. 그는 가볍게 바닥에 발을 디뎠고, 몸은 민첩하게 다시 뛰어올라 두 대나무장대의 사이로 타고 올라가서 금방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관중들이 기다리던 조해수였다. 그는 출도(出道)한지 얼마 되지 않은 장간희(長杆戱) 예인(藝人)이다. 당나라때는 장간희예인을 "간목가(竿木家)"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를 부를 때는 "간목가조해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대나무장대 꼭대기에 한 발로 서서 관중들에게 포권하여 인사를 했다. 그후 대나무장대를 거점으로 몸을 회전시키고 춤을 추는 등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놀라운 동작들을 보여주는데, 그 실력은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기예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였고, 용모도 빼어났다. 키는 약간 크며 건강한 몸이었다. 팬들 뿐아니라 지나던 사람들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는 장간희의 대가들을 구경하러 온 것이데, 생각지도 못하게 가장 큰 기쁨을 준 것은 신인인 조해수였던 것이다.
나중에 시인 장호(張祜)는 <잡곡가사(雜曲歌辭)-천추락(千秋樂)>에서 당시의 성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팔월평시화악루(八月平時花萼樓)
만방동락주천추(萬方同樂奏千秋)
경성인간장간출(傾城人看長竿出)
일기초성조해수(一伎初成趙解愁)
이번 천추절 공연을 통해, 조해수는 일거에 최고인기의 연예인이 된다. 그는 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되고, 또한 유명한 여가수의 방심을 얻게 된다. 그녀의 성은 배(裴)이고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자매들 중에서 첫째이어서 그녀를 '배대낭'이라고 불렀다.
배대낭은 교방(敎坊)의 예인집안 출신이다. 장안성에는 황실의 교방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좌교방으로 광택방(光宅坊)에 있었고, 무도류의 예인을 길렀다. 다른 하나인 우교방은 연정방(延政坊)에 있었는데, 주로 가수를 배출했다. 배대낭은 가수이다. 어려서부터 우교방에서 공부했다. 그녀의 오빠인 배승은(裴承恩)은 저명한 백희(百戱) 예인이다. 그가 잘 하는 것은 공중제비넘기였다. 배대낭은 비록 지명도와 영량력에서 다른 가수인 허화자(許和子, 황제가 내린 예명은 '永新'이다)에 약간 못미치지만, 그래도 일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에 예인들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배대낭은 우교방의 유명한 가수이므로, 물질적인 대우는 일반 백성들보다 몇배는 좋았다. 그러나, 그녀의 개인 생활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원인은 바로 고금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이다. 혼인불행.
배대낭은 재능이 출중하고, 가수로서도 성공했지만, 고대의 여성은 스스로 결혼상대를 정할 수 없었다. 일찌기 오빠인 배승은이 주재하여 그녀는 간목가인 후모(侯某)에게 시집갔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결혼은 문당호대(門當戶對) 즉 집안이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대낭은 후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해수를 만나고 난 후 그와 바로 마음이 통하고 여교사칠(如膠似漆)하게 된다.
구체적인 내용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연예게는 미남미녀가 운집해 있고, 유혹은 곳곳에 널려 있다. 하물며 배대낭이 살던 시대는 비교적 여성에게 개방된 당나라때였다. 연습할 때나, 공연할 때나, 모임을 가질 때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자주 만나다보면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감정을 키울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연예계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현대의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보더라도 이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배대낭과 조해수의 사랑은 점점 커지고, 몰래 만나는 횟수도 점점 늘어난다. 이들의 사통이 발각될 확률이 점점 커지게 된 것이다. 일단 장안의 누군가가 증거를 잡게 되면 배대낭과 조해수가 당하게 되는 것은 절대로 현대의 연예인들보다 못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죄하고" "잠시 업무를 중단하고, 반성하는 것" 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당율에 따르면, 간통은 1년반의 유기징역에 처해진다. 유부녀는 2년의 유기징역에 처해진다. 원인은 묻지도 않고 이유를 따지지도 않는다. 배대낭은 마치 이 애정의 최후를 예상한 듯하다. 자신과 애인은 모두 스타 예인으로서의 생활은 끝장나고, 감옥에 갇혀야 하며, 출옥후에도 명성이 바닥에 떨어져 다시 예인으로 살아가기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광경은 아주 좋지 않다.
이와 동시에 배대낭의 남편인 후모에 대한 혐오는 날로 강해진다. 그녀는 하루빨리 이 무미건조한 혼인생활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후 광명정대하게 진정한 사랑과 함께 살고 싶었다.
공포, 혐호, 그리고 갈망. 이런 감정은 신속히 조해수와 배대낭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꽃을 피운다. 그들은 위험을 선택하기로 한다. 후모를 영원히 없애버리기로 결정한다.
기회는 바로 왔다. 후모가 병에 걸렸다. 어떤 병인지는 잘 모른다. 고대의 의료여건으로 봐서, 단순한 감기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게다가 고인들은 미신을 믿었다. 후모가 급사하더라도, 그저 사수(邪祟, 원인을 모르는 병)에 걸렸다고 말하면 된다. 먼저 병을 치료하는 척하다가 나중에 목숨을 거두면 된다. 배대낭과 조해수는 밀모하여 후모의 죽에 독을 넣는다. 남아있는 사료를 분석하면, 배대낭은 가수로서 바쁘다보니 집안 일은 하지 않았다. 환자인 후모의 저녁도 다른 사람이 해주었거나, 혹은 외부에서 사왔다. 당나라때 장안의 외식산업은 송나라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흥성했다. 동시, 서시 두 시장에 일부 대식사(大食肆)는 케이터링서비스까지 했다. 한번에 수백명의 연회에 음식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니, 배달도 분명히 가능했을 것이다.
사건의 진전을 보면, 배대낭, 조해수 두 사람은 예인들 사이에서 가까운 친구인 왕보국(王輔國), 정함산(鄭銜山)과 상의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배대낭, 조해수와 가까운 사이일 뿐아니라, 후모와도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왕보국, 정함산은 조해수, 배대낭을 배신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후모가 참혹하게 죽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다른 예인들인 설충(薛忠), 왕염(王琰)을 통해 후모에게 경고를 보낸다: "만일 오늘 저녁에 누군가 죽을 보내거든 절대 먹지 말라."
이어진 일은 약간 불가사의하다. 정상인이라면 친구가 자신에게 그렇게 경고했다면, 분명히 그 말을 한 내력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왜?"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후모는 어떻게 했을까? 깨달았을까?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떤 대응조치를 취했을까? 사료에 후모의 심리상태는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설충, 왕염에게 무엇을 물었는지도 언급해놓지 않았다. 그러면 그냥 시간순서대로 사건의 진전을 설명해보기로 한다. 그 후에 역으로 추측해보기로 한다.
그날 저녁에 과연 누군가 죽을 보내왔다. 후모는 먹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설충, 왕염이 한 말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미 경각심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대낭은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밤중에 조해수를 방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무거운 모랫가마니를 후모의 몸 위에 얹어서 그를 질식사시키려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함산을 여전히 믿었던 것같다. 정함산에게 도움을 쵸청한다. 정함산은 적극적으로 모래가마니를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
정함산은 확실히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후모도 도우려 했다. 조해수, 배대낭 이 간부음부(奸夫淫婦)가 아니라. 그는 실내에 등이 꺼져 있고, 빛이 어두운 틈을 타서, 후모의 몸에 모래가마니를 얹을 때, 일부러 그의 코와 입부분을 압박하지 않도록 놓았다. 당황한 상태이다보니, 배대낭, 조해수 두 사람은 정함산의 어런 동작을 눈치채지 못한다. 일을 마치고, 배대낭은 조해수, 정함산을 데리고 현장을 떠난다. 아마도 훈련, 공연때문이라고 핑계대고 다른 곳에서 잠을 잔다.
후모는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사료기재에 따르면, 그는 해가 밝은 다음에야 신고한다. 이를 보면, 배대낭이 행동할 때 그는 깊이 잠들었던 것같다. 아니면 그가 병을 앓고 있어서, 약이 독해서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모랫가마니가 자신을 누르고 있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아마도 잠을 더 이상 잘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깨고는 자신의 몸 위에 무거운 물건이 얹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힘을 다해서 멋어난 후 신고한 것이다. 아마도 그를 찾아온 친구나 제자가 상황이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모랫가마니를 치우고 그를 도와 신고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 죽에 장난을 치고, 모랫가마니를 몸 위에 얹어놓기까지 했는데, 후모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편안하게 집에서 잠들었었다. 이를 보면 그는 '모래가마니'음모는 전혀 몰랐던 것같다. 배대낭에 대하여도 아직 깊이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죽에 독을 넣은 것이 배대낭일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정함산이 '모랫가마니음모'를 후모에게 털어놓고, 둘이서 '장계취계, 인사출동"의 계획을 짠 것일까? 그렇게 후모를 미끼로 하여 배대낭, 조해수의 간통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잡으려 한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그날 저녁에 발생한 모든 일을 후모가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간부음부가 도망칠 리스크도 안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관아에 신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정함산은 현장을 떠났다가 바로 돌아와서 그의 몸 위의 모랫가마니를 내려주고 신고했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후모가 죽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졌지만, 아마도 배대낭이 자신을 해치려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같다. 아마도 설충, 왕염이 그에게 죽에 누군가 장난쳤을 것이라고 한 것을 그저 가래침이나 재같은 것을 넣었을 정도라고 여겼을 것이다. 배대낭과 조해수의 간통사실을 후모는 아마 전혀 몰랐던 것같다.
후모는 반응이 느렸지만, 관아는 전문가들이다. 바로 사건을 해결하고, 조해수, 배대낭은 체포된다. 재판에서 범인들에게 장 100대의 형을 내린다. 일이 이 정도로 그친 것에 대하여 배대낭은 마땅히 정함산에게 감사해야 한다. 정함산이 후모의 목숨을 구해준 동시에 간접적으로 그녀의 목숨도 구해준 것이다. 당률에 따르면, 살부(殺夫)죄가 아니라, 남편을 구타하여 죽인 것으로 인정되더라도 그녀는 참형에 처해져야 한다.
사건후의 상황을 보면, 당나라때도 사건기록에 대하여는 기밀을 유지했던 것같다. 외인들이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몰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연예계에는 후모가 죽지 않은 것은 모랫가마니가 터졌고, 모래가 흘러나와서 중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소눔이 돌았다. 여자예인들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후 남편을 눌러죽일 모랫가마니를 만들 때는 잘 꿰매서 터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당사자들의 이후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료에 이런 소인물에 대하여까지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관은 부지물식간에 적어놓은 다른 기록에서 우리는 조해수의 최후에 대한 하나의 추정은 할 수 있게 해놓았다.
당현종 천보14년(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다음 해 756년, 해(奚), 거란(契丹)등 부족이 그 틈을 타서 노략질하고 유주(幽州)를 침범한다. 당나라군대는 인원이 부족했다. 그해 오월, 대간예인(戴竿藝人)들이 범양보위전에 투입되고, 대부분은 성북쪽 청수하(淸水河)변에서 전사한다. 조해수가 아마도 그 안에 있었을지로 모르겠다.
그후 민간에는 이런 노래가 퍼진다.
구래과대간(舊來夸戴竿)
금일불감간(今日不堪看)
단간오월리(但看五月裏)
청수하변견거란(淸水河邊見契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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