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청련(何淸漣)
최근, 국내 웨이신에 류야저우(劉亞洲)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는 2021년 12월 유야저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에 뒤이은 것이다. 구경꾼의 입장에서 필자는 당연히 장후(江胡, 장쩌민, 후진타오)시기를 홍얼다이(紅二代)들은 집사모델(管家模式)이라고 여겼고, 후진타오의 두번째 임기에 이르러, 홍얼다이들은 슬슬 몸을 풀면서 집사모델에서 이제는 후계자모델로 바뀌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시진핑은 당연히 홍색후계자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후진타오시대에 거의 조야에서 모두 찬양받던 느슨한 시기를 맞아, 특히 류야저우는 후원(胡溫, 후진타오, 원자바오)시대 10년중 거의 중공당내 미래의 정치스타로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보면,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후 두 시기는 집사대리모델이었다.
장후 두 시기는 홍얼다이집단에서 특히 홍얼다이중 상층 노태자당이 보기에 '집사가 대신 관리하는 모델'이었다. 홍색강산은 언젠가 홍색후계자의 손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모택동의 "홍색후계자"라는 관념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제창했던, "우리는 공산주의 후계장, 혁명선열의 유지를 계승하자"라고 할 때, 자신도 후계자의 일원이라고 여겼다; 1964년에 이르러 계급투쟁이 메인스트림이 되고, 문혁을 거치면서, 비로소 명백해졌다. 원래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모택동의 신분정치하에, 우리같은 착취계급가장출신자들이 계승하는 것은 흑색혈맥이다. 그저 "홍오류(紅五類)"야말로 승계자격이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후,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더욱 깊어진다: 홍색후계자는 원래 홍색권력귀족가정 출신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장쩌민시대에 "태자당(太子黨)"과 "홍얼다이(紅二代)"들이 권력마라톤에 뛰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기관, 국유기업에서 기껏해야 처장,과장급이었고, 지방에서 단련중인 류위안(劉源, 유소기의 아들)이 가장 빠른 승진을 보여, 부성장급에 이르고, 보시라이와 시진핑은 정시장급(正市級)이었다. 권력의 최고정점과는 아직 여러 개의 올라야할 계단이 있었다. 후진타오시기에 이르러, 인사는 완전히 쇄신된다. 홍얼다이들에 대하여, 후진타오는 각종 혜택을 베풀어, 신노태자당은 팔선과해(八仙過海)로 각현신통(各顯神通)하여, 체제내에서도 승진했다. 지방이건 중앙이건 적지 않은 관리들이 장관, 성장급에 이르렀고, 군내에 소장계급을 다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국유기업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장이 된다. 이 세 개의 부문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정협에 충분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2003년 중국정협10기1차회의에 참가한 위원중에서 50여명이 명문가의 후손이다. 그중에는 중공원로의 자녀도 있고, 저명한 민주인사의 후대도 있다. 더더구나 많은 사람들은 군대장군의 아들, 예술가의 후손이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장쩌민시대에 이미 전국정협이라는 "엘리트클럽"에 들어가 있었다.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모택동의 딸 리민(李敏)과 11차노선투쟁에서 패배한 중공원로자제등이 새로이 정협위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세마디중 한번은 "나의 할아버지"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 마오신위(毛新宇, 모택동의 손자)는 2008년 후진타오가 승인하여 제11기 전국정협위원이 되고, 2010년에는 소장계급을 받는다. 리펑(李鵬)의 딸 리샤오린(李小琳)는 국유기업중 중요한 중국전력국제발전유한공사 동사장, 중국전력신에너지발전유한공사 동사장을 맡은 외에 제11기, 제12기 전국정협위원, 전국부련(全國婦聯) 집행위원을 맡았다.
후진타오의 통치의 느슨함은 공전절후(空前絶後)였다.
후진타오의 느슨함은 지금까지 중국역사상 공전절후라고 할 수 있다. 류야저우라는 아주 특수한 존재가 그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류야저우가 군대내에서 빠르게 승진한 것은 제외하고, "짧은 10년간 작가에서 장군으로의 관료의 길을 완성했고, 더더구나 눈에 띄는 것은 류야저우가 군대내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정치개혁을 얘기하고, 서방정치를 숭상하고, 또한 이로 인하여 탄압받지 않은 현혁고위관료라는 것이다. 류야저우가 청두(成都)군구에서 공군 부정위(副政委)를 맡고 있을 때, 당시 공군은 군사학술을 연구하는 인사가 특별히 류야저우가 여러 해동안 내부강연한 녹음을 정리하여 원고로 만들어 3권 1세트의 <류야저우전략문집(劉亞洲戰略文集)>을 편찬한다. 매권마다 많으면 3,4편, 적으면 1,2편이 실렸다. 중공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중공역사상 소장의 '전략문집'이 이처럼 군내에서 발행될 수 있는 것인지. 더욱 기이한 일은, 당시 중국의 반체제인사들 중에서 류야저우를 중국정치개혁에서 내일의 스타로 여겼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류야저우를 신격화하는데 힘썼고, 류야저우를 위하여 적지 않은 글을 대필해주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이미 사망한 천쯔밍(陳子明)이다. 그는 필명 왕쓰뤼(王思睿)로 발표한 만자의 장문 <민주의 기치하에 단결하자 - 류야저우강연을 읽은 감상>을 써서 류야저우를 숭배했다. 그리고 일찌기 그가 주재하던 건설과개조사이트에 필자의 <중국개혁의 득과 실>을 류야저우의 명의로 발표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 글을 그와 같은 기에 발표한 <당대중국연구>계간 2002년 제1기에 발표했다. 그는 이 글의 작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글을 쓴 바도 있고 VOA에 발표했었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유야저우는 나서서 정정해주지 않았다. 2012년, 홍콩원후이(文匯)출판사에서 <류야저우국가사고록>을 출판한다. 편저자인 왕이(王易)는 이미 승진한 공군상장 류야저우가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했으며, 일부 내용은 중국이 진정 굴기하는지 여부는 정치개혁이라는 전투에 달려있고, 정치개혁의 핵심은 민주화, 특히 중공내부의 민주화라고 주장했다고 하였다. 그때는 시진핑이 막 중공총서기를 승계받은 때였고, 류야저우는 홍콩명보(明報)를 통해 성명을 발표하여, 이 책의 편자는 유야저우 본인의 수권을 받지 않았고, 많은 글은 그의 이름을 빌린 위착이며, 류야저우는 책임을 추궁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상(官商)에 있어서, 가국일체(家國一體)의 이익수송매커니즘은 장쩌민시기에 싹을 틔웠고, 후진타오시기에 성숙되었다. 후진타오시기의 "구룡희주(九龍戱珠)"국면을 형성하여, 각 상위는 모두 자신의 이익체인과 '얼굴마담(白手套)"이 있다. 샤오젠화(肖建華)라는 금융큰손은 여러 상위가 공동으로 쓰던 수퍼'얼굴마담'이었고, 중기위, 증감회, 보감회, 은감회등 기구는 모조리 귀머거리가 되어버린다. 감독기구와 피감독관련기구의 관리들이 묘서일가친(猫鼠一家親)이 되었다. 여러 이익수송채널은 적지 않은 수혜자를 길러냈고, 이들은 나중에 모두 후진타오시대를 그리워하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된다.
홍얼다이들은 그 시기에는 감히 범상(犯上)할 수도 있었다. 보시라이는 고위층의 인사배치에 불복하여, 일군의 홍얼다이들의 지지를 받아, "창홍타흑(唱紅打黑)"을 진행하고, "충칭모델(重慶模式)"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총서기(자신의 말로는 단지 상위를 원했다고 하지만)의 자리를 노렸다. 경력은 많지만, 부모의 지위가 높지 않았던 장무셩(張木生)까지고 감히 후진타오가 무능하여, 적지 않은 사회갈등을 조성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바 있다.
시진핑은 홍얼다이 신분이지만, 홍얼다이가 집단으로 승계하지 못했다.
장후 두 시기의 집사모델은 마침내 2012년 16대에 종결된다. 시진핑이 승계한다. 비록 그는 홍얼다이신분이지만, 그의 부친 시중쉰이 모택동에게 정치적 박해를 받아, 문혁전에는 세력이 없어 항상 사람들에게 정종(正宗)의 자격이 없다는 조롱을 받아왔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홍얼다이'라는 모자를 벗겨버릴 수는 없었다.
시진핑이 중공의 장문인(掌門人)이 된 후, 2013년 10월 15일 인민대회당에서 그의 부친 시중쉰의 백년명수(冥壽)기념회를 개최한다. 중공 홍색가족의 모든 파벌은 대표를 참석시킨다. 외부와 홍얼다이들은 모두 이를 홍얼다이를 초청하여 "함여신정(咸與新政),, 공장조강(共掌朝綱)"(함께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 함께 정권을 장악하자)의 뜻으로 생각했고, 이후에는 중국이 홍색가족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홍얼다이들은 집단적으로 실망하게 만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권력이 비록 홍얼다이인 시진핑의 수중으로 회수되었지만, 홍얼다이라는 이 집단은 충분히 권력을 나눠서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전인대, 정협의 자리도 점차 축소되었다.
홍얼다이가 집단적으로 승계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하여 필자는 계속하여 의문을 품어왔다. 의문을 품은 근거는 다른 것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의 최대 특징은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독재권력은 한명 혹은 몇명의 수중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눈을 돌려 세계를 보든 고금을 보든 예외가 없다. 당정군 국유기업과 각계의 홍얼다이들의 나이를 고려하고, 다시 시진핑의 권력집중필요를 고려하여, 필자는 일찌기 글을 써서 시진핑이 약간의 인내심만 있으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2015년의 마지막 날, 중국국방부는 전총후정위 류위안 상장이 은퇴한다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그가 향후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들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그후 시진핑의 군대개혁후 1급지휘관이 속속 취임한다. 이미 공표된 명단에서 군대내의 27명의 현직 '홍얼다이'장군중 오직 친텐(秦天, 秦基偉의 아들)이 무경부대 참모장의 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정보는 '홍얼다이'들이 중국정계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밀려나는 과정은 바로 시진핑이 자연규율에 의지하여(연령상한) 정치적인 배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에 '홍얼다이'들은 정계, 국유기업, 군대를 종횡하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 시기는 이제 끝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진핑은 분홍색자본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2015년 등소평집안의 손녀사위 우샤오후이(吳小暉)의 안방(安邦)이 분홍상권을 타격하는 첫번째 대상이 된다. 비록 천샤오루(陳小魯, 陳毅원수의 아들)는 재신 기자에게 자신은 '안방의 실제지배인이 아니다', '나는 샤오휘와 15년가까이 합작했지만 고문이다. 자문해주고, 편들어주기는 했지만, 지분도 없고, 급여도 없다. 회사의 구체적인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그저 전략자문만 해준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도 몇달간 격리조사를 받는다. 그가 다시 신체자유를 회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난(海南)에서 휴양하던 중에 급사한다. 자칭 "능력외의 자본은 제로"라고 말했던 홍색공주 리샤오린은 과거에 매번 화복(華服)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전국정협회의에 참석해ㅏ여, 네티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는데, 시진핑이 취임한 후에는 조용하게 지냈다.
홍얼다이가 보기에, 권력을 집사에게 맡기던 시대는 확실히 끝났다. 그러나 홍얼다이가 함께 다스리는 아름다운 시대는 오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홍색형제'인 시진핑이 장문인에 오른 후, 그들의 자유, 그들의 생활은 집사가 다스리던 때보다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경험이 그러하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보지 않았을 뿐.
그러나, 집사대리통치모델에서, 황실의 자손들은 자신들 중 누군가가 황상이 되었을 때보다 더 살기 좋다. 이건 역사경험이다. 중국인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청사(淸史)를 예로 들면, 강희제가 건재할 때 구왕탈적(九王奪嫡)이 벌어진다. 군기처대신들은 모든 왕야에게 밉보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후계자후보이고, 누가 황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왕야들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나중에 넷째가 황상에 오르자, 형제들은 혹은 황상에 의해 '아치나(阿其那)', '사이스헤이(塞思黑)'로 이름붙이고, 감금하여 죽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유배보내어 변방의 군영으로 보냈으며, 장교들은 이들 낙백(落魄)한 왕야들에게 더 이상 잘 대해주지 않아서, 그들은 그저 예전 시사에서 본 적이 있는 변새풍광(邊塞風光)을 겪어야 했다.
헤겔이 남긴 명언이 있다. 인류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바로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건재한 홍얼다이들은 장후시대의 휘황한 세월을 그리워하는데, 그건 중국인들이 북양시대를 되돌아보는 것같을 것이다. 정치는 느슨하고, 언론자유는 폭이 크고, 경제는 발전하고, 민족자본이 크게 발전한다. 다시 고개를 숙여 현실을 보면, 돌연 거리가 느껴진다. 군벌이 할거하고, 관문이 여기저기 설립되고,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던 북양정부시대게 황금시대로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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