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춘추전국시대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다. 진정으로 체계적인 학술사상을 가진 유파는 당연히 백개에 이르지는 않았다. 한나라때 유향(劉向)의 <칠략(七略)>은 춘추전국의 백가를 구체적으로 십가(十家)로 정리했다. 즉, 유(儒), 묵(墨), 도(道), 법(法), 음양(陰陽), 명(名), 종횡(縱橫), 잡(雜), 농(農), 소설(小說)이다. 소설가를 제외한 나머지 구가를 구류(九流)라 부른다. 소설가는 주로 이야기책을 썼고,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 않아서, 점차 몰락한다. 십가외에도 병가(兵家), 의가(醫家)등이 있으나 체계를 완성한 학파로 형성되지는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유, 묵, 도, 법의 사가(四家)이다. 그러나, 이들 유명한 학파외에도 오늘날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명가는 위(魏)나라의 승상을 배출하기도 했고, 농가는 유가의 제자들을 빼내가기도 했다. 당시 그들도 상당히 이름을 날렸다고 할 수 있다.
1. 명가(名家)
명가의 명(名)은 어디서 온 말일까? 기실 근원을 따져보면 공자에 이르게 된다. 공자가 가장 먼저 "정명(正名)"을 제창했다. 이때부터 "명"의 사상이 사상, 정치, 철학분야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공자는 "명"이 무엇인지를 심도있게 연구하지는 않았고, 단지 "반드시 정명(正名)해야 한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名不正則言不順)"고만 강조했다. 이것은 후인들에게 무한한 사고의 여지를 남겼다. 그래서 후대의 유묵도법등 백가들이 모두 "명"이 무엇인지를 탐구했고, 명례(名禮), 명법(名法), 명변(名辯)같은 명실(名實)논쟁이 나타나게 된다.
후대의 학파중에서 혜시(惠施)를 장문인으로 하는 전문적으로 "명(名)"이 무엇인지를 토론하는 학파가 생겨난다. 바로 "명가"이다. 명가는 전문적으로 철학을 연구했고, 논리를 토론했으며, "명" "실"의 관계를 검토했다. 문자를 가지고 노는 변론이 이 문파의 특색이다. 다만 만일 혜시를 단순히 궤변을 잘 늘어놓고, 글자를 가지고 따지는 관리였다면, 그는 절대로 위나라의 승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위왕도 바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가의 사상에는 우리가 취할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혜시는 혜자(惠子)로 존칭된다. 전국시대 중기 송(宋)나라 사람이다. 그는 도가의 장자(莊子)와 막역지교였다. 두 사람은 손우(損友, 손해되는 친구)라 할 수 있다. 사적에는 혜자상량(惠子相梁)과 "장자와 혜자가 호량지상(濠梁之上)에서 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혜자가 진 것같지만, 사실이 과연 그러했을까?
먼저, "혜자상량"의 이야기를 보자. 장자가 위나라로 온다. 누군가 혜자에게 이를 알려준다. 장자가 온 것은 혜자를 밀어내고 위나라의 승상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혜자는 장자를 수색하여 체포하려 한다. 그러나 장자는 스스로 혜자를 찾아가서 만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추(鵷鶵, 봉황의 친척)이다. '오동(梧桐)이 아니면 머물지 않고, 연실(練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위나라승상이라는 자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음으로 "장자와 혜자가 호량지상에서 놀다"는 이야기를 보자. 장자와 혜자는 함께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장자가 물고기를 보고서는 즐겁게 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혜자가 말한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가 즐거운지 안단 말인가? 그러자 장자가 말한다: 그대는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얘기하는가? 그러자, 혜자가 말한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도 물고기가 아니다. 그러니 당신도 물고기를 모른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자 장자가 다시 말한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그대는 나보고 어찌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느냐고 묻지 않았는가? 그건 이미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알면서 나에게 물은 것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에서 혜자는 모두 장자에게 밀린 것으로 보인다. 혜자는 안목이 좁고 근시안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그저 남을 비꼬고 조롱할 줄 아는 장자와 달리, 혜자는 백성들을 위해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준 정치가이다.
혜자의 명가는 변론을 중시했다. 그러나 말만 잘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적인 결과를 중시했다. 혜자가 위나라 승상으로 있을 때, 위나라는 이미 쇠약해져 있었고, 떠오르는 진나라와 상대해야 했다. 혜자는 공리공담으로 집정할 수 없었다. 그는 부국강병의 수단을 모두 채용한다. 그래서 그가 집정할 때, 첫째, 적극적으로 위나라의 법치를 완비하여 봉건지주제를 강화하며, 귀족을 억누르고, 국력과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둘째, 또 다른 강국인 제나라를 끌어들여, 제나라와 위나라가 모두 서주에서 만나 서로를 왕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제나라를 위나라의 후원국으로 삼ㄴ고, 마릉지전때 방연(龐涓)이 죽은 이후 위나라와 제나라간의 갈등을 해소시킨다. 이를 통해 위나라가 진나라와 제나라를 앞뒤로 상대해야하는 곤란한 국면을 피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전력을 다하여 진나라에 대응한다. 이를 위하여 위초제(魏楚齊) 삼국이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도록 적극 추진한다.
혜자의 행위를 보면, 명가는 실제결과를 더욱 중시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학파사상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허명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공자가 처음 말한 것은 이러하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事不成)." 최종적인 것은 결국 '일을 성사시키기 위함'이다. 혜시는 이 점을 가장 잘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농가
전국시대에는 경전(耕戰)을 중시했다. 다만 농가는 단순하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가르치는 농학(農學)이 아니다. 농가는 구류중에서 유일하게 유파전승 및 창시자를 모르는 신비한 학파이다. 농가는 또한 유일하게 근거지를 가진 학파이다. 다른 학파는 모두 사방을 떠돌아다니고, 구성원도 복잡했다. 즉 떠돌면서 점진적으로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유가의 공자도 사방을 떠돌아다녔고, 유가의 제자들은 어느 나라이든 다 있었다. 고정적인 거점이 없었다. 그러나, 농가는 엄격한 세력범위가 있었다. 농가의 맹아와 발전은 모두 초(楚)나라에서 나타난다.
<한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농가의 류는 대체로 농직(農稷)의 관리에게서 나왔다." 농사를 관장하는 관학출신이라는 것이다. 하상주 삼대시기에 생산력이 낮았다. 그래서 국가는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전문관리가 필요했다. "백곡을 파종하고, 농사와 잠업을 권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다"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농가는 백초의 맛을 본 신농씨(神農氏)가 1대이고,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후직(后稷)이 2대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생산력이 변혁을 맞이했고, 사족이 굴기하며 사학이 흥기했다. 관학은 밀려난다. 농관은 정전제, 분봉제의 파탄으로 쇠약해진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민간으로 흘러들어갔다.
춘추시대 최초의 농가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가 초나라를 유력할 때 만난 장저(長沮), 걸닉(桀溺), 하조장인(荷蓧丈人)의 세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은 은사(隱士)이며 학문이 뛰어났다. 생존을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농사에 대하여는 직관적인 체험과 인식이 있었다. 그들은 공자를 "사체불근(四體不勤), 오곡불분(五穀不分)"(팔다리를 쓰지 않고, 오곡을 구분하지 못한다)이라고 비판한다. 이를 보면 그들은 실천을 중시하고, 공리공담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저, 걸닉, 하조장인 세 사람을 농가의 맹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러 허행(許行)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농가는 그제서야 비로소 체계적인 사상을 갖추게 된다. 허행은 직접 자신의 힘으로 해볼 것을 주장한다. 제자 십여명을 데리고 거친 베로 짠 짧은 옷을 입고 초나라에서 농사를 짓는다. 허행은 관리라 하더라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속이후식(種粟而後食)"(씨를 심은 후에 먹어야 한다), "현자는 백성들과 나란히 농사를 짓고 먹어야 하고, 남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다스려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농가는 간단하게 농사짓고 밥먹는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라는 난세에 상호정벌하고, 관리가 사치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황을 보고, 사회의 분업에 반대하고,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심으로 자신이 먹을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자급자족을 주장했다. 이는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종의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과격했다. 심지어 잘못도 있었다. 왜냐하면, '사농공상'의 사민의 존재는 모두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자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직접해야 한다고 하면, 천하의 일이 너무 번잡스러워진다. 자연히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그가 자신의 힘으로 직접 해야한다고 주장한 배후에는 실천사상이 있다. 유가의 진량(陳良), 진신(陳辛)은 허행을 만나서 얘기를 나눈 후, 유학은 공리공담이라는 것을 깨닫고 농가에 들어간다.
비록 명가와 농가는 모두 실학을 제창하고, 부국강병과 실용공리를 주장했지만, 어쨌든 실력이 너무 약했다. 그래서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중 명가는 사상이 극히 복잡하여 보급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웠다. 예를 블어, 백마비마(白馬非馬), 이견백(離堅白), 화불열(火不熱)같은 철학적인 명제는 후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단순화되어 이를 제기한 공손룡(公孫龍)은 바보로 조롱받게 된다. 그리고 농가는 모든 일을 직접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하여 지나치게 편면적이다. 비록 공리공담사상을 바로잡았지만, 다시 또 다른 극단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후대학자들은 한때 명가의 혜자와 농가의 허행을 묵가(墨家)로 분류하기도 했다. 이는 선진백가사상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하나의 사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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