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휘(林輝)
1974년 12월 17일, 한 구의 시신이 301병원에서 비밀리에 화장장으로 보내어져 화장된다. 화장신청서에 쓰인 것으로는 "신청인: 왕규(王奎), 주소: 301, 사망자와의 관계: 부자, 사망자성명: 왕천(王川), 남, 76세, 번호: 0012690" 사실상, 이 왕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전 국방부장, 원수 팽덕회였다.
중공내부에서 팽덕회는 성격이 솔직하고, 충동적이며, 감히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항전시기, 팽덕회는 중공의 적극항전을 주장했다. 서북의 구석에 숨어서 병력과 힘을 비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바로 모택동의 '마작전'만 하라는 지도사상을 어기면서 진행한 것이다. 이 전투는 중공이 나중에 자랑하는 손에 꼽히는 항전의 전적이 되었다. 그리고 팽덕회가 비판받는 죄상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1898년생인 팽덕회는 일찌기 국민혁명군에 가입하고 북벌전쟁에 참가한다. 1928년 중공에 가입하고, 평강폭동(平江暴動)을 일으키나 실패한 후, 농촌으로 물러나서 중공 홍삼군단(紅三軍團)의 지휘관이 된다. 중공이 북으로 도망치는 기간동안 3천의 잔여병력으로 모택동을 장국도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다. 이로 인하여 모택동이 그를 중시하게 된다. 모택동은 일찌기 이런 시도 지은 바 있다:
산고로험구심(山高路險溝深) 산은 높고 길은 험하고 도랑은 깊은데
대군종횡치분(大軍縱橫馳奔) 대군이 종횡으로 달려가고 있다.
수감횡도입마(誰敢橫刀立馬) 누가 감히 말 위에서 칼을 비껴들 것인가
유아팽대장군(唯我彭大將軍) 오직 나의 팽대장군뿐이다.
항전기간, 팽덕회는 모택동의 군사전략을 집행하지 않아, 지나치게 이르게 중공이 실력을 드러내 버려, 모택동의 불만을 산다.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된 후, 팽덕회는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된다.
1950년대초의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침략한 북한을 돕기 위해, 팽덕회는 명을 받들어 중공지원군사령관이 되어 십수만군대를 이끌고 한반도로 들어간다.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毛岸英)은 팽덕회의 기요비서(機要秘書) 신분으로 함께 참전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도착한지 겨우 1개월여만에, 모안영은 군대규율을 지키지 않고, 엄폐물내에서 달걀을 구워먹다가 적에게 들켜 미군비행기의 폭격에 사망하고 만다. 모택동은 아주 힘들어했다. 비록 팽덕회에게 보호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질책하지는 않았지만, 모택동은 팽덕회에 대하여 앙금을 품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팽덕회는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에 임명된다. 1955년 원수 계급을 받고, 서열은 주덕(朱德) 바로 다음인 2위였다. 1958년, 팽덕회는 섭영진(聶榮臻), 황극성(黃克誠)등과 군사위원회확대회의에서 속유(粟裕)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여, 속유에게 '자산계급개인주의'라는 레테르를 붙이게 된다.
1959년 강서 여산(廬山)에서 소집개최된 중앙정치국확대회의기간동안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서신을 써서 모택동이 발동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1958년의 기본건설을 현재 보기에 어떤 항목은 너무 조급해었고, 자금을 너무 분산시켰으며, 일부 반드시 했어야할 프로젝트를 미뤘다. 이것은 결점이다." "1959년에도 진도를 조금 늦추면서 적절히 통제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계속하여 대약진을 했다. 이는 불균형현상이 적시에 시정되지 않아서 새로운 일시적 곤란을 증가시켰다." 그는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부과풍(浮夸風, 허풍떨기 좋아하는 기풍), 소고로(小高爐, 철강생산을 위해 소규모 고로를 만든 것)등등 모두 표면적인 혀낭에 불과하다. 민주가 결핍되었고, 개인숭배를 한 것이 모든 병폐의 근원이다."
이 서신은 모택동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모택동은 딴 살림을 차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당내 고위층들을 굴복시키고 최종적으로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張聞天), 주소주(周小舟)등을 "팽황장주반당집단"으로 몰아간다. 팽덕회 본인은 "이통외국(裏通外國, 외국과 통모하다)"으로 모함받아, 팽덕회는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규정된다. 국방부장과 군사위부주석의 직위를 박탈당했을 뿐아니라, 비판을 받게 된다.
팽덕회가 면직된 후, 이화원 부근의 괘갑둔(掛甲屯) 오가화원(吳家花園)에서 6년간 농사를 지어,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았다. 1961년 10월 30일부터 12월 26일까지, 그는 호남 상담현의 고향으로 가서 조사를 하고, 그가 쓴 5건의 조사자료는 중앙으로 참고용으로 보내어진다. 1962년 봄, 팽덕회는 대약진후 전국적인 대기근이 발생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사실을 다시 한번 팔만언으로 써서 모택동에게 올린다. 실사구시하고, 잘못을 시정하며 삼면홍기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달라고 한다.
이 글은 다시 한번 모택동의 불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아니라, 모택동에게 우려를 갖게 했다. 그는 유소기를 대표로 하는 당내부에서 팽덕회의 명예회복을 노리는 세력을 우려한 것이다. 모택동은 잘 알고 있었다. 팽덕회의 명에회복이 성공하면, 모택동의 모씨강산은 유소기의 유씨강산으로 바뀌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여전히 군대내에서 영향력과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팽덕회가 자신이 유소기등을 타도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권모술수에 능한 모택동은 1965년 9월 23일 팽덕회를 중남해로 불러서 얘기를 나눈다. 모택동은 그에게 "아마도 진리는 너의 편인 것같다"고 인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중앙지도자동지들에게 말한다: "나는 과거 팽덕회동지를 반대하는데 적극적이었지만,지금은 그가 성심성의로 했다는 것을 지지한다. 팽덕회에 대한 견해는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나 자신도 그러하다.....나의 선집에서 여전히 너(팽덕회)의 이름을 남겨두었다. 왜 한 사람이 잘못을 범하면,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하는가?" 팽덕회는 최종적으로 사천으로 보내어져 중공중앙 서남국 '삼선' 건설위원회 제3부주임이라는 직을 맡는다.
팽덕회를 멀리 떠나보낸 후에 모택동은 유소기등을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문혁'을 일으킨다. 1966년 12월, 팽덕회는 북경으로 끌려와 비투(批鬪)를 당한다. 1967년 1월,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상황을 얘기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회신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강청(江靑)등이 팽덕회를 비투하는 것을 묵인한 것같았다.
7월 19일, 팽덕회는 홍위병에게 비투를 당한다. 나이 칠순에 가까운 팽덕회는 주먹과 발로 얻어맞고 걷어차여, 땅바닥을 일곱번이나 구른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중앙경위전사가 다음날 '중앙문혁'에 보고한 서면보고서에 따르면: "어제, '북항(北航, 북경항공학원)에서 3,40명의 소규모대회를 열어 팽덕회를 비투했다. 회의에서 팽덕회는 7번 바닥에 쓰러졌고, 앞이마가 깨졌으며, 폐에 내상을 입었다. 내일 다시 비투할 것이다." 7월 23일, 위수구(衛戍區)는 다시 보고한다. 팽덕회가 구타당한 후, "흉부의 통증을 느끼고, 호흡이 곤란하여, 가래를 뱉어내지 못하고, 식사를 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의사가 초보적으로 검사한 바에 따르면(엑스레이를 찍지는 않았음) 내상을 입은 것같다."
7월 23일, 중앙문혁의 직접 지휘하에 강청, 강생(康生), 진백달(陳伯達), 척본우(戚本禹)등이 직접 출석한 상황하에서 다시 북경항공학원의 남쪽운동장에서 10만명 비투대회를 개최한다. 팽덕회는 중상이 치유되지 않았는데 다시 상처가 더해진 것이다. 그의 옷과 바지는 찢어졌고, 두 발 중에서 한 발은 면혜(棉鞋)를 다른 한발은 초혜(草鞋)를 신고 있었다. 가슴 앞에는 검은 패를 걸어놓았고, 여러번 강제로 허리를 구십도 숙이게 하였다.
한 목격자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팽덕회가 유투(遊鬪)를 당하는 트럭위에 실려서, 천안문성루앞의 장안대가를 지나갈 때, 오른쪽 왼쪽에 서 있는 덩치큰 사내들이 그를 눌러서 강제로 머리를 숙이게 했다. 다른 유투를 당하는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있어서 이들이 머리카락을 잡고 고개를 숙이게 했는데, 팽덕회는 머리를 박박 밀어서 붙잡을 머리카락이 없었다. 그리하여 좌우의 덩치큰 사내들이 눈을 눌러잡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1972년 9월 17일, "중공중앙팽덕회전안심사조"가 '심사보고서'를 완성한다. "영구히 당에서 축출하고, 무기징역에 처하며, 공민권을 종신박탈할 것"을 건의한다.
계속되는 구타와 괴롭힘 속에서 1973년 늦은 봄, 팽덕회는 대량의 혈변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중에 직장암으로 진단받는다. 수술을 받은 후,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지만, 그가 입원한 병실은 모든 창문이 꼭꼭 가려져 있었다.
1974년 여름, 팽덕회의 몸에는 암세포가 폐, 뇌로 전이되고, 반신불수가 되어 생명이 위급했다. 그러나 지시때문에 모든 의료수단은 반드시 '전안복무(專案服務)'해야 했고, 아무도 그에게 진통제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는 죽기 전에 창밖의 햇볕과 푸른 하늘 그리고 흰구름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를 감시하는 전안인원은 기밀과 안전을 이유로 그의 마지막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11월 29일, 팽덕회는 사망한다. 죽을 때 그의 곁에는 가족이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시신은 왕천이라는 가명으로 화장되고, 화장비는 그의 얼마되지 않는 '급여'에서 공제당한다. 유골함은 성도로 보내어진다.
1978년 중공에 공로를 세운 팽덕회는 마침내 "평반(平反, 명예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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