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화(施化)
"백년대변국"은 시진핑의 구두선이다. 원래의 의미는 20대에서 개인독재를 확립한 후, 세계는 그의 손안에서 크게 변할 것이며, 그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승서강(東昇西降)", 중러연합의로 세계지배, 중국의 순조로운 북한화로 시진핑의 주체사상과 세습제를 확립, 국제경제궤도에서 벗어나 자력갱생하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 말이 현실이 되었다. 2024년이 되어 변국이 정말 곧 도래할 것같다. 그러나 소위 대변국의 의미는 그가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일 뿐이다.
먼저, "동승"은 이미 정점에 도달했다. 중국경제가 전체적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시진핑의 정치적 큰그림이 크게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20기 3중전회는 예정대로 개최하지 못하고 있고, 소문에 따르면 이미 숙청된 친강(秦剛)은 단지 당내경고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속속 발표되는 중남해의 정령은 요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여러가지 현상은 시진핑의 '신시대'는 이미 정체되었고, '쓰레기시간'에 접어들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강"은 내가 보기에 오히려 "서승(西昇)"이다. 그러나 의미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동서"에 대한 인식부터 얘기해보기로 하자. 그리고, 왜 일찌기 나타나는 것같았던 "서강"이 지금은 오히려 "서승"으로 돌아가게 되었는지를 말해보자.
내가 보는 동방, 서방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비록 지역과 관련이 있지만, 근원을 보면 인식론의 차이이다. 서방은 고대로부터 계속하여 개인의 독립정신을 대표한다. 고대그리스의 여러 신들의 인격화, 고대로마의 시민의식, 지금의 서방각국의 개인독립과 자유까지 연속되고 있다. 그리고 동방은 지금까지 개체였던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동방은 전체, 집단으로 존재했다. 여하한 정신도 만일 일치되어 인정받지 못하면 존재가 허용되지 않고 반드시 압살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이다. 그렇다. 독재는 그저 사정의 결과이다. 철학의 근원은 전체라는 것에 있다. 만일 근원을 찾아내고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독재를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를 무너뜨리면 다른 하나가 나타난다. 새로 나타나는 독재자는 더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더 수완이 높을 것이다.
나의 이런 구분은 오스트리아학파에서 배운 것이다. 하이에크를 대표로 하는 오스트리아학파는 경제학파라고는 하지만 철학학파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최근의 여행기간에 나는 주로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작을 읽었다. 부득이 이들 학자와 논자들이 날카롭고 투철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 속으로 탄복했다. 이 학파의 주요작가에는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 에드먼더 버크, 그리고 19세기이후의 토크빌, 액턴 남작, 지난세기의 미제스, 하이에크까지, 그들의 발견은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진실을 보여준다. 또한 인류가 곤경을 해결할 출로를 찾아낸 것이다. 그들의 적수가 너무 강대했고, 너무 심하게 억눌려왔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들의 학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는 저명한 케인즈가 있다. 그러나, 2024년의 오늘날, 그 강대한 적수들은 이미 끝장이 났다. 금방 붕괴괴는 엄준한 현실이 진위를 밝혀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적수는 동방에서 독재주의이고, 서방에서는 백좌(白左)이다. 쌍방의 주요 의견차이는 여전히 우리가 앞에 언급한 것과 같다. 개인을 인정하느냐 이나면 전체만 인정하느냐이다.
개인을 인정하는 관념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세속적이고 용속적이다. 숭고한 추구도 없고, 고상한 도덕도 없다. 다만 실질을 추구하고 이상을 꿈꾸지 않는 눈으로 과거를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이 존재하는 모든 의미는 그저 최대한 만족한 생존여건을 창조하여 계속 살아나가는 것이지, 다른 추구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나와 같은 교육환경하에서 성장한 많은 친구들이라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설마 자고이래로 그렇게 많은 위인 지도자들의 큰 그림은 모두 허망하단 말인가? 확실히 그렇다. 세계가 나쁘게 변해간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국혁명의 전과정이 바로 그러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많은 청년인재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현상을 바꾸려는 혁명의 물길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는 그저 소수의 가장 수완이 뛰어난 효웅과 그들의 후손들만 누리게 만들어 주었다.
현상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 나빠지게 만든단 말인가? 이는 또 다른 종극적인 철학사고와 관련된다. 이 사고에 따르면, 인류역사이래로 사람과 사람간에는 두 가지 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거래관계와 약탈관계. 전자의 관계의 결과는 사람과 사람간에 평당하고 화목하게 공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후자의 관계의 결과는 당연히 모순과 충돌이다. 바꾸어 말하면, 전자의 관계는 문제를 해결하고, 후자의 관계는 문제를 조성한다. 관건은 네가 무엇을 취하느냐에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식민은 바로 약탈이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쇠락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대영제국. 미국도 그들의 대외관계에서 거래의 부분은 반드시 성공했고, 약탈의 부분은 반드시 실패했다.
사회주의제도에는 확실히 거래관계가 없다. 더 많은 것은 약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재산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개인의 재산을 약탈해서 재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하이에크는 이렇게 왜 거래만 가능하고, 분배는 불가능한지를 분석했다. 사람의 수요는 너무나 복잡다양하고, 변화무궁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가장 필요한게 무엇인지, 언제 만족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더더구나 십여억의 대중임에야. 오직 한가지 제도로 이걸 해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무역하의 자본주의이다. 당연히 자본주의좌파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징수와 임의분배이기 때문이다.
왜 오직 거래만이 수요를 만족시키고 분배로는 안된다고 하는가. 인성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환경하에서 모든 사람은 같은 상품에 대한 판단이 같지 않다. 이건 예상불가능하고, 계획할 수도 없다. 분배할 수도 없다. 그저 대량의 복잡한 독립된 개체가 화폐거래에서 잠정적인 평형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장기적으로 거래하게 되면, 아마도 장기적인 평형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경지이다. 절대로 사람들마다 평등한 것도 아니고, 대동사회가 올 수도 없다.
2024년에 이미 몇 가지 대표적인 사건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예정이다. 이는 세계의 거대한 변혁이 이미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즉 대량의 주류사람들은 동방의 전체개념이 서방의 개인개념으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아르헨티나 대통령선거이다. 마지막은 아마도 대통련선거후의 미국일 것이다. 타이완 총통선거가 끝나면서 이미 같은 편에 섰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고, 역시 그들과 같은 편에 설 것이다. 그리고 동방을 대표하는 두 세력인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역사상 유례없는 쇠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논리는 이러하다. 무릇 강성해진 국가는 영향력도 강하다. 그들의 관념은 세계의 조류를 이끈다. 그리고 쇠퇴하는 국가도 붕괴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그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낙오하게 되면, 그저 다른 사람의 뒤에서 천천히 기어가는 수밖에 없다. 언제 관념이 바뀌면,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너를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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