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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 신동(神童)의 역사 (1): 선진, 한위, 당송.

by 중은우시 2023. 4. 10.

글: 유랑미(柳浪美)

 

중국은 자고 이래로 영웅을 많이 배출하였고, 서로 다른 시기에는 서로 다른 유형의 신동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찬란한 별빛처럼 신주대지위의 하늘에 떠 있었고, 어떤 경우는 유성처럼 그저 밤하늘을 순식간이 지나가버렸다.

 

영성(靈性)이 개체의 차이를 결정한다. 영성과 천부를 가진 아니는 반드시 총명하고, 한번 배우면 바로 익히며, 한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깨우친다. 스스로 익혀서 인재로 성장하고, 심지어 스스로 이치를 깨닫는 능력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오성이 뛰어난 아이들을 '신동'이라 불렀다.

 

간단하게 신동의 의미를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아동시기에 소년 심지어 청년시기에 완성할 수 있는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신동을 배양한다는 것은 나이와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동이라 불리던 인물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1. 선진(先秦)시기의 신동들...

 

신동은 기실 성인화된 소대인(小大人)이다.

 

중국에서 "신동숭배"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원래 신동이 아닌 대인물에 대하여도 사람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신동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사서에 기재된 상고의 군왕, 예를 들어 오제(五帝)의 으뜸인 황제(黃帝), 하(夏)의 창시자 우(禹), 상(商)의 시조 계(契),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등은 모두 최초의 신동들이다. 그들은 출생경력이 기이하거나, 아니면 어려서부터 지혜가 남들보다 뛰어났다. 신동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신의 편작도 사람들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었다. 

 

고대사서에서 황제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하였다고 한다. 15세가 되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류의 기록은 기실 "성이불가지지지위신(聖而不可知之之謂神, 성스러워서 알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신이라 한다)"(<맹자.진심하>)의 심리이다. 신령신앙과 자연숭배로 사람들은 이들 위대한 지도자들은 반드시 신명과 모종의 연계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신의 아들이라고 여긴다. 이런 류의 신동은 '신격화된 아동'이다. 후세의 종교신화와 제왕전설에서 계속하여 나타난다.

 

그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숭상받는 신동은 약간 달라진다.

 

춘추시기, 예약이 붕괴하여, 이때는 사람들이 예의형의 신동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항탁(項橐)이 7살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도중에 7살짜리 항탁을 만나는데, 항탁은 어렸지만, 읽은 것이 많아서 말을 잘했다. 공자는 그와 대화를 나눠본 후, 그의 사고가 민첩한 것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항탁이 유명해진 후, 금방 각 제후국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다투는 대상이 된다. 제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항탁을 빼앗아갈까봐 우려하여, 잔인하게 항탁을 죽여버린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전국책. 진책5>). 이후 어떤 사람은 항탁이 항우(項羽)의 조상이었다고 말한다.

 

전국시기에, 합종연횡을 한다. 그래서 이때는 모략형의 신동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감라(甘羅)가 12살에 상경(上卿)의 관직을 얻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사기> 기록에 따르면, 감라는 진나라의 재상 감무(甘茂)의 손자이다. 나이 겨우 12살에, 이미 진나라의 상경이 되어 재상 여불위의 심복이 된다. 그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신동이다.

 

당시 여불위는 영토확장을 꾀하였는데, 진나라대신 장당(張唐)을 연(燕)나라의 상(相)으로 보내고,다시 연나라와 연합하여 조(趙)나라를 치고자 한다. 그런데, 장당이 거절한다. 이때 감라가 가서 장당을 설득하고, 그를 위해 계책을 내놓는다. 결국 감라는 병사 한명 다치지 않고 조나라와 연나라가 싸우게 만든다. 그리고 진나라는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11개 성을 얻어낸다(<전국책.진책5>)

 

기실 선진의 신동이야기는 대부분 근거가 없다. 중국역사상 지명도가 가장 높은 신동중 하나인 감라의 이야기는 청나라때 일찌감치 '헛소리'로 고증되었다. 

 

청나라때의 양옥승(梁玉繩)은 <사기지의(史記志疑)>에서 이에 대해 고증한다. 진나라가 스스로 연나라의 태자단을 보내주고, 조나라가 연나라의 30개성을 취한 후, 진나라에 11개성을 준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한다. 감라의 이야기는 전국의 종횡가들이 모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진나라의 공로를 한 어린아이의 공로로 억지로 돌린 것에 불과하다.

 

2. 한위(漢魏)의 신동들...

 

어떤 학자에 따르면 한나라는 중국고대신동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한나라때는 찰거제(察擧制)였다. 지방관리가 현지에서 살펴서 인재를 선발한 후, 상부에 추천하는 관리선발제도였다. 그중의 "거동자랑(擧童子郞)"은 전문적으로 신동을 관료로 등용하는 통로였다.

 

그때 많은 나이어리지만 실력있는 인재들은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예를 들어, 임연년(任延年)은 12살에 제생(諸生)이 되어, 태학(太學)에서 이름을 떨쳐, '임성동(任聖童)'이라 불렸다; 장감(張堪)은 나이 12살에 장안에서 공부하여, 그 뜻과 행동이 좋아 여러 유생들이 그에게 '성동(聖童)'이라는 별호를 붙여주었다. 두안(杜安)은 13살에 태학에 입학하여 '기동(奇童)'이라고 불렸다.(<문헌통고.선거과>)

 

그 시대에 신동을 판단하는 기준은 지능이 뛰어난 외에 효제겸양의 덕을 갖추어야 했다. 이는 유가사상이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 결과이기도 하다.

 

공융(孔隆)은 바로 전형적인 그런 유형의 한나라 신동이다.

 

공융양리(孔融讓梨, 공융이 동생에게 배를 양보하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공융양리는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정신으로 한나라신동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했다.

 

더더구나 공융은 어렸을 때 사고가 민첩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한서>에 따르면, 공융이 10살때, 부친을 따라 낙양으로 갔는데, 당시 사례교위 이응(李膺)은 천하가 다 아는 명사였다. 평소에 손님을 잘 맞이하지 않는다. 공융은 이응의 집으로 가서, 집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말한다: "나는 이원례(李元禮)의 친척이다."

 

문지기는 어린아이의 말을 듣고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집안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리하여 공융은 이응을 만나보게 된다.

 

이응은 당연히 공융을 몰랐다. 그래서 그에게 묻는다: "너의 할아버지가 나와 교분이 있느냐?"

 

공융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저의 선조인 공자(孔子)께서는 당신의 선조인 노자(老子)와 사우(師友)관계였습니다. 저 공융도 당신의 집안과 대대로 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찬탄한다. 막 문을 들어서던 태중태부 진위(陳韙)는 마땅치않게 여겼다: "어릴 때 총명하다고 하여, 어른이 되고나서 반드시 쓸모있는 것은 아니다." 공융은 아무런 이유없이 폄하받게 되자 즉시 반격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려서 분명 총명하셨을 것같습니다."

 

진위는 말문이 막혔다. 이응은 크게 웃으면서 난감한 분위기를 풀어주고, 공융에게 말했다: "너는 장래 크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신동으로 조충(曹冲)이 있다. 그는 조충칭상(曹冲稱象, 조충이 코끼리 무게를 재다)의 이야기를 남긴다.

 

<삼국지>에 따르면, 동한말기, 조조는 큰 코끼리를 한 마리 얻는다. 이 코끼리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궁금하여 수하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오직 조조의 아들 나이 겨우 5,6살의 조충이 부력으로 중량을 측량하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사서에 따르면,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시행했다'고 한다.

 

조충칭상은 성공적인 '신동마케팅'이다.

 

후세에 보는 것은 왕왕 단지 신동 조충의 기지이지만, 당시라면 이런 류의 실적은 나중에 관료로 나가는데 자본이 된다. 그러나, 조충은 조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13살까지밖에 살지 못한다. 조충이 죽은 후, 조조의 아들 조비가 와서 조조를 위로하자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나에겐 불행이지만, 너에겐 행운이겠구나!"

 

한위양진(漢魏兩晋)의 신동은 기민하고 사변에 뒤어났다. <세설신어>에 그런 내용이 잘 나타난다. 이 저작은 주로 동한에서 위진에 이르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수록된 36문 1,219개의 이야기중에서 백개넘는 것이 아동에 관한 것이다. 약 8%를 점한다. 이는 중국고적에서 실로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이를 보면 신동현상은 동한양진에서 흥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신동의 출현은 주로 한나라때 찰거제와 위진의 구품중정제의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절대다수의 신동은 명문집안출신이거나 관료집안자제였다.

 

옆마을에서 농사짓는 장삼, 이사의 집안에서 신동이 출현했던가? 만일 그들 집안에서 신동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공융, 조충처럼 고관, 명사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것이고, 성공적으로 관직을 얻고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신동마케팅은 원래 자본이 필요하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3. 당송(唐宋)의 신동들

 

당송의 과거에는 동자과(童子科)가 있었다. 아동이 이런 류의 시험에 참가하는 것을 "응신동거(應神童擧)"라고 부른다. 당나라때는 "10살이하로 일경(一經)을 통하고, <효경> <논어> 매권을 십통(十通)하면 관직을 주고, 칠통(七通)하면 출신을 준다" 전자는 관직을 얻고, 후자는 출신을 얻는다. 비록 인원수는 극히 적지만, 한위시대의 신동에 비해 기준이 명확했다.

 

당송과거에는 시부(詩賦)를 지었다. 신동은 대부분 시를 잘 지었다. 7살의 낙빈왕(駱賓王)은 <영아(詠鵝)>를 지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당시중 하나이다. 전체 시는 천진난만하고 소리내어 읽기에 좋다.

 

아,아,아(鵝,鵝,鵝)            거위, 거위, 거위

곡항향천가(曲項向天歌)  목을 굽혀 하늘을 향해 노래부른다

백모부록수(白毛浮綠水)  햐얀 털이 푸른 물 위에 떠 있고

홍장발청파(紅掌拔淸波)  붉은 발로 맑은 물결을 만들어낸다.

 

11살의 양형(楊炯)은 신동으로 추천된다. 왕발(王勃)은 어려서부터 시와 부를 지어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다. <구당서>에는 "6살때 글을 알고, 사고의 흐름이 막히지 않으며, 시의 내용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7살때 <고헌과(高軒過)>를 쓴 이하(李賀), 5살때 문장을 썼던 어현기(魚玄機), 9살때 시를 썼던 왕유(王維)등등이 있다.

 

<삼자경>에 기재된 또 다른 대당의 신동도 있다: "당류안(唐劉晏), 방칠세(方七歲), 거신동(擧神童), 작정자(作正字). 피수유(彼雖幼), 신이사(身已仕), 유위자(有爲者), 역약시(亦若是)"(당나라때 유안은 7살때 신동으로 추천받아, 서적을 교정하는 관직을 얻는다. 그는 비록 어렸지만 이미 관직에 나갔다. 실력이 있으면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

 

당현종 재위기간에 유안은 7살의 나이로 신동거에 응하여 관직이 비서성 정자에 이른다. <명황잡록>의 기록에 따르면, 하루는 당현종이 근정루에서 음악과 춤 공연을 보면서 유안에게 누각 위로 올라오도록 부른다. 그리고는 묻는다: "경은 관직이 정자인데, 글자 중에서 몇개가 바른가?"

 

유안은 조정은 이미 붕당의 싸움이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천하의 글자는 모두 바르나, 오직 '붕(朋)'자만은 바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붕'은 붕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현종은 이 신동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상아홀(象牙笏)과 황문포(黃紋袍)를 하사한다.

 

여러해 이후 유안의 관직이 재상에 이른다. 그는 경제개혁을 실시하여, 안사의 난 이후 피폐해졌던 국고를 한때 호전시키는 당나라의 유명한 이재가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귀양간다.

 

이필(李泌)도 당나라때 유명한 신동이다. 이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살때 글을 지어, 당현종에게 높이 평가받는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 태자 이형(李亨)의 속관이 되게 한다. 당덕종때는 재상이 되어, 내정, 외교, 군사, 재정등 분야를 두루 거치며, 관직이 중서시랑, 동평장사에 이르고 업현후의 작위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귀신이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송나라는 문치천하로 등신동거를 당나라때 그대로 시행하며, 더더욱 문재를 중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문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아동들을 선발한다.

 

양억(楊億),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7살때부터 글을 쓰고 시를 짓고 부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고담준론을 나눌 수 있었다. 송태종이 사람을 시켜 양억을 3일간 연이어 시험하며, 시를 5편 짓게 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나 깜짝 놀란다. 그러자 송태종이 직접 시험을 본다. 그때 양억은 "원병청충절(願秉淸忠節), 종신입성조(終身立聖朝)"라고 말하여 송태종이크게 기뻐한다. 그리하여 그자리에서 관직과 관포, 관패를 내린다. 20여세에는 한림학사를 수여한다. 그는 북송의 저명한 '서곤체(西昆體)' 사인(詞人)의 대표가 된다. 양억과 구준(寇準)은 아주 비슷하다. 두 사람은 독특하면서도 정기(正氣)를 지니고, 개성이 있고, 기개가 있다. 정의를 지켰으며, 절대로 아부하는 어용문인이 아니었다. 나중에 풍자시를 쓰는데, 송진종이 호화사치하며 신에게 기도하며 민생이나 귀신을 묻지 않는다고 은근히 비난했다. 결국 그는 총애를 잃고, 모함을 받는다.

 

왕우칭(王禹偁)은 5살때 <영백련시(詠白蓮詩)>를 짓는다:

 

작야삼경후(昨夜三更後)

항아타옥잠(嫦娥墮玉簪)

풍이불감수(馮夷不敢受)

봉출벽파심(捧出碧波心)

 

구준은 7살 때 세걸음만에 <화산(華山)>시를 짓는다.

 

지유천재상(只有天在上)

갱무산여제(更無山與齊)

거두홍일근(擧頭紅日近)

회수백운저(回首白雲低)

 

나중에 "무가내하화락거(無可奈何花落去), 사증상식연귀래(似曾相識燕歸來)"같은 유명 구절을 남긴 사종(詞宗) 안수(晏殊)는 7살에 '응신동거'하여 일시에 경성을 뒤흔든다. 당시 이미 재상이었던 구준은 안수를 아주 중시했다. 특별히 황제가 그에게 내린 말에 태워서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말의 고삐와 굴레를 그에게 선물로 주어, 경성까지 오는 여비로 삼게 한다. 양대신동의 망년지교는 한때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 몇몇은 모두 송나라때의 신동들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모두 조정의 중신이 되고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송나라때의 유명한 간신 채경(蔡京)은 4차례에 거쳐 재상이 되는데, 어렸을 때 역시 신동이었다. 4살때 <악양루기>를 외웠고, 23살때 진사급제한다. 등수는 9위였다. 만일 덕행을 따지지 않는다면, 채경의 서예는 송나라때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신동비극도 송나라때 발생한다. 왕안석(王安石)의 <상중영(傷仲永)>은 강서 금계의 농촌집안의 아이 방중영(方仲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방중영은 5살때 시를 짓고 글을 써서, 동네에 이름을 떨친다. 그의 부친은 이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여 아이를 데리고 매일 친구의 집을 방문하거나, 명사의 집을 방문하여 방중영의 시문을 돈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여 아이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 몇년이 지나자, 방중영의 글을 더 이상 옛날같은 명성을 잃게 되고, 그저 평벙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왕안석은 이에 한탄하여 말한다: "중영의 오성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보통의 재능있는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결국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그가 나중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때문이다. 그가 얻은 천부적인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니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현재 원래 천부적인 재능을 받지 않으면 원래 평범한 사람이 되겠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받게 되면 설마 그저 평범한 사람에 머물겠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안수는 송진종의 아들 조정(趙楨, 즉 송인종)을 가르칠 때 , 또 다른 신동 채백희(蔡伯俙)를 만난다. 채백희도 천재였다. 1살에 책을 읽고, 2살때 시를 쓰고, 3살때 동자과고시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송진종이 '삼세기동'이라고 칭친하며 동진사출신을 내리고, 태자 조정과 함께 공부하게 했다.

 

태자 조정과 함께 공부할 때, 채백희는 태자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태자에게 아부한다. 조정을 잘 모시는데만 신경썼지 자신의 재능을 정상적인 곳에 발휘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사료기재에 따르면, 황궁의 문턱은 매우 높은데, 조정이 문턱을 넘어갈 때 힘들어하자, 채백희는 앞에 엎드려서 조정이 그를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송진종이 조정에게 문제를 낼 때, 채백희는 몰래 조정을 대신하여 답을 해주면서 송진종을 속였다. 채백희는 조정의 앞에서는 아부꾼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기민했던 신동 채백희는 거의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내팽개치고, 스스로 타락하며, 아부에만 골몰했다. 조정에서 75년간이나 봉록을 받았지만, 아무런 업적도 없었다. 그는 체제내의 '방중영'이 된 것이다.

 

4. 요금원(遼金元)의 신동들

 

요나라의 저명한 시인 야율맹간(耶律孟簡)은 신동이었다. 6살때 시와 부를 지었으며, 그는 교육을 중시하던 거란 상층귀족 지식인이었다. <요사.문학전하.야율맹간전>에 따르면, "맹간은 성격이 총명하고 깨닫는 것이 빨랐다. 6살때, 부친이 새벽에 사냥을 나갈 때 <효천성월시(曉天星月詩)>를 지으라고 하자 바로 완성하여, 부친이 크게 기이하다고 여겼다. 그가 자라면서 문장을 잘 썼다....황태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애통함을 금치 못하고 시를 지었는데, <방회시(放懷詩)> 20수이다...고주관찰사가 되고, 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뽑았다."

 

우중문(虞仲文). 요금시기 두 왕조에 걸쳐 재상을 지낸다. 어려서 시를 잘 지어 신동이라 불렸다. 인마묵죽을 잘 그렸고, 7살때 시를 지었으며, 10살때 문장을 잘 썼으며, 매일 천마디를 외우며 각고노력하며 학문을 했다. 진사가 된 후, 요나라에 관직을 맡는다. 관직은 추밀직학사, 한림시강학사, 참지정사, 동평장사에 이른다. 후금태조가 연경을 함락시킬 때 금나라에 투항하여, 추밀사, 시중이 되고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진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마찬가지로, 동자과를 두었다. 그러나, 동자과는 금나라에 이르러, 이미 어떤 사람이 '동자과'는 합격을 시키되 바로 관직을 주지 않고, 계속하여 공부하게 하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에 이르러 시행된다.

 

"문세간정위하물(問世間情爲何物)"(세상에 묻는데 사랑이 무엇인가)이라는 구절을 써서 유명한 금나라의 재자 원호문(元好問)은 지방에서 유명한 신동이었다고 한다. 7살때 시를 지었고, 나중에 진사급제한다. 원호문은 금나라 시단의 1일자이고, 예술적으로 소식, 신기질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호방하고, 완약한 여러 스타일을 갖추었다.

 

원나라도 전왕조를 계승하여, 동자과를 둔다. 그리하여 양산동(楊山童), 장태산(張泰山), 유부손(兪傅孫), 풍호가(馮怙哥), 장답한(張答罕), 두산동(杜山童), 진빙(陳聘), 진원(陳元), 장영(張英), 섭유경(葉留耕), 두풍령(杜風靈)등 신동이 나타났다.

 

허형(許衡)은 농민집안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랐고, 자질이 총명하며,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어른이 된 후에 언행에 덕이 있어 원근에 이름을 날린다. 허형은 '백과전서식의 인물'로 불린다. 원나라때 정주이학을 전파한 제1인이다. 그는 쿠빌라이에게 중용되어 조정에서 중요관직을 맡는다. 금말원초의 이학가, 교육가, 사상가, 정치가, 천문학자이다.

 

장기암(張起巖)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책을 목숨처럼 좋아했으며, 총명하기가 남달랐다. 6살때 학문에 성취를 얻는다. 7살때는 사서오경을 통독했고, 시사를 잘 지었다. 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하루를 먹지 않을 수 있지만, 반나절이라도 책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찰거로 복산현학교유가 된다. 그가 19세 되던 해 원나라에서 과거가 처음 열리는데 그는 장원을 한다. 그는 원나라때 한인중 최초의 장원이다. 동시에 원나라때 유일한 산동출신 장원이다. 이 신동은 또한 원인종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났다.

 

그는 평생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학식이 넓었으며, 금, 요의 전장고사를 잘 알고, 송나라의 유학,도학을 잘 알았다. 그는 정치가이면서, 동시에 조예가 뛰어나고 성취도 있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일생의 상당한 기간동안 국사편수를 주재하고, 요사, 금사, 송사를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