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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2)

by 중은우시 2023. 4. 21.

글: 오기민(吳基民)

 

3. 향충발 체포전후

 

1931년 4월 24일, 중공정치국후보위원이며 정치보위공작을 책임지던 고순장(顧順章)이 무한에서 체포되고, 바로 변절한다. 주은래는 즉시 상해의 중공중앙기관의 대이전조치를 취한다. 향충발은 프랑스조계 선종로(善鐘路)의 거처에서 이사를 나와 소사도로(少沙渡路)의 주은래의 거처로 옮겨간다. 그와 동거하던 여인 양수정은 임필시(任弼時)의 부인 진종영(陳琮英)과 함께 정안사(靜安寺) 주변의 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모든 것을 천의무봉하게 처리하고 소리소문없이 처리했다. 그러나 암류는 지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순장은 남경에서 그가 원래 홍대(紅隊)에 있을 때의 조수인 진련생(陳蓮生)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주은래와 향충발을 체포하지 못했다고. 그는 바로 진련생에게 다시 상해로 가서, 그가 향충발의 집에서 일꾼으로 일하도록 배치해두었던 광동아이를 붙잡아 남경으로 데려온다. 고순장이 그에게 묻는다: 너는 양수정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그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고순장이 묻는다: 그럼 너는 그녀를 찾을 방법이 있느냐?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한다: 선생께서 부인에게 치파오(旗袍)를 만들어주기로 했고, 옷감을 신경써서 골라서 소광성(蘇光成) 의포(衣鋪)로 보냈는데, 아직 다 만들지 못했습니다. 고순장은 양수정이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물건을 아낀다는 것을 알아서 그녀가 분명히 그 치파오를 가지러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부하에게 광동아이는 붙잡아 놓고 잘 먹이라고 하고는 진련생에게 몇명을 데리고 상해로 가게 했다. 그리고, 24시간 선종로의 소광성의포를 감시했다. 양수정이 나타나서 양수정만 찾고나면, 분명 향충발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주가 지난 후, 양수정이 과연 소광성의포에 나타나 치파오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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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은 선종로, 포석로를 거쳐 정안사까지 따라간다. 그러다가 잠시 부주의하여 양수정의 행방을 놓친다. 고순장은 진련생을 한바탕 욕해주고 그에게 반드시 믿을만한 부하를 보내어 정안수부근의 몇개 택시회사를 감시하도록 말한다. 그는 향충발이 양수정을 보러 갈 때면 반드시 택시회사에서 택시를 부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상해는 이미 안전하지 않았다. 주은래는 이미 향충발을 중앙소비에트구로 옮겨가게 할 준비를 마쳤다. 교통노선을 준비하다보니 이미 6월하순에 가까워졌다. 향충발은 강서(江西) 서금(瑞金)으로 갈 것에 동의했고, 다만 반드시 양수정을 한번 보고 가겠다고 한다. 주은래도 동의한다. 다만 그에게 반드시 밤을 보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6월 21일 오후, 향충발은 서둘러 정안사 주변의 여관에 도착한다. 양수정을 만나고 나서, 주은래의 당부를 따르지 않고 그날 밤을 양수정과 함께 보낸다.

 

6월 22일 오전 9시경, 향충발은 정안사 건너편에 영국인이 경영하는 "탐륵기차행(探勒汽車行)"으로 가서 택시를 구했다. 그런데 택시회사이 회계 섭영생(葉榮生)이 그를 알아본다. 그는 중화호제회(中華互濟會)에서 일한 적이 있고, 그때 향충발이 보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왼손에 손가락이 4개뿐이라는 것이었다. 예전에 향충발이 뱃사공으로 일할 때, 도박에 빠져있었고, 도박을 끊겠다는 결심으로 왼쪽 손가락 1개를 잘라버렸던 것이다. 향충발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바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몇발짝 가지 못해서 숨어있던 밀탐과 순포에게 체포되고 만다.

 

1931년 6월 23일 <신보(申報)>는 이런 소식을 올린다: 향충발 공당수령이 어제 오전 9시 45분경 프랑스조계 선종로에서 체포되어, 숭산로 포방으로 끌려간 후, 다시 노가만 정치부로 압송되었다. 경비사령부는 그가 공당의 수령이어서 즉시 요원을 보내 심문하고 있다고 한다.

 

110살까지 살았던 상해시정부 참사실 참사 황모란(黃慕蘭)이 말년에 발표한 자서전 <황모란자전 - 가장 아름다운 홍색녀 '특공'의 직접진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1931년 가을의 어느 날 오후 4시(향충발이 체포된 것은 6월 22일로 초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 -- 필자주), 그녀는 변호사 진지고(陳志皋)와 동해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진지고는 친구이자 당시 프랑스조계 순포방의 통역을 맡고 있던 조병생(曹炳生)으로부터 향충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조병생은 이런 말도 했다: 이 작자는 정말 쓸모없다. 전기의자에 앉자마자 견디지 못하고 바로 다 불어버렸다....황모란은 원래 진지고와 저녁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기로 했으나,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반한년(潘漢年)에게 상황을 보고한다. 반한년은 강생(康生, 당시에는 趙容이라고 불렀다. 강생은 그가 모스크바로 간 후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다 -- 필자주)에게 통보하고, 강생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필자는 1980,90년대에 여러번 황모란을 인터뷰한 바 있다. 그리고 <황정혜(黃定慧) - 3번의 혼인을 겪은 기녀자(奇女子)>라는 글과 <상해1931>이라는 책의 향충발이 체포되는 장면에서 모두 황모란의 이 주장을 채택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필자가 확인한 사료를 보면, 황모란의 기억은 약간 문제가 있다. 그녀는 최소한 주은래에게 향충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최초로 전달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이미 중공중앙정치국상위 겸 강소성위서기를 맡고 있던 왕명은 <중공오십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6월 22일 오후, 중앙정치국은 중요한 회의를 개최했다. 중앙에서 보위공작을 책임지는 "뚱보"가 돌연 회의를 주재하는 주은래에게 귓속말을 했고, 주은래는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회의를 끝낸다. 그리고 왕명에게 말했다: 향충발이 체포되었다. 프랑스조계 순포방에 갇혀 있다. 왕명이 말했다: 그럼 온갖 수단 방법을 써서 그를 구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은래는 "뚱보"에게 반한년을 데려오라고 했고, 반한년에게 즉시 5만은원의 예금통장(이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다. 2채의 단독석고문주택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 필자주)을 양도(楊度)에게 주라고 했고, 그로 하여금 그 돈을 가지고 당시 프랑스조계 중국인동사를 맡고 있던 두월생(杜月笙)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보석을 얻어내는 것이고, 최소한 국민당정부로 인도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2시간이후 반한년이 돌아왔는데, 5만은원의 예금통장을 다시 돌려준다. 그리고 두월생이 한 말을 전달했다: 향충발을 체포한 것은 남경에서 직접 파견한 사람들이다. 현재 그들이 향충발의 곁에서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있으며, 조계당국이 먼저 심문하겠다고는 하지만, 인도는 단지 절차문제일 뿐이다. 결국 향충발은 6월 23일 새벽1시 상해송호경비사령부로 인도된다. 그가 24일 새벽 3,4시경 사망하기 겨우 26시간 전이었다.

 

향충발이 체포된 후, 가장 먼저 진술한 것은 정안사여관에 거주하는 양수정과 진종영이었다. 당시 진종영은 아이를 하나 데리고 있었다. 진종영이 체포된 후, 자신은 시골여자로 이제 막 상해로 왔으며, 아무 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양수정은 자신과 동거하던 향충발이 공산당의 고위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순포가 그녀를 때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은래는 1972년 5월에 이런 말을 했다: 향충발의 정조는 일개 기녀만도 못하다.

 

향충발은 22일 저녁 다시 자신의 주소를 진술한다. 관건은 이곳이 주은래와 등영초(鄧潁超)의 거처라는 것이다. 이때 주은래는 이미 영국조계 복주로(福州路) 강서로(江西路)가 만나는 곳에 영국인이 연 도성반점(都城飯店)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많은 전기작품에서는 그날 저녁 순포들이 수갑과 족쇄를 찬 향충발이 직접 소사도로의 주은래 거처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1993년에 출판된 <등영초전>에는 향충발이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은래가 직접 소사도로 뒤쪽의 높은 제방에서 자신의 집의 동정을 살피는 장면은 있다. 필자의 생각에 이날 저녁의 향충발, 주은래 두 사람이 전후로 소사도로의 주은래 주택에 나타났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향충발은 분명 주은래의 주소를 제공했을 것이고, 분명 아침 9시에 자신이 체포된 후, 이미 10여시간이 지나서, 주은래가 분명 옮겨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옮겨가지 않고 거기에 남아있었다믄 그건 주은래가 아닐 것이다. 다만 향충발이 주은래를 배반한 것은 사실이다.

 

향충발이 세번째로 진술한 것은 과등로(戈登路) 항길리(恒吉里) (지금의 강녕로 1141호)의 중공중앙 문서보관장소이다. 기관의 책임자는 장기은(張紀恩)과 그의 부인 장월하(張月霞)였다. 향충발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전인 6월 21일, 중앙은 막 특과요원 포화인(浦化人)과 서빙(徐氷)을 보내어 기관내의 모든 문건을 두 개의 큰 상자에 담아서 옮겨가버렸다는 것을. 장기은의 회고에 따르면, 6월 23일 새벽1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아주 급하게 두드렸다. 장기은이 방문을 열었더니, 공공조계 과등로 순포방의 순포가 중국순포와 몇몇 인원과 함께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아래 위를 수색하였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그저 장기은, 장월하를 데려갔을 뿐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이 공산당원이라는 신분을 발설하지 않았고, 집을 공산당원에게 임대해준 과실이 있다고 하여, 장기은은 5년형을 받고, 장월하는 반년만에 풀려난다.

 

그외에 향충발은 이미 체포되었지만 아직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중앙정치국위원 관향응, 그리고 향충발의 비서 여창생(余昌生), 발전소 노동지도자 교생발(喬生發)등이 옥중에서 평안무사하게 있으며, 향우 보석으로 출옥하거나 무죄석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코민테른 극동국의 상해에 있는 여러 기관과 책임자들이다. 향충발이 체포된 후, 주은래는 그들에게 긴급히 옮기라고 통지한다. 그들의 상해에서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은래, 향충발과 왕명등 3,4명뿐이었다. 극동국의 지도자들은 아주 긴장했다 로버트(본명은 게르하르트 아이슬러)의 회고에 따르면, 전체기관이 꼬박 1개월여동안 '업무중단'되었고, 그 본인도 8월초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 평안무사했다. 이런 특이한 현상에 대하여 필자는 당시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중앙백구의 전체 교통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황평(黃平)을 만난 이후 약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받는 것이 겁나고, 죽을 지경으로 얻어맞을 것이 겁나서, 나는 북평에서 체포되었을 때 먼저 전구를 가지고 자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자수하고 변절하면서 비밀처럼 보이는 것을 진술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그의 회고록 <왕사회억>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가 진술한 장소는 유소기의 주소였다. 그러나 황평은 하루이틀전에 이미 유소기가 옮겨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평은 체포되어 변절한지 반년여가 지난 후에도 코민테른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국민당이 퍼트린 유언비어가 아닌지 의심했다. 황평의 경력은 향충발의 당시 상황과도 부합한다. 당시는 정보가 그다지 잘 유통되지 않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은 향충발이 체포된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몰랐다. 그의 체포는 당의 지도기관과 지도자들에게 그다지 큰 손실을 입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향충발이 체포되어 사망한 후 꼬박 2개월이 지나, 중공중앙은 서금에서 기념식을 열었고,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를 향충발동지기념주간으로 선포하고, 신문에 글을 실었다: 향충발의 희생에 대하여 국민당에게 피의 빚을 받아내겠다. 장기은이 '문혁'을 전후하여 두 번이나 글을 써서 향충발이 반도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해가 된다(자세한 점은 1979년 <당사자료총간> 제1집 장기은 글 <주은래동지의 상해혁명활동 편단>이라는 글을 보라 -- 필자주). 당중앙도 1967년초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묻고나서, 모택동이 비로소 향충발은 반도라고 확정하게 되었다.

 

4. 향충발의 죽음에 의문이 남는다.

 

6월 23일 새벽 1시경, 향충발은 프랑스조계 순포방에서 용화(龍華)의 상해송호경비사령부로 압송된다. 당시 상해송호경비사령부의 사령관은 웅식휘(熊式輝) 중장이다. 웅식휘는 장개석의 심복이다. 1928년 9월 그는 정예 제5사단을 이끌고 상해에 주둔한다. 그리고 사단장의 신분으로 경비사령관도 겸직하고 있었다. 1930년 12월 9일, 장개석은 웅식휘를 강서국민당초공총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송호경비사령부의 직무도 여전히 남겨두었다. 여러 역사저작들은 이 부분을 설명할 때 이렇게 적는다: 6월 22일 저녁 웅식휘 장군은 여산에서 공산당토벌업무를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낸다: 공당총서기 향충발을 상해에서 체포했습니다. 장개석은 즉시 회신을 보낸다: 즉각 처형하라. 23일 웅식휘는 다시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낸다: 향충발이 이미 중앙정부에 귀순했습니다. 장개석이 회신을 보낸다; 처형을 잠시 중지하라. 다만 장개석의 두번재 회신이 누구에 의해서인지 몇 시간동안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향충발은 6월 24일 새벽에 총살당한다. 그가 송호경비사령부로 인도된 지 26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이다. 그가 체포된 때로부터 사망한 때까지는 겨우 40여시간으로 이틀도 되지 않는다. 황모란의 회고록에도 이런 견해를 취했다.

 

다만 지금 보면 이런 결론은 문제가 아주 큰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웅식휘는 상해에 있지 않았고 그는 바로 여산(廬山)의 장개석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웅식휘는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고, 최근 들어 그의 일기를 출판한 <웅식회회고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31년 6월 18일, 나는 뼈의 상처가 나아서 지팡이를 집고 강서로 가서 사령부참모장을 겸임했다; 19일 남경에 도착하여 일을 한다; 22일 총사령부가 남창에 도착하다; 25일 총사령관 하응흠(何應欽)이 초비(剿匪)전선총사령관이 되다. 그는 40만자에 이르는 회고록에 향충발이라는 이름은 한글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6월 15일 체포되고, 7월 중순 송호경비사령부로 인도된 코민테른 극동국 요원 우란(牛蘭, 제이콥 루드닉, 우크라이나출신)에 대하여는 많은 글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웅식휘가 장개석에게 두번이나 전보를 보냈을 리는 없다고.

 

향충발이 체포되었을 때 이미 51세였다. 체포된 후 사망할 때까지 모두 46시간인데, 단 1분도 쉬지 못했다. 조병생에 따르면, 그는 직접 향충발이 순포방에서 이미 전기고문을 한번 당했다고 했다. 장기은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체포된 후 용화감옥에 갔는데, 국민당 상해군법처 수석법관 장회소(蔣懷素)가 그에게 향충발이 전기고문받는 사진을 보여준 바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향충발은 체포후 최소한 2번 전기고문을 받았다. 동시에 장회소는 그에게 향충발이 친필로 쓴 자술서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것은 붓으로 쓴 것으로 당지(唐紙, 누런옛날종이)에 2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 향충발의 지식수준으로 보아  체포된 후의 그 정도 시간에 붓으로 글자를 쓴다면, 개략 그 정도 페이지였을 것이다. 향충발의 진술에서 국민당 군경은 중대한 수확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하여 고문을 가했고, 그러다가 문제가 생겨서 향충발이 죽게 된 것일 것이다....

 

공산당의 총서기가 체포된지 겨우 46시간만에 처형되다니 이건 전혀 국민당의 일처리방식이 아니다. 그리고 상리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국민당 중통(中統)의 책임자로 고순장 사건을 처리하는데 전권을 가졌던 서은증(徐恩曾)이 말년에 쓴 회고록 <암투>를 보면 이렇게 적고 있다: 향충발이 체포된 후 그에게 보내어지기도 전에 죽어버렸다(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하여 그는 쓰지 않았다). "이런 처리는 나의 업무수행에 실로 중대한 손실이다...."

 

향충발이 체포후에 반도가 된 것은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왕명회고록에 언급되어 있다. 왕명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구해내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그래도 두월생을 찾아갔다. 그에게 프랑스조계 순포방의 두목 육련규(陸連奎)를 찾아가서, 향충발의 진술을 베껴와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육련규는 진술서초본을 보내왔다: 향충발의 진술은 당지에 쓰여 있고, 모두 3페이지였다. 주요 내용은 첫째, 국민당의 용서를 청하고, 둘째, 자신은 이름만 걸어놓은 총서기이고 실권은 주은래 진소우(陳紹禹, 왕명)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1933년 10월 중통특무기관에서 출판한 <전변(轉變)>이라는 책에는 수천자 길이의 <전공당중위겸총서기 향충발의 자술>이 실려 있다. <전변>에는 중공반도와 변절분자의 진술서를 실었다. 중통특무기관이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주로 국민당의 자수변절분자에 대한 정책이 정확했고, 공산주의는 중국국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향충발의 진술은 10개부분이다. 소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다: 1. 국제 -- 국제공당(즉, 공산국제) 주동방부 책임자; 2. 중국 --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위원, 3. 특무위원회(즉, 특과...필자주); 4. 소비에트구책임자(중앙소비에트구, 악예환소비에트구에서붜 해남도의 각소비에트구상황 및 책임자 명단...필자주); 5. 이입삼은 이미 모스크바로 보내어졌다. 6. 각지역상층책임자, 7. 각지역실제상황, 8. 군사(가 근거지 홍군 7개군의 인원수, 상황 및 책임자명당...필자주), 9. 공산당의 자금원, 10. 부기.

 

이런 3천여자에 이르는 진술을 향충발이 송호용화경비사령부로 이송된지 겨우 26시간만에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상식으로 판단해보면, 이것은 분명 향충발이 감옥으로 옮겨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공산당총서기에서 반도로의 역할전환이 완성된 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어떤 사람은 향충발의 소위 진술서가 고순장이 위조한 것이라고 했다. 향충발의 소위 진술서는 첫부분에서 당시 아직 감옥에 있던 관향응, 여창생부터 얘기한다. 이 몇몇 당의 중요간부는 향충발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보석으로 풀려난다. 만일 진술서가 진짜라면, 왜 당시에 관향응등을 모조리 붙잡아 들여 총살하지 않았을까? 이는 다른 측면에서 이 소위 진술서가 위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누군가 글을 써서 이런 말도 했다. 향충발이 반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찌기 누군가를 경비사령부에 잠입시켜, 모든 심문자료를 보았는데 모두 수천자였다. 그것을 모두 훔쳐나와 조직에 바쳤다. 이건 너무나터무니없는 헛소리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