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범금민(范金民)
2002년 3월, 영국의 퇴역장교인 개빈 맨지스(Gavin Menzies)는 1421년 정화함대가 미주대륙을 발견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견해가 나오자 석파천경(石破天驚, 천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읍에 사람들이 놀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깜짝 놀라다라는 의미임)처럼 세계를 뒤흔들었다. 학계에서는 정화함대가 가장 멀리 어디까지 갔을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연구붐이 일어난다. 그해 10월, 맨지스는 미국에서 그의 저작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1421, The Year China Discovered the World)>를 출판한다. 2003년 11월, 타이페이의 위안류(遠流)출판사업주식유한공사가 바오자칭(鮑家慶)이 번역한 중문본을 출판한다. 중문본의 겉표지에는 이런 광고문구가 붙어 있었다: "폭발적인 내용, 기존의 인식을 뒤집다. 역사를 고쳐쓸 수 있는 놀아운 작품 과거의 역사교과서는 모두 버려야할지도. 과거에 배운 것들은 잊어야할지도. 왜냐하면 이 책은 모든 것을 고쳐썼기 대문이다." "1421년 - 명성조19년, 중국인이 미주대륙을 발견하다. 컬럼버스보다 70년이나 앞섰다. 중국인이 호주대륙을 발견하다. 쿠크선장보다 350년이 앞섰다. 중국인이 마젤란해협을 발견했다. 마젤란보다 60년이 앞선다. 중국인은 경도계산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유럽보다 3세기가 앞선다."
멘지스의 놀라운 작품과 그 결론에 대하여 번역자인 바오자칭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최종결론을 볼 수는 없다. 많은 부분에서 신념으로 부족한 증거를 메워야 한다. 단지 논거의 질이 천차만별이므로, 그의 논점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뿐아니라, 그의 역사관을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화의 제6차 항해는 이미 고증하기가 아주 어렵다. 10여년의 노력을 거쳐도 완전히 커버할 수 없다. 이 점으로 인하여, 유한한 증거는 비판자들의 비판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고, 또한 곳곳에서 헛점이 드러난다...기실, 정화항해에 관한 중문자료는 모두 소실된 것이 아니다. 자료가 멸실된 책임을 유대하(劉大夏)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은 너무 간단화한 이론이다....명청자료는 중국역사의 비밀을 품고 있을 뿐아니라, 어떤 곳은 상업적가치도 있다.....누군가 자료를 고찰한 후, 다시 정화가 어느 곳까지 갔는지 얘기하는 것이 아마 비교적 적합할 것이다."
정화의 제6차항해의 구체적인 상황은 확실히 바오자칭이 얘기한대로 "이미 고증하기 아주 어렵다." 필자의 유한한 지식으로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 중국에서는 말라카해협 서쪽을 서양이라고 칭했다)의 자료는 이미 고찰할 수 없게 되었다. 정화함대의 제6차 원항에 대하여는 우리가 맨지스처럼 세계각지에서 침몰된 선박을 인양하는 것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맨지스처럼 아직 정화함대의 선박인지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정화함대가 분명히 어디, 어디를 갔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한번 중문문헌을 정리해서, 중국인 자신은 어떻게 정화의 제6차항해활동을 기록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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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정화함대 제6차항해에서 미주등을 발견했고 이렇게 세계를 발견했다고 단정한 맨지스가 어떤헤 그의 놀라운 결론을 논증하고 서술하였는지 보도록 하자.
책에서 맨지스는 1421년 홍보(洪保)의 항해노선, 주만(周滿)의 항해노선, 주문(周聞)의 항해노선과 양경(楊慶)의 항해노선을 열거했다. 맨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정화의 제6차 하서양때 말라카에서 물자를 보충한 후, 북상하여 5일간 항해했다. 인도양입구의 수마트르의 외해(外海)에 도착한다. "정화는 그곳에서 선박을 네 개의 함대로 나누어, 각각의 함대에 화포를 갖춘 병사들로 하여금 방어하게 했다. 그중 3개의 함대는 부사태감(副使太監) 홍보, 주만과 주문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했다. 네번째 함대는 가장 규모가 작은 함대인데, 정화가 직접 지휘했다."(제90페이지). "이번 제6차항해에서 홍보, 주만, 주문과 양경은 해상에서 2년반을 항해했다.(제97페이지). "정화의 함대가 삼천여개국가를 방문하였을까? 그랬다면, 세계의 탐험사는 다시 쓰여져아 한다(제99페이지). "천비궁(天妃宮)의 비문에서, 나는 제6차항해에 그들은 개략 6만킬로미터를 갔고, 그것은 거의 지구를 두바퀴도는 거리라는 것을 알았다."(제108페이지). "제6차항해에서 17종의 인도와 아프리카언어의 통역인을 데려갔다."(제122페이지). "나는 현재 일련의 보선함대가 당고(塘沽)에서 출발하여 영락19년 팔월(서력1421년 9월)에 녹각군도(綠角群島)에 도착했다는 증거가 있다."(제126페이지). "나는 중국함대가 해류를 따라 서로 다른 길로 갔다고 단정한다. 주문은 서북방향으로 항해하고, 카리브해를 거쳐 북미주로 갔다. 홍보와 주만은 적도해류의 서남갈래를 따라 미주에 도착했다. 우 함대가 서로 다른 길을 떠날 때 분명히 서로 헤어지는 정이 충만했을 것이다."(제130페이지). "나는 이미 홍보와 주만이 마지막에 되돌아온 날짜, 그리고 두 함대가 데려운 사신의 숫자를 알고 있다."(제154-155페이지). "주만의 함대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태평양을 그렸다. 향료군도를 거쳐 되돌아온다. 홍보의 함대는 남으로 가서 남극주에 도달하고, 계속하여 남십자성좌를 측량한다. 그후 남반구의 해양에서 동쪽으로 가서 말라카와 코지코드(古里, 인도의 항구도시)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제155페이지)
홍보의 항해에 대하여, 맨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홍보에게 내린 임무는 고정된 참고지점인 포클란드군도 동쪽의 세계를 측량하고 그리는 것이었다."(제161페이지). 피리 레이스의 지도와 약자(若玆)해도를 가지고, 맨지스는 구체적인 홍보의 항해노선을 그렸다: 홍보함대는 아프리카동안을 따라, 희망봉을 돌아, 남대서양으로 들어선다. 아프리카서안을 따라, 녹도군도에 도착하고, 다시 남미주를 따라 남하하며 마젤란해협을 지나 남으로 항해하여 남극에 도착한 후, 호주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젤란해협을 지난 후, "홍보가 이끄는 함대는 남으로 갔다. '화지도(火地島)' 서쪽의 방향으로 항해했다.". "함대는 영락19년 십이월(서력기원 1422년 1월)에 남극에 도착한다.(제172페이지). "나는 홍보가 호주에 갔었다고 완전히 믿는다."(제179페이지). "나는 홍보가 보내어 남안을 측량하고 그리게 한 범선이 오늘날 호주 동남부 빅토리아주 Warrnambool의 바다에 침몰했다고 생각한다. 166년전에 이곳에서 침몰선박이 한척 발견된다. 아마도 홍보의 선박일 것이다."(제181-182페이지). 홍보는 "필리필서쪽을 지나 마침내 영락21년 구월 십팔일(서력기원1423년 십월 이십이일) 중국으로 돌아온다."(제184페이지)
주만의 항해에 대하여 맨지스는 이렇게 적었다. "주만에게 주어진 임무는 남미주서쪽의 세계를 측량하는 것이었다. 동쪽으로 항해한 홍보와 마찬가지로 주만은 노인성(老人星)의 아래에서 대양을 건넜다. 남위52도 40분의 '고정' 참고점이 필요했을 것이다.(제191페이지). 멘지스가 설계한 주만의 항해노선은 다음과 같다; 거의 홍보의 함대와 같은 항해노선을 거쳐 마젤란해협을 지난 후, 남미주해안을 따라 에콰도르에 도착하고, 다시 태평양을 가로질러, 오늘날 미국서해안의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일대에 도달하며, 호주 동부와 북부에서 향료군도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다. 맨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페루를 지난 후, 주만의 함대는 먼저 적도해류의 가장 북쪽인 에콰도르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해류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함대를 이끌고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태평양중앙의 사모아군도에 이른 후, "아주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주만의 함대는 여기에서 둘로 나뉜다. 북방지대는 캐롤라인군도의 키리바시에 천문대를 만들고 뉴기니에도 5개를 만들었다."(제194페이지). "그들은 회항하는 길에 최소 2척의 보선을 잃는다"(제203페이지). "그들이 영락19년 중국을 떠날 때 107척이던 보선은 영락21년 회항할 때는 몇척 남지 않는다."(제209페이지). 주만의 함대는 "영락21년 구월(서력기원1423년 10월) 돌아오는데, 그때 원래 9천여명이 10분의 1밖에 남지 않았다."(제223페이지). 태평양에서 필리핀을 거쳐 향료군도까지의 노선에 대하여 "나는 마젤란의 해도상에 그린 것이 바로 주만의 항해노선이라고 논정한다."(제228페이지). 필리핀의 옥수수는 원산지가 미주이다. "소소의 잔존한 중국문헌에도 정화와 함대가 옥수수를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범선은 자기, 비단 및 중국돈을 주고, 호초(胡椒)를 가져오는 외에 옥수수도 남미주에서 필리핀으로 가져왔다(제231페이지). "나는 현재 주만이 영락21년 구월 초나흘(서력1423년 10월 8일) 남경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명의 외국사절도 데려오지 않았다."(제235페이지). 오늘날 미국 오레곤주의 Neahkahnie 해변에는 몇척의 연대가 오래된 선박잔해를 발견할 수 있다. 그중 한곳의 유적에서는 유목(柚木) 부품이 발견되는데, 위는 호동(胡桐)이다. "이런 나무는 동남아 특산이고, 그 목재는 아직 탄소14로 연도측정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만일 이 목재가 15세기초엽의 것으로 확인된다면 그것은 주만의 범선이 Neahkahnie해변에서 좌초되었다는 유력한 방증이 될 것이다(제238페이지). "Waldseemüller지도에는 정확한 위도에 상세하게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가 그려져 있다. 나는 주만이 분명 남하하여 이 해안을 항해한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제239-240페이지). "나는 보선함대가 남북미주의 태평양연안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다만 나의 연구는 중국범선잔해라는 확실한 증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제249페이지)
주문의 항해에 대하여 맨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영락19년 구월(서력1421년 10월), 홍보와 주만의 함대가 서남으로 카리브해의 입구에서 남미주해안으로 항해할 때, 남겨진 주문의 함대는 서북으로 적도해류의 북측지류를 따라 전진했다."(제281페이지). 그는 프라 마우로지도, 비치가노해도, 간디노지도와 빈랜드지도에 따라 주문함대의 구체적인 항해노선을 짰다. 그린랜드군도에 도착한 후, 서북으로 대서양을 건너, 중미주를 따라 동해안에서 동북으로 항해한다. 주문의 수하에 어떤 사람은 북미주에 정착한다. 그린랜드를 지나 북극을 탐험하고 베링해협을 건너 서쪽으로 항해하고, 오늘날 일본열도의 동부를 따라 남으로 항해하여 중국에 도착한다. 맨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합리적인 추측으로 그들이 도미니크해협을 통과할 때 암흑이고 달빛이 없는 저녁이었다고 생각한다."(제289페이지) "나의 결론은 4척의 범선이 비미니섬의 외해 멀지 않은 곳에 침몰했고, 5척은 동북비미니섬에 버려졌으며, 나머지는 수리한 후 다시 항해했다는 것이다."(제321페이지). "선박훼손이라는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문은 더 큰 골치거리를 만난다. 그의 선박이 어느 정도 수리도고, 백미를 구해왔는데, 그들은 비미니섬에 좌초된 선박의 선원과 비녀(婢女)들에게 식량을 남겨주어야 했다. 그는 최소한 수천의 선원과 수백의 비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했고, 함대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 비녀들은 아랍, 아프리카, 인도의 여러 왕을 섬긴 바 있고, 많은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기 전에 이미 임신했다. 몇명은 일찌감치 분만에 가까웠다. 선박수량이 이전만큼 많지 않은 상황하에서 과도하게 많은 사람이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해안에 정착할 곳을 찾는 것이 선원, 비녀와 낳은 자식들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그후 아마도 다른 선박이 와서 그들을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제327페이지). "중국인은 북극에서 돌아왔다고 보는 것이 아마도 1507년에 출판된 Waldseemüller지도의 비밀을 푸는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주문이 베링해협을 지나 중국으로 돌앙는 길에 이 지방을 탐색한 바 있다고 보는 것이다"(제362페이지). 이렇게 하여, "또 다른 중국의 태감 주문은 이미 발견여행을 완성했다. 그의 항해는 홍보와 주만처럼 더욱 위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에 못지 않다. 영락19년에서 21년까지(서력1421에서 1423까지) 행적이 불명했던 2년동안, 양경(楊慶)도 방대한 함대를 이끌고 해상을 항해했다.(제363페이지)
양경의 항해에 대하여 맨지스는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바로 동료들이 노인성과 남십자성을 측량하는데 바쁘게 움직이면서, 극지역탐험에 깊이 들어가, 세계각지에서 신대륙과 도서를 발견하는 동시에, 양경의 함대는 다른 사람들보다 1달 먼저 북경을 출발하여였다. 다만 그의 항해거리는 인도양에 국한되었다(제367페이지). 맨지스는 간디노지도에 근거하여, 양경함대의 구체적인 항해노선을 그렸다: 인도양에 들어가, 희망봉에 접근하고, 아프리카동부해안을 따라 회항한다. "양경의 여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멀지 않았지만, 다만 그의 임무는 홍보, 주만등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고,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그의 성취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그 항해가 끝난 후, 그의 수하는 경도의 기술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제382페이지)
결론에서, 맨지스는 다시 한번 태창유하(太倉劉河)와 복건장락(福建長樂)의 두 개의 비문을 거꾸로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 이 수년에 걸치는 발견의 항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이 두 개의 석비는 아주 곤혹스러웠다. 지금 여정이 끝나고,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미 증거를 얻었다고 깊게 믿는다. 서방세계에서 장기간 공인되었던 역사를 뒤집을 수 있다고. 나는 정화, 양경, 주만, 홍보와 주문이 중국함대를 이끌고, 전설적인 제6차항해에서 세계의 모든 대륙을 조사한 바 있다는 많은 증거를 얻었다. 그들의 항해는 62개군도, 모두 1만7천여개의 섬을 거쳤으며, 수만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을 그렸다. 정화는 자칭 '대소 3천여국'을 방문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맞는 말인 것같다. 중국함대는 인도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동부로 갔다. 희망봉을 돌아 녹도군도로 갔다. 그리고 카리브해를 건너 북미주와 북극을 가고, 다시 남하하여 혼곶과 남극, 호주, 뉴질랜드로 가고, 다시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꼬박 10만리의 항해거리로 남극에 도달하자 보선은 역풍을 만나거나 역류항해해야 했을 것이다. 영락19년부터 21년(1421년에서 1423년)의 대항해이전에 명성조는 이미 전체 동남아, 그리고 만주, 조선, 일본을 중국에 조공하는 국가영역에 집어넣었다. 비단길의 동쪽은 중국에서 시작하여 가장 멀리 페르시아(지금의 이란)까지 개통된다. 전체 중앙아시아는 중국에 고개를 숙이고 신하를 자처했다. 인도양도 중국해운의 세력범위가 된다. 영락19년에서 21년 보선함대는 이 원래 이미 광대한 무역제국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페루에 이르는 남북미주 태평양연안에 영구식민지를 건설한다. 그리고 호주, 인도양 각지 및 동아프리카에 개간을 한다. 그들은 태평양의 여러 곳에 보급기지를 건설하여, 미주와 중국을 연결시켰다. 그 다음으로 호주, 뉴질랜드와 중국을 연결시킨다. 그들의 기지는 범위가 아주 넓고 이렇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스터섬에서 Marquesas군도와 토목군도에서 Pitcairn섬까지, 캐롤라인군도에서 타히티, 서사모아의 Sarai섬, Tonga섬, Solomon군도의 San Christoba섬, Nan Madol섬, Yap섬, Tobi섬, 및 마리아나군도, 사이판섬이다. 지금도 이들 도서에서는 자주 석조건물, 간이항구, 주택, 수영장, 그리고 천문대등이 발견된다. 정화와 방대한 함대와 그들의 보급대는 이들 식민지와 보급거점을 연결시켰다. 영락18년에서 21년까지 이 2년간의 '실종'기간에 중국항해여행에 관한 나의 주장은 강리도, 피리 레이스지도, 약자지도, 간디노지도, Waldseemüller지도의 진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증거가 이처럼 심도있고, 광범위하고 다양하므로, 영락19년부터 21년까지의 위대한 중국항해여행을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물론 불합리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홍보의 선박은 겨우 4척만이 중국으로 돌아왔고, 주만은 겨우 1척만이 돌아온다. 그들의 이 두 개의 함대만 하더라도 최소 50척의 선박손실을 입었다. 인명손실도 마찬가지로 컸을 것이다. 주만의 함대는 영락21년 구월(서력1423년 10월) 돌아오는데, 9천명의 선원중 겨우 9백명이 돌아왔다. 함대최초성원의 3/4은 이미 죽거나 세계각지의 식민지에 버려졌을 것이다. 명성조는 전세계를 발견하고 지도로 그릴 계획이었다(제461-466페이지).
맨지스는 자신만만하고 단정적으로 그래고 생동감있고 구체적으로 정화함대의 제6차원거리항해활동을 묘사했다. 이치대로라면, 일정한 역사적근거 혹은 사료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모든 결론은 자료, 증거 혹은 사실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먼저 결론을 내리고, 선입견을 가지고, 먼저 정화함대는 분명 미주등 세계각지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고나서 세계대항해시대의 몇 장의 지도, 그리고 그 지도에 그려진 것을 정화함대의 실제항해노선이라고 보고, 연도에서 나타나는 모든 유적유물,식물,동물 혹은 진상이 불명학하거나 연도가 불명확한 침몰선박을 모두 정화함대활동의 흔적으로 취급했다. 여기에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자기 마음대로 정화함대를 나누고, 지휘관을 분배하고, 신분을 마음대로 정하고, 함대규모아 인원수도 마음대로 정했다. 지리개념도 없고, 사학의 기본도 없다. 그저 자신의 설계에 필요하면, 정화함대는 그의 설계에 따라 세계의 어느 곳이든 가야 했다. 맨지스가 채용한 것은 원인과 결과가 뒤집혀진 것이고 역사시대를 무시하는 방식이며, 마음대로 상상한 것을 묘사하고 아무런 근거없이 추측한 것을 얘기했다. 중국의 고대전적을 곡해하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문제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다. 맨지스의 중국식선박은 "나침반이 필요없다"는 견해는 정화보선의 실제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맨지스가 제공한 소위 정화함대의 단면도는 중국범선의 특징이 들어 있지 않다. 맨지스가 증거로 내세운 카리브해의 침몰선은 정화보선이라는 증거가 없다. 맨지스가 증거로 든 미주의 동물, 식물사례는 근본적으로 정화함대와의 여하한 관련성도 증명할 수 없다.
맨지스가 정화함대의 항해노선을 논증할 때, 비록 말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지만, 통상적으로 '분명히' '이치상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 '합리적인 추측에 의하면' '논의하여 정했다' '확신한다' '확실하다' '깊이 믿는다'는 등 추측성 혹은 자아긍정성 어투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통상적으로 먼저 가설을 세우고, 추론하며, 그후에 붓을 들어 일거에 써내려갔다. 만일 "제3분대의 지휘관을 완전히 확정할 수 없지만, 그가 뮌헨대학의 Roderich Ptak교수와 통신으로 토론한 후, 나는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인물후보를 주문이라고 생각한다."(제93페이지)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한 후,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해도를 하나 붙인다. 그리고 주문함대의 구체적인 항해노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전체 서적에는 이처럼 아무런 검증도 통과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방식과 기이한 방식의 결론들로 넘쳐난다.
정화함대는 남경에서 출발하였다. <정화항해도>의 전체 명칭은 <자보선창개선종용강관출수직저외국제번도(自寶船廠從龍江關出水直抵外國諸番圖)>이다. 그후 다시 태창(太倉)의 유하(劉河)에서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맨지스는 함대가 북경에서 출발했다고 하면서, 북경에서 출발해서 발해만, 황해로 나가는 항해노선을 그려놓았다. 북경에는 바다로 나가는 수로가 없다. 이런 상식마저도 맨지스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정화칠하서양(鄭和七下西洋)은 학계에서 횟수에 대하여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맨지스는 그걸 잘 몰랐다. 그는 말했다: "대부분 권위있는 학자들은 그의 제4차와 제5차를 같은 회로 보고 있다. 필자는 이런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그러므로 영락19년에 시작한 여정은 제6차에 해당한다."(제58페이지). 만일 제4차와 제5차를 합친다면, 영락19년의 그 항해는 바로 제5차가 된다. 맨지스가 말하는 제6차가 아니라. 실제로 학계에서 아무도 제4차와 제5차를 합쳐서 1회로 보지 않는다. 맨지스는 정화의 제6차항해에 대한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이후 더 이상 먼 곳에서 조공오지 않았다. 위대한 과학실험도없었고, 더더구나 무역과 발견의 원거리항해라는 장거는 없었다. 중국은 폐관자수의 기나긴 밤중으로 들어서게 된다(제467페이지) 그는 정화가 다시 선덕5년에 제7차 원항에 나섰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정화의 7차에 걸친 원항의 구체적인 횟수도 잘 몰랐을 뿐아니라, 근본적으로 영락19년의 제6차항해이후 선덕5년의 제7차항해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것같다. 정화가 몇번 하서양했는지도 제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정화제6차항해의 구체적인 항해노선까지 그려낼 수 있을까? 실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맨지스는 강소태창과 복건장락이 정화하서양에서 지니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다른 사람의 책에서 정화가 세운 <누동류가항천비궁석각통번사적기(婁東劉家港天妃宮石刻通番事迹記)>와 <장락남산사천비지신영응기(長樂南山寺天妃之神靈應記)>라는 두 개의 비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자주 두곳 비문을 혼동하여 거꾸로 적었다. 김국평(金國平), 오지량(吳志良)의 말처럼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이 정도는 심하지 않은가?"
맨지스는 득의만면하여 말한다. "나는 겁난을 피한 중국문헌과 항해기록을 발견했고, 몇가지 1차적 보고서도 있다: 두 부는 중국역사학자가 쓴 것이고, 또 다른 하나의 작자는 유럽상인이다. 나머지 자료의 작자는 중국의 항해에 따라나서고 또한 이전사람들의 흔적과 남겨진 문물을 발견한 제1대 유럽탐험가들이다.(제23페이지). 이들 소위 '발견'은 정화하서양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최소한 1천여권의 서적이 컬럼버스시대의 ㅈ우국인이 미주를 여행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제274페이지). 그런데 증거를 가지고 논증한 것이 아니고, 유일하게 제출한 증거라는 것이 만력25년에 쓰여진 소설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였다. 이 책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기 위하여, 그는 이 책은 관리들의 소훼를 피한 '하나의 중국문건'이라고까지 말한다. 심지어 얻어들은 것을 가지고 이 책이 "그러나 현재는 이미 보기 드물게 되었다. 아시아학원도서관이 소장한 판본은 전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고본(孤本)이다"라고 한다(제192페이지). 이는 정화항해문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소설이고, 상해고적출판사가 1985년에 215,000책을 인쇄했고, 다른 판본의 인쇄수량은 더더욱 얼마가 될지도 알 수가 없다. 이런 기이한 견해들은 맨지스가 실제로 아무런 설득력있는 사적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맨지스는 중국어를 모른다. <수서>의 "파리(婆利)"를 호주로 이해했다(제195페이지). 그는 정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키가 크고 몸이 건장했다. 주체(朱棣, 영락제)보다도 더 컸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의 키는 2미터가 넘었고, 체중은 100킬로그램이 넘었다고 한다."(제32페이지). 그는 다시 중문문헌을 이용하여, "나는 중국인이 북대서양을 항해했다고 확정했다. 왜냐하면, 제6차항해를 완성한 후, 정화는 중국남방의 장락현(맨지스의 원문에는 유가항이라고 잘못 적어놓았다 - 역자주)의 석비에 이렇게 쓴 바 있다: "제천극지(際天極地), 망불신첩(罔不臣妾). 기서역지서(其西域之西), 이북지북(迤北之北), 고원야(固遠也)" 중국인의 각도에서 보자면, '서역지서'와 '이북지북'은 바로 가장 북쪽의 북국과 가장 서쪽의 서국을 가리킨다. 이는 북미주의 대서양연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제300페이지). 원문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서역지서'와 '이북지북'은 그저 머나먼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지, 구체적인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명나라에 '신첩'한 국가중에 절대로 '북미주의 대서양연안국가'는 없다. 맨지스는 말한다. "천비궁의 비문을 보면, 나는 제6차항해에서 그가 개략 6만킬로미터를 갔고, 이는 지구를 두바퀴도는 거리이다"(제108페이지). 맨지스는 아마도 중국인이 상용적으로 쓰는 허수(虛數)개념을 이해못한 것같다. <서양조공전록>에는 정화가 "신장구척(身長九尺), 요대십위(腰大十圍)"라고 되어 있는데, 이걸 가지고 키가 2미터가 넘고,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정화가 말한 "섭창명십만여리(涉滄溟十萬餘里)"도 더더욱 '6만킬로미터'라고 해석할 수 없다.
맨지스는 아마도 명나라초기에 유기(劉基)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은 것같다. 그래서 "그리하여 영락2년 십일월(1404년 12월), 주체는 그의 두 심복인 요광효(姚廣孝)와 유기에게 명하여, 2,180명이 대학사를 이끌고 <영락대전>을 편찬하게 했고, 고증가능한 모든 문학작품과 지식을 수록하게 했다. 이는 역대이래 가장 방대한 학술프로젝트이다. 최종적으로 4천여권에 5천만자가 넘는 대백과사전이 탄생하게 되었다.(제46페이지). 맨지스는 유기가 이미 홍무8년(1375년)에 사망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영락연간에 <영락대전>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음에도. 그의 이 묘사는 더더욱 잘못된 부분이 많다. <영락대전>은 영락원년부터 편찬되기 시작했고, 이 일에 참여한 사람은 147명이다. 나중에 중수(重修)때 참여자는 3천여명이다. '2,180명의 대학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도대에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대학사가 나왔단 말인가. <영락대전>이 최종적으로 22,877권, 3억7천여자로 완성된다. 4000여권, 5천만자가 아니라.
맨지스는 이런 말도 한다: "영락5년(1407년), 정화는 남경에 언어학교 '사이관(四夷館)'을 설립한다"(제51페이지). "남경성의 언어학교 '사이관'은 어쨌든 정화가 설립한 것이다."(제122페이지). 사이관은 명나라때 변방민족과 이웃국가의 언어문자를 번역하는 기구이다. 이는 조정에서 설립했지 정화가 설립한 것이 아니다. 사적에 기재된 한혈마(汗血馬)에 대하여 맨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명성조 재위기간에 수백만필의 이런 말을 수입했고, 적지 않은 은자를 들였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전문적으로 '이차역마(以茶易馬, 차를 말로 바꾸는)'하는 기구를 설치한다. 이를 통해 백은의 지출을 줄였다."(제215-216페이지). 명나라조정이 차를 주고 말로 바꾸었지만, 그게 무슨 한혈마는 아니다. 전마(戰馬)이다.
맨지스는 또 이런 말도 한다. "정화의 보선함대는 세계각국에 유사한 천문대를 건설했다."(제375페이지). 이는 맨지스의 상상이다. 맨지스는 이런 말도 한다. "정화의 백색비단외투 속에, 항상 주보로 장식된 작은 상자를 넣어두었다. 그 안에는 그의 음경과 두 개의 고환이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삼보태감"이라고 불렀다. 작은 상자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보배'인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중에 그가 죽었을 때, 완전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제35페이지). 이런 묘사는 그저 길거리 할아버지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고, 상식에 위배된다. 책에서 쓴 삽화의 '호화로운 비단제품'은 실제로 청나라때의 '동자곶지련(童子串枝蓮)' 비단이다. 맨지스는 이화접목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가린 것이다.
이런 상식적이면서 생각해보면 그럴 것이다라고 적은 잘못들, 그리고 검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들은 수준의 근거없는 말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세세히 얘기하자면, 김국평, 오지량이 말한 것처럼 "그 내용이 이 책보다 많아질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그저 극히 일부를 예로 들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맨지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무계한지 말하기 위해서.
2.
그렇다면, 영락19년 정화의 제6차 항해에 관한 진정한 문헌기재는 어떠할까? 관련중문자료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화의 각석(刻石)기록
<유동유가항천비궁석각통번사적기>(공진 <서양번국지>에 붙어 있음. 중화서국 1961년 향달교주본): "명나라 선덕 6년 신해 춘삭, 정사 태감 정화, 왕경홍, 부사 태감 주량, 주만, 홍보, 양진, 좌소감 장달등이 세움. 그 내용에는 "영락19년 선박을 이끌고 호르무즈등 각국은 사신들중 오랫동안 경사에 머문 자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각 국왕이 방물을 많이 바쳤는데 이전보다 많았다."
<장락남산사천비지신영응기>(공진 <서양번국지>에 붙어 있음. 중화서국 1961년 향달교주본): "1. 영락19년 선박을 이끌고, 호르무즈등국가의 사신으로 경사에 오래 머문 사람들을 모조리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이를 돌에 기록하여 세운다. 그 국왕들은 공물을 더욱 많이 바치니 이전보다 많았다....옛날에 여러번 신명의 보우를 받아 공을 세운 것이 이러하니, 돌에 새겨 비석을 세운다. 선덕6년 신해 중동 길일, 정사태감 정화, 왕경홍, 부사 태감 이흥, 주량, 주만, 홍보, 양진, 장달, 오충, 도지휘 주진, 왕형등이 세우다. 정일사 주지 양일초가 돌을 세우다."
둘째, 정화수행원들의 기록
공진(巩珍) <서양번국지>(중화서국 1961년 향달교주본)에 첨부된 칙서1: "태감 양경등은 서양 호르무스등 국가로 가서 공무를 수행하라. 각색깔의 저사사금(紵絲紗錦)등의 물건을 쓰고, 각 번의 왕등에게 저사등의 무런을 하사한다. 각 아문은 원래 정한 숫자대로 지급하라. 각 아문의 관리들은 자세히 점검한 후에 내주도록 하고, 조그만치도 빠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락18년 십이월 초십일."
공진 <서양번국지>(중화서국 1961년 향달교주본)에 첨부된 칙서2: "내관 정화, 공화복화(孔和卜花), 당관보(唐觀保)에게 내린다. 이제 내관 홍보등으로 하여금 각번의 사신들을 돌려보내도록 하며 하사품으로 가져갈 은량, 단필, 동전등의 건은 칙서가 도착하면, 규정한 숫자대로 지급하라; 관군의 양식, 하사품 구입하는 사향등의 물건도 사람수대로 지급하라. 군수물자등의 항목, 그리고 배에 따르는 유마(油麻)등의 물건도 각 창고의 아문에서 원래의 숫자대로 지급하라. 태감 정화에게 명하니, 해선 2척을 내어서 이를 싣고 가라. 그리고 각 아문의 관료들은 자세히 점검하여 내주고, 조그만치도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서양으로 가는 내관이 쓰는 소금, 장, 차, 기름, 초등의 물건도 사람수대로 지급하라. 영락19년 십월 십육일."
공진 <서양번국지.아단국>조(중화서국 1961년 향달교주본): "영락19년, 황상이 태감 이충(李充, 충은 興으로 써야 할 것이다)을 정사로 임명한다. 이 0(마땅히 이흥일 것이다)은 수마트라국, 내관 주 000(주만 등일 것이다)등으로 하여금 보선 3척을 몰아서 그곳으로 갔다. 대소두목을 이끌고 해빈에서 맞이하며, 예의를 공경하고 신중하게 했다. 조서를 읽고나서 왕에게 의관을 하사하고, 왕이 그 나라국민들에게 알렸으며, 무릇 보물은 모두 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 나라에서 사오는 고묘안석 하나는 무게가 이전가량인 것, 큰 진주 각색깔의 아관(鴉鸛)등의 돌, 산호수는 높이 2척이상인 것으로 여러 그루, 가지를 구슬로 한 것 5박스, 금박(金珀), 장미로(薔薇露), 기린, 사자, 화복록(花福鹿), 금전표(金錢豹), 타계(駝鷄), 백구(白鳩)같은 류를 구매했다."
마환(馬歡)의 <영애승람.아단국>(풍승균교주, 상무인서관 1935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락19년, 흠명정사 태감 이 0(이하 글자 한자가 빠졌는데, 황록(黃錄)도 같다. 오본(吳本)에는 '모(某)'라고 썼다. 태감 이흥으로 보인다)등 조서를 주고 의관을 그 왕추(王酋)에게 하사했다. 수마트라국까지 내관 주 0(글자 한자가 빠졌는데, 황록도 역시 같다)가 보선 수척(오본에는 3척이라고 되어 있다)을 몰아 그 곳으로 갔다. 왕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소두목을 이끌고 해변으로 와서 맞이할 것이고 조서를 내리고 하사품을 주었다. 왕궁으로 가서 예를 행하는데 아주 공손하고 감복한 모습이었다. 조서를 읽노나자 국왕은 바로 국민들에게 알리고 무릇 진귀한 보물은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거기에서 무게 2전의 큰 묘안석을 사고, 각색깔의 아고(雅姑)등 기이한 보물을 사고, 큰 알의 진주, 산호수는 높이 2척인 것으로 여러 그루, 그리고 산호가지 5박스, 금박, 장미로, 기린, 사자, 화복록, 금전표, 타계, 백구같은 류를 사서 돌아왔다."
셋째, <명태종실록>의 기록
<명태종실록>(대만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교감본) 권119, 영락19년 정월 계사(삼십일): "호르무스등 16국의 사신이 돌아갔다. 초폐표리(鈔幣表裏)를 하사하다. 다시 태감 정화등을 보내어 칙서를 내리고, 금기사라능견(錦綺紗羅綾絹)등 물건을 여러 국왕에게 하사했다. 사신과 함께 가도록 했다." 실록에서 말하는 16국은 실록 영락18년 정월 무자조에 호르무스등 16국이 사신을 보내어 명마, 방물을 바쳤고, 예부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치하하도록 했다. 이를 보면, 호르무스(忽魯謨斯), 아단(阿丹), 조법아(祖法兒), 랄살(剌撒), 불랄와(不剌哇), 목골도속(木骨都束), 고리(古里), 가지(柯枝), 가이륵(加異勒), 석란산(錫蘭山), 류산(溜山), 남발리(喃勃利), 수마트라(蘇門等剌), 아로(阿魯), 말라카(滿剌加), 감파리(甘巴里)등이다.
<명태종실록>권123, 20년 팔월 임인(십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관(中官. 환관) 정화등의 사신이 여러 번국으로부터 돌아왔다. 섬라(暹羅), 수마트라, 아단등의 국가에서 모두 사신을 보내고 방물을 조공으로 바쳤다."
영락19년 정화의 제6차 하서양과 관련한 직접적이고 비교적 원시적인 자료는 대체로 이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마환의 <영애승람>은 <서양번국지>를 참고한 흔적이 있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보면, 영락18년말, 호르무스등 국가의 사신들이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명나라조정은 태감 양경에게 방문 혹은 방문할 물자준비를 하도록 명한다. 다음해 정월 각국사신이 떠나고, 명나라조정은 각종 비단등의 물건을 하사한다. 그리고 정화에게 이들을 데려다도록 명한다. 같은 해 십월, 명나라조정은 다시 내관 홍보에게 정화와 동행하지 못한 외국사절들을 데리고 가도록 하면서, 필요한 물자는 이미 남양으로 간 정화에게 지급하도록 한다(속세징 <정화남정기>(청년출판사 1941.3)). "이 기록을 보면, 정화는 정월말 제1차로 출발하고, 홍보가 십월 제2차로 출발했다. 그래서 홍보가 떠날 때 정화에게 하사품을 지급하라고 칙서를 내린다. 이는 이미 남양에 도착한 정화에게 통지한 것이다. 정화는 이때 일찌감치 나라를 떠나 분주하게 항해하고 있었다. 설사 각번국사신이 아직 경사에 남아 있고, 정화가 아직 출발하지 않은 상황일 경우, 만일 하사품이 있으면 예부에서 홍보에게 지급했을 것이고, 칙령을 내려 정화에게 지급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화는 명을 받아 각국에 도착한 후에 하사품을 줄 것이고, 경성에서 외국사신에게 하사품을 지급할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정화가 외국으로 가면 당연히 남양에 통신을 설치할 것이고, 정부와 통신하였을 것이다." 풍승균의 <중국남양교통사>(상무판, 1937년 1월, 제99페이지)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정화는 먼저 19년 봄에 대보선을 몰고 출발했다. 홍보는 같은 해 십월 나머지를 데리고 출발한다." 정일균 <논정화하서양>(해양출판사. 1985년 6월, 제309-310페이지)에는 이번 사신으로 나가는 경위를 설명할 때, 속세징의 견해를 따랐을 뿐아니라, "정화함대는 차례대로 아랍제국을 방문한다. 1차계절풍때 겨우 절반의 항해만 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두번째해의 계절풍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전체 항해노선을 갈 수 있는 것이다....정화는 계절풍을 타기 이해서 명령을 받은 후 급히 출발했다. 그리하여 16국중에서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정화와 함께 출발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정화가 정월에 제1차로 출발한 후, 제2차로 떠나는 사절들은 그해 10월 계절풍이 시작될 때 홍보에게 호송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정화에게 정해진대로 각 번국에 하사품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필자는 이 견해를 채택하고자 한다. 정화는 영락19년 정월에 칙령을 받은 후 16국중 일부 국가의 사절을 데리고 먼저 떠난다. 영락20년 팔월에 귀국한다. 정화가 사신으로 나가서 항해한 기간은 1년반이다. 수마트라에 도착한 것은 태감 이흥이고, 3척의 보선을 몰고 아단국에 도착한 것은 내관 주만이다. 주만등 명나라사신은 그곳에서 '진귀한 보물'을 구매한 후에 돌아왔다. 국내로 바로 돌아왔을 것이다.
넷째, 명나라후기사람들의 기록
명나라 가정때 황성증(黃省曾)의 <서양조공전록.아단국>(사방교주본, 중화서국1982년)의 소주(小注)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락 신축 정사 태감 이 0 (이흥일 것이다)은 조서를 내리고 그 왕에게 관복을 하사했다. 수마트라국으로 나누어간 주 0(주만일 것이다)등은 보선을 몰고 그곳에 도착한다. 왕이 우두머리들을 이끌고 맞이하여 왕궁으로 간다. 조서와 하사품을 읽은 후, 왕은 국민들에게 진귀한 보물이 있으면 교역하도록 허가한다."
만력원년, 일찌기 행인사(行人司) 행인(行人)을 지낸 바 있는 가흥사람 엄종간(嚴從簡)은 <수역주자록(殊域周諮錄)>을 편찬한다.(여사려 점교본, 중화서국 1993년), 여기에 영락19년의 제6차 정화하서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섬라조: 영락18년 다시 조공하다. 중관 양민(楊敏)등으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러온 사신등을 호송하여 귀국시키다. 그리고 후하게 그 왕에게 하사품을 내리다. 19년, 왕은 사신 내회(奈懷)등 16명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다. 말라카국을 침범한 죄를 사해주었다. 사폐(紗幣, 사는 鈔일 것이다)를 내리는데 차이가 있었다." 삼불제(三佛齊, 스리위자야, 현재의 말레이시아지역국가)조: 영락21년, 구항선위사 시진경이 죽다. 그의 아들 제손(濟孫)으로 하여금 선위사를 승계하게 하다. 관대, 직금, 교기, 습의, 은인을 하사하다. "중사(中使) 정화가 가서 하사품을 내리다."
만력말기, 장섭(張燮)이 편찬한 <동서양고>(사방 점교본, 중화서국 1981)에 영락19년 정화의 제6차하서양에 관련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섬라조: 영락17년 공물이 또 도착하다. 중사 양민을 보내어 그 사신이 귀국하는 것을 호송하게 했고, 왕으의 예에 보답했다. 19년봄, 글을 올려, 말라카를 침범한 죄를 사해달라고 청하다. 칠월 공물을 예전과 같이 하다."
다섯째, <명사>와 <국각(國榷)>등 사서의 기록
<명사>권7 <성조본기3>(중화서국 1974년 점교본): 영락19년봄 정월 "계사(癸巳), 정화가 다시 서양으로 가다. 20년 팔월 임인, 정화가 돌아오다. <명사>의 이 기록은 마땅히 <실록>에서 가져온 것일 것이다.
<명사>권326 '조법아'조: "영락19년 사신을 보내어 아단, 랄살의 여러 나라와 함께 조공을 바치다. 정화등에 명하여 국새와 칙서를 내리고 하사물을 내려 보답했다." 같은 권 '아단국'조: 그 왕은 중국은 극히 존중했다. 정화의 선박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직접 신하를 이끌고 맞이하러 나왔다. 나라에 들어가 조서를 다 읽자, 널리 그 신하들에게 알리고, 기진이보를 내놓고 교역하도록 한다. 영락19년, 중관 주(周)씨성을 가진 사람이 간다. 시장에서 묘안석 무게 이전가량, 산후수 높이 2척가량 여러개, 그리고 대주, 금박, 여러 색의 아고이보, 기린, 사자, 화묘, 녹, 금전표, 타계, 백구를 사서 귀국한다. 다른 나라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명사>의 이 기록을 보면, <서양번국지>와 <영애승람>의 "아단국"조와 아주 비슷하다. 이 부분은 그 두 책에서 인용한 것일 것이다. 글에 나오는 "중관 주씨성을 가진 사람"은 주만일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번에 아단국으로 간 사자가 시장에서 기진이보와 기이한 짐승을 사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즉 사신은 국내로 바로 돌아왔다. 이는 실록에 기록된 아단국등의 사신이 정화를 따라 조공을 바치러 왔다는 것과 부합한다.
청나라초기 담천(談遷)의 <국각> 권17(중화서국 1958년 점교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영락19년 정월 계사, "태감 정화에게 명하여 16국의 사신을 데리고 가서 그 왕에게 금기사라능견을 하사하게 했다."
여섯째, 기타 기록
강희제때의 인물인 전증(錢曾)은 <독서민구기>권2 <별지>(서목문헌출판사 1984년 정유 점교본)에서 공진의 <서양번국지>를 소개하고, 정화제6차하서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 고증해보면, 이 책이 처음 기록된 것은 영락18년 십이월 초십일, '태감 양경에게 칙령을 내려 서양으로 가서 공무를 보게 했다'는 것이고, 19년 십월 십육일 '내관 정화, 공화복화, 당관보에 칙령을 내렸고, 지금 내관 홍보등을 보내어 각번국사신이 돌아가도록 하며 일상용품과 하사품으로 쓰일 것들을 수량에 따라 지급했다."
도광제때의 인물인 정광조(鄭光祖)의 <일반록> 잡술4에는 "삼보태감하서양"조(해왕촌고적총간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다섯번째 사신으로 나간 것은 영락19년 봄이다. 정화등을 다시 가도록 했고, 20년 팔월에 돌아왔다." 이것은 실록을 참고해서 적은 것일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향달(向達)은 청나라초기의 잔권(殘卷) 1책(冊)을 소장하고 있는데, 책의 제목, 서문, 발문이 모두 없다고 한다. 풍승균은 <침위편(針位編)>의 일종으로 추단했다. 잔권에는 이런 글이 있다: "영락19년 성지를 받들어, 삼보신관(三保信官) 양민(楊敏), 자는 불정(佛鼎), 정화, 이개(李愷)등 3명은 방갈랄(榜葛剌, 원문은 榜葛據로 잘못 적혀 있음)등 번방으로 가서, 36국을 주유하며 공무를 보았다. 영락23년, 오귀양(烏龜洋)을 지날 때 돌연 풍랑을 만난다."(그 아래 내용은 천후낭낭에게 기도한 후 파도가 가라앉았다는 내용이다)
위의 3종류의 관련기록을 보면, 실제로는 대부분이 이전의 기록들에서 옮겨온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지 않다. 오직 청초초본잔권에 기록된 내용은 다른 기록과 다르다. 소위 청초초본은 내용이 불명확하고, 언급하고 있는 정화등 3명이 발갈랄을 갔다는 것과 영락23년에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영락22년 정월 명성조는 정화에게 구항을 방문하도록 했다(<명태종실록>권128에는 '영락22년 정월 갑신, 구항고선위사 시진경의 아들 제손이 사신 구언성을 보내어 부친의 직을 승계하도록 청했다. 그리고 옛날 인장이 불에 타서 훼손되었다고 하였다. 황상은 제손에게 선위사를 승계하도록 하고, 사모, 은화, 금대, 금직, 교기, 은인을 내리면서 중관 정화에게 가지고 가서 하사하도록 했다'고 되어 있다). 정화는 19년 하서양한 후 이미 귀국했으므로, 아직 귀국하지 않아 23년에 돌연 풍랑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초본은 설사 지금까지 세상에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청초 전민구가 말한 것처럼 정화하서양의 일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아주 많고, 극으로도 쓰여 있으며, 평화(評話)로 전해진다. 그 내용이 허황되고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을 것이 못된다. 양민도 맨지스가 말하는 양경은 아니다.
이상의 관련사료를 살펴보면, 홍보는 일찌기 영락19년 십월에 칙령을 받아 호르무스등 16국 혹은 16국중 일부국가를 방문했다. 주만은 일찌기 수마트라에 도착한 후 아단국으로 갔다. 양경은 영락18년 십이월 십일 칙령을 받아 호르무스등 국가로 갔다. 그들에 관련된 기록은 아주 간단하다. 근본적으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언제 도착했는지, 언제 돌아왔는지 그리고 함대의 손실등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주문은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가 합비(合肥) 사람이고, 태창(太倉)에서 군인으로 근무했으며, 일찌기 뒤 5차례 정화하서양원항 및 영락22년의 항해활동에 참가했다. 그동안 영락13년 '본위우소부천호'로 승진하고, 무략장군을 세습한다. 주문이 겪은 '서양제국'은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후범육왕(侯凡六往), 사저궐경(四抵厥境)'했다. 그가 참가한 정화의 6번째 하서양도 묘지명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신축에 떠났는데, 중도에 돌아왔다."(<명무략장군태창위부천호상후성원묘지명> 명문의 탁본은 태창시박물관 심로민선생이 제공했다. 여기에서 감사드린다). 주문이 정화의 제6차하서양에 참가했지만 중도에 돌아온다.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나가는 상황을 보면, 정화하서양에서 함대를 이끄는 사신은 모두 태감이다. 무관이 아니다. 주원은 천호소의 부천호라는 하급장교이다. 그가 분대를 이끌고 사신으로 갔을 가능성은 없다.
맨지스는 주문을 태감이라고 잘못 적었는데, 주문의 신분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주문의 묘지명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러므로, 맨지스가 언급한 4명은 비록 모두 영락19년의 제6차 정화하서양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호주는 가지 않았고, 아프리카 남단으로 가지도 않았으며, 더더구나 미주로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전후로 모두 국내로 귀국했다. 소위 행방불명인 선박은 그들의 이번 항해와는 무관하다. 맨지스의 소위 홍보, 주만, 주문이 미주에 도착했다는 항해노선은 보기에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항해노선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맨지스의 '새로운 주장'을 지지하는 여하한 다른 문헌이나 쓸모있는 기록이 없다. 맨지스의 '놀라운 작품'은 여하한 설득력있는 새로운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맨지스의 새로운 주장은 정화연구에 아무런 학술적 가치가 없다. 근본적으로 이것때문에 정화하서양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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