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영천순씨(潁川荀氏): 동한에서 남북조까지...

중은우시 2023. 2. 17. 11:35

글: 소태양(小太陽)

 

TV드라마 <군사연맹>에서 왕징쏭(王勁松)이 연기한 순욱(荀彧)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지모가 뛰어나서, 조조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동시에 한황실에 충성하며 한나라의 이익을 보호했다. 순욱은 동한과 조위집단의 중요인물인데, 그의 뛰어난 개인적인 능력이외에 우리가 살펴보아야할 점은 그의 배후에 있는 가족세력, 즉 영천순씨(潁川荀氏)이다. 동한에서 시작하여 남조에 이르는 명문거족으로서 순씨가족의 역사는 많은 왕조들보다 길었다. 오늘은 영천순씨의 역사를 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순씨가족의 탄생

영천은 오늘날의 하남성(河南省)에 소재하고 있고, 낙양(洛陽)과 이웃하고 있는 중원의 복지(腹地)이고, 경제중심이 남방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은 교통요지였을 뿐아니라, 역대왕조의 정치와 문화의 중요중심지였다. 순씨가족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기나긴 영천순씨의 가족사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은 동한(東漢)떄의 순숙(荀淑)이다. 순숙은 어려서 품행이 단정하여 추천을 받아 경성으로 가서 관직에 오른다. 그러나 순숙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아유봉승(阿諛奉承)을 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금방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세월을 보낸다.

 

순숙은 품행이 좋아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 다시 한번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간다. 이번에는 순숙이 쉽게 물러나지 않고 관료로 있으면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을 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적지 않은 명사들과 교분을 맺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순씨집안이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견실한 인맥의 기초가 된다.

 

149년, 순숙이 사망한다. 그는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같이 인중용봉(人中龍鳳)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고 칭했다. 이 여덟명의 아들 중에서 둘째아들인 순곤(荀緄)은 세아들을 두는데 그중 한명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순욱(荀彧)이다. 순숙의 셋째아들인 순정(荀靖)과 여섯째아들인 순상(荀爽)도 매우 유명했다. 그러나, 순정은 평생 은거했고, 순상이 여덟명중에서도 능력이나 학문에서 가장 뛰어났다.

 

순상은 부친 순숙과 마찬가지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면서도 품행이 우수하여 추천을 통해 관직에 나아간다. 그러나 순상의 관료로서의 길은 부친 순숙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순상이 관직에 나아갔을 때, 동한조정은 "당고지화(黨固之禍)"에 직면해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정치풍파에 휘말렸으며, 순상도 거기에 휘말려들어간다. 그리하여 할 수없이 이름을 숨기고 은거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관직을 철저히 멀리하는 동시에, 학술상으로 큰 성취를 이루게 해준다. 당고지화가 끝난 후, 순상은 다시 관직으로 돌아간다. 직위는 빠르게 승진하여 중앙정부의 요직에 앉는다. 순상의 노력으로, 순씨가족의 영향력은 계속 확대되었다.

 

2. 순욱과 순씨가족

 

순욱은 순상의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순씨가족 제3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영향으로 영천순씨는 명성을 널리 떨치고, 사상유례없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163년, 순욱이 출생한다. 그의 부친 순곤은 순숙의 둘째이다. 즉 순상의 둘째형이다. 순곤은 비록 순상처럼 이름을 떨치지 못했지만, 관직이 제남상(濟南相)에 이르러, 지방에서는 영향력이 제법 있었다.

 

순욱이 태어나자, 부친과 여러 숙부의 세심한 보살핌과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성을 떨쳤고, 사람들로부터 "왕좌지재(王佐之才)"라는 평가를 받는다. 189년, 27살의 순욱은 과거효렴을 통하는 방식으로 관직에 나선다. 2년후, 순욱은 조조의 휘하로 간다. 조조는 순욱의 명성을 일찌감치 들었기 때문에 순욱을 보고 아주 기뻐한다. 그리고 순욱을 한고조 유방(劉邦)의 장량(張良)에 비유했다. 이렇게 순욱은 조위집단에 정식으로 가입한다.

 

196년, 조조가 황건적을 격패시킨다. 이때 동한의 천자인 한헌제 유협(劉協)은 동도(東都) 낙양에 있었다. 조씨집단내부에서 어떤 사람은 한헌제를 데려와야 한다고 얘기했고, 더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하에서 만일 한헌제를 낙양에서 허현(許縣)으로 모셔오는 것은 너무 나대는 행동이라고 반대했다. 조조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순욱이 의견을 내놓는다. 순욱은 옛날 진문공(晋文公)이 주양왕(周襄王)을 받아들이고나서 여러 제후들이 모두 진문공의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마찬가지로 만일 천자를 모셔올 수 있다면 명정언순(名正言順)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받아들여,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한헌제를 허현으로 모셔온다. 조조는 대장군에 봉해지고,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리다)'하게 된다. 그후 전쟁에서 명분과 합법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욱이 조조의 한헌제를 모셔오는 거동에 찬성한 것은 조조가 나중에 견실한 기초를 쌓게 해주었기 때문에 조위집단의 발전에 지워없앨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이다.

 

203년, 상서령(尙書令)을 맡고 있던 순욱은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진다. 212년, 순욱은 수춘(壽春)에서 병사한다. 나이 겨우 50살이었다. 비록 순욱이 장수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조씨집단에 대하여는 국궁진췌(鞠窮盡瘁)했다고 할 수 있다. 순욱외에도 순씨가족의 순유(荀攸)는 마찬가지로 조조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다. '이순(二荀)'의 영향하에, 순씨가족은 동한말기 여러 명문거족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고, 위진(魏晋)떄 중천에 뜬 해와같은 중원의 명문가족이 된다. 많은 순씨자제들이 조정에 들어가고, 순씨가족의 영향력은 계속 확대된다.

 

3, 순씨가족의 남천(南遷)과 최후

 

 265년, 조위집단에서 떨어져나온 사마가족(司馬家族)이 조위의 마지막 황제 조환(曹奐)을 끌어내리고, 사마염(司馬炎)이 황제로 등극하여 서진(西晋)을 건립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해, 서진의 역대황제들은 혼용(昏庸)했다. 그리하여 겨우 몇십년이 지난 317년, 서진은 멸망하고 만다. 서진의 황실은 황급히 남쪽으로 도망쳐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으로 간다. 사마예(司馬睿)는 건강에서 등극하며 연호를 태흥(太興)으로 고치고, 동진(東晋)왕조를 건립한다.  

 

남쪽으로 도망친 사마예는 기실 자신의 실력이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그가 여러 황살자제들 중에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러 명문집안들과 우호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그를 따라 남하한 낭야왕씨(琅邪王氏)와 같은 영천의 유씨(庾氏)가족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동진시대의 문벌정치는 중국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고, 심지어 "왕여마(王與馬), 공천하(共天下)"(왕씨집안과 사마씨집안이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호란화(五胡亂華)"의 시기에 많은 명문집안이 사라지게 되는데, 영천순씨도 비록 적시에 황실을 따라 남천했지만 그래고 적지 않은 순씨자제들이 동란중에 피살당한다. 남방에 도착한 순씨자제는 수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순씨가족이 그대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남천한 순씨가족은 대체로 두 갈래였다. 순수(荀邃), 순개(荀闓), 순혁(荀奕)등 순상의 일맥과 순규(荀馗), 순숭(荀崧)등 순욱의 일맥이다. 그중 순수는 20살에 관직에 나아갔고, 그는 세심하고 심모원려가 있어 왕조교체기에 여러번의 '명창암전(明槍暗箭)'을 피할 수 있었다. 동진이 막 건립되었을 때, 그는 왕씨가족의 왕도(王導)등과 함께 소준(蘇峻)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참가했다. 반란을 평정한 후, 순수는 사망하고, 금자광록대부에 추증된다. 순개는 당시에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순수와 함께 남하하여, 동진에서 관직이 상서(尙書)에 이르렀고, 사양공(射陽公)에 봉해진다. 순수와 순개 두 형제는 충성심과 공적으로 사마가족에게 존중을 받았다.

 

순수, 순개외에 동진시대의 순씨가족에는 여러 충성심이 강한 인물 예를 들어 순숭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순씨가족은 그들의 선조인 순상, 순욱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더 이상 배출하지 못했다. 만일 동진시대에는 순씨가족의 발전이 비교적 양호했다고 한다면, 동진왕조가 멸망한 후, 남조시기에는 몰락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양(梁)나라에 이르러, 순씨가족의 여러 자제들은 정치풍파에 휩쓸려 피살된다. 그 이후 순씨가족은 점점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