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1)

중은우시 2023. 4. 21. 19:58

글: 오기민(吳基民)

향충발

향충발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공6대때 중앙정치국 주석 겸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주석에 당선된다. 사람들은 그를 습관적으로 '총서기'로 불렀다. 사건이 많았던 1931년 6월 22일 체포되었고, 변절한다. 그리고 24일 사망한다. 최근에 출판된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쓴 <중국공산당역사>에서는 그의 체포에 대하여 단지 두 마디만 적혀 있다: "6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을 맡았던 향충발이 상해에서 체포된 후 변절한다. 이 두 사람(향충발과 같은 해 4월에 체포되어 변절한 고순장(顧順章)을 가리킴)의 변절은 중공중앙기관과 중앙지도자의 안전에 극히 큰 위협을 조성했다"

 

오랫동안 향충발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각박했다. 노동자출신이기 때문에 '건달무산자'라고 불린다든지;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기 떄문에, '큰 글자도 몇 개 알지 못하고, 문건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든지; 그가 프랑스조계에서 골동품상인으로 위장한 적이 있다고 하여, '물질적으로 누리는 것을 추구하여 크게 특수화했다'고 한다든지; 골동품상인행세를 해야 하는데, 본처는 아줌마, 이모같아서 서로 어울리지 않아, 고순장이 그를 위하여 젊고 예쁜 여자 양수정(楊秀貞)을 소개해서 결혼했는데(이때 주은래는 상해에 있지 않았고, 일반적인 업무는 정치국위원 관향응(關向應)이 주재했는데, 이 일은 관향응의 동의를 받았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하는등 뭐든지 나쁜 짓은 다 했다." "기녀를 찾아서 마누라로 삼았다" 심지어 "정조가 기녀만도 못하다."라고 말하게 된다.

관향응

기실 중국공산당역사에서 3년이나 최고지도자의 직위에 있었던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각박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국공산당역사에 대한 경멸이다. 그렇다면, 향충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의 체포를 전후하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 향충발이 어떤 사람인가?

 

1880년 향충발은 호북 한천(漢川) 성황묘(城隍廟) 향가대(向家臺)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부친은 이를 악물고 그를 사숙(私塾)에 5년간 보낸다. 이 정도 문화수준은 당시 노동자농민들 중에서는 상당히 보기드문 경우이다. 그후 학도(學徒)가 되기도 하고, 방용(幇傭)도 했고, 오랫동안 뱃사람이 되어 일한다. 오랫동안 장강유역에서 일했기 때문에, 무한삼진(武漢三鎭, 무창, 한양, 한구를 합쳐서 부르는 명칭)의 상황을 잘 알았다. 1922년 한양철창(漢陽鐵廠)에 노동조합(工會)이 결성되고, 그는 부위원장을 맡는다. 얼마 후 한야평총공회(漢冶萍總工會)가 결성되고, 그는 또 부위원장을 맡는다. 연말에 허백호(許白昊), 시양(施洋)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82년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시위 통전부로 분배되어 정책업무를 수행했다. 일찌기 중공6대에 참석하고, 중앙위원으로 당선된 방직여공(紡織女工)출신의 장금보(張金保)를 접대한 적이 있다. 그녀는 향충발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문화정도가 아주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글자는 읽을 줄 알았고, 자신이 문건을 초안했다; 말솜씨는 아주 좋았다. 몇 개의 핵심내용만 적어놓은 메모쪽지 하나를 가지고 그는 몇시간동안 보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직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일이 생기면 자신이 책임지고 처리했다. 노동자들 사이에 비교적 위신이 높았다." 나는 장금보의 이러한 평가가 정확하다고 본다.

 

1925년 1월, 향충발이 상해로 가서 중공4대에 참석하고, 중앙위원에 당선된다. 1925년, 국민당이 북벌을 개시하고, 국민혁명군은 곧 호북으로 진입한다. 1926년 10월 호북성총공회(湖北省總工會)가 성립되고, 향충발이 위원장이 된다. 부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나중에 중공당사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유소기(劉少奇), 항영(項英), 이입삼(李立三)이다. 총공회가 성립된지 1달도 지나지 않아, 무한삼진의 노동조합은 13개에서 270개로 급증한다. 조직된 노동자의 수만도 수십만에 이른다. 규찰대(糾察隊)에도 수천명이 있었다. 이때 향충발의 명망은 최고조에 달한다. 무릇 비교적 큰 집회라면 향충발이 반드시 참석했다. 그리고 향충발이 참석하는 대회라면, 향충발이 반드시 연설을 했다. 1927년초, 무한 각계의 40만명이 집회를 거행한다. 악감지구(鄂竷地區, 호북, 강서지역을 가리킴)에서 사망한 노동운동지도자들을 추도했다.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향충발, 멋지다. 과연 노동자계급의 아들이다. 향충발, 겁내지 마라. 우리 노동자를 위해 일하니 노동자의 자손들이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중외기자가 쓴 제1대 중공지도자> 및 <문정천하> 두 책에 나오는 내용임)

 

1927년 4월 27일, 향충발은 무한에서 개최된 중공5대에 참석한다. 거기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된다. 8월 7일, 중공중앙은 긴급회의를 개최하여(역사에서 말하는 "87회의"), 회의에 출석하지 않은 향충발을 만장일치로 임시중앙정치국위원으로 선출한다. 

 

중공당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당이 탄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로부터 1943년까지 중국공산당은 계속하여 공산국제(코민테른) 휘하의 하나의 지부(支部)였다는 것을. 향충발은 코민테른의 지도자 스탈린과 부하린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활동때문이었다. 10월혁명승리 10주년 기념활동을 거행하기 위하여, 코민테른은 중공중앙에 중국공산당노동자농민대표단을 파견하여 축하할 것을 요구한다. 말그대로 지도자는 반드시 노동자출신이어야 했다. 원래 가장 적합한 후보자는 광동의 선원노동자출신의 소조징(蘇兆徵)이었다. 그는 "87회의"때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조징이 이때 병을 앓는다. 그래서 향충발이 단장을 맡고, 부단장도 역시 노동자출신인 이진영(李震瀛)이 맡았다. 향충발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코민테른을 도와 일련의 중국유학생과 관련한 학생운동붐을 종식시킨다. 그는 태도가 확실했고, 행동은 민첩했으며, 수단은 신축적이었다. 그리하여 스탈린, 부하린이 그를 좋아하게 된다. 1928년 2월, 향충발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9차회의에 참석한다. 향충발과 이진영은 중공중앙과 소련공산당(볼셰비키)중앙의 명의로 <코민테린의 중국문제에 관한 결의안>를 작성하고, 대회에서 통과된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직접 2월 21일자 회의에 참석하여 향충발의 대회보고를 듣는다.

 

거창하게 시작한 대혁명운동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중공당원들은 최고조일 때의 6만명에서 일거에 1만여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혁명은 고조되다가 저조하게 된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혁명을 지식분자가 이끌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계급이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지도자를 상응하게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공중앙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제6차대표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부하린은 일체의 희생을 치르고서라고 모든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중국각지에서 80 내지 100명의 노동자를 선발하여 모스크바로 호송하여 대회에 참가하도록 한다. 그 결과 81명이 도착한다. 중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폭동에 참가한 적이 있어서, 주은래가 분노하여 소리치기도 했다: "폭도들이 한무더기로 왔다." 그러나 향충발은 스탈린의 마음을 완전히 읽었고, 그는 스탈린에 대한 보고에서 거의 매번 이렇게 언급한다: "현재 중국당내의 최대문제는 끊임없이 동요하는 기회주의지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쁘띠부르조아계급색채를 지닌 고위지도자들이 서로 권력쟁탈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주요한 방법은 바로 노동자계급이 당을 지도하고 공고히 해야 한다...."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스탈린과 코민테른 서기처 제1서기 부하린은 이미 향충발로 구추백(瞿秋白), 장국도(張國濤)등 지식분자를 대체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1928년 6월 18일 중공6대가 모스크바근교 백색장원내에서 개최된다. 개막식과 폐막식은 모두 향충발이 주재했다. 코민테른의 의도는 명백했다.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과 후보중앙위원 36명 중에서 21명이 노동자출신이다. 그후 거행된 6대 1중전회에서, 코민테른이 제출한 명단에 따라, 향충발이 중앙정치국 주석 겸 중앙정치국상임위원회 주석(당내에서는 습관적으로 그를 '총서기'라고 불렀다)에 선출된다. 그가 중공의 최고지도자에 오른 날로부터 체포되어 변절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2. 향충발이 한 일들...

 

향충발이 중공중앙총서기를 맡은 3년동안 몇 개의 사건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28년 9월, 향충발등은 차례로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돌아온 후, 그는 당중앙상위 채화삼(蔡和森)이 중공 순직성위를 처리할 때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면직시키고, 원래 후보중앙상위이던 이입삼으로 하여금 중공상위 겸 선전부장을 맡게 한다.

이입삼

이입삼은 혁명의지가 굳건했지만, 성격이 불같았다. 그리고 혁명을 너무 간단하게 보아, 빠른 시간내에 급하게 성과를 내고자 했다. 필자는 일찌기 상해문사관의 관원으로, 저명한 번역가이자, 일찌기 중공6대에서 통역업무를 맡은 바 있는 두외지(杜畏之)를 인터뷰한 바 있는데,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6대기간동안 스탈린은 6대에 참가한 중공지도자들을 단체로 접견한 바 있다. 스탈린은 중국혁명형세를 분석하면서 예리하게 지적했다: 중국혁명은 현재 저조한 시기이지 고조된 시기가 아니다. 다만 고조를 향하여 가고 있다....그런데, 혈기방장한 이입삼은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중국혁명은 그래도 고조기입니다. 왜냐하면 각지에 아직 노동자, 농민의 투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종이를 꺼내서 빨간펜으로 두 개의 파도선을 그리고, 파도의 낮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국혁명은 현재 이 곳에 있다. 저조할 때도 파도는 친다. 그러나 그 파도를 고조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1930년을 전후하여, 장개석은 각지의 신군벌들과 중국의 통치권을 놓고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당의 생존환경은 약간 호전된다. 그리하여 이입삼은 형세를 오판했던 것이다. 1930년 6월 11일 개최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그가 초안한 <새로운 혁명고조와 1개성 혹은 몇개성의 우선승리>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킨다. 향충발은 전력을 다해 이입삼을 지지한다. 회의결론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입삼동지의 보고를 완전히 지지한다. 입삼동지의 의견이 바로 나의 의견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향충발이 이입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기실 '입삼노선'의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향충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향충발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만일 내일 수만명이 길거리로 나온다면, 혁명고조가 왔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입삼노선'의 뒷배경이었던 것이다.

 

1930년 7월 16일, 향충발은 중앙을 대표하여 코민테른 주석단에 보내는 서신에 서명하고, 남경, 무한등 대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상해에서는 총동맹파업을 거행하고, 전국에 소비에트정권을 건립할 것을 제안하면서 코민테른의 승인을 구한다. 

 

8월 5일, 향충발은 다시 중앙정치국을 대표하여 코민테른주석단에 보고서를 쓴다. 중국의 무장폭동여건이 현재 성숙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코민테른의 승인을 요청한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각국의 공산당지부를 동원하여 지지해줄 것도 요청한다. 그리고 소련이 5년계획을 포기하고, 전쟁을 준비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하여 코민테른은 즉시 전보를 보내 부동의한다. 

 

8월 8일, 향충발은 직접 나서서 <중공의 현재정치형세에 관하여 스탈린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서 스탈린에게 자신의 맹목적인 계획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스탈린은 무시해버린다.

 

1930년 7월말, 팽덕회(彭德懷)는 홍군을 지휘하여 장사(長沙)를 점령한다. 상해의 중공중앙은 환호작약한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코민테른은 긴급전보를 보내, 중국혁명의 주관적인 역량이 너무 약하니 전국폭동계획은 순전히 맹동(盲動)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이입삼, 향충발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8월 1일부터 3일까지 중앙정치국에서 연일 회의를 열었고, 이입삼은 거의 미치광이같은 말을 계속 했다. 코민테른은 반드시 진취적인 노선을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심지어 "소련은 즉시 만주로 진격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외몽고는 반드시 중국화북에 출병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향충발은 더더욱 직접적으로 코민테른을 비난한다. "만일 중앙이 기계적으로 코민테른의 전보를 집행한다면 그것은 기회주의일 뿐아니라, 당을 적의 노예인 당으로 만들게 되고, 혁명의 죄인이 될 것이다."

 

8월 5일, 코민테른은 서신을 보내어 명확히 지적한다: "이입삼은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다." 향충발은 그러나 그의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오히려 코민테른 극동국이 중국공산당의 분쟁을 도발하고, 당의 통일을 파괴한다고 비난했다.

 

8월 6일, 중공중앙과 코민테른극동국이 연석회의를 개최한다. 향충발은 시작하자마자 연이어 질문을 던진다: "극동국은 중공중앙정치국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가? 중공중앙정치국이 중국혁명을 영도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가? 중공중앙은 정치적으로 이미 파탄났는가?" 감히 직접 코민테른 책임자를 직접 지적하며 대들었던 것은 중국공산당 역사상 향충발이 유일하다.

 

그러나 형세는 금방 급전직하한다. 장개석이 신속히 부대를 장사로 보내어 방어하고, 겨우 며칠만에 홍군은 장사에서 쫓겨난다. 이입삼이 영도한 폭동, 병변, 파업, 시위는 모두 실패하여, 손실이 심각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모스크바에 있던 중앙정치국 상위 주은래, 구추백이 8월 19일, 8월 22일 차례로 상해로 돌아온다. 중앙은 6기 3중전회를 개최하고, 이입삼의 직무를 면직시킨다. 그리고 "입삼노선"의 과오를 시정한다. 코민테른은 이입삼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이입삼은 졸지에 심연에 빠진다. 코민테른은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고, 1930년말 다시 파벨 미프(본명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 중국에서는 米夫라고 부름)를 상해로 보내 1931년 1월 7일 제6기 4중전회를 개최한다. 구추백, 주은래등은 모두 코민테른의 비판을 받는다. 오직 노동자출신인 향충발에 대하여는 비난을 제기하지 않았다. 파벨 미프는 4중전회를 전후하여 개최한 고위간부회의에서 두 번이나 향충발을 언급한다: 충발, 석근(徐錫根), 향응(관향응), 온유성(溫裕成) 그들은 노동자 동지이다. 그들은 비록 과오를 저질렀지만, 우리는 현재 그들을 쫓아낼 수 없다. 업무를 하면서 그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업무과정에서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는지를 보아야 한다.....이어서 왕명(王明) 일당의 세력이 커지자, 여전히 총서기를 맡고 있던 향충발은 여러번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이입삼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이론수준이 낮다" "문화수준도 높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금방 의기소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