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 신동(神童)의 역사 (2): 명, 청, 민국, 신중국

by 중은우시 2023. 4. 11.

글: 유랑미(柳浪美)

 

5. 명(明)의 신동들

 

신동을 진정으로 추앙한 것은 명왕조이다. 특히 젊은 나이로 과거에서 거인이 되거나 진사가 된 신동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신동들이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한 후 명나라의 최고위직 문신이 되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제일신동으로 불리는 해진(解縉)은 18살에 거인이 되고(해원, 즉 1등), 19세이 진사가 되며, 명나라의 수보(首輔)가 된다. 이동양(李東陽)은 18세때 진사가 되어 내각수보가 된다; 양일청(楊一淸)은 4,5살때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7,8세때는 이미 문장을 제대로 썼던 유명한 신동이다. 10살때 한림수재로 추천받고, 18세때 진사가 되며, 내각수보에 오른다; 양정화(楊廷和)는 12살에 거인이 되고, 19살에 진사가 되었으며 내각수보가 된다; 서계(徐階)는 20살때 탐화(3등)가 되고 내각수보가 된다; 비굉(費宏)은 20살에 장원이 되고, 역시 내각수보가 된다.

 

명나라의 저명한 정치가 장거정(張居正)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여, '강릉신동(江陵神童)'으로 불렸다. 23살에 진사가 되고, 역시 내각수보에 오른다.

 

저권(儲巏)은 태주(泰州)사람으로 5살때 책을 한번 읽으면 외웠고, 9살때 문장을 써서 '신동'으로 불렸다. 해원, 회원에 1갑진사제2로 조정에서 20여년간 있으면서 청렴했다. 

 

엄숭(嚴嵩)은 6살때 고향에서 유명한 신동이었고, 나중에 권력이 조야를 뒤흔드는 수보, 대간신이 된다.

 

과백령(過百齡), 무석(無錫)에서 태어났고, 자질이 총명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한다. 11살때 다른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고 금방 그 허실, 진퇴의 도리를 깨닫는다. 과백령은 공인된 대명 바둑신동이다.

 

당연히 신동중에는 요절한 사람도 있고, 중용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동기(董玘)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글읽기를 좋아하고 시와 대를 잘 지어서 신동으로 불렸다. 18살때 회시제1, 전시제2로 진사방안(2등을 말함)이 된다. 다만 환관 유근에게 배척받아 끝까지 중용되지 못한다.

 

소복(蘇福)은 홍무제때 신동으로 추천받는다. 8살때 <삼십야월시>를 지었고, 황제가 직접 신동이라고 정하나, 14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희항(李希沆), 명나라때 동안현 대학촌 사람이다. 7살때 문장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으나, 아쉽게도 18살에 요절한다.

 

6. 청(淸)의 신동들

 

청나라제일신동 용계서(龍啓瑞)는 하급관리집안 출신이다. 용계서의 부모는 틈만 나면 아들에게 글을 읽고 공부하도록 독촉했다. 그리하여 그는 어려서 좋은 공부습관을 기르게 된다. 5살때 <삼자경> <백가성>과 "사서오경"의 서적을 외웠고, 8살에는 시를 지었다. 어린 나이에 현지에서 이름을 떨친다.

 

용계서는 8살때 친척을 방문한다. 마침 한 사숙(私塾)선생과 두 학생이 대자(對子)를 내고 있었다. 선생이 버드나무를 가리키며, "녹류(綠柳)"라고 말하자, 한 학생은 "홍련(紅蓮)"이라고 대답한다. 선생이 계속하여 "풍취녹류(風吹綠柳, 바람이 녹색 버드나무에 불다)"라고 하자, 학생은 "우타홍련(雨打紅蓮, 비가 붉은 연꽃을 친다)" 선생은 아주 기뻐하면서 난이도를 높였다. "당중연포찬홍권(塘中蓮苞攢紅拳, 연못 가운데 있는 연꽃이 붉은 주먹을 쥐고 있다.)" 그러자 두 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때 연못같에서 놀고 있던 용계서가 "수면하엽신녹장(水面荷葉伸綠掌, 물 위의 연잎이 푸른 손바닥을 내밀고 있다)" 이 대련은 아주 뛰어나서 실로 얻기 힘든 것이다(가위,바위,보로 하더라도 바위를 낸 것에 보를 내어 이긴 것임). 선생은 고개를 들어보니 아주 어린 아이였다 그래서 놀랍다고 여긴다. 선생은 이 아이에게 얼마나 뛰어난 능력이 알고 싶어서, 다시 상련(上聯)을 낸다. "칠압부당(七鴨浮塘), 수수수삼쌍일지(數數數三雙一只)" 이 대련의 난점은 시작부분의 '칠압(일곱마리 오리)'가 마지막의 '삼쌍일지(세 쌍에 한 마리)'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용계서는 연못을 보면서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잉어 한 마리가 튀어올랐다. 용계서는 바로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렇게 말한다: "척어약수(尺魚躍水), 량량량구촌십푼(量量量九寸十分)" 그 대련을 듣자 선생은 더욱 깜짝 놀란다.

 

이어서, 용계서는 선생에게 상련을 낸다: "남인북상(南人北相), 옥중소투투투투동서(屋中小偸偸偸偸東西)" 선생은 용계서의 상련을 듣고는 안색이 변한다. 네개의 '투(偸)'자는 모든 글자의 의미가 달랐다. 선생은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기효람(紀曉嵐)도 대련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용계서는 27살때 장원급제한다.

 

명나라의 당백호(唐伯虎)는 명성이 높아 일시에 이름을 떨친다. 당백호가 한번은 향을 사르러 갔는데, 오랫동안 명성을 들어오던 화상이 그에게 대련을 하나 내달라고 부탁한다. 당시는 한여름이어서 사원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당백호는 그 광경을 보고 상련을 낸다: "화상하화화상화(畵上荷花和尙華)". 7글자는 간략하지만 포함한 내용은 아주 교묘했다.

 

당백호는 화상에게 말한다: 만일 나중에 누군가 하련(下聯)을 만든다면, 그는 분명 공부를 열심히 하는 '신동'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대련을 절에 놓아두었고, 많은 문인들이 와서 대련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앞으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발음이 같아지는 하련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실패하고 돌아갔다.

 

200여년후, 청나라때의 서생 이조원(李調元)이 절로 와서 부처에게 향을 사를 때, 대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한번 시험해보고자 한다. 이조원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 하련을 내놓는다: "서림한첩한림서(書臨漢帖翰林書)"

 

뜻이 맞을 뿐아니라 독음 평측압운도 모두 부합했다. 그리고 상련이 뜻과 서로 통했다. 

 

당백호의 예상과 마찬가지로, 이조원은 확실히 7살때 글을 읽었던 '신동'이다. 대련에도 실력이 필요하니, 이조원도 보통 인물은 아닌 것이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기억력도 남달랐다. 그래서 당백호의 상련에 하련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림중에 태사(太史) 대공(戴公)이 있었다. 그는 명을 받아 서진독찰학정(西秦督察學政)으로 있으면서 과거를 주재했다. 당시 7살짜리 어린 아이 장절(章節)이 있었다. 그는 얼굴이 관옥같았고, 붓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 시험에 답안을 작성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사가 그를 보니 나이가 너무 어려서 이렇게 말한다: "여긴 왜 왔느냐. 저리 꺼져라. 시원(試院, 시험보는 곳)은 문장을 겨루는 곳이지 어린아이가 노는 곳이 아니다." 그러자 어린 장절은 공손하게 두 손을 들어 읍(揖)을 하며 말했다: "동자가 무지하여 한번 구경하러 온 것입니다." 태사가 묻는다: "글은 쓸 줄 아느냐? 만일 백지를 내면 너에게 곤장을 쳐서 벌주겠다!" 어린 장절이 말한다: "비록 1등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곤장을 맞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학궁선생이 말한다: "이 아이는 예전부터 신동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리하여 태사는 그에게 시험문제를 내주고 그에게 작은 탁자에 앉아서 답을 적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과자도 먹을 수 있도록 주었다. 장절은 시험문제를 본 후 잠시 눈꼬리를 찡그리더니 바로 글을 써내려간다. 금방 완성했다. 그가 시험답안을 내놓을 때 이렇게 말한다: "동자 장절은 부끄럽습니다. 실력이 부족하고, 급히 문장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이미 지려고 하니 그저 백지답안을 내지 않기 위해서 이 답안지를 냅니다." 태사는 그의 답안을 읽어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마침 벽에는 왕희지의 <난정집서>가 걸려 있었다. 태사는 그 중의 구절인 "차지유숭산준령(此地有崇山峻嶺), 무림수죽(茂林修竹)"으로 대련을 쓰도록 명한다. 어린 장절은 그 자리에서 대답한다: "파니부조충전각(怕你不雕蟲篆刻), 단간잔편(斷簡殘片)". 몇몇 막료들이 그 대답을 듣고는 손뼉을 치면서 멋지다고 칭찬한다.

 

태사는 짐짓 화난 체 하면서 다시 상련을 하나 낸다. "동자독서상(童子讀西廂)" 장절은 그 자리에서 대답한다: "대인응동정(大人應東井)" (서상은 서상기 소설을 말하고, 동정은 하늘의 28수중 하나이다). 태사는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면서 정원의 큰 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노수천년(老樹千年)" 그러자 장절은 이렇게 대답한다: "향담일현(香曇一現)". 태사는 그의 대답을 듣자 그가 걱정되었다. 그의 대답이 불길한 징조인 것처럼.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그의 총명하고 민첩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년이 지나고 태사는 돌연 꿈에 장절을 만난다. 그는 손에 담화(曇花)를 들고 천천히 다가와서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절구시를 하나 읊는다;

 

신본우발라(身本優缽羅)

탁신식요도(托身植瑤島)

입세상숙포(入世償宿逋)

담화의구호(曇花依舊好)

 

원래 어린 장절은 태사를 만나고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연두를 알아 죽었던 것이다. 태사는 이전의 '향담일현'이라는 댓구를 떠올리며 홀연 깨닫는다. 그리하여 붓을 들어 <담화기>를 적어, 불국의 담화가 전세하여 왔던 신동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청나라이후에는 동자과가 쇠락한다. 청나라는 철저히 동자과를 폐지하고, 과거의 제1차시험인 동시(童試)만 남긴다. 동시에 응시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고 적고를 불문하고 '동생(童生)'으로 부른다. 합격하면 '수재(秀才)'로 불렀다. 신동들이 관직에 나가는 첩경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오닌들과 함께 수재 시험을 치를 수는 있게 되었다.

 

7. 청말민초(淸末民初)의 신동들

 

11살짜리 강희장(江希張)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청말민초의 '제일신동'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3살때 800여개의 한자를 알았고, 100여수의 당시를 외웠으며, 4살이 되어서는 시와 대를 능숙하게 지었다. 그가 쓴 글의 수준은 성년수준이었다.

 

청나라말기 산동순무 손보기(孫寶琦)는 4살짜리 강희장을 추천하여 북경으로 보내어, 그보다 1살 많은 선통제(宣統帝, 부의)와 함께 공부하게 한다.

 

강유위(康有爲)가 그를 보고는 파격적으로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의 원고를 그에게 보여준다.

 

강희장이 7살되던 해 <사서백화해설(四書白話解說)>을 쓴다. 이 책은 쉽게 설명하면서도 관점이 새로웠고, 신문화운동의 조류도 따랐다. 그리하여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후 신동 강희장의 <삼천대천세계도설(三千大千世界圖說)>등 책이 출판되고, 명성은 더욱 높아진다. 노신조차도 그의 명성을 들었을 정도이다. 1918년, 노신선생은 한 글에서 11살의 신동에 대한 공격을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신동 배후의 부친을 공격한 것이다.

 

강희장의 이후 경력을 보면, 그는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이렇게 대단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부친 강종수(江鍾秀)가 신동제조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강희장은 그가 기획한 사기극에서 역할을 담당한 것일 뿐이고.

 

출생때부터 강희장의 부친은 온갖 머리를 짜내서 그를 '포장'한다. 예를 들면, 이전에 꿈을 꾸었는데, 한 거지가 그의 앞에 다가와서 영아가 되었고,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면서 강희장은 바로 '무훈전세(武訓轉世, 무훈이 환생하였다는 뜻)'라고 말했다. 무훈은 강씨집안이 있는 산동사람으로, 생전에 수십년간 걸인으로 지내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아껴서 현지에 3개의 학교를 지어, 사회에서 존중받는 자선가,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천고기개(千古奇丐)'가 '민국신동'으로 환생했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종수는 수재였고, 방원 십여리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강희장에게 유학경전을 배우도록 했을 뿐아니라, 아들에게 도, 불, 회교등 종교사상도 주입했다. 그리고 아들이 "5살때 이미 여러 경전을 읽었고, 글을 쓸 수 있으며, 외국어도 개략 할 줄 안다"고 선전한다. 그리하여 전체 산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산동순무에게까지도 알려지게 된다.

 

강희장이 7살때 지었다는 <사서백화해설>은 그의 부친이 여러 선비들을 청해서 함께 아들을 '지도'하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전체 책의 작자를 '7세동자 강희장'이라고 쓴 것이다. 그건 전혀 강희장의 개인작품이 아니다.

 

강희장 부친의 사기극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알아차렸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문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니 일시에 기이한 이야기로 전해지게 된다. 그러나 노신은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글에서 "귀화(鬼話)와 과학"을 언급하면서 이 '신동'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더욱 엉망으로 만든 것은 이 신동이 쓴 <삼천대천세계도설>이다. 그는 유학자, 도사, 화상, 예수교의 온갖 것들을 섞어놓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이야기들까지 포함시켰다. 천당을 얘기하는 것은 육조방사의 <십주기>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지옥을 설명하는 것은 그저 <옥력초전>을 베낀 것이었다.

 

강희장은 처음 과도하게 포장된 신동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다.

 

그러나, 강희장은 운이 좋은 신동이었다. 그는 가장 좋은 시절에 성공적으로 포장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희장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봉건적인 것들을 주입받았고, 그는 그런 지식들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무신론자가 된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걱정없이 마음대로 놀기를 바랐다. 중학교를 다닐 때, 강희장의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마침내 1927년 봄, 20살의 강희장은 과기구국(科技救國)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근공검학(勤工儉學)을 떠난다.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한다. 그는 착실하게 인생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강희장은 귀국후에 상하이의 한 화학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지낸다. 해방후에는 국내에서 명성을 얻은 화학공업전문가로 성장했다. 청말민초때 전국을 뒤흔들었던 신동이야기는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졌고, 그도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다.

 

은퇴후의 강희장은 구식 서양건물에 거주하며 검소한 생활을 지낸다. 가끔 젊은 화학전공자들이 물어보면 대답해주면서, 2004년까지 살다가 평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향년 97세였다.

 

그의 신동으로서의 옛날 일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평생의 정력을 국가의 화학공업건설에 바친 과학자라는 것이다.

 

8. 신중국의 신동들

 

1980년-1990년, 교육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러한 사회배경하에서, 인재를 배양하기 위하여 자원을 가장 우수한 학생들에게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들은 '인조신동(人造神童)'의 시대로 진입했고, 소년반(少年班), 신동붐, 천재가 연이어 나타난다.

 

영박(寧鉑)은 2살반때 20여수의 모택동시사를 외웠고, 3살때 100개의 숫자를 헤었으며, 4살때 400여자의 한자를 알았고, 5살에 입학하고, 6살부터 <중의학개론(中醫學槪論)>을 공부하며 중초약(中草藥)을 사용했으며, 8살때는 바둑을 두고 <수호전>을 읽었다.

 

1977년, 강서야금학원(江西冶金學院)의 선생인 예림(倪霖)은 당시 중국과학원 원장 겸 부총리인 방의(方毅)에게 편지를 써서, 강서 강주8중의 13살 천재소년 영박을 추천한다. 방의는 그 서신을 읽은 후, 중국과학원 산하의 중국과기대학에 파격적으로 영박을 입학시켜준다.

 

영박은 한가지 기록을 달성했다. 중국과기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는다. 19살의 나이로 전국에서 가장 젊은 강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제일신동은 결국 '상중영'식의 이야기로 끝난다.

 

2003년, 영박은 정식으로 중국과기대학을 떠난다. 오대산에서 불가에 귀의하며, 신동의 전설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 만이 아니다. 영박과 같이 유명했고, 심지어 성적이 더욱 두드러졌으며 미래 노벨상감이라고 치켜세워지던 천재소년 사언파(謝彦波)와 간정(干政)은 교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한명은 결국 국내로 귀국하여 보통의 대학부교수가 되고, 다른 한명은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으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78학번의 소년반은 결국 국가에 기술연구형인재를 제공하게 되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렇게 이름을 날리던 몇몇 천재소년들은 결국 모두 평범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비록 어떤 의미에서 당시의 중국은 그런 '신동' '천재'가 필요했었는지 모르겠다. 이를 통해 전체사회가 과학을 중시하도록 일깨워주기 위해서. 그러나, 일부러 심은 꽃은 피지를 않고, 아무 생각없이 꽂은 나무에서는 활짝 꽃이 피는 법이다. 영박은 이렇게 말한다: "신동은 내가 마땅히 누려야할 생활과 오락의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그리고 사언파도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다시 한번 기회가 있다면, 나는 다시는 소년반에 들어가지 않겠다."

 

2004년 3월 베이징의 타오란(陶然)유치원에 "재고일반(才高一班)"을 정식으로 개설한다. 선발에 선발을 거쳐, 서로 다른 지역에서 14명의 평균연령이 5살인 '뛰어난 어린아이'들로 완전히 새로운 반을 만든다. 이 반의 아이들을 당시의 사람들은 '신동'이라고 불렀다. 이 유치원에 이런 반을 두게 된 것은 신동들을 잘 교육시켜 진정으로 뛰어난 인재로 배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5년이 지났는데, 당시 '재고일반'의 아이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그후 아무런 보도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이 일은 흐지부지되었을 것이다. 즉, 소위 '뛰어난 아동'의 절대다수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을 뿐아니라, 나중의 발전도 보통아이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