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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황리중(黃立衆) 이야기

by 중은우시 2025. 3. 17.

글: 궁장패점랑(弓張貝占郞)

1956년 가을, 20살의 황리중(黃立衆)은 미래에 대한 동경을 안고,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기 위하여, 북상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 그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4년후, 그는 자신의 독립적인 사고로 북경대학에서 제명당하고, 남으로 돌아오는 열차에 다시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가을날의 저녁때, 남하하는 기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열차칸에는 귀향하는 여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창쪽의 자리에서 황리중은 두 명의 업무인원들 가운데 끼어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호구부가 꽉 쥐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개제학적(開除學籍)"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열차가 장강대교를 지나갈 때, 그는 돌연 힘을 주어 그 호구부를 찢어버렸고, 찢긴 조각이 바람에 날리면서,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4년전, 같은 철로를 통해, 황리중은 농촌자제의 질박함과 지식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북경대학의 교문으로 걸어들어갔다. 1956년의 개학시즌, 그는 다른 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짐보따리를 들고 연원(燕園)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다. 북경대학의 강의실에서 그는 철학에 대한 농후한 흥미를 드러냈다. 특히 사회현실문제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주 수업이 끝난 후, 교수와 심도있는 토론을 했다. 특히 농촌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하여. 그의 성장배경은 그로 하여금 농촌에 대해 깊이있게 이해하게 해주었고, 그가 강의실에서 제기하는 일부 주장은 다른 학생들과의 열렬한 토론을 불러오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황리중은 강의실에서의 토론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농촌으로 돌아가 현지조사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고향부근의 여러 생산대를 방문했고, 농민의 생활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발견했다. 농촌의 실제상황과 신문에서의 묘사는 차이가 아주 크다는 것을. 이 발견은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그가 논문에서 이런 문제를 검토하도록 만든다.

1959년 봄학기에 황리중은 논문을 한편 써서 상세히 농촌문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하층에 존재하는 일부 구체적인 문제를 언급했고, 철학적인 각도에서 분석을 진행했다. 이 논문은 학과내에서 적지 않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교수는 그의 견해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당시의 주류견해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황리중은 이로 인하여 위축되지 않았다. 그후, 그는 계속하여 강의실에서 그리고 글을 써서 자신의 독립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이렇게 보았다. 철학과의 학생으로서, 마땅히 현실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저 교조적으로 암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그를 점점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학교는 여러번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사상인식을 단정히 할 것"을 요구했다.

1960년 가을, 학교측은 최종적으로 황리중의 학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한다. 일찌기 활기넘치던 이 학생은 몇몇 업무인원의 호송하에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게 된다. 이제 북경대학에서 학문을 추구하는 길은 그가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이상과 마찬가지로 돌연 끝나버린다.

호구본이 없으면,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기차역을 떠난 후, 황리중은 장강중하류의 도시를 전전했다. 그는 전후로 공장, 부두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지만, 매번 그에게 호구증명을 요구당했다. 이 핵심 증빙자료가 없으면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며칠간 여기저기 돌아다닌 후, 황리중은 부득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다시 농촌으로 돌아간다. 일찌기 농촌을 떠났던 대학생이 다시 황토를 향하고 하늘을 등지는 나날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농촌생활도 그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꺽을 수는 없었다. 일상적으로 일하는 외에, 그는 주위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황리중은 자주 고향사람들이 생활에서의 곤란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어떤 농민은 그에게 현지간부의 행태를 얘기했고, 또 어떤 농민은 식량배급기준이 지나치게 낮다는 곤란을 얘기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하여, 대다수의 농민들은 그저 혼자서 원망만 할 뿐,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분자로서, 황리중은 자신이 상급기관이 이런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그는 마을에서 조사를 한 후, 상세히 농촌의 식량생산량, 분배상황과 군중의견을 기록하였다. 대량의 자료를 수집한 후, 그는 촌민대표를 조직하여 공사(公社)에 상황을 보고하고, 상급기관이 중시해줄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여러차례에 걸친 보고에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받지 못한다. 여러 차례의 시도가 막혀버리자, 황리중은 더욱 급진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는 농민을 조직하여 단체를 만든다. 그리고 일부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는 행동방안까지 제정한다. 이런 행동은 금방 현지정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1970년, 사태는 가장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현지정부는 "반혁명죄"로 황리중을 체포한다. 구금기간동안 그는 시종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죄를 인정할 것을 거부한다. 결국 법원은 그에 대하여 사형판결을 내린다.

사형집행당일, 황리중은 끌려나와 공개처형을 당한다. 당시의 사진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했다: 두 명의 압송인원이 그의 어깨를 누르고, 그는 바닥에 꿇어앉아 있다. 입술은 꽉 다물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져 있었다. 공개재판대회현장에서, 아래에는 구경하러 온 군중들로 가득했으며, 그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일찌기 그가 도우려고 했던 고향사람들이었다.

일찌기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던 우수한 학생이 이렇게 짧고 기구한 일생을 끝마치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특수한 시대의 축소판이며, 지식분자가 사회현실문제를 대할 때의 곤경을 말해준다. 사진속의 그는 시종 침묵을 유지한다. 마치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영원히 가져가는 것처럼.

여러 해 이후, 사람들이 이 때의 역사를 회고할 때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상을 지닌 젊은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시대는 그에게 어떤 선택을 주었는가? 이들 문제는 아마도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영원히 역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