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창해(顔昌海)
오랫동안 중국당국의 공식 선전내용은 이러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한국전쟁)"를 위하여, 자진하여 장남 모안영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시켰고, 모안영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공식 선전내용의 모택동이 자신하여 장남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안영이 인민지원군에 들어간 것은 조직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과 팽덕회는 관련이 있을까?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1950년 10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다급한 도움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서 아군의 작전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월 5일, 모택동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10월 6일, 해방군 총참모장 섭영진(聶榮臻)은 총참모부 작전부장 이도(李濤)에게 즉시 약간명의 참모인원과 러시아어통역을 선발하도록 지시한다. 이들을 팽덕회와 함께 심양으로 보내어, 소련에서 중국과 조선에 파견한 군사고문과 상호 정보를 소통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날, 이도는 총참모부 작전부의 처장 1명(成普), 참모 2명(서무원(徐畝元), 공걸(龔傑)), 그리고 군사위원회 판공청 외문처(外文處)에서 러시아어통역 유모(劉某)를 선발한다. 10월 7일, 이 도는 유모를 만나 개인경력과 가정상황을 물어본다. 그후 그는 유모가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엄격한 정치심사와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북한에 병력을 파견하는 것과 소련군사고문과의 연락은 절대기밀을 요하는 사항이다. 만의 하나 기밀이 누설된다면 그 결과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섭영진에게 보고하여, 유모는 팽덕회의 지휘부에서 근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아 보이니 다른 러시아어통역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섭영진은 재삼 생각해본다. 당시는 심양으로 출발하기까지 겨우 반나절이 남은 상황이었다. 어디로 가서 믿을만한 통역을 구한단 말인가? 그는 돌연 모안영이 러시아어도 잘하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하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시간이 촉박하였기 때문에 섭영진은 모택동에게 보고해서 승인을 받을 시간도 없었다. 그는 즉시 이도에게 모안영에게 통보해서 중남해 거인당(居仁堂)으로 와서 총참모부 작전부와 면담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도는 모안영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그는 그저 천진에 있다는 말만 들었었고, 나중에서야 북경기기창(北京機器廠)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바탕 곡절을 거쳐, 10월 7일 저녁에야 겨우 모안영을 중남해 거인당으로 오게 했다. 이도는 그에게 공작임무를 알려준 후, 그에게 내일 팽덕회 총사령관을 따라 동북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모안영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즉시 당의 결정에 복종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는 그 후에 모택동의 거처로 가서 가족들과 만난다.
10월 8일, 모안영은 팽덕회를 따라 비행기를 타고 심양에 도착한다. 11월 25일, 모안영은 북한에서 사망한다. 지원군사령부는 그날 중앙군사위에 전보를 보낸다. 주은래는 전보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의외라고 여긴다. 그리고 전보를 모택동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기요실의 인원들에게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기밀을 유지하게 명한다. 1개월여후인 1951년 1월 2일, 주은래는 모안영이 사망한 사실을 보고한 전보를 모택동에게 보낸다. 모택동은 아주 비통해 했다. 모안영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중남해에 전해진 후,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서로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사람들간에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가자 직접 지휘소에서 근무할 인원을 뽑는 책임을 졌던 총참모부 작전부장 이도는 가책과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주은래에게 검토신(檢討信, 반성문)을 써서 보낸다. 거기에서 모안영이 지원군임무에 참가하게된 전과정을 설명했다. 검토신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부주석:
어제 모안영동지가 희생되었다고 확인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통념과 애도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그를 팽덕회 총사령관을 따라 북한으로 보낸 경위에 대하여 제가 알고 있고, 제가 처리한 상황을 보고하고 조직에서 내리는 처분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팽덕회 총사령관이 출발하기 전날(10월 7일 저녁), 섭영진 총참모장은 나에게 천진의 황경(黃敬) 시장에게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즉시 모안영에게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음 날 아침 일찍 팽덕회 총사령관을 따라 비행기를 타고 동북(나는 단지 동북으로 간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으로 가도록 통지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러번 전화를 돌렸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을 때, 마침 이극농(李克農) 동지가 작전실에 와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황시장에게 연락하지 못해서 모안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모안영을 팽덕회 총사령관을 따라 동북으로 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그는 즉시 나에게 모안영은 천진에 있지 않고, 이미 북경기기창으로 와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극농 동지는 나에게 모안영의 전화번호까지 주었습니다. 마침 모안영 동지가 외출하여, 다시 섭자룡(葉子龍)의 기요실(機要室)을 통해 겨우 모안영을 거인당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극농 동지는 그 자리에서 모안영동지에게 당부했습니다 .이미 그의 임무가 바뀌었고, 팽덕회 총사령관을 따라 동북으로 가야 한다고, 모안영은 기꺼이 새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후 주석의 집으로 가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팽덕회 총사령관을 따라 동북으로 갔습니다.
이 일은 내가 섭영진 총참모장의 지시를 받아 처리한 것이므로, 주석의 동의를 받았는지 여부는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혹은 다시 정식으로 주석등에게 통지해야 하는지 문제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꿔서 보내는 문제는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일을 오늘 반성해보니, 내심으로 극히 가책을 느끼고 괴롭습니다. 모안영 동지는 항미원조사업을 위하여 희생하였으니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주석께서는 아끼는 아들을 잃어서 그가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특히 전세계의 평화인류와 노동인민의 위대한 사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영수이신데, 우리가 업무를 신중하게 하지 못해서 받지 말았어야할 정신적 타격을 입으시게 하였으니, 의문의 여지없이 이는 우리의 죄과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에서 마땅히 받아야할 처분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주석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경례.
이도 일월삼일"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백만의 보통중국백성자제가 국외에서 사망했다. 북한, 남한, 베트남. 그러나, 깊이 가책을 느끼고 불안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모안영이 죽자, 그를 보낸 사람조차도 속속 의론대상이 되면서, 가책을 느끼고 불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조직에서 내리는 처분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당에서 마땅히 받아야할 처분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이를 보면, 모안영은 원래 죽지 말았어야 하고, 죽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기실 원래의 생각대로라면, 팽덕회의 지휘부위치는 압록강북안의 중국경내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생명위협은 거의 없었다. 이건 명백한 특권사상이다. 금방 정권을 차지한 체제내에서도 그런 특권사상은 이렇게 농후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체제내에는 특권을 무시하는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팽덕회가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일 모든 것을 특권인물인 모택동이 특수한 배려를 받던 관례대로 처리했다면, 북한에서 죽은 모안영의 유골은 중국으로 운송했어야 한다. 그러나 팽덕회가 이를 막는다. 1954년 12월 25일, 총간부부는 전보초안을 준비하여 모안영의 유골을 북경으로 운반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팽덕회가 직접 주은래에게 서신을 쓴다:
"제 뜻은 북한에 매장하는 것입니다. 지원군사령부와 지원군사령관의 명의로 비석을 세우고, 그가 자원하여 지원군에 참가하고 희생된 경위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모택동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희생된 또 다른 참모 고서환(高瑞歡)과 함께 묻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북한인민들에게 교육적인 의미가 비교적 좋고, 다른 사망한 열사의 가족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의 전보내용은 이미 당신께 보내어졌는데, 이상의 의견이 붙어 있지 않아서 특별히 보완하여 말씀드립니다. 타당한지 여부를 고려해 주십시오."
주은래는 25일 이 서신에 다음과 같이 회신한다: "팽덕회 총사령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총간부부에는 따로 회신을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이 문건을 유소기(劉少奇), 등소평(鄧小平)에게도 참조로 돌린다. 나중에 팽덕회는 모안영의 유골을 지원군지휘기관주둔지인 회창열사능원(檜倉烈士陵園)으로 옮기고, 묘비에 그의 평생을 서술하면서도, 모안영보다 중국혁명에 더욱 큰 공헌을 한 고서환의 묘는 이전하지 않은 것을 보고 팽덕회가 아주 불쾌해 했다고 한다.
모택동의 아들도 보통백성의 아들과 같이 취급했던 팽덕회는 너무 모택동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1959년 모택동에게 숙청당하고, 타도당하며 나중에 문혁때 겁난을 당하는 것의 화근은 이때 마련된 것이다.
대륙의 관영매체에 범상치 않은 두 편의 글이 실린 바 있다. <구침(鉤沉): 모안영의 입북과 불행한 희생의 진실한 원인도>(내부 제목: 모안영 희생과 관련한 하나의 전보)와 <모택동희생역사환원: 팽덕회는 모택동의 전보를 받은 바 없다>. 두 편의 내용은 똑같다. 문장의 첫부분에 이렇게 쓰여 있다: 모택동의 위사(衛士) 이은교(李銀橋)와 그의 부인 한계형(韓桂馨) 구술, 저연생(邸延生) 집필로 <역사의 진언(眞言) - 이은교의 모택동 곁에서의 업무사실기록> 신화출판사 2000년 7월 출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살펴보지 않겠다. 다만, 그중 모안영의 입북과 희생한 원인에 대한 것은 사실에 위배된다.
이은교는 <역사의 진언> 495페이지 내지 496페이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1950년 11월 23일, 한반도의 전국(戰局)을 밀접하게 주시하고 있던 중국인민해방군 대리총참모장 섭영진은 소련측에서 보내온 기밀전보를 한통 받는다. 거기에는 미군이 최근 들어 비행기를 보내어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를 폭격할 것이니, 중국에서 경계를 강화하고, 미리 대비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섭영진은 급히 모택동의 사무실로 가서, 모택동에게 소련의 전보를 보고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지시했다: "즉시 팽덕회에게 전보를 보내, 사령부를 이전하라고 해라! 적의 상황이 변화무쌍하니 미리 방비해야 한다."
"예!" 섭영진이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즉각 팽덕회에게 전보를 보낸다. 11월 24일 오후, 모택동은 직접 전보를 써서, "AAAA"의 급전으로 보낸다. 팽덕회에게 최근 적기의 폭격이 있으니, 방법을 강구해서 지원군총사령부를 이전하라는 것이다.
팽덕회는 아주 비통해 했다. 비통한 와중에 자신이 섭영진의 전보와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급히 지원군총사령부를 이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역사의 진언> 제501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모택동은 지원군총사령부가 폭격받았다는 말을 들은 후, "이 팽덕회!"라고 소리치면서 화가나서 말했다. "내가 전보를 보내어 이전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독자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 모안영의 희생은 팽덕회가 모택동의 명령대로 즉시 총사령부주둔지를 옮기지 않아서 모안영의 희생은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책임이 팽덕회에게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사자로서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역사의 진언>에서는 모안영의 희생을 팽덕회가 모택동의 총사령부이전명령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팽덕회에게 책임을 씌우고 있다. 필자는 항미원조기간동안 지원군총참모부 참모로 있었으며, 팽덕회 동지를 따라 근무했다. 1986년 은퇴후에는 <팽덕회전>의 편집심의업무에도 참가한 바 있다. 항미원조기간의 역사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모택동은 그런 전보를 보낸 적이 없다."
즉, 모안영의 죽음은 팽덕회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대륙의 관영매체가 실은 <모택동희생역사환원: 팽덕회는 모택동의 전보를 받은 바 없다>의 작자는 이렇게 말한다; 1950년 11월하순의 23일과 24일, 지원군이 북한에서 받은 전보를 뒤져보았는데, 근본적으로 11월 23일 섭영진이 이전하라는 전보는 없다. 23일 북경에서 온 전보가 없다. 24일에는 모택동의 전보가 확실히 있다. 그러나 전문에 폭격을 대비하여 사령부를 이전하라는 말은 없다.
설사 만보 양보하여 말한다고 하더라도, 모택동이 당시 팽덕회에게 사령부를 이전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낼 때, 이은교가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들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중앙기관에 들어간 간부, 전사는 기밀엄수교육을 확실하게 받기 때문에, 자신이 봐서는 안되는 문건은 보지않고, 자신이 알지 말아야할 비밀은 묻지 않는다. 수장이 다른 사람과 기밀을 얘기할 때는 자리를 피한다. 당시 모택동의 곁에서 일하던 두 명의 기요비서인 서업부(徐業夫)는 오랫동안 기요업무를 담당해온 인물이고, 나광록(羅光祿)은 군대간부이다. 서,라 두 비서는 절대로 전보를 이은교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기밀유지기율에 위반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은교가 당시 전보를 볼 수는 없고, 군사기밀을 들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와 집필자는 당시의 역사문헌도 찾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큰 거짓말을 책으로 쓴단 말인가? 그건 팽덕회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짓이 아닌가. 그럼 누가 이은교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켰을까? 팽덕회를 모욕하는 가짜소식을 책으로 만들어 퍼트리도록 했단 말인가? 모택동에 관하여 거짓소식을 내보내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막후요소와 목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11월 25일 오전, 모안영이 폭사한 후, 오후 4시, 팽덕회는 정신을 차리고 군사위에 전보를 보낸다. 중공중앙 기요실주임 섭자룡은 전보를 받은 후, 먼저 주은래에게 보여준다. 주은래는 읽은 후 전보에 "유(소기), 주(덕): 주석은 요 이틀간 몸이 좋지 않아서, 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라고 지시를 쓴다. 37일후인 1951년 1월 2일 주은래는 섭자룡에게 지원군사령부의 전보를 모택동에게 보내도록 시킨다.
<섭자룡회고록>에 따르면 주은래가 말했다: "속이지 말자. 계속 속이는게 방법은 아니다. 주석에게 보고하자!" 나는 전보를 들고 모택동사무실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쇼파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주석!"이라고 부른 후, 전보를 그에게 내밀었다.....모택동은 그 간다난 전보를 3,4분은 족히 보았을 것이다. 그는 머리를 깊이 박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에게서 눈물은 보지 못했고,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안색은 아주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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