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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3)

by 중은우시 2023. 5. 1.

글: 장명양(張明揚)

 

당나라때 태상황으로서는 되돌아보기도 싫은 '완전은퇴'시대를 겪은 후, 태상황들의 운명은 송나라때부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송, 명, 청 3왕조에 걸쳐 모두 6명의 태상황이 배출돈다. 당나라때 유행한 '핍궁(逼宮)'과 비교하면, 이들 태상황들은 자원하여 태상황으로 물러난 경우가 많았으며, 현무문사변이나 마외지변같은 궁중투쟁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게 된 송휘종(宋徽宗)과 정신이상이 온 송광종(宋光宗)을 제외하면, 이 시기의 태상황들의 은퇴생활은 아주 여유있었다.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았을 뿐아니라, 연금생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권력도 대부분 황제보다 컸다. 정치생활에서 왕왕 전형적인 "퇴이불휴(退而不休)"였다.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의 태상황생활은 그다지 좋지 않아, 연금상태라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역습'에 성공하여 다시 황제에 오른다. 그리하여, 그는 이 시기의 태상황들이 보낸 휘황한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연이어 4명의 태상황이 출현하다.

 

중국역사상 태상황이 가장 밀집된 시대는 송나라때이다. 송고종 조구부터 시작하여, 송효종 조신(趙眘), 송광종 조돈(趙惇)까지 연속으로 3명의 황제가 태상황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저명한 "삼조내선(三朝內禪)"이다. 만일 송휘종 조길이 송고종 조구의 부친이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송나라는 연속 4대에 걸쳐 태상황이 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송휘종의 퇴위는 절대로 권력에 담담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전형적인 임전탈영이다. 선화7년(1125년) 십이월, 금나라군대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대거 남하한다. 송휘종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즉시 동남으로 도주하여 화를 피할 결심을 한다. 그의 원래 의도는 태자 조환(趙桓)을 감국(監國)으로 삼아 개봉(開封)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반대했다. 그들의 뜻은 이러했다. 너 황제가 도망치는 것도 좋고, 태자를 남아서 너 대신 죽게 하는 것도 좋은데, 도망치려면 황위를 태자에게 넘겨주고 가라. 남쪽으로 도망치려는 생각뿐이던 송휘종은 시원스럽게 그달말에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조서)를 내린 후, 송흠종 조환에게 황위를 넘겨준다. 당시 43살이던 송휘종은 '완전은퇴'를 약속한다. 조정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 태상황으로 남겠다고.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태상황이 안전하게 동남으로 도망친 후에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된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송휘종의 주변에 예전의 여러 중신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동남에서 다시 '성지'를 내리기 시작한다. 동남각지의 주둔군이 개봉으로 가서 황제를 보위하지 못하게 막고, 물자도 운송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당시 송휘종에게 '장강을 경계로 삼아 다스리겠다'라는 식의 동남소조정에 대한 구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송흠종은 태상황에게 맞설 힘이 실로 없었다. 그저 도성으 포위한 금나라군대를 상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정강원년(1126년) 이월, 금군이 개봉에서 철수한 이후, 송흠종은 서둘러 태상황을 상대한다. 이때의 복잡한 상황을 당시의 태학생(太學生)인 진동(陳東)의 말로 표현하자면, "강절지변(江浙之變), 소장지화(蕭墻之禍), 불가불려(不可不慮)" 확실히 송흠종에게 있어서 외적을 막으려면 내부부터 안정시켜야 했다

 

송흠종의 대책은 이러했다. 빠른 시일내에 태상황을 동남에서 개봉으로 모셔온다. 별도의 정부를 꾸리는 것을 막는다. 아들의 압력하에 특히 이전에 '화석강(花石綱)'의 고통을 겪은 동남지방은 이 태상황에 대한 원성이 아주 컸다.그리하여 송휘종은 사월 어쩔 수 없이 개봉으로 되돌아간다.

 

태상황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가 이번에 돌아가게 되면서 즉시 연금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송흠종은 대신 경남중(耿南仲)의 건의를 받아들여 송휘종 주변의 환관들을 모조리 내보내버리고, 송흠종의 사람들로 교체해버린다. 몇년후, 심지어 송고종마저도 분개하며 말한다: "경남중은 양궁을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가 막대하다." 이에 대하여, <송사.흠종본기>에는 춘추필법으로 교묘하게 실질을 감추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매일 태상황의 기거가 평안한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연금초기, 태상황과 황제는 서신으로 왕래를 하였으며 서신에는 왕왕 "스스로를 노졸(老拙)로 칭하고 상대를 폐하(陛下)로 칭했다" 그러나 이해 십월의 태상황 44세 생일연회에서 쌍방의 갈등은 철저히 폭발한다. <삼조북맹회편>의 기록에 따르면, 태상황이 술을 마신 다음 다시 한잔을 따라 황상에게 권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대신이 혹시 독주일지 모르니 마시지 말라고 권한다. 그러자 송흠종은 술을 마시지 못하고 떠났다. 송휘종은 통곡을 하며 궁으로 들어갔다.

 

송흠종이 외적을 막기 전에 내부의 적부터 정리한다는 조치를 취하고 있을 때, 금나라군대가 다시 개봉성까지 쳐들어온다. 이들 부자는 서로 싸우다가 정강국치를 당하게 되어 함께 포로로 잡히면서 끝이 난다. 기록에 따르면, 부자가 금나라 군영에서 만난 후 먼저 오랫동안 통곡한다. 송휘종은 그후 송흠종을 질책한다. '네가 애비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의 화는 당하지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송휘종이 보인 추태는 금군총사령관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변명한 것이다. 자신은 일찌감치 조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니, 금나라와 송나라간의 문제는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비참한 전쟁포로생활중 황권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버리고나서야 비로소 이들 부자는 서로 사이가 좋아져서 보통의 부자간처럼 서로에게 의하며 살아갔다는 것이다. 한번은 능욕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송휘종이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는데, 송흠종이 구해준다. 그리고 부자는 서로 끌어안고 통곡했다. 몇년후 송휘종이 죽은 후 금나라사람들은 송휘종의 시신을 석갱(石坑)위에 걸어놓고 불태웠는데, 반쯤 탔을 때 물을 뿌려 불을 끄고 시신을 갱 속에 집어던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렇게 하면, 갱안의 물을 '등유(燈油)'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송흠종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도 갱 속에 뛰어들어 죽겠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막았다. 왜냐하면 산 사람이 갱 속에 뛰어들면 그 물을 등유로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생각에 태상황이 죽을 때, 마음 속으로 가장 미워한 아들은 이전에 그와 죽기살기로 싸우던 송흠종이 아니라, 시종 '영이제(迎二帝)'하지 않는 아들 송고종 조구였을 것이다.

 

조구는 나중에 태상황이 된다. 조구의 태상황은 아주 특수하다. 그가 황위를 물려준 사람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다. 원인은 이러하다. 한번은 조구가 양주로 도망쳤는데, 돌연 금나라군대가 기습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때 놀란 나머지 남자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조구는 퇴위후에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고, 후세의 사가들이 칭송하게 된다. 홍매는 <용재수필>에서 이번 퇴위를 천고에 없었던 화해(和諧)라고 말했다. 소흥32년(1162년) 육월, 송고종은 송효종에게 황위를 넘겨준다. 보기 드물게 송고종은 선위의식에서 후임황제에게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같은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짐은 재위기간동안 덕을 잃는 일이 아주 많았다. 다행히 경들이 그것을 가려주었다." 그는 완전히 모든 부담을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조구가 퇴위한 후의 생활은 고등학교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완전히 풀어지는 것과 같았다. 완전히 향락주의에 빠진다. 그는 부친 송휘종의 '화석강'에 전혀 못지 않게 놀고 즐겼다. 한꺼번에 큰 돈을 썼다. 서호의 물을 은퇴후 기거하는 덕수궁(德壽宮)으로 끌어들이고, 매달 용돈으로 4만관을 썼으며, 생일때는 송효종으로 하여금 많은 돈을 생일선물로 바치도록 했다; 가장 말도 안되는 일은 태상황이 '권력을 주고 돈을 받는 일'과 세금을 포탈하는 것으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송효종에게 '면세권'을 요구한 후,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 나중에는 분뇨를 실어나르는 배까지도 덕수궁의 깃발을 달았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송효종과 태상황의 관계는 말그대로 "세폐(歲幣)"관계였다. 송나라와 요나라 및 금나라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네가 나에게 돈을 주면, 나는 네가 평안히 살도록 해주겠다.

 

비록 송고종이 은퇴후에 놀고 즐기느라 조정에 간섭하지는 않았고, <송사>에도 특별히 송효종이 '궁정의 효도를 다했다'고 칭찬했지만, 여영시(余英時) 선생의 <주희의 역사세계>를 보면 이 모든 것은 단지 겉모습뿐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는 긴장과 충돌이 심심치않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두 사람의 관계를 건륭제와 가경제의 관계로 정의하기도 했다. 먼저 여선생이 송고종에 대하여 너무 가혹하게 보았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어쨌든 송고종과 송효종의 관계는 대체로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여선생의 말중에 한가지는 틀리지 않았다. 화전(和戰)의 결정권은 여전히 태상황에게 있었다. <사조견문록>에는 이렇게 말한다. 송효종은 자주 송고종에게 그의 출병북벌건의를 설명했다. 한번은 태상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명확하게 황제에게 말한다: 내가 죽은 후에 네가 다시 이 일을 논의해보라. 이때부터 송효종은 더 이상 북벌에 대하여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송고종과 송효종간의 북벌에 대한 의견차이는 '권력다툼'이라기보다는 '정견다툼'이다. 어쨌든 송고종은 은퇴후에 명확하게 보류한 권력은 '화전'의 결정권이었다. 송고종에 있어서, 금나라와의 의화정책은 장기간의 습관이면서 그의 일생의 공과의 핵심이다. 그로서는 후임자가 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고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희14년(1187년) 십월, 중국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26년간 태상황으로 지낸 후, 송고종이 붕어한다. 향년81세이다. 송효종에 있어서, 이제 그가 독립적으로 이 나라를 운영할 기회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겨우 1년여가 지난 순희16년 이월, 송효종은 다시 아들 송광종 조돈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된다.

 

송고종이 붕어한 후, 아직 태자이던 송광종은 이미 권력욕이 꿈틀거렸다. 그는 공공연히 '신의 머리카락이 이미 하얘졌습니다'라고 원망하기도 했다. 부친이 송고종이 했던 방식을 본받아 일찌감치 황위를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대로 황제에 오르자 발견하게 된다. 태상황은 철저하게 정치를 떠나 말년을 보낼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송효종이 퇴위한 초기, 먼저 아들을 위해 자신의 심복인 주필대(周必大)를 좌상(左相)에 임명하고, 다시 아들에게 '일월사조(一月四朝, 한달에 네번 배알하는 것)'하도록 요구하여 간접적으로 조정대권을 통제했다.

 

만일 송광종 자신이 나서서 태상황과 암중으로 황권을 쟁탈했다면 그만이겠는데, 송광종의 황후 이봉낭(李鳳娘)까지도 극력 황제가 시아버지(송효종)와 싸우도록 부추겼다. 한번은 태자를 세우는 문제를 놓고, 이황후는 아예 태상황과 말다툼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송효종이 대노하기도 한다.

 

이런 궁중투쟁이 한창 진행될 때, 즉위한지 2년여가 지난 송광종은 돌연 정신병이 걸린다. 여영시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내가 현재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송광종의 정신이상은 주로 송효종의 압력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생긴 것이다." 여기에는 이황후와 태상황간의 다툼도 송광종을 힘든 곤경으로 몰아넣었을 것이고, 송광종이 정신병을 얻는데 상당히 핵심역할을 했을 것이다.

 

병을 얻은 후에도 송광종은 2년여간 황제로 지낸다. 그동안 기본적으로 태상황과의 왕래를 끊는다. 대신들이 효도를 내세워 압박해도 그는 가지 않았다. 심지어 태상황이 순희5년(1194년) 연초에 중병을 앓고 있는데도 그러했다. 이해 육월, 태상황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송광종은 여전히 상복을 입기를 거부하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이에 분노하게 된다. 이학(理學)의 시대에 불효 특히 황실의 불효는 대역무도한 일이다. 당시에 심지어 쿠데타의 징조까지 나타난다. 

 

태상황의 장례식 전날, 송광종이 직접 이 장례식을 주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정대신들은 태황태후 오씨(송고종의 처)에게 글을 올려, 긴급히 송광종의 황자 가왕(嘉王) 조확(趙擴)에게 황위를 승계하도록 하여, 송효종의 장례를 주재하게 했다. 송녕종(宋寧宗) 조확은 이렇게 하여 유일하게 황실의 장례를 주재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즉위하게된 황제이다.

 

이 자질이 평범했던 가왕은 자신이 즉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대전의 기둥을 돌면서 피해다녔다고 한다. "못한다. 못한다." 나중에 태황태후가 강제로 하라고 압박하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고 한다. 태황태후는 그후 태상황(즉 송광종)이 불참한 상태에서 새황제의 내선의식을 주재한다.

 

자신도 모르는 상태하에서 송광종은 태상황이 된다. 그가 정신병을 앓지 않고 정신이 맑을 때에는 시종 퇴위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때때로 실성하며 통곡했다. 통한과 정신병의 사이에서 태상황은 여전히 먹고 입는 것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6년여를 지낸다.

 

바로 송녕종부터 남송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명영종 주기진

 

만일 송휘종은 포로가 되는 것을 겁내어 남으로 도망쳐서 태상황이 되었다면, 명영종은 포로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태상황이 되었다. 정통14년(1449년) 칠월, 삼십만의 명군이 토목보의 변에서 와해되고, 명영종 주기진은 오이라트의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초기, 오이라트는 보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명영종을 데리고 변방을 돌아가니면서 황제의 명의를 이용하여 변방도시의 투항을 받아내고자 했다.

 

명나라측에서도 그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해 구월, 손태후와 우겸(于謙)등 조정대신들은 성왕(郕王) 주기옥(朱祁鈺, 명영종의 동생)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경태(景泰)라 한다. 그리고 명영종은 태상황으로 올린다. 주기옥이 황제에 오른 후, 상당히 잘 다스렸다. 즉위한 다음 달에 우겸의 도움으로 북경보위전을 승리로 이끌어 대명왕조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 알고 있는 이유로, 주기옥은 태상황을 다시 모셔오는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영종이라는 인질은 오랫동안 완전히 정치적 가치를 잃게 된다. 게다가 전쟁포로군영에서 태상황인 주기진은 상당히 사람들을 사귀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예센(也先)을 포함한 오이라트의 권력귀족들과 상당한 교분을 쌓게 된다. 포로가 된 다음 해(1450년),명영종은 풀려나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예센과 명영종은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고 한다.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오이라트에서는 명목상으로는 포로이지만, 실제로는 귀빈대접을 받았던 명영종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죄수가 되어버린다. 성대한 환영의식같은 것도 없이 동화문(東華門) 밖의 남궁(南宮)에 연금되어 버린 것이다. 일체의 정치생활이 봉쇄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명영종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창문을 모두 폐쇄하고, 대문은 납으로 때워놓았으며, 음식도 그저 작은 창문을 하나 열어서 들여보내 주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식사수준도 높지 않아서, 명영종의 황후가 부득이 바느질을 해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고 한다. 경태제는 나중에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지경에 이르러, 누군가 명영종과 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남궁의 수목을 모조리 베어버린다. <명사>기록에 따르면, 태상황의 생일이나 설날같은 때 백관들이 연명으로 태상황을 배알하도록 청했으나, "모조리 불허되었다."

 

주기옥이 등극할 때, 일찌기 장래 명영종 주기진의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자신의 아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즉위4년이후 경태4년(1453년), 주기옥은 자신의 약속을 깨고 명태종의 장남 주견심(朱見深)를 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朱見濟)를 태자로 앉힌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아들은 몇년후에 죽어버리고 만다.

 

7년간 연금상태로 지내고나서 명영종은 돌연 운명의 전기를 맞이한다. 주기옥이 태상황을 막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생각지 못하게 경태8년 정월(1457년) 주기옥이 돌연 중병에 걸린다. 대장 석형(石亨), 대신 서유정(徐有貞)은 태감 조길상(曹吉祥)과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킨다. 한밤중에 명영종을 남궁에서 모시고 나와 황궁의 정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조회때 명영종은 돌연 복위를 선언한다. 신하들은 깜짝 놀랐지만, 명을 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탈문지변(奪門之變)"이다.

 

명영종은 복벽이후 신속히 병중인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원래의 봉호인 성왕으로 만든다. 그리고 '서내(西內)'에 연금시킨다. 병환과 분노가 겹친 주기옥은 얼마 후 목숨을 잃는다. 당시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명영종의 반응은 이러했다. 경태제가 이전에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던 능묘를 직접 파괴하고, 친왕의 예로 북경서산에 매장한다. 성화11년에 이르러 당시 주기옥에게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당했던 주견심이 즉위한 후, 옛원한을 잊고 숙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다시 주기옥의 황제칭호를 복원시킨다. 

 

주견심이 당시 내놓은 이유는 이러하다. 부황 명영종이 간신의 교사를 받아 그렇게 했지만, 나중에 후회막급이었다. 다만 숙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도 전에 붕어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은 부친이 완성하지 못한 유원을 받드는 것뿐이다.

 

건륭제(乾隆帝)와 가경제(嘉慶帝)

 

건륭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태상황이다. 여영시 선생은 <주희의 역사세계>에서 상당히 간명하게 이를 설명했다: 태상황과 황제 가경제의 관계는 서태후와 광서제에 비유할 수 있다.

 

여선생의 비유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다만 황권을 놓고 말한다면, 건륭제는 역대 태상황중에서 가장 권력이 컸다. 집정에서 훈정까지, 퇴위했을 때나 퇴위하지 않았을 때나 별 차이가 없었다. 가경제가 행사하는 것은 그저 예의상의 권력뿐이었다. 그러나 광서제와 비교하면, 가경제는 훨씬 행운아이다. 첫째는 궁중정변을 통해서 친정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는 분명 폐위였을 것이다. 둘째, 그는 건륭보다 오래 살았다. 태상황 건륭제가 붕어한 이후에도 22년간 실권을 가진 황제로 지낸다. 광서제가 서태후의 앞뒤로 죽으면서, 단 하루도 독자적으로 권력을 행사해본 적이 없던 것과는 달랐다.

 

건륭제는 체면을 중시하는 황제였다. 그는 즉위초기에 맹세를 한 바 있다. 최대 60년간 제위에 있겠다고. 절대로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61년을 초과하지 않겠다고. 1796년 정월 초하루, 60년의 재위기간을 충분히 쓴 건륭제는 황십오자(皇十五子) 가경제에게 황위를 넘겨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날의 전위의식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당시에 황제의 옥새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제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결국 아쉬워하면서 내놓았다고 한다.

 

옥새는 내놓았지만, 권력은 내놓을 수 없었다. 건륭제는 양위할 때 선언한다. 자신은 신체도 건강하고, 정력도 충만하니, 새 황제를 한동안 이끌어주겠다고. 처음에 건륭제는 그래도 풍도를 보이면서 양심전(養心殿)을 아들에게 내주고, 자신은 영수궁(寧壽宮)을 수리하여 쓰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흐지부지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양심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장 말도 안되는 것은 자금성내에서 여전히 '건륭' 연호를 썼다는 것이다. '가경' 연호는 단지 대외적으로 쓰는 것이었지 대내적으로는 쓰지 않았다.

 

건륭제의 태상황생활에 관하여,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평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바로 화신(和珅)이 태상황의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조정을 좌지우지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경제는 화신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가, 건륭제가 붕어한 후, 즉시 화신을 제거한다. "화신이 쓰러지니, 가경제가 배부르게 먹었다." 맹삼(孟森)은 <청사강의(淸史講義)>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남겼다. 화신이 가경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주 태상황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먼저 가경제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가경제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 "황야께서 처분하신 일을 짐이 어찌 감히 다시 본단 말인가." 그리하여 화신은 더욱 자기 마음대로 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건륭제의 '퇴이불휴'의 상태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맹삼이 말한 것처럼 기실 정사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 방면에서 가장 권위있는 자료는 당시 조선사신의 견문에서 나온다. 맹삼이 인용한 <이조실록>에 따르면, 건륭제가 조선사신을 접견할 때, 더 이상 분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말한다: "짐이 비록 물러났지만, 대사는 여전히 내가 처리한다." 그리고 가경제가 태상황과 함께 있을 때, 태상황이 웃으면 가경제도 웃고, 태상황이 즐거워하면 가경제도 즐거워했다.

 

가경4년(1799년) 정월 초사흘, 건륭제는 3년간의 태상황생활을 마치고 붕어한다. 부황이 붕어한 다음 날, 가경제는 화신에게 손을 쓴다. 정월초팔일, 직접 화신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가경제는 드디어 자신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성세에서 쇠퇴로 전환되는 시대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