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0월의 어느 날, 당시 중국국무원총리로 있던 주은래는 사무실에서 공안부가 보내온 "손유세사망보고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된 범죄인 손유세는 10월 12일 저녁 11시 공안부병원으로 보내어졌고, 지주막하출혈로 진답받았는데, 치료를 하였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3시 30분 사망했다. 이에 보고드린다. 왕명소수(王明蘇修, '소수'는 소련수정주의'를 가리킴)특무전안조."
얼마 후 비서가 돌아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손유세의 시신은 이미 '현행반혁명'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주은래의 양녀
손유세는 중국의 저명한 희극예술가(戱劇藝術家)로 1921년에 태어났다. 부친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1927년 민국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당시 손유세는 겨우 6살이었다. 나중에 주은래는 손유세를 양녀로 삼는다. 1937년 손유세가 16살 되던 해에 주은래는 그녀를 무한에서 연안으로 데려온다. 1939년, 주은래가 소련으로 요양하러 갈 때, 손유세도 따라갔다.
그후 손유세는 주은래와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손유세는 주은래를 만날 수 없게 된다.
1967년 10월 6일, 손유세의 오빠이자 당시 중공원로 주덕(朱德)의 비서이며, 중국인민대학 부교장으로 있던 손앙(孫泱)이 박해받아 죽임을 당한다.
중국에서 공식적으로는 손앙이 "외죄자살(畏罪自殺, 죄를 짓고 처벌이 두려워 자살하다)"이라고 하였으나 손유세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중공지도자 모택동, 주은래, 임표등에게 편지를 써서, 손앙의 사인을 규명해달라고 요구한다. 손유세가 모택동, 임표에게 보낸 서신은 각각 모택동과 임표의 부인인 강청(江靑), 섭군(葉群)이 중간에 가로챈다. 강청, 섭군은 일찌감치 손유세를 처치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핑계를 잡아 손유세를 체포한다.
일찌기 중공당수 호요방(胡耀邦)의 책사였던 완명(阮銘)이 발표한 <회전무대 위의 주은래>라는 글에 따르면, 손유세가 '통적반국(通敵叛國,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배반하다)'의 죄명으로 체포될 때, 체포서류에 동의하는 서명을 한 사람이 바로 주은래였다고 한다.
손유세의 참사
임표와 섭군의 딸인 임립형(林立衡)의 회고에 따르면, 1967년, 강청이 섭군에게 말한다. "손유세는 소수특무이다. 현재 혼란한 때이니 네가 이 자를 체포해라. 너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붙잡아 주겠다."
1968년 3월 1일 밤, 손유세는 "소수특무"라는 죄명으로 체포된다. 그녀를 체포한 것은 공안기관이 아니라, 공군의 현역군인이었고, 그들은 섭군의 지시에 따라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섭군은 강청의 지시에 따라 처리한 것이다.
손유세는 먼저 북경시공안국 소속의 공덕림(功德林)감옥에 갇힌다. 나중에는 반보교가(半步橋街)의 공안국간수소로 옮겨진다.
손유세의 조카딸인 손빙(孫氷)이 <일로주래(一路走來) - 큰고모 손유세를 기억하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한 심문에 참여했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손유세에 대해 매번 심문하는 것은 한차례의 유린이었다. 왕XX는 말했다: 손유세의 그 사건은 말도 꺼내지 말라. 그저 악몽이었다. 여러 해동안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손유세는 그 안에서 반년도 되지 않아 죽임을 당한다. 그것은 일찌감치 누군가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고 아예 그 해(1968년을 가리킴)을 넘길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자 나도 갔다. 그러나 한번 가고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나를 오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히 갈 수가 없었다. 그건 심문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고, 서면어로 하자면 유린이다."
"나는 한번은 상사에게 왜 이 여자를 이렇게 못살게 대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상사는 나에게 자료를 보여주었다. 보자마자 나는 이 사건의 내력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았다. 위에는 모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몇몇 전안조의 심문하는 사람들도 심문하다가 지쳐서 돌아와 물을 마시고 얘기할 때 이런 말을 했다. 그 여자(손유세를 가리킴)는 성격이 정말 대단하다. 아직도 여기가 중남해인줄 아는가보다."
"손유세가 죽는 날, 나는 당직이 아니었다. 물건을 가지러 돌아왔는데, 그녀가 죽었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즉시 오라고 했다. 나는 바로 갔더니 마침 들것에 실려나오고 있었는데, 너무나 참혹하게 죽었다. 몸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고,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손유세가 참혹하게 죽은 원인
문혁후기, 손유세의 남편인 김산(金山)등 4명은 한 곳으로 가서 "중앙문혁전안조"가 손유세를 '현행반혁명'으로 인정한 결론을 보았다. 결론은 겨우 몇줄이었다. 손유세의 '죄증'은 오직 하나였다. 즉 "1950년대 일찌기 이입삼(李立三)의 부인 이사(李莎)에게 청년예술극원의 입장권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이입삼은 중공 초기의 지도자로, 이입삼의 부인 이사는 소련인인데, 나중에 중국국적을 취득했다. 일찌기 소련인인 이사에게 '입장권'을 선물한 것을 가지고 손유세를 처벌하는 핑계로 삼은 것이다.
손유세가 참혹하게 죽은 진정한 원인은 아마도 다음의 다섯가지일 것이다:
첫째, 손유세와 모택동의 관계를 강청이 질투했다.
강청의 간호사인 주숙영(周淑英)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직접 강청이 침실의 화장실에서 악독하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손유세 이 년은 절대 그냥 놔두지 않겠다. 반드시 그녀를 가둬서 죽여버리겠다!"
이 말은 강청이 손유세를 뼛속까지 미워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강청이 왜 손유세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그녀가 손유세와 모택동간에 부정당한 남녀관계가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호색했다. 이미 적지 않은 자료가 그것을 말해준다. 모택동의 두번째 처인 양개혜(楊開慧)는 일찌기 모택동을 "정치건달" "생활건달"이라고 질책한 바 있다. 모택동을 위해 20년간 보건의사를 지낸 이지수(李志綏)가 쓴 <모택동개인의사회고록>에도 이 방면의 일을 여럿 적어놓고 있다.
손유세는 젊고, 활발하고, 명랑하며, 러시아어를 잘 할 뿐아니라, 예술가였다 재능이 넘쳤으며 격정적이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적지 않은 기혼, 미혼의 중공고관들은 그녀에게 완전히 넋이 나갔다.
1949년말, 모택동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모택동이 허락하지 않았다. 손유세는 모택동의 러시아어통역으로 중소지도자의 회담에서 모택동의 통역을 맡았을 뿐아니라, 모택동을 모시고 소련각지를 참관할 때도 통역 겸 가이드를 했다.
모택동의 이번 소련방문에서 2개월간 머물렀다. 모택동과 손유세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아주 친해졌다. 손유세의 조카딸인 손빙의 회고에 따르면, 손유세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찍은 사진이 몇 장 있는데, 모택동과 손유세가 아주 즐겁게 눈덩이를 서로 던지는 모습이 있었다. 손유세의 남편 김산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소련에 있을 때, 손유세와 모택동이 함께 찍은 사진이 아주 많다.
1950년, 손유세는 제3자로 끼어들어 이미 결혼했고, '플레이보이'로 유명했던 저명한 배우 김산과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주은래등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산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김산은 부득이 역시 저명한 배우였던 장서방(張瑞芳)과 이혼하고 손유세와 결혼하게 된다.
손유세의 이런 거동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자유분방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손유세가 소련에서 귀국한 후, 강청은 여러번 그녀와 모택동간에 소련에서 있었던 일을 추궁했다.
예를 들어, 손유세의 남편 김산의 회고글인 <막장혈한부추풍(莫將血恨付秋風)>에 따르면, 그와 손유세가 결혼한 그날, 즉 1950년 10월 14일, 강청이 손유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나한테 오지 않았느냐?" 손유세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강청이 말했다: "바로 너와 모주석이 출국한 일을 말하는 것아니냐."
손유세에 대한 심문에 참여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1980년대 우리들이 진술할 때, 나는 상사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자료에 관한 것도 진술했다. 자료의 한 구절은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 그건 강청이 말한 것이다. 그때 강청이 어떤 사람인가? 그녀의 말은 성지(聖旨)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어찌 기억하지 못할 것인가."
"자료를 보면, 손유세는 대경에서 돌아와(개략 1964년) 다시 모주석을 만나러 간다. 강청은 바로 이 일을 가리켜서, 손유세는 호리정(狐狸精, 여우)이고 미녀사(美女蛇)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주석 신변의 시한폭탄이라고 했다. 나중에 상급조직에서는 내가 진술한 그 말을 삭제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둘째, 손유세와 주은래의 관계를 강청이 질투했다.
손유세는 주은래의 양녀로, 주은래의 사랑을 받았다.
1968년 3월 18일, 인민대회당에서 강청은 주은래와 사람들 앞에서 욕을 한다: "성원공(成元功, 주은래의 비서)은 총리의 개이다. 손유세는 총리 곁에 있는 늑대이다."
손유세의 여섯째이모인 임균(任均)의 회고에 따르면, 문혁기간, 손유세는 세번이나 몰래 그녀의 집으로 도망쳐왔다고 한다. "한번은 추운 겨울밤에, 유세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를 푹 눌러썼다....그녀는 모자를 살짝 들춰서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미 삭발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리다니, '문혁'초기의 일종의 혁명폭력방식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아팠다. 유세는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들이 나에게 총리의 상황을 말하라고 한다. 아마도 나를 이용해 총리를 해치려는 것같다. 총리의 일에 내가 뭐 말할 게 있느냐. 내가 뭘 얘기할 수 있느냐. 나는 그렇다고 아무 소리나 할 수도 없다. 총리를 해치려는 것은 주석 주변의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려는 것같다. 그녀들은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있다."
임균은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유세의 성격을 잘 안다. 그녀는 아주 강인하다. 분명 때리면 때릴수록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죽더라도 그녀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 말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손유세는 강청의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1930년대, 강청이 상해에서 배우로 있을 때, 손유세와 손유세의 남편 김산은 모두 상해 연예계의 사람들이다. 당시 강청은 상해탄을 뒤흔든 스캔들이 많았을 뿐아니라, 국민정부에 체포된 바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일찌기 배신하고 자수한 바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십년문혁혁명기간, 그녀는 30년대상해에서 있었던 스캔들이 그녀의 중국퍼스트레이디의 신분에 영향을 주고, 그녀의 정치앞길에 영향을 줄까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강청은 그녀와 관련된 상해연예계의 명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박해받아 죽기까지 했다.
손유세의 여섯째이모 임균의 회고에 따르면, 문혁이 발발한 후, "1966년 겨울의 어느 저녁, 유세가 두건을 쓰고, 외투를 걸치고 급히 찾아왔다. 그녀는 나에게 그녀가 반동예술권위가 되었다고 말했고, 매일 그릇을 씻고, 접시를 닦고, 화장실을 청소한다는 것이다. 주로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여섯째 이모, 강청이 어떻게 정치에 참여합니까? 그녀가 나서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아주 나쁩니다. 나는 그녀가 상해에서 저지른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내가 그녀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를 해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녀의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여섯째이모는 아직 강청이 상해에서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습니까?' 나는 말했다: '바로 동방화극사(東方話劇社)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한사람에 한장씩 보내준 것아닌가. 서명은 남평(藍萍)으로 하고. 아직 가지고 있다.' 유세가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여섯째이모, 빨리 꺼내서 태워버리세요. 만일 찾아낸다면 아마도 바로 반혁명으로 몰릴 겁니다.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험합니다. 지금 그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으니, 뭐든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에게 꺼리를 잡혀서는 안됩니다."
1967년 12월, 강청은 '특무혐의'라는 죄명으로 손유세의 남편 김산도 감옥에 쳐넣는다. 7년간이나 갇혀 있었다. 상해연예계의 명사들 예를 들어 조단(趙丹), 정군리(鄭君里), 왕영(王瑩), 장민(章泯), 고이이(顧而已), 동지령(童芷苓), 진리정(陳鯉庭)등이 모두 강청에게 박해를 받았다.
넷째, 손유재의 재능과 기품을 강청이 질투했다.
손유세는 소련에서 7년을 지낸다. 먼저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모스크바희극학원 공연과와 감독과에서 공부한다. 손유세는 중공고관자녀중 소련에 유학하여 예술분야를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된 후, 손유세는 제1, 2, 3기 전국정협위원, 중국극협 이사가 되어 여러번 해외를 방문하며, 유럽의 고전명저를 번역하고 감독했다. 예를 들어 고골의 <흠차대신>, 체호프의 <반야삼촌>등이 있다.
1950년부터, 그녀는 중국청년예술극원을 창립하는데 참여하여 총감독, 예술위원회 주임, 부원장을 지낸다. 같은 해 9월, 중국아동예술극원의 창설업무에도 참여한다. 그리고 소련동화극 <작은 토끼>를 번역하고 감독했다. 1953년, 소련전문가가 개설한 중앙희극학원 감독훈련반에서 반주임을 맡는다. 1956년 중앙실험화극원 총감독, 부원장을 맡고 소련작가 코체토프의 <예르쇼프형제들>을 화극으로 개편하여, 인민대회당 소례당에서 3개월을 연이어 공연한다.
배우출신인 강청은 신중국이 건립된 후, 희극분야에 참여하고 싶어했고, 여러번 손유세를 찾아가서 함께 하자고 했지만, 모두 손유세에게 거절당한다.
예를 들어, 1963년 화극 <두견산>이 공연된 후, 강청은 손유세를 찾아간다. 그녀도 이 극의 개편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손유세는 말했다. 이 극은 청년극원에서 쓴 것이고, 나는 지금 실험화극원의 직원이다. 나에게 그 일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또 예를 들어, 1966년초, 손유세가 창작한 화극 <처음 떠오르는 태양>을 북경에서 공연한다. 강청은 본 후에 손유세를 찾아가 협의한다. 이 화극을 현대경극으로 개편할 수 없겠느냐고. 손유세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 또 거절한다.
다섯째, 손유세와 임표의 관계도 화근을 심었다.
손유세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항일군정대학 교장으로 소련에 요양중이던 임표를 만난다.
임표의 부인 장매(張梅)는 섬북(陝北) 미지(米脂) 사람이고, 연안에 있을 때 손유세의 친구였다. 임표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장매가 전화를 걸어 손유세에게 놀러오라고 했다. 활발하고 명랑한 손유세가 오기만 하면,임표의 기분도 좋아졌다. 소련유학생들은 손유세가 임표를 잘 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자주 그녀를 통해 임표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손유세가 나서서 부탁하기만 하면, 임표는 반드시 갔다.
이렇게 오가면서 임표는 손유세에게 푹 빠진다. 심지어 그녀에게 고백까지 한다. 손유세에게 자신에게 시집와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손유세의 여섯째이모인 임균의 회고에 따르면, 임표는 소련에 있을 때 손유세를 많이 쫓아다녔으며, 귀국할 때도 그녀를 기다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돌아온 이후에는 섭군과 결혼한다. 그래서 섭군의 질투도 만만치 않았다. 이것들이 모두 손유세로 하여금 '문혁'때 참사하도록 만든 원인이다.
결론
세 명의 여인간에 벌어진 일이다. 모택동의 처인 강청, 임표의 처인 섭군, 그리고 주은래의 양녀인 손유세. 이들은 문혁때 현대판의 '궁중암투드라마'를 펼쳤다. 강청, 섭군이 힘을 합쳐 손유세를 박해하여 죽인다. 그후 섭군은 임표를 따라 도망치다가 몽골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죽었고, 강청은 '반혁명집단'의 수괴로 몰려, 사형집행유예판결을 받고 결국 목을 매어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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