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학도(米鶴都)
2014/08/27
(1968년 여름, 문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북경에서 "소혼단사건"이 벌어진다. 여러 해동안 왕삭(王朔)의 소설, TV드라마 <혈색낭만>등 문예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이 사건은 이미 강호의 전설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설이 돌고 있다. <중국신문주간> 제662기에 실린 미학도의 글은 이 사건의 내력을 파악하게 해준다)
"이 일의 앞뒤 사정, 특히 마지막 장면은 여기에 앉아 있는 당사자들만이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 나머지 여러 소문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조도도(曹都都)가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사이에, 필자는 여러번 사건의 핵심당사자 왕남생(王南生), 중요참여자 유호생(劉滬生), 강소로(江小路), 목격자 왕기예(王冀豫), 조도도등을 인터뷰했다. 당시, 그들은 대부분 북경의 "삼교(三校, 취미로중학, 육영중학과 태평로중학을 합쳐서 '삼교'라고 불렀고, 학생은 대부분 부대대원(部隊大院)의 아이들이었다)의 노홍위병이었다. 필자는 사망자 주장리(周長利, 즉 '소혼단')의 친구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저 접촉가능한 현존자료에 근거하여, 상대방의 진술과 입장을 취합하여 최대한 이 사건의 진실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홍팔월(紅八月)"의 원한
사건의 시발점은 문혁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혁이 발발하기 전에, 모택동(毛澤東)의 뜻에 따라, 주은래(周恩來)는 상당히 높은 기밀수준의 "수도공작조(首都工作組)"를 설립하고 주재한다. 심지어 임표(林彪), 강청(江淸)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 기구의 목적은 "모주석을 보위하고, 당중앙을 보위하며, 문화대혁명을 보위하고, 수도를 보위한다"였다. 그 아래에는 7개의 소조(小組)가 있었는데, 부대지휘조(部隊指揮組), 치안조(治安組), 총기탄약조사조(槍支彈藥淸査組), 방송국조(電臺組), 사회인구조사정리조(社會人口淸査淸理組), 감옥간수조(監獄看守組), 외사교무조(外事僑務組)였다. 그후 북경에 출현한 홍위병의 깡패소탕, 가산몰수, 축출등은 모두 이 초기의 배치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1966년 8월초, 북경에서는 깡패(流氓)가 칼을 들고 제47중학 홍위병을 찔러 부상입히고 외교관을 칼로 베어 부상입힌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계급보복'사건으로 성격규정된다. 그후 북경에는 깡패진압의 바람이 불게 된다.
공안부장 사부치(謝富治)의 지시에 따라, 공안기관에 '기록이 남은' 자들은 그게 아무리 경미한 범죄행위였다고 하더라도, 모두 하급파출소에서 명단, 주소를 제공하고, 홍위병이 각 학교로 붙잡아와서 '군중전정(群衆專政)'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맞아죽고, 부상당했다. 이ㅣ 사건은 "타유맹(打流氓)"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노홍위병('노병'이라고도 부른다. 문혁초기 성립된 홍위병조직의 구성원이고, 간부자제들이 핵심구성원이다)과 '깡패'간에 원한이 맺어진다. 나중에 쌍방이 집단패싸움을 벌이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967년에 이르러, 노홍위병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도도는 기억한다. 마치 하룻밤만에 그의 부모가 흑방(黑幇)이 되었다. 그의 집이 있던 해군대원(海軍大院)내에서 2급부장이상의 간부는 대부분 비투(批鬪, 비판투쟁)와 구금을 당하고,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수시로 누군가 학대받고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왕기예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가 있던 공군대원에 집안의 어른은 격리조사를 받거나 '삼지양군(三支兩軍, 삼지는 지좌(좌파군중지원), 지공(공업지원), 지농(농업지원), 군관(일부지역 단위, 부서에 대한 군대관리), 군훈(학생에 대한 군사훈련)을 가리)'으로 가서, 많은 집안에는 그저 아이들만 남았다.
노홍위병 자신의 조직으로 한때 명성을 떨쳤던 "홍위병규찰대"와 "수도중학홍위병연합행동위원회(간칭 "연동")"등은 차례로 중앙문혁에 진압되었다. 최고지도자의 지시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홍색공포'를 만들었던 미성년자들은 교사와 이용을 당한 후에 '잘 교육해야할 자녀'가 되었다. "그런 '침몰하는 배에 타있는' 느낌을 당시의 민중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도도의 말이다.
이들 소년들은 무법천지의 폭력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집단을 이루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싸움을 벌였다. 그들 중에서 "왕소점(王小點)"의 명성이 점점 올라간다.
왕소점의 이름은 "왕남생"이고 1949년 남경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 왕문헌(王文軒)은 일찌기 국방부(國防部) 오원(五院, 七機部의 전신)의 부정위(副政委), 개국소장(開國少將)이었으며, 문혁후에 중앙기율검사위 위원이 된다.
부대대원에서 자란 왕남생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 다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는 말라. 싸우면 반드시 이겨라"였다. 조도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바깥에서 행동할 때 항상 집단으로 다녔다. 누구든지 겁을 먹거나 싸우지 않으면 대원으로 돌아온 다음에 냉대받거나 소외당했다.
문혁을 시작한 1966년, 왕남생은 북경취미로중학 초3(우리나라의 중3)에 다니고 있었다. 180가량의 큰 키로 학교농구부에서 활약했다. 8월, 그는 또 다른 6명의 친구들과 취미로중학에서 홍위병을 만든다. "그때 중학생은 대학생보다 전투력이 있었고, 초중생이 고중생보다 전투력이 있었다." 그의 말이다.
세력을 잃은 후, 그들은 도처에서 소란을 피운다. 왕기예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비록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깡패를 수습하는 것은 가능했다.
1967년 5월 29일, 홍위병성립 1주년때, 노홍위병들은 천안문광장에서 기념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구호를 외쳤다: "깡패진압, 깡패타도!"
"소혼단"의 굴기
노홍위병들뿐만이 아니라, "혁명은 폭동이고,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시키는 폭력적인 행동이다"라는 최고지시가 계속하여 선동하자. 거의 각계각층에서 잠재된 폭력이 발현하게 된다. 특히 "물에 빠진 개를 마구 패는 것(痛打落水狗)"같은 집단폭력의 경향을 띄게 된다.
홍팔월의 잔혹한 타격을 받은 완주(玩主, 頑主라고도 쓴다)들은 한동안 쉬고나서 다시 살아난다. 그들은 지역을 경계로 하여, 하나하나의 세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서로간에 병합과 충돌을 시작한다.
그중 16,7세의 "신가구소혼단(新街口小混蛋)"이 점점 세력을 키운다.
"소혼단"의 이름은 주장리이고, 북경 서성구 적수담, 신가구 일대의 평민자제인 완주의 두목이었다. <삼련생활주간>이 보도한 "1968년의 북경강호"에 따르면, 주장리의 부친은 건국전에 철공소를 운영하여, 집안이 자본가로 낙인찍혀 일가 8식구가 덕승문성루와 서해 사이의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주장리가 이름을 날린 것은 그가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다. 그의 곁에 있던 2인자인 변작군(邊作軍)에 따르면, 지도자는 직접 손을 쓰지 않는다. "그가 한 마디만 하면, 우리 신가구 소혼단들은 바로 이름을 외치고, 앞으로 돌진한다." 주장리는 기획과 조직에 능했으며 명성은 갈수록 높아진다.
"소혼단"의 또 다른 오른팔 왼팔격인 인물로 나중에 <천자(天字)>시리즈 소설을 쓴 왕산(王山, 인터넷아이디는 "四橫堅"이다)은 이렇게 말한다. '홍팔월'이 지난 후, 사회에는 노홍위병에 대한 반발심리가 생겼다. 그러나, 처음에는 노홍위병이 깡패를 진압하는 운동의 위세가 남아 있었고, 완주들도 아직 세력이 크지 못해서, 쌍방은 기본적으로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서로 건드리지 않았다. 쌍방의 첫번째 전투는 1967년 6월에 발생한다. 장소는 서단(西單)의 번화가이다.
왕산에 따르면, 사건의 원인은 전날 주장리등이 처음 노홍위병의 전통근거지인 신교반점(新橋飯店)으로 가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조롱을 받는다. 그날 그는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선글래스는 고관자제들의 전용물로 여겨졌었다), 서단상장에서 노홍위병에게 모욕을 당한다. 분노한 주장리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제35중의 노홍위병 위X(衛X)를 피터지게 때리고, 그의 군복과 군화를 강탈한다.
그후에도 쌍방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1969년의 북경강호"에 따르면, 변작군은 이렇게 말했다. 월단공원에서 주장리는 두 사람을 데리고 소련식무기를 들고 포위망을 뚫었는데, 7,80명의 노홍위병이 그를 막지 못했다. 자죽원공원에서, 주장리측은 10명으로 80여명의 노홍위병을 상대로 싸워서 소수로 다수를 이겼을 뿐아니라, 상대방의 11대 자전거까지 노획했다. 그러나 왕남생등이 보기에, 이건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바로는, 당시 북경에서 그런 규모의 집단패싸움은 벌어진 적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일찌감치 소혼단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쌍방간의 원한이 쌓여갔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도화선
1968년 6월, 며칠동안 연이어 3건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3건은 이들 집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제1차는 유호생이 몇몇 친구들과 북해공원으로 가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군복을 빼앗기고, 쇠밧줄자물쇠에 머리가 깨진다.
사건발생후 소구자(小邱子)가 한 사람을 데리고 북대병원으로 갔고, 유호생에게 50위안의 돈을 찔러넣어준다. "당시 50위안은 노동자들의 한달 월급보다 많은 돈이다." 유호생의 말이다. 그는 소구자에게 누가 한 짓인지 물었는데, 소구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이걸로 퉁치자!"
나중에야 유호생을 알았다. 그날 소구자와 함께 온 사람이 바로 "소혼단"이고, 그가 와서 상황을 살펴본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유호생이 처음 "소혼단"을 만난 때였다.
얼마 후, 유호생과 강효군(姜曉軍), 소신민(蘇新民)이 서사(西四)에서 같이 이발하고 있었는데, 강효군이 혼자 나가서 아이스께끼를 사러 나갔다가, 소구자를 보고 그에게 말을 걸자, 상대방의 한 무리가 그를 둘러싸고, 물었다. "너는 어디 쪽이냐?" 강효군이 반문했다: "너희는 어느 쪽이냐?"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소혼단'이다." 강효군이 말했다: "나는 '삼교'쪽이다." 그들이 말한다: "가로막는게 바로 너희 '삼교'쪽이다."
말이 떨어지자 마자, 한 사람이 뒤에서 강효군을 칼로 찔러 견갑골이 찔린다. 또 다른 한명은 그의 대퇴부를 칼로 찔러 근육이 잘린다.
왕남생은 강효군과 잘 아는 사이였다. 소식을 들은 후 그를 보러 간다. 그가 보기에 "가로막는게 바로 너희 삼교쪽이다"라는 말은 공공연히 노홍위벼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가진 돈을 모두 강효군에게 주고, 이런 말을 남긴다: "효군, 잘 치료하고 있어라. 내가 반드시 복수해주겠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법이다. 바로 다음 날 혹은 다다음날 정오, 같은 장소인 서사의 T자형도로에서 쌍방은 마주치게 된다.
상대방은 칼로 그의 뒤를 막고 쌍방은 말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서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원래 그냥 지나쳐갈 일이었다. 왕남생은 둘연 동생 왕모점(王毛點)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동생이 쫓기며 맞고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버리고, 자전거의 쇠밧줄자물쇠를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변작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곁에 놓인 나무상자의 나무조각을 떼어내서 왕남생을 향해 휘둘렀다.
왕남생은 손을 들어 막았고, 스위스손목시계가 부서졌다. 나무조각에는 못이 박혀 있어서, 그의 어깨와 팔을 찢어놓았다.
혼전때, 주장리는 전혀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다.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혼자서 길가에 서서 관전만 했다. 싸움을 마치고, 왕남생은 그의 앞으로 걸어가서 물었다: "네가 바로 '소혼단'이냐?". 주장리는 아주 침착했고, 꼼짝도 하지 않을 뿐아니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 기억해라. 3일내에 내가 너를 깨부수지 않으면, 나의 '왕(王)'자를 세워서 쓰겠다." 왕남생이 말했다.
그날 저녁, 왕남생과 유호생등은 서성공안분국에 가서 신고를 한다. 경찰은 말했다. 그들도 소혼단을 찾고 있으나 찾지 못했다고. 왕남생이 말한다: "그럼 좋습니다. 우리가 도와서 찾아주겠습니다. 찾은 후에 그를 여기로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상대방은 좋다고 대답한다. 다만 그들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사람을 때려서는 안된다. 정당방위는 괜찮다." 또 다른 경찰이 한 마디 보충한다. "너희가 그를 때려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옷에 피가 가득 묻어 있어서, 왕남생은 감히 집으로 가지 못하고, 학교에서 밤을 새운다. 그리고 대원의 노홍위병들에게 연락을 하여, 다음 날 함께 소혼단을 찾아서 혼내주기로 한다.
변작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주장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때리면서 죽도록 때리지 않으면 그들은 분명히 다시 와서 복수하려 할 것이다. 됐다. 내일은 우리 놀러나 가자. 그들을 피하자.
집결
변작군의 기억에 그날은 1968년 6월 24일이다. 아침 일찍, 그와 주장리등 8명은 약속한대로 북경동물원에 모였다. 먼저 아침을 점포에서 사먹고, 도시락을 준비한 후 차를 타고 향산으로 간다. 그들은 놀러나가는 것이었으므로 무기될만한 것은 가지고 가지 않고, 기타를 들고 갔다.
다만 왕남생과 조도도는 확신한다. 그날은 6월 23일이라고.
왕남생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날은 바로 경찰에 신고한 다음날이었다고. 조도도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해밀턴손목시계점은 문혁때 처음으로 외국시계를 수입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는 줄을 서서 가족의 시계를 샀기 때문에, 집합시간에 늦었던 것이다.
집합장소는 왕남생이 있는 취미중학이었다. 아침일직 노홍위병들이 속속 모였다. "소단자(小壇子, 성은 담(譚)이고 그의 부친은 공정병부사령관이었다)"도 왔다. "그때, 우리 '삼교'의 사람들은 소단자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단자는 자주 깡패들과 어울렸고, 소혼단과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왕남생의 말이다. "그때 그런 자격미달인 간부자제들에게는 우리가 마찬가지로 칼을 썼다." 그러므로, 그는 고의로 소단자의 면전에서 큰 소리로 말한다: "오늘 누구도 소단자의 편을 드는 말을 하지 말라. 누구든지 소단자를 봐주자고 하면, 내가 안면바꾸더라도 뭐라고 말하지 말라."
출발때, 개략 2,30명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무기를 들었다. 가는 도중에 시내의 노홍위병들이 계속하여 건공부(建工部), 국가계위(國家計委), 물자부(物資部)등의 대원에서 나와서 참여했고, 가장 많을 때는 100-200명에 달한다.
처음에는 소혼단이 북해공원 일대에 있을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북해공원 방향으로 갔다. 나중에 다시 듣기로 아마도 북경동물원 일대에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뒷쪽이 오히려 앞쪽이 되어 북경동물원쪽으로 간다.
조우
변작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은 가장 먼저 아침을 다 먹고 나오자, 눈앞에 노란색 천지였다(해방군의 구식군복은 노란색이었다). 즉시 "그들이 저기 왔다!"라고 소리치면서 고개를 돌려 미친 듯이 도망쳤다. 마침 시내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해서, 그는 차문으로 타서 도망친다.
당시 동물원의 건너편은 상업지구였다. 남쪽에는 동서방향으로 철도가 있었고, 철도의 곁에는 흙길이 있었다. 이리구(二里溝)와 감가구(甘家口)의 사이이다. 주장리와 소구자는 흙길을 따라 서쪽으로 도망쳤다.
노홍위병들은 추격했고, 먼저 소구자를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소구자는 철로에 쓰러져 있었고, 오는 사람들마다 그를 한번씩 찔렀다. 유호생은 더 이상 찌르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그를 막고 더 이상 그를 찌르지 못하게 막았다. 유효생은 지금도 생각한다: "소구자는 아주 의리있는 자이다. 뒤에서 막아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혼단이 그렇게 멀리 도망칠 수 없었을 것이다."
소구자는 모두 20번 칼에 찔렸고, 나중에 100여바늘을 꿰멘다. 듣기로 그는 그후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더 이상 '불야(佛爺, 좀도둑이라는 의미임)'짓을 하지 못하고, 신발수리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하여 주장리를 쫓아갔다. 당시, 강소로는 "양교무투(糧校武鬪)"사건으로 붙잡혀 있다가 공안국에서 풀려난지 얼마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몸이 허약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자전거에 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주장리가 키는 크지 않지만 아주 균형이 잡혀 있었고, 근육이 발달되었다. "도망치는데 아주 튼튼했고, 운동선수같았다."
103번 전차 이리구역 앞에서 주장리가 따라잡힌다. 가장 먼저 그를 따라잡은 것은 왕남생의 동생 왕소육(王小六)과 건공부, 백만장신구(百萬莊申區)의 몇명이었다. 그들은 주장리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하고, 그의 바지와 신발을 벗기고 그의 손목시계를 푼다.
주장리는 돌연 발버둥을 치고 녹색군용양말만을 신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노홍위병들은 추격했고, 누군가 그의 등을 식칼로 베었다. 그는 멈추었고, 그들 무리는 욕을 하면서 그를 등을 밀면서 갔다.
중상
왕남생이 도착했을 때, 주장리가 붙잡혀 마주보고 오고 있었다. 소반자(小胖子), 유(劉)XX등이 뒤에서 칼로 주장리를 밀고 있었다. 왕소육은 그의 신발과 바지를 들고 있었다.
주장리는 등에 5,6촌 길이의 상처가 있었고, 흰색셔츠는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식칼로 벤 것이 누구인지 나는 안다. 그러나 당사자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나도 말하지 않겠다." 왕남생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건 피부의 상처일 뿐이다."
왕남생을 보자, 주장리가 말한다: "소점(小點), 네 손목시계는 잃어버렸다. 내가 배상하겠다." 왕남생이 말했다: "너는 배상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네가 훔친다는 걸 안다. 네 물건은 모두 제대로 가진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蘇)XX가 밀고 나오면서 소리쳤다. "소점. 그와 쓸데없는 소리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주장리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다.
나중에 왕남생을 심문한 공안에 따르면, 병원의 검시보고서에 따르면, 주장리는 3개의 치명상을 입었는데, 이것이 첫번째 치명상이라고 한다.
이어서 축(祝)XX가 나와서 주장리를 베었다. "이것이 두번째 치명상이다." 왕남생의 말이다.
이때 그는 급해졌다. 다른 사람을 말리면서 말했다: "됐다. 그만 때려랴." 그는 주장리에게 말했다: "무릎을 꿇고, 홍위병할아버지라고 말해라!"
이 말을 할 때 그는 흥분했다. 마치 이것이 일종의 "재판"처럼 여겨졌다. "소혼단은 풀썩 굻어앉아, 분명하게 홍위병할아버지라고 말했다."
주위이 사람들이 모두 소리쳤다: "소점, 나도 한번 찌르자" "나도 한번 베야겠다." 왕남생이 소리쳤다: "XX 이제 그만 때린다는 소리를 해라. 그는 무릎을 꿇었는데 때려서 뭐하겠다는 거냐. 그를 공안국으로 데려가자. 너희는 이제 가라. 더 이상 신경쓰지 말고!" 그후 사람들은 흩어졌다.
최후의 일격
왕남생은 주장리를 부근의 해군총의원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마침 곁에서 자전거를 타고 구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호생이 소리쳤다: "이리와라! 그를 자전거에 실어라!" 그는 거절한다. "저자는 온몸이 피인데, 내가 그를 데려갈 수 없다." 유호생이 험악하게 소리쳤다: "데려갈 거야 말거야. 네가 데려가지 않겠다면, 너도 저렇게 만들어주겠다!"
이때까지는 주장리도 정신이 있었다. 그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나를 데리고 가달라. 네 옷이 더러워지면 새옷으로 변상하겠다."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주장리를 데리고 가운데 타고, 왕남생은 가장 왼쪽에 타고, 그들의 사이에는 소단자가 있었다. 주장리의 오른쪽에는 마후자(馬猴子)가 있었다. 다시 그 곁에는 유호생이 있었다. 이들 한 무리는 수전과학원이 소재한 길을 따라 해군총의원으로 갔다.
돌연 누군가 건면장(㨴麵杖, 국수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밀 때 쓰는 방망이)으로 소혼단의 머리를 내리쳤다. 왕남생은 뒤에서 오는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는 XX 때리지 말라니까. 피가 우리 몸에까지 튀잖아."
이때 주장리가 왕남생에게 부탁한다: "소점, 오늘 나를 살려달라." 왕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지금은 너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치료하겠다. 낫고나면 너를 해정구공안국으로 보내겠다. 너는 이제 끝났다." 주장리는 아마도 공안국에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같다. 다시 곁의 소단자에게 몸을 돌려 말한다: "네가 소점에게 말해달라. 내가 졌다. 나를 보내달라."
이때 사람들이 소단자를 노려보았고, 눈빛이 흉흉했다. 소단자는 압박을 버티지 못했다: "너는 XX 무슨 헛소리냐. 너는 내가 너를 찌르지 못할 줄 아느냐." 말을 마치고는 칼로 찔러갔다.
주장리는 두 다리가 털썩 하고는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똑바로 자전거에서 떨어지고, 땅바닥에 쓰러진다.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도 과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건 깡패가 죽은 척 하는 거다. 소점, 넌 신경쓰지 말라. 우리가 그를 패겠다."
주장리는 겨우 버티고 앉았다. 마침 왕남생과 마주보는 자리였다. 그는 한 마디 했다. "너희를 홍위병할아버지라고까지 불렀지 않느냐. 나를 살려줘. 나를 살려줘"말을 마치고 풀썩 다시 쓰러진다.
왕남생은 그의 몸이 아직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누구도 더 이상 때리지 말라!" 그는 길가의 중국수리과학원연구원의 경비실로 가서, 전화로 구급차를 부르려 했다. 경비실의 사람은 '전화를 외부인에게 쓰게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상대방에게 공안국과 해군총의원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누군가 그를 경비실에서 끌고 나와서, 빨리 도망치라고 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소단자를 보고 소리쳤다: "너는 빨리 도망치지 않고 뭘하는 거냐. 그 칼로 일이 벌어졌어. 너 기억해라.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빨리 도망쳐라!"
사람들이 흩어진 후, 강소로가 도착했다.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니 "마음 속으로 공포스러웠다. 땅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조도도가 집으로 돌아와서 손목시계를 놔두고 친구들을 찾아나섰다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싸움은 이미 끝났고, 상대방은 몇명 없어서,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오에, 그는 해군총의원으로 갔다. 응급실안은 엉망진창이었고, 문밖에 있는 짐수레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그가 듣기로, 데려왔을 때는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깡패살인범"
나중에 왕남생등은 운하를 따라 학교로 돌아간다. 도중에 그는 소단자에게 칼을 운하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정오, 그들은 함께 공농병식당(즉 惠豊堂)에서 식사를 했다. 왕남생은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이번에는 일이 너무 커졌다. 모두 입을 맞추자. 누구든 먼저 나서서 얘기하지 말라. 만일 공안국에서 물으면, 너희는 나에게 다 미뤄라. 앞의 일은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공안국에 신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뒤에 어찌된 일인지는 우리 모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후에 왕남생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막 나도장(羅道莊)에 도착했을 때, 두 개의 사이드오토바이를 타고온 경찰들에게 잡힌다. 그날 저녁, 그와 일부 사건관련자들은 서성공안분국의 구류소에 수감된다. 그후 그는 해정분국의 간수소로 옮겨간다.
이 사건으로 공안부서는 앞뒤로 70여명을 붙잡는다. 왕남생이 진술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혹은 다른 원인으로 축XX와 유호생등 소수의 주요참여자들은 시종 붙잡히지 않는다.
수감기간동안 왕남생이 다니던 취미중학, 그가 살았던 칠기부대원등에서는 4차례에 걸쳐 천명이 넘는 규모의 비투회가 벌어진다. 그는 가슴에 큰 패를 걸었다. "깡패살인범 왕남생"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매번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깡패가 아닙니다. 나는 깡패를 때린 사람입니다." 그럴 때마다 매를 맞았다. 나중에 패에서 "깡패"라는 두 글자는 지워지고 "살인범왕남생"으로 바뀐다.
그해 9월, 그는 같은 사건의 소XX, 소단자, 유XX, 마천아(馬天兒), 주자(柱子), 진회아(秦檜兒)와 함께, 북원학습반(北苑學習班)으로 간다. 이 학습반은 "흑방자제학습반(黑幇子弟學習班)"으로 불렸다. 나중에는 "중앙가이교육호자녀학습반(中央可以學習好的子女學習班)"으로 개칭된다. 그날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타고 주장리를 병원으로 데려다준 사람은 원래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그의 부친이 '흑방'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갇히게 된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 재수없는 사람이 "양(楊)XX"라는 것을 알았다.
왕남생은 합쳐서 400여일동안 갇혀 있었다. 1969년말, 한때, "반도, 특무"로 몰렸던 부친이 석방되고, 이 학습반의 불문률에 따라 그는 석방된다.
"3일내에 북경을 떠나라"는 석방조건에 따라, 왕남생은 외지로 간다. 부친이 근무하던 부대인 40군 120사에서 군인이 된다.
"병비합류(兵匪合流)"
"1968년의 북경강호"라는 글에 따르면, 주장리가 죽은 후, 북경시의 완주들은 모두 군용가방속에 식칼 한 자루씩 가지고 다녔다. "홍위병만 보면 처리한다"
왕기예는 그건 근거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추측으로 그건 아마도 그후에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낸 달지교(達智橋) "채도대(菜刀隊)"때문일 것이다. 다만 '채도대'의 완주들은 대원의 노홍위병들과 대규모의 정면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자주 만나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갔다. 왕기예가 보기에, '채도대'는 실제로 '소혼단'에게서 교훈을 얻은 것같았다.
1969년, 대원의 노홍위병들은 군대에 갈 사람은 군대에 가고, 하향할 사람은 하향을 했다. 패로 몰려다니며 싸우는 분위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후의 대원자제들은 완주들과 신속히 융합하여 왕산(王山)이 말한 북경문혁역사상 극히 독특한 "병비합류(兵匪合流)"의 시기로 접어든다.
왕기예가 산서에서 삽대(揷隊, 농촌생산대에 들어가는 것)하고 있을 때, 영제(永濟)기차역에서 옛날에 소혼단의 일당이던 사람을 만나는데, 쌍방은 모두 예의를 갖추었다.
이들은 많은 경우 신강에서 나온 노동개조범, 노동개조취업인원들이었다. 전문적으로 농해선(隴海線)에서 소매치기에 종사했다. "흘대륜적(吃大輪的)"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다. 왕기예에게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두 사람이 생산대에 나귀를 판 노인에게서 100여위안을 훔쳐냈다가. 다시 그 돈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들은 나에게 보여주었다. 도둑도 도가 있다고. 이런 돈은 노인의 목숨에 관련된 것이니 훔칠 수가 없다고 했다." 왕기예의 말이다.
"소혼단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왕남생등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은 지금까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배경이 있는 간부자제들이 무법천지로 사람을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1년 내지 3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왕남생은 인정한다. 그들중 확실히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없다고.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우대'를 받아서가 아니라, 중형을 받지 않은 원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책임을 완전히 구분하기 어려웠고, 둘째, 대부분 미성년자였다(그날의 참가자중 19살이 되지 않았던 그가 가장 나이많은 편이었다), 셋째, 주장리는 입건되었던 형사범죄자였다. 그는 주장리가 권력귀족자제에 대항한 평민영웅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한 가지를 주목해주길 바랐다. 이들이 입고 다니던 군복, 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 매일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뿌리는 돈은 모두 훔치거나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위로부터 아래까지 소위 '군중전정' '문공무위(文攻武威)를 제창했으며, 사적으로 재판하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을 여기는 일이 허다했었다.
"소혼단"사건전인 1967년 8월, 왕기예는 "낭교무투"에서 상해치사죄를 범해 감옥에 갇힌다. 그후에 북원학습반으로 옮겨간다. 그가 알기로, 당시 문혁때 미성년자의 과실치사에 대하여는 기본적으로 중형을 내리지 않았다. 그와 같이 수감되어 있던 유(劉)씨성의 중학생은 흑방자제가 모택동상장(像章)을 빼앗아갔다고 하여 상대방을 죽였는데, 1년후에 무죄석방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법률관념으로 문혁대의 난상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왕기예의 말이다.
그러나, 왕남생도 인정한다. 소혼단이 어찌되었건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고. "우리가 비록 사람을 죽이겠다는 주관적인 고의는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사형(私刑)을 가해 그를 죽였다. 그러므로, 법률적인 의미는 따질 것도 없이, 강호의 도의로 보더라도 나는 소혼단에게 잘못한 것이고, 나 개인도 그의 가족에게 죄송하다."
주장리가 죽은 후, 왕산등은 계속하여 누군가 그를 배신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의심은 한때 어떤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동물원에서 차량을 바꿔타려고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바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의심은 시종 확인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왕산은 기괴한 추측을 하게 된다: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 아마도 주장리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때 그는 많은 노홍위병친구들을 사귀고 있었고, 그들을 지기(知己)로 여겼다. 심지어 그들때문에 옛날 친구들을 멀리하기까지 했다.
조도도는 계속 주장리의 음혼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느낀다. 1972년 소단자가 중병으로 입원한다. 그와 왕남생등 몇명이 병문안을 갔다. 소단자는 병상에 앉아서 손에는 쇠밧줄자물쇠를 만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너는 별 일 없으니 병이나 잘 치료해라." 그는 말했다. "그래, 나도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뒤에 한 마디 덧붙인다. "소혼단이 나를 찾아왔어."
최근 들어 왕기예는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간부자재들 중에도 쓰레기가 있다. 이들도 '깡패'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아는 바로는 소혼단사건에 관련된 노홍위병은 나중에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 "내 생각에, 우리가 한 짓은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다. 악행은 언젠가 댓가를 치른다. 은연중에 벌어지는 많은 것들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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