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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1)

by 중은우시 2023. 4. 30.

글: 장명양(張明揚)

 

가경5년(1800년), 조익(趙翼)은 십년의 공을 들여 <이십이사찰기(二十二史札記)>를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이 청나라시기 가장 위대한 사론(史論) 저작에는 필자가 보기에 아주 특별한 필기(筆記)가 포함되어 있다: <"태상황"제("太上皇"帝)>. 이는 시평을 담은 '영사사학(影射史學)' 필기이다. 바로 <이십이사찰기>를 완성하기 전해(가경4년)에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마지막인 "태상황" 건륭제(乾隆帝)가 붕어한다. 그리고 조익은 글에서 역사상 14명의 "태상황"을 살펴본 후, 건륭제를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원만한' 태상황이며, '정말 유사이래 본 적이 없으니, 어찌 성세라 아니할 수 있으랴'라고  치켜세운다.

 

건륭제가 이런 엄청난 평가를 받을만한지 아닌지는 뒤에 다시 얘기해보기로 하자. 다만 필자에 있어서 조익의 이 글에서 가장 흥미없는 부분은 그가 태상황들의 퇴위이후의 '은퇴생활'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력전환시대의 잔혹과 비감을 효와 불효라는 몇마디 말 속에 숨겨두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태상황"을 분류하자면, 원인을 따져볼 때 양대문파가 있다:

 

건륭제와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를 대표로 하는 "자원파(自願派)"이다. 원인은 대부분 정치에 대한 권태로 인하여 "내선(內禪)"한 것이다. 이것이 다수파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를 보면 선양이라는 것이 송노정(宋魯鄭)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스러운 것은 아닌 것이다. '태상황'으로 지내는 것이 그다지 전도유망한 직업은 아닌 것이다. 

 

당고종(唐高宗) 이연(李淵)을 대표로 하는 "핍박파(逼迫派)"이다. 현무문의 피는 괜히 흘린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또 하나의 지파(支派)가 있다. 예를 들어,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와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이다. 비록 아무도 그들에게 '태상황'이 되라고 핍박하지는 않았지만, 한명은 사천으로 도망가는 길에 아들이 황제를 칭하자 자동으로 '태상황'이 된 것이고, 다른 한명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포로로 잡힌 후, 동생이 황제에 오르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둘 다 자원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분류는 은퇴이후의 상태로 나누는 것인데, 개략 세개의 파로 나눌 수 있다.

 

"퇴이불휴파(退而不休派)". 남은 열정을 발휘하여 후계자를 끌어주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사실상 은퇴하지 않은 것같았던 건륭제이다. 이 파에 참가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먼저 자원해서 황위를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새황제가 너의 수렴청정에 도전할만한 실력이 없어야 한다. 이 둘이 갖추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파는 "나퇴파(裸退派)"이다. 양위이후 노년을 보내면서 술이나 마시는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이연과 그의 현손 이융기이다. 이 파의 말년은 비교적 처량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가장 '재미있다' 

 

나머지 하나의 파는 "재등극파"이다. 하야한 후에 복벽에 성공한 것이다. 이 파는 아주 적다. 제대로 해낸 사람은 오직 명영종 주기진 뿐이다.

 

필자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태상황'들의 은퇴생활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원만한' 결말은 없었다고. '태상황' 자신이 불행하여 황권을 잃은 회한과 실의로 우울하게 생을 마감했거나, 후임황제가 불행하여, 부친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오직 은인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래에서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기로 하자. 설사 위대한 조익이라 하더라도, 그가 말한 '위대하고 원만했던 것'은 신화의 범주에 속했다는 것을. 권력 앞에서는 인륜이 없다.

 

1. 유태공(劉太公)

 

누가 중국최초의 '태상황'인가? 이건 이견이 있는 문제이다. 그다지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한가지 견해에 의하면 최초의 태상황은 진시황의 부친인 진장양왕(秦莊襄王)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황제라는 직위를 만들어냈는데, 효심이 폭발하여, 특별히 단지 '진왕(秦王)'에 머물렀던 부친을 '태상황'으로 추봉했다는 것이다. 아, 첫번째 '태상황'은 세상을 떠난 후에 되었다는 말이구나.

 

그러나, 조익의 견해가 더욱 많이 인정받고 있다. 첫번째 '태상황'은 바로 유방(劉邦)의 아버지인 유태공(劉太公)이라는 것이다. 태상황은 원래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 자신의 부친 태공에게 내린 칭호이다. 역사상 유일하게 황제를 지낸 적이 없는 '태상황'으로서 유태공의 역사적 지위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사서에 심지어 그의 이름도 쓰여 있지 않다. '태공'이라는 것은 그저 '어르신'이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다. 유어르신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는가? 유태공은 역사상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태상황이기도 하다.

 

<사기>에는 유태공이 태상황에 오르는 과정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방이 즉위한지 6년후에, 매5일에 한번씩 부친을 찾아가서 절을 하는 습관을 유지했다. 나중에 유태공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하여 유태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땅 위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 지금 비록 한고조가 아들이지만, 그는 백성의 주인이다; 태공이 비록 부친이지만 황제의 신하이다." 어찌 황제로 하여금 신하인 당신에게 절을 할 수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유태공이 그 말을 들으니 매우 황공해서 다음번에 유방이 집으로 왔을 때 빗자루를 들고 뒷걸음질로 걸었다. 아주 겸손한 태도였다. 유방도 마음이 조급해진다. 유태공을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자 유태공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황제는 백성의 주인인데 어찌 내가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황제를 지존으로 삼는 '천하의 법'도 어기지 않으면서,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유방의 해결방법이 바로 태공을 '태상황'을 모시는 것이었다. <한서>에는 유방의 조서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아비가 천하를 얻으면, 아들에게 전해준다. 아들이 천하를 얻으면 부친을 존귀하게 모신다(父有天下, 傳歸于子, 子有天下, 尊歸于父)"

 

유태공과 같은 정종(正宗)이 아닌 '태상황'은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황권에 조그만치의 위협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유태공의 은퇴생활은 정말 '부자자효(父慈子孝, 아비는 자상하고 아들은 효도를 다한다)'의 인륜논리로 돌아가게 된다.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진(晋)나라때의 야사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실린 것이다. 유방은 유태공이 '태상황'이 된 후에도 하루종일 우울해 하는 것을 보았다. 이유를 알아보고나서 비로소 유태공이 고향인 풍현(豊縣)에서 "술을 사고팔며, 투계를 하고 축국을 하는" 시정생활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장안의 대도시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장안의 부근에 풍현을 모방하여 "신풍현(新豊縣)"을 만든다. 그리고 유태공이 고향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이웃사람들을 불러서 이 새로 지은 마을에 살게 한다. 그러자 태상황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신풍현은 신풍진(新豊鎭)이라고 부르고,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이야기의 감동적인 정도는 필자로 하여금 <사조영웅전>의 완안홍렬(完顔洪烈)이 포석약(包惜弱)을 위하여 왕부의 가운데 우가촌(牛家村) 구택(舊宅)을 지어준 것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는 <사기.고조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은 유방이 유태공의 생일을 축하하다가, 돌연 유방은 태공이 이전에 둘째형을 편애하였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부친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공은 이전에 항상 나를 무뢰한이라고 하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둘째형만 못하다고 말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유방이 유태공에게 효도를 다했느냐고 물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유태공의 행복한 말년의 '태상황'생활은 권력에 대한 시험이 없는 상황하에서 만들어졌다. 한가지 옛날 에피소드가 이 점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초한전쟁때 태공과 유방의 처 여치(呂雉)가 함께 초군에 포로로 잡혔는데, 항우가 전쟁터에서 유방에게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유태공을 삶겠다고 협박한다. 유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한ㄷ나: 우리는 형제이다. 나의 부친은 바로 너의 부친이다. 만일 네가 태공을 삶는다면 나에게도 탕을 한그릇 나눠달라.

 

기원전 197년, 태상황 유태공이 붕어한다. 필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방과 유태공과 같은 양호한 황제와 태상황의 관계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2. 조무령왕(趙武靈王)

 

반드시 또 한명의 그다지 정종이 아닌 태상황을 이야기해야겠다. 그러나 필자는 그래도 그가 유명무실했던 유태공보다는 조금은 정종이었다고 생각한다. 조(趙)나라의 위대한 군왕 조무령왕은 27년간 조왕을 지낸 후에 왕위를 아들 조혜문왕(趙惠文王)에게 넘겨준다. 그는 존호로 '주부(主父)'라고 부른 외에 사실상 후세의 '태상황'들과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러니 그도 '태상황'으로 쳐주기로 하자.

 

일찌기 '호복기사(胡服騎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조무령왕은 절대로 이전에 말했던 '퇴이불휴파'는 아니다. 그러나 아들 조혜문왕도 그다지 비참하지 않았다. 조무령왕과의 왕권구분은 기본적으로 각자 한분야씩을 관리했던 것이다. 주부는 '주외(主外, 대외관계를 책임짐)'하여 계속하여 그의 호복을 입고 군사와 전쟁을 관장했다. 조혜문왕은 "주내(主內)"하여, 국내사무를 관장했다. 주무령왕이 은퇴한 이후 가장 빛나는 사적은 바로 한차례의 외교사건이다. 은퇴한 후 첫째해에, 그는 사신으로 사칭하고 진(秦)나라로 간다. 그리고 여러 진나라대신들을 만난다. 마지막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왕(秦王)과 진나라 태후(太后)를 만나기까지 한다. 당시 이 '태상왕'의 왕으로서의 기품이 말과 태도에서 묻어나와, 진왕과 태후로부터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접견을 마친 후에 깨닫고는 기병을 보내 추격했으니, 이미 경계심을 가진 조무령왕은 일찌감치 도망쳐버렸다고 한다.

 

'주부'로 있으면서, 조무령왕은 여전히 여러 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을 벌인다. 중산국(中山國)을 일거에 멸망시키고, 누번왕(樓煩王)에게 승전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조무령왕은 후세의 '태상황'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잘못을 범하게 된다. 스스로 궁중의 황위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는 왕위를 아들 조혜문왕에게 넘겨준 것을 후회했다. 그는 자신이 복벽하여 다시 '조왕'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는 또 다른 아들인 공자장(公子章)도 왕으로 세워 조나라를 둘로 나누려 한 것이다. 당연히 조무령왕이 4년이나 '주부'로 지내다보니 심심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46세였으니까. 권력의 유혹하에 이 웅재대략의 군주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이번 왕위지쟁의 결과는 저명한 '사구지변(沙丘之變)'이다. 공자장은 부친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패전후 조무령왕의 사구궁(沙丘宮)으로 도망쳐 비호해줄 것을 요청한다. 누가 알았으랴. 조혜문왕의 군대는 사구궁으로 쳐들어와 공자장을 죽였을 뿐아니라, 조무령왕의 내궁까지 포위하고 모든 궁인을 쫓아낸다. 조무령왕은 일세의 영웅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새알을 주워서 허기를 채워야하는 신세가 된다. 3개월간 갇혀 있다가 결국 궁안에서 굶어죽는다.

 

가장 극적인 결말은 조혜문왕은 부친이 굶어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거국적으로 애통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후 황제와 '태상황'간의 다툼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된다: 간사한 자가 "교조(矯詔, 조서를 고쳐)" 혼란을 일으켜, 귀를 가리고 골육을 이간질했다.

 

그러나, "교조"에는 따옴표를 넣어야 한다.

 

3. 난세의 태상황들

 

난세때의 '태상황'은 많은 경우 그저 한바탕 소동도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서진(西晋)의 '팔왕지란'대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진혜제(晋惠帝)의 황제위를 찬탈하고, 진혜제를 금용성(金墉城)에 연금한다. 그리고 진혜제를 '태상황'으로 봉한다. 나중에 사마륜도 패전하여 죽고만다. 진혜제는 다시 황제에 오른다. 다만 여러 왕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장악하여,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이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대했던 진혜제라면 그다지 문제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북조(北朝)의 태상황은 더욱 어지럽다. 5명이나 나왔다. 기인도 배출된다. 조익의 말에 따르면, "북조의 여러 황제들은 말할 만한 것도 없다." 먼저 후량(後凉)의 개국군주 여광(呂光)이 있다. 10년간 재위하고, 중병을 앓으면서 태자 여소(呂紹)에게 황위를 전해주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여기서 뉴스거리가 나온다. 그는 태상황이 된 후 몇시간만에 병사한다는 것이다(조익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 신기한 점은 여소의 황위는 그날 바로 동생 여찬(呂纂)에게 빼앗겨버린다는 것이다. 황위를 빼앗기면서 여소는 목숨도 잃는다. 바로 몇시간전에 형제 둘은 태상황의 병상 앞에서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겠다'고 맹세를 했었는데.

 

그리고, 후위(後魏)의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拔弘)이 있다. 이 '태상황'은 기인이다. 7년간 재위했는데, '항상 속세를 떠나려는 마음'이 있었다. 17세때 황위를 아들에게 넘겨준다. 그는 역사상 가장 젊은 '태상황'이다. 그러나 즉위한 신황제는 겨우 5살이었다. 헌문제는 어쩔 수 없이 조정의 업무를 계속하여 처리해야만 했다. 그동안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그리고 6년동안 태상황으로 지내다가 붕어한다. 결국 그는 단 하루도 속세를 떠나지 못했다. 

 

다음은 북제(北齊)의 무성제(武聖帝) 고담(高湛)이다. 이 '태상황'에게서 재미있는 점이라면, 그가 좋아하는 태자인 고위(高緯)를 황후가 좋아하지 않았다. 황후는 작은아들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고담은 기정사실화사기 위하여 천상(天象)에 변(變)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이는 황위를 넘겨주는 가장 전형적인 이유이다), 돌연 황위를 10살된 태자에게 넘겨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하여 태자를 교체하려던 황후에게 한방을 먹인다. 그러나 황위를 넘겨준 후, 28살의 고담은 '퇴이불휴'의 길을 걷게 된다. '군국대사를 모조리 보고받는다' 그리고 황제가 책임지는 영역은 군주입헌제식의 예의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4년간 '태상황'으로 있다가 고담은 붕어한다.

 

고위도 나중에 '태상황'이 된다. 그에게도 재미있는 점이 있다. 황위를 넘겨준 원인이 북주(北周)군대에게 패배하여 곧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이 망국황제가 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인지 8살된 아들 고항(高恒)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이를 보면 망국황제라는 것은 실로 뜨거운 감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위의 존호는 태상황에서 다시 한단계 올라서서 "무상황(無上皇)"이라고 쓴다(후세에 이런 명칭을 쓴 경우는 다시 없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부자 두 사람은 북주군대에 포로로 잡힌다.

 

북조의 마지막 '태상황'은 북주의 주선제(周宣帝) 우문윤(宇文贇)이다. 1년간 황제로 지낸 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7살짜리 아들에게 황위를 넘긴다. 그는 아마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같다.부친인 주무제(周武帝)가 붕어할 때 부친의 관을 두드리면서 '너무 늦게 죽었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이런 자이니 당연히 '퇴이불휴'하게 된다. 그러나, 태상황에 오른지 1년후에 그는 붕어한다.

 

수양제(隋煬帝)의 태상황 경력도 아주 기이하다. 동시에 4개월간 황제와 태상황을 지낸다. 대업13년(617년) 십일월, 진양에서 거병한 이연이 장안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양광의 아들 대왕(代王) 양유(楊侑)는 유명무실한 수공제(隋恭帝)가 된다. 동시에 이때 아직 강도(江都)에 머물던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봉한다. 다만, 문제는 수양제는 이때도 아직 황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와 태상황을 겸직하던 생활은 4개월만에 끝난다. 대업14년 삼월, 수양제는 우문화급(宇文化及)이 기획한 '강도지변(江都之變)'으로 죽는다. 그 소식이 장안에 전해진 후 이연은 즉시 같은 해 오월 양유를 핍박하여 퇴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