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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2012년 정변미수사건의 내막

by 중은우시 2022. 7. 5.

출처: 미국지음(美國之音)

 

미국최대의 오프라인 서점 Barnes & Noble의 판매대에는 최근 영문판 신간서적 "China Duel(중국대결)"이라는 책이 올라왔다. 이 책에서는 2012년 중국내부의 경심동백(驚心動魄)할 정변미수사건의 내막을 소개하고 있다. 만일 정변의 결과가 달랐더라면, 분명 오늘날의 "동태청령"이나 홍콩의 "일국양제"의 분쇄등등도 없었을 수 있다. 다만 중국의 정국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의 작자인 향양(向陽)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중공의 당파투쟁과 정치체제에서 외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내부사정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외부의 중공내부에 대한 의문은 모두 이 책 안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 고위층의 내막은 모두 내가 근거리에서 접촉한 것이다. 어떤 것은 내가 참여했고, 모두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볼만한 점이다."

 

향양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할아버지대에서 혁명에 참여하여 강산을 얻었으므로, 그의 부친대에서도 정계와 군계에 고위직에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이로 인하여 큰 혜택을 입었고, 한때 관계와 경제계에서 모두 잘나갔다. 그의 가족은 보시라이(薄熙來)와 교분이 깊었으며, 그의 부친은 심지어 저우용캉(周永康)등이 모의한 '궁중정변'에 참가했다고 한다.

 

<중국대결>은 베이징의 2012년 3월 19일 후진타오(胡錦濤)는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저우용캉이 당시 근무하던 정법위빌딩을 포위하는데서 시작한다.

 

책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날 오후 12시 55분, 당시 중공중앙군사위부주석을 맡고 있던 쉬차이허우(徐才厚)는 기밀전화를 통해, 일찌기 "공위경사(拱衛京師)"라 불리는 당시 제38집단군의 작전실에 연락하여, 명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제38집단군 군장 쉬린핑(許林平), 그리고 정치부주임 창웨(常躍), 정치위원 저우윈펑(鄒雲鵬)에게 명을 내려, 집단군 산하의 헤베이 바오딩(保定)에 주둔하고 있던 제113사와 육군항공병 제8단 그리고 창핑(昌平)에 주둔하고 있던 장갑제6사를 베이징으로 진입시키도록 명령한다.

 

구체적인 행동명령은 후진타오가 직접 구두로 하달했다. 후진타오는 전화를 통해, 제113사에게 베이징에 집결하여 중앙정법위빌딩을 포위하도록 명령한다. 제6장갑사단은 함께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공안부, 무경총부, 공안부8국을 포위하고 저항하는 무장역량의 무장을 해제시키도록 했으며, 항공병제8단은 호응하는 역할로 베이징시의 제공권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 행동의 문자명령에서는 오직 후진타오와 쉬차이허우만 서명했고,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시진핑은 서명하지 않았다. 이는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책에서는 같은 시간 정법위빌딩안에는 저우용캉이 "태자당"의 구성원인 천하오쑤(陳昊蘇, 陳毅의 아들), 허광예(何光曄, 何長工의 아들)과 같은 방에 있었다. 두 명의 "태자당"은 저우용캉에게 망설이지 말고 '결심을 내려 중남해로 병력을 보내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며칠전 해직된 보시라이와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이 소재한 정법위빌딩은 이미 군대에 포위되었고, 헬기의 소리도 은연중에 들려왔다. 공안부에서도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그들도 포위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포위된 곳은 중앙경위국과 방송국도 있었다.

 

책에서는, 후진타오의 '숙적'이던 천하오쑤와 허광예는 계속 당시 상위중 한명인 저우용캉을 도와 '중남해를 점거'하고자 기획했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었고, 후진타오는 내부인을 통해서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위의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정법위빌딩에 포위된 저우용캉은 후진타오와 통화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결국 장쩌민(江澤民)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은 후진타오에게 사정하면서, 권위를 이용하여 후진타오를 압박하여 후진타오가 "대국의 안정을 중시하여" 그 정도 선에서 끝내주기를 압박했다.

 

그리하여, 서면으로 기획중이던 "정변"과 군대를 동원한 "정변진압"은 "한 바탕 오해였다"는 말로 종료된다.

 

나중에 후진타오는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한때 80만 무경을 장악했던 저우용캉은 진성감옥에 갇힌다.

 

책에서는 천하오쑤와 허광예가 보시라이의 '일당'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원래 "중공내부에서 한 사람이 총서기, 군사위주석과 국가주석의 3가지 직위를 겸하는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변'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돌발사건인 왕리쥔(王立軍)사건으로 원래의 계획은 무산된다.

 

2012년 2월 6일, 왕리쥔이 청두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친다. 그가 가지고 간 엄청난 기밀문건이 곧 공개될 판이었다. 보시라이는 강력하게 반발했고, 2월 8일과 9일 윈난을 시칠하면서 당당하게 전지(滇池)로 가서 해구(海鷗)에 먹이를 준다. 부친 보이보(薄一波)의 세력지이자, 중국인민해방군제14집단군이 바로 쿤밍(昆明)이다. 이로 인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3월초의 "양회"기간동안, 왕리쥔의 망명사건은 여전히 가장 핫이슈였다. 이 기간동안 천하오쑤와 허광예의 건의하에 보시라이는 충칭시장 황치판(黃奇帆)으로 하여금 전인대가 개막하는 당일인 3월 5일 홍콩 봉황TV와 인터뷰를 하도록 한다.

 

"황치판은 오만하게 왕리쥔을 데려오기 위하여 70대의 경찰차량을 동원하여 청두미국영사관을 포위했다는 주장에 반박하며, 그것은 적대세력의 여론조작"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또한 이 그 경찰차량은 모두 청두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청두경찰의 불만을 산다.

 

이와 동시에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걱정이 많았다. 왕리쥔사건이 양회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후진타오는 할 수 없이 허궈창(賀國强)을 충칭대표단을 시찰하던 보시라이에게 보내어 말을 전한다. 보시라이에게 조용히 지내면서 영향에 주의하고, 중앙에 협조하여 양회가 정상적으로 개최완료할 수 있게 하라고. 그러나 보시라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양회를 통해 당당하게 나서서 스스로를 변명했다. 이는 후진타오와 여러 상위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책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인대가 폐막되기 하루 전인 3월 13일 저녁, 후진타오는 긴급하게 정치국상위회의를 소집하여, 보시라이의 충칭시위서기직무를 면직시키는 건을 토론한다. 9명의 상위중 저우용캉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은 모두 손을 들어 찬성한다. 이에 "막후원로 장쩌민도 이 압도적인 결론에 동의했다."

 

3월 14일 오전, 전인대가 폐막하고, "보시라이는 중앙경위국 국장 차오칭(曹淸)의 부하들에게 끌려간다" 다음 날, 중공중앙은 대외적으로 선언한다. "보시라이 동지는 더 이상 중공충칭시위서기의 직을 맡지 않는다."

 

책에는 이렇게 묘사한다. 보시라이는 저우용캉과 관계가 밀접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그래도 저우용캉을 감청했다. "보시라이는 저우용캉에게 정교하게 수공작업으로 만든 금필(金筆)과 스위스손목시계를 선물했다. 왕리쥔은 두 선물에 최첨단 도청정치를 장착했다."

 

이렇게 하니, 저우용캉과 정치국상위들과의 대화, 그리고 모든 무경, 위수부대고위층과의 연락 그리고 어떤 국보급 선물을 받았는지 심지어 각종 여인들과의 밀회까지도 왕리쥔은 모두 "감청"할 수 있었다.

 

그중 중요한 내용은 왕리쥔이 모두 보시라이에게 보고했고, 도잇에 음성과 문자를 포함한 전자기록으로 보존했다. 보시라이가 낙마한 후, 천하오쑤는 충칭에 심어놓은 내부인을 통하여 이들 자료를 확보한다. 이는 그가 저우용캉으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 무기가 된다.

 

이와 동시에, 천하오쑤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 비서인 리공다(李功達)이 후진타오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진타오는 천하오쑤와 보시라이등과의 '음모'를 모조리 알고 있었고, 신속히 군대를 동원하여 포위할 수 있었다. 

 

책에서는 또한 중앙경위국 부국장이자 원자바오의 호위대장 리룬텐(李潤田)은 보시라이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비록 그가 왕리쥔사건후에 면직되지만, 이전에 보시라이를 위해 얼마나 정보전에서 공을 세웠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사실상 왕리쥔의 청두미국영사관도망사건으로 보시라이가 연금된 후, 천하오쑤와 허광예는 저우용캉을 설득하여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써야할 필요가 생겼다. 정변을 계속 추진해야 했던 것이다. 저우용캉에게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느끼게 해야 그는 행동에 나설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천하오쑤가 충칭에서 얻은 문건이 아주 중요했다.

 

이 문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초급목표....우리는 18대 및 그후의 국가기구 인사배치에서 총서기, 중앙군위주석과 국가주석을 1사람이 맡고, 이를 통해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초부적인 구상은 저우용캉 동지가 국가주석을 맡고, 보시라이 동지가 총리 혹은 부총리를 맡고, 시진핑 동지가 총서기 겸 중안군사위주석을 맡는다. 2년의 과도기를 거쳐, 만일 시진핑동지가 능력이 없으면, 그는 그중 1개의 직위를 사임하여, 총서기만 맡거나, 군사위주석만 맡는다. 우리의 의견은 대체로 보시라이동지가 2014년에 중앙군사위주심 겸 중앙기율검사위서기 혹은 정법위서기를 맡는 것이다. 만일 시진핑동지가 총서기로서 능력이 없다면, 보시라이 동지가 맡는다."

 

저우용캉과 보시라이는 모두 문건에서 "최고위직을 획득"한다. 이는 두 사람이 '정변음모'를 했다는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저우용캉이 '정변'에 나서기 직전에, 후진타오가 이미 한걸음 먼저 움직였다.

 

이 책의 작자인 향양은 인터뷰때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의 '세부적인 사항은 모두 사실이다." 113사와 저우용캉의 무경이 대치한 장면은 "모두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에게 들었다. 비록 지금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아마도 작전참모일 수도 있고, 경위일 수도 있다. 나는 비록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양쪽 사람을 나는 모두 접촉했다. 38군쪽이 보다 상세하고, 무경쪽도 나는 알아보았다. 양쪽에서 말하는 내용은 서로 들어맞는다."

 

향양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 가지 규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설사 중공의 홍색집단의 일원이지만 모두 수시로 심연에 직면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독재는 생사를 건 결전이라는 것이고 모든 사람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후기: 향양은 이렇게 말한다. 보시라이사건에서 그와 부친은 주로 몇몇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부대와의 연락을 담당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청두군구, 쿤밍주재제14집단군과 충칭주재 제13집단군이 포함된다. 그외에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의 지시하에 그의 부친은 쉬차이허우가 원래 지휘하던 제16집단군과 궈보슝이 지휘하던 제21집단군과도 연락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