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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촉한(蜀漢)을 멸망으로 몰아간 5명의 반도(叛徒)

by 중은우시 2023. 4. 20.

글: 정회역사호(情懷歷史號)

 

219년, 유비는 조조를 격패하고 한중(漢中)을 차지한다. 같은 해 유비는 유봉(劉封), 맹달(孟達)을 파견하여 상용(上庸)등의 군(郡)을 차지한다. 그때에 이르러 촉한은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촉한의 전성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관우가 부주의로 형주를 잃고, 이릉전투에서 패한 이후 촉한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삼국중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가 된다. 그때 5명의 반도는 자연히 촉한이 급속히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만든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1. 미방(麋芳)

 

미방(생졸년 미상), 자는 자방(子方)이고, 동해군(東海郡) 구현(胊縣)(지금의 강소성 연운항시) 사람이다. 유비의 미부인의 남자형제이다. 미방은 원래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의 부하였고, 조조가 조정에 청하여 팽성상(彭城相)을 지냈다. 나중에 관직을 사직하고, 유비를 따라 서주에서 업성(鄴城), 여남(汝南), 신야(新野), 장판파(長坂坡), 강하(江夏)등지를 여러해동안 전전했다. 그리하여, 촉한에서 경력이 아주 심후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는 미부인의 남자형제라는 특수한 지위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미방의 배반을 이해하지 못했다.

 

219년, 유한이 한중왕을 칭할 때, 미방은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그를 경시했다. 나중에 물자공급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관우에게 책망을 듣게 되어, 마음이 불안해진다. 여몽(呂蒙)이 형주를 기습할 때, 이미 투항한 부사인(傅士仁)을 미방에게 보여주고, 미방도 투항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관우는 패전하고 피살당한다. 그후 미방은 오나라에서 장군으로 있으면서 오나라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한다. 

 

2. 부사인(傅士仁)

 

부사인은 유주(幽州) 광양군(廣陽郡) 사람이다. 그의 주공 유비는 어렸을 때 계속 유주에서 활약했으나, 흥평원년(194년) 서주로 떠난 이후부터는 다시 유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을 때, 부사인은 당시 관우의 직속부하였다. 다만, 관우는 부사인, 미방에 대하여 오만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부사인, 미방 두 사람은 불만이 있었고, 관우와는 감정의 골이 쌓인다.

 

건안24년(219년), 관우가 양번(襄樊)을 북벌하면서 두 사람에게 물자공급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부사인, 미방 두 사람은 물자공급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그러자 관우가 이런 말을 한다: "돌아가면 그놈들을 처치하겠다." 두 사람은 모두 불안에 떨었다. 게다가 관우는 사대부들에 대한 태도가 일관되게 오만하고 험악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두려우면서도 화가 났다. 같은 해 동오의 장수 여몽이 남군으로 온다. 부사인, 미방 두 사람은 모두 배반하고 손권에게로 간다. 

 

부사인, 미방의 배반으로, 관우의 양번북벌의 좋았던 국면은 파괴되고, 관우가 피살당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촉한은 형주의 군현을 철저히 상실하게 된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부사인, 미방은 촉한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만든 원흉들이라고 할 수 있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한해 한다.

 

3. 맹달(孟達)

 

맹달(?-228), 자는 자도(子度), 원래 자는 자경(子敬)이었는데, 유비의 숙부의 이름이 유자경(劉子敬)이어서 피휘를 위해 자를 고친 것이다. 맹달은 부풍군(扶風郡) 미(郿)의 사람이다. 동한말기, 맹달은 익주로 왓고, 유장(劉璋)의 부하가 된다. 당연히 법정(法正)과 마찬가지로 맹달을 일찌감치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에 투항한다.

 

219년, 맹달은 유봉과 함께 상용등 군을 점령한다. 같은 해 관우가 번성(樊城), 양양(襄陽)을 포위할 때, 맹달이 병력을 보내 관우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여 유비의 진노를 산다. 그리하여 맹달은 촉한을 배반하고 조위로 간다. 그후 조위는 유봉에게도 투항을 권유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맹달은 서황(徐晃), 하우상(夏侯尙)과 손을 잡고 동삼군(東三郡)을 점령한다. 즉 맹달은 촉한을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옛 주공과 창과 칼을 맞대고 싸웠던 것이다.

 

조위에 있는 동안, 맹달의 관직은 산기상시(散騎常侍), 건무장군(建武將軍)에 이르고, 평양정후(平陽亭侯)에 봉해진다. 228년에 이르러, 맹달은 다시 조위를 배반하고 촉한으로 돌아오고자 한다. 그러나 미리 들통나는 바람에 사마의(司馬懿)에게 죽임을 당한다.

 

4. 장서(蔣舒)

 

장서는 촉한의 무흥독(武興督)이었는데, 나중에 조정에 의해 직위에서 면직된다. 그리하여 장서는 촉한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263년, 사마소(司馬昭)가 18만대군을 모아 촉을 공격하는 전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촉한은 다시 장서를 기용하여 부첨(傅僉)을 도와 양안관구(陽安關口)을 지키도록 파견한다. 종회(鍾會)가 십여만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할 때, 장서는 성을 나가 적과 싸우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부첨은 그의 말을 믿고 막지 않았으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장서는 부하들을 이끌고 성을 나선 후, 직접 호열(胡烈)에게로 가서 투항한다. 호열은 양안관이 빈틈을 타서 급습했고, 부첨은 싸우다가 죽는다.

 

양안관구을 잃게 되자 종회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창고의 곡식들을 많이 획득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종회는 검각(劍閣)일대로 가고, 강유(姜維)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이들을 막기 위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서의 배반으로 촉한의 방어배치는 무너져 버린다.

 

5. 마막(馬邈)

 

마막(생졸년 미상). 삼국시대 촉한의 강유(江油)를 지키는 수비장수. 경요6년(263년), 사마소가 사람을 보내 촉한을 대거 침공한다. 등애(鄧艾)는 부대를 이끌고 음평(陰平)을 몰래 건너고, 부장(部將) 전장(田章)으로 하여금 선두부대를 이끌고 강유(지금의 사천성 평무의 동남쪽)을 공격하게 한다. 마막은 군대를 이끌고 전장의 부대를 기습했으나 실패하고는 투항해버린다. 강유를 탈취한 후 등애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촉한의 복지(腹地)에 이른다. 그러므로, 마막의 투항은 확실히 촉한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