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동림당(東林黨)은 대명왕조를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중은우시 2023. 3. 21. 15:54

글: 요풍휘(姚豊輝)

 

명나라말기에는 유학자들로 구성된 동림당인들이 중용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유학자들의 글을 보면 이들 동림당인들은 '정인군자(正人君子)'였다. 그러나, 그들의 '당수'는 명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역사상의 '망국지신(亡國之臣)'임이 확실하다. 동림당의 핵심구성원들은 강남사대부를 위주로 하는 관료집단이다. 숭정제는 즉위후 동림당인들에 의지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들이 관직을 일단 차지하자, 말만 번지르르한 고상한 뜻을 펼치고자 했다. 고대 성인들의 이상적인 통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자 이들은 득의양양하게 즉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것을 고쳐야 한다 저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변법혁신을 주장한다. 소위 "혁제조야적폐(革除朝野積弊), 반대탐종왕법(反對貪縱枉法)"(조야의 적폐를 없애고,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의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원래 숭정제가 즉위하기 전에 전임황제로 그의 형인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는 위충현(魏忠賢) 일당을 기용하여 태감치국(太監治國)했다. 동림당이 보기에 태감은 바로 소인난정(小人亂政)의 엄당(閹黨)이고, 자신들의 사적(死敵)이다. 그리하여 이런 소인들과는 절대로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동림당과 엄당의 두 무리는 각자 서로 다른 이익을 대표하고, 이들은 서로 끝도없이 싸웠으며, 물과 불처럼 서로를 배척했다. 

 

동림당인이 정권을 잡자 먼저 숭정제에게 이전의 대태감 위충현이 관장했던 동창(東廠), 서창(西廠)의 특무기구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고, 또한 각지방에 배치되어 있는 유사한 감시기구도 없앨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각 성의 하도감관(河道監管)같은 자리들이 포함된다. 아마도 이전에 이들 특무기관들이 동림당인들을 박해한 경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뱀에게 한번 물리면 10년간 밧줄도 겁낸다는 것처럼. 게다가 위충현이 기른 자들은 남들을 훔쳐보는 버릇이 있다. 공무를 수행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들까지도 마찬가지여서, 동림당인들은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 적이 찬성하면 나는 반대한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림당인으로 구성된 내각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전과 다릅니다. 우리는 성인의 학문을 배운 정인군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감시가 필요없습니다. 특무로 감시하는 것은 우리같은 군자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감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멸사공봉의 정신으로 백성들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그런 기관들을 없애주십시오.

 

숭정제도 기꺼이 동의한다: 좋다. 여러분들의 충성심은 해와 달에 비유할 수 있다.

 

동림당인들도 이에 호응한다: 황상성명(皇上聖明)! 황상은 요순같은 임금이십니다.

 

동림당인들은 청평세계(淸平世界)를 건립하여 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전의 가정제(嘉靖帝), 천계제같이 위충현같은 태감을 좋아해서는 안되며, 태감은 가장 큰 '소인이자 나쁜 자들'이다. 특히 위충현은 그중 가장 나쁜 자이다. 이전에 매년 위충현이 태감을 파견하여 하도(河道)를 수리하고 축조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지 않는다. 적이 옹호한 것이라면 나는 반대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림당인들은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위충현이 만든 악법 하나를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매년 국고의 돈을 태감들이 가지고 갔는데, 이들은 홍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국고의 돈을 가져가서 사사로이 챙긴 것입니다. 이건 무저동(無底洞)이니 반드시 폐지해야 합니다.

 

숭정제는 응락한다: 좋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숭정제가 재위한  전체 17년동안 한번도 하도(河道)를 수리한 적이 없고, 치수사업을 한 적이 없다. 황하이건 장강이건, 산동이건 절강이건, 이 17년동안 어떤 강물이 범람을 하더라도 매번 동림당인들은 '절약'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돈을 쓰기 시작하면 무저동이라고 주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림당인들은 공상업무역을 일체 금지하는 계획을 내놓는다. 목적은 고대성현의 말씀대로 대명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과거 성인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중농억상(重農抑商). 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은 억눌렀습니다. 농업이 본(本)이고 공상을 말(末)입니다. 우리 대명왕조는 가경제이래 홍무제의 고제(古制)를 버리고, 국경을 열고, 금지하던 사업을 크게 풀어주어서, 공상업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본을 버리고 말을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이익을 쫓는 소인들이 늘어나서 나라의 근본을 교란시키게 될 것입니다. 광산을 예로 들면, 추워도 옷을 입지 못하고, 배고파도 먹지 못하면서 항상 수십만의 농사를 짓지 않는 자들이 황량한 산골짜기에 모여 있습니다. 이는 조정에 해가 되고 농업을 망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백성들을 먹고 살게 하는데 이는 상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위충현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자잘한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소인들과 결탁하여 기풍을 어지럽혔습니다. 그 위해가 아주 크고, 체통이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점진적으로 차, 광업, 해상무역, 변경무역을 억제하여, 철저히 광산채굴금지, 국경무역금지로 나가야 합니다.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국경무역을 금지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들을 단속하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숭정제가 말한다: 그렇게 하라.

 

동림당인들은 바닥에 엎드려 소리친다: 황상성명, 황상만제, 만세, 만만세!

 

숭정제의 동의를 받은 후, 동림당인들은 공상업무역을 타격할 준비를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점차 차세를 감면하고, 만력제가 각성의 다원(茶園)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기구를 없애고, 각 포정사를 감독하기 위해 보낸 태감을 폐지한다. 당연히 이후 각 성의 차세수입은 격감한다. 

 

이어서 그들은 해상무역을 금지한다. 명나라의 경제발전과 해상대외무역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상무역은 명나라경제에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해상무역금지(海禁)'를 제안하여 해상무역을 단속하고, 선박을 몰수하도록 건의한다. 일률적으로 만력제가 국경에 파견한 세수기구를 취소하고, 해관에 파견했던 관리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당연히 이 해금령으로 세금이 점차 줄어든다. 먼저 정지룡(鄭芝龍, 정성공의 부친)이 독점경영하게 하며 척당 1천냥을 거둔다. 그후 철저히 해금이 된 후에는 정지룡까지 죽여버린다. 그후 세금은 한푼도 거두지 못하게 된다.

 

만력제때 해상무역이 흥성한 이래로 위충현시기를 포함하여 해상무역관세는 대명의 재정에서 큰 몫을 차지했다. 조정의 국고를 채우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만력40년에 이르러, 만력제는 매년 400만냥백은을 해상무역세금으로 거두었다. 숭정원년 해금을 한 후, 국고는 일찌기 번성했던 해상무역에서 한푼의 세금도 거두지 못하게 된다.

 

기실 해금을 실시함과 동시에 동림당의 내각은 비단상인, 과일상인, 포목상인들에 대하여도 압박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소인이다"라는 생각으로 상인들은 나라의 근본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공상업활동을 일률적으로 금지한다. 각종세금을 일률적으로 폐지한다. 그리고 숭정제는 그에 대하여 모두 동의한다.

 

포목업을 예로 들어보면, 당초 만력제가 친정한 후, 그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백성들의 의복제한을 풀어주었다. 금방 대명제국내에는 일반백성들과 관리들이 서로 옷을 누가 잘입는지 다투는 국면이 발생한다. 당시의 동림당인들의 선배들은 이에 대하여 만력제에게 항의한 바 있다. 만력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관리가 관리가 아니게 되고, 백성은 백성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분체계가 교란되니, 자신들이 일반백성들과 같은 수준이 되니 이는 문인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었다. 숭정제때의 동림당내각은 그런 포목상의 행위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동림당내각의 요구에 따라 숭정제는 각종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무역업종을 폐지하고, 국경무역, 해상무역, 광산을 금지했다. 상응한 상업무역도 하나하나 단속되니 이들 세수는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

 

새로 즉위한 숭정제는 매일 문필을 자랑하는 동림당인들의 칭송하는 말을 들으면서 지냈다. 당금천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업적이 뛰어나며, 대명을 태평성대로 부흥시킬 영명한 군주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전국의 상황이 아주 좋다고 보고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어떠했을까? 조야의 동림당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고 있지만, 수리사업을 하지 않아 전국각지에서 홍수가 아니면 가뭄이 나고, 백성들은 기근으로 고통받아 원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북방의 만주족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중원으로 쳐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가세수의 중요자금원은 상업무역이었다. 그런데 상업무역을 모조리 금지하자, 재정수입이 거의 고갈난다. 국고에 들어올 돈이 없게 되니, 동림당인들은 농사에 대한 세금을 가중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말기에 농민에 부과하는 세금이 과중하여 농민들이 파산하고, 사회혼란에 빠지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만력제때 농업세를 거두기는 했지만, 농민들은 개략 수입의 30분의 1을 내면 되었다. 그렇지만, 만력제는 만주족과 싸우는데 드는 전비인 요향(遼餉)을 오백만이나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만력, 천계제때 위충현이 정권을 담당했을 때는 어느 한 성에 천재지변이 발생하더라도 조정은 즉시 해당지역의 세금을 감면하고, 심각한 때는 조정에서 돈을 내어 구호를 했다. 그런데, 숭정제때는 국고가 텅 비어, 구호를 할 돈이 없을 뿐아니라, 천재지변을 겪은 지역의 세금을 감면해줄 수도 없었다. 각성에 일률적으로 나누어 부과한 농업세금은 그후 각 백성들에게 나뉘어 부담시켰다. 동시에 숭정제와 동림당내각은 신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각 성의 적폐를 철저히 조사했고, 이전 왕조때 미납되었던 농업관련세금까지도 모조리 거두어 갔다. 백성들의 원성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위충현은 공상업무역을 허용하여, 변경무역을 허용한 지방에서는 스스로 군비를 마련하였다. 특히 섬서(陝西)의 각 군대의 군량, 무기, 피복은 현지에서 조달했다. 그런데 숭정제에 이르러 동림당이 변방무역을 금지한 후, 자체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혀 버린다. 그리하여 동림당인은 이 비용을 변방의 농민들에게 분담시킨다. 무(畝)당 2냥을 거둔다. 나이어리고 경험이 없는 숭정제는 이것도 허용한다.

 

이전에 위충현이 변방무역을 허용했을 때는 변방의 백성들과 군인들은 섬서의 목장에서 말을 길렀고, 조정은 초장(草場)을 마련해서 말을 기를 수 있게 했다. 이런 방법은 군사용으로 쓸 수도 있고, 외국과의 생활용품교환에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숭정제와 동림당내각에 이르러 이 지역에는 말 한마리도 기를 수 없게 된다. 초장도 따로 마련해주지 않고, 개간하여 농지로 바꾸어버렸다.

 

이전에 위충현은 가난한 농민들에게서는 돈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창에게 명하여 각지의 광업공상업자들을 엄밀히 조사했으며, 특히 이들과 결탁한 조정의 고관들도 조사했다. 그후에 광산세, 공상세를 거두어 국고에 넣었다. 광업분야 하나만으로도 대명의 군비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명나라떄 매년 57만필의 군마와 100만건의 군사장비를 마련하는 비용은 주로 광산세수입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숭정제와 동림당내각이 위충현을 무너뜨리기 위해 광산금지를 시작한후 광산세가 없어진 것은 당연했다. 이제 황제는 말을 기르지도 못하게 명령을 내렸다. 중농억상이니까. 양마장도 농지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니, 말을 기를 곳이 없어진다. 광업도 없어지니 세금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다시 황제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섬서에서 무당 5전의 돈을 거두어 말을 구입하도록 하자. 숭정제는 또 응락한다.

 

이전의 조정은 세금은 많이 거두고, 지출은 절약하기 위하여, 만력제때 황실종친들 중에서 명호가 없는 자들에게는 봉양전을 지급하지 않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관계가 멀어진 황실종친들에게는 명호나 작위를 수여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정의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동림당인들은 다시 세금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들 일부 종친들의 비용을 충당하자고 건의한다. 숭정제는 그 건의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대량의 종실인원, 주씨자손들이 조정의 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하여 각지의 농민들은 다시 세금을 더 내야 했다. 골수를 빼먹는 것이다. 결국 농민들은 속속 파산한 후 도망쳐서 세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동림당이 계획한 정책이 하나하나 실시하자, 결국 명나라조정은 수입이 줄어들어 비용을 충당할 수 없게 되고, 국고는 텅 비어 버린다.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기관이 제대로 운용되지 못한다. 그들의 이러한 재정방식은 그저 망하려고 작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대명왕조는 관리들에게도 돈을 지급하지 못하고, 군인에게도 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군대가 속속 반기를 들고,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게 하여 대명왕조는 파멸의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