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한수(張恨水): 3명의 부인, 13명의 자식, 민국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

중은우시 2023. 2. 22. 12:04

글: 습문화(拾文化)

 

장한수가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바로 글솜씨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그는 민국시대 작가들 중에서 절대로 첫손에 꼽힐 것이다. 50여년간 집필하면서 3000여만자를 썼다.

동시에 여러 소설을 연재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최고기록은 동시에 7편의 장편소설을 연재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스토리라인, 그렇게 많은 인물이 있지만, 한번도 헷갈리지 않았고, 한번 글을 쓰면 고치지도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한손으로 소설을 쓰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마작을 했는데, 둘 다 실수없이 해냈다는 것이다.

질로 따져도 그는 팬들사이에서는 대가중의 대가이다.

진인각(陳寅恪)이 두 눈이 멀고 나서, 매일 친구 오복(吳宓)에게 부탁해서 장한수의 소설 <수호신전(水滸新傳)>을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병상의 무료함을 달랬다고 한다. 

노신의 모친이 반드시 노신의 팬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는 분명 장한수의 팬이었다. 장한수가 새 책을 낼 때마다, 노신은 반드시 구매해서 고향의 모친에게 부쳐주곤 했었다.

가장 행복했던 사람들은 해적판출판사들이다. 100여부의 짝퉁소설을 장한수의 이름을 걸고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는 민국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였던 것이다. 

베스트셀러라면, 사람들이 가장 즐겨보는 스토리일 것이다. 어떤 스토리가 가장 인기를 끌게 될까?

재자가인(才子佳人) 이야기, 치남원녀(痴男怨女) 이야기, 호문은원(豪門恩怨) 이야기이다. 

<금분세가(金粉世家)>부터 <제소인연(啼笑因緣)>까지, 그 어느 것하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독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장한수는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고, 얼마나 슬픈 일이 있길래 자신의 이름에 "한(恨)"자를 넣었을까?

기실, 그의 애정은 간단하다면 아주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아주 복잡하다.

3명의 부인, 13명의 자식

 

1

 

장한수가 소설을 쓰고 문아하지만 그는 원래 무장(武將)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청나라때 군관으로 참장(參將)을 지냈으며, 식사를 하다가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을 정도였다.

부친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팔장장모(八丈長矛)를 잘 써서, 사람들이 '소장비(小張飛)'라고 불렀다.

장한수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서부터 칼과 곤봉을 휘둘렀고, 서당선생의 <삼국연의>를 몰래 훔쳐보는데 한번도 들킨 적이 없었다.

집안환경이 좋은 편이어서, 장한수는 교육을 잘 받는다. 시사가부도 모두 정통했고, 14살때는 신식학당에 들어가서 서방의 현대문화도 배운다.

원래는 영국으로 유학갈 계획이었는데, 조부와 부친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이 기울어지게 된다.

홀어머니와 형제자매5명은 살아야 했다. 장한수는 사방으로 돈을 벌러 다녔다. 남창으로 갔다가, 한구로 갔다가, 상덕으로 갔다가, 상해로 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안휘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얼마되지 않은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더니, 차라리 일찌감치 소나 기르는게 나았을 것이다!"

부친은 죽기 전에 아들이 결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하여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게다가 집안환경도 좋지 않게 되니, 모친은 더욱 고민이었다. 하루종일 아들을 혼처를 찾았다.

결국 찾아냈다.

 

2

 

장한수 모친은 중매쟁이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서씨집안의 딸 서문숙(徐文淑)은 자질이 괜찮다. 조상은 관직에 있었고, 부친은 서당선생이다. 비록 집안환경이 예전만 못하지만 아가씨는 예쁘게 생겼고, 글자도 잘 썼다. 

그래서 약속한 날짜에 중매쟁이는 장한수의 모친을 데리고 희극무대앞으로 데려가서 한 아가씨를 가리키면서 "저 아가씨이다"라고 말한다. 장한수의 모친이 보니 과연 참하게 생겼다. 그리하여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 장한수에게 얘기해주고, 장한수도 그 말을 듣고 기뻐한다.

그런데, 신혼날 밤에, 장한수가 신부의 얼굴가리개를 벗기자 못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못생긴 건 그렇다치더라도 글조차 읽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속은 것을 안 장한수는 도망치듯이 화촉동방을 빠져나온다.

서씨집안에는 모두 네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을 시집보내지 못할까봐 걱정하여, 바꿔치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혼인식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왔으니, 다시 물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이 아가씨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마음이 약한 장한수는 결국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상이 장한수의 첫번째 결혼에 대하여 세상에 알려진 버전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헛점투성이이다. 마치 민간에서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서 전설로 만든 것처럼.

학자인 서제민(徐霽旻)의 고증에 따르면, 서문숙은 절대 그렇게 못나지 않았다. "그녀의 숙조는 청나라때 변방을 지키는 무장이었고, 군공으로 정일품 건위장군(建威將軍)이 되었다. 부친 서해산(徐海山)은 유명한 서당선생으로 글재주도 뛰어나고 용모도 당당했다." 

이런 집안내력은 절대로 장한수의 집안내력에 못지 않다. 서문숙 본인도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을 배웠고, 글자도 잘 썼다.

사진을 보더라도, 서문숙이 예쁘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단정하여, 절대로 못생겼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런 결혼이라면 무슨 바꿔치기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소문이 떠돌게된 윈인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장한수가 그녀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전통교육을 받아서, 자신의 배우자에 대하여 유정사수(柔情似水), 홍수첨향(紅袖添香)식의 여자를 바라면서, 또한 그는 신식교육도 받아서, 자유연애를 주장했고, 중매결혼은 반대했다.

서문숙은 비록 약간의 학식이 있었지만, 어쨌든 구시대의 여자였다. 그녀는 장한수의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혼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한수는 고향을 떠나, 상해, 소주를 거쳐 다시 남창으로 간다. 마치 일부러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장강의 가에 서서 그는 장탄식을 내뱉는다: "혼인의 자유가 없다는 건, 실로 사람을 죽이는 길이다."

그동안 그는 소설 <청삼루(靑衫淚)>를 쓴다. 비록 발표를 하지 않아서, 그 내용이 어떤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제목만 보더라도 개략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하여, 장한수는 '법도에 따라' 서문숙과 합방하고, 1년후 서문숙은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그 아이는 1살도 되지 않아 요절한다.

장한수는 실망한 끝에 아예 고향을 떠나버린다.

 

3

 

고향을 떠난 장한수는 무호(撫湖)로 가서 한 신문사의 총편집인이 되고, 처녀작 <자옥성연(紫玉成煙)>을 발표한다.

5.4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피가 끓어올라 신문사를 사직하고 북경으로 간다.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북경대학의 방청생 자격도 없었다. 먹고살기 위하여, 그는 동시에 6,7개 신문사에 겸직을 한다. 공부는 고사하고 잠조자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압박이 커지자 몸이 버티질 못한다. 어느해 가을, 그는 심각한 상한(傷寒, 장티푸스)에 걸려 몇달간 병석에 누워지내게 된다.

친구의 소개로 그는 고아원의 한 여자아이를 알게 된다. 이름은 호초제(胡招娣)였다.

고아원에는 모두 돌아갈 집이 없는 여자아이들이 있었고, 그녀들은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하나씩 배운다. 그리고 결혼할 나이가 되면 고아원의 책임자는 혼처를 찾아준다. 남자측이 돈을 내고 절차를 거치면 데려가는 것이다.

호초제는 힘들게 살아온 아이였다. 사천 사람인데, 부친은 육체노동으로 살았다. 4,5살때 그녀는 유괴되어 상해로 갔다. 거기서 양(楊)씨성의 사람 집에서 여종으로 있었다. 이 집이 나중에 북경으로 이사를 왔고, 그녀도 따라 온다. 양씨집안사람들은 그녀에게 마주 못되게 대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하고, 그녀가 꽃병을 하나 깨트렸다고 하여, 눈속에 무릎을 꿇고 있도록 하기도 했다.

도저히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호초제는 용기를 내어 양씨집안에서 도망쳤고, 다행히 길거리를 헤메고 있을 때 순경에게 발견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어진 것이다. 

그때 호초제의 나이 16,7세였다. 용모도 반반하고, 기민했다. 그녀의 기구한 인생은 더더욱 장한수의 연민을 자아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돈을 내고 그녀를 고아원에서 데려온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 아가씨를 부인으로 취하겠다고 당당하게 알린다.

 그런데, 호초제는 글을 못읽었다. 그럼 어떻게 홍수첨향식의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그녀를 가르친다.

손에 손을 잡고 붓을 들어 글자를 쓰게 하면서, 하루에 몇 글자씩 알아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그녀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가거나 희극을 보러가서, 그녀의 견식을 높여주었다.

그외에 그는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에서 글자를 따서 그녀의 이름을 "호추하(胡秋霞)"로 개명시킨다.

호추하는 아주 총명해서 글자를 금방 익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개략 신문과 소설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후 장한수의 <춘명외사(春明外史)>, <금분세가> <제소인연>등 작품의 첫번째 독자는 바로 그녀였다.

호추하는 박복한 운명을 타고 났지만, 장한수같은 남자를 만난 것에 만족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아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고향에 본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심지어 매월 정확한 날짜에 정확한 금액을 고향의 본부인에게 생활비로 보냈다.

<야광(夜光)>잡지에 <춘명외사>를 연재하면서 그는 북경의 문단에서 명성을 떨친다.

게다가 딸까지 낳게 되자, 장한수는 득의만면한다.

돈이 좀 생기자, 그는 모친과 서문숙을 고향에서 데려온다. 본부인이 새부인을 만나게 되면, 한바탕 싸움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본부인은 마음을 넓게 가지고 받아들였고, 호추하도 인정세고를 잘 알다보니 두 사람은 오히려 자매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장한수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쓰여진 것들이다.

이렇게 아주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올 것이 오고 만다. 장한수는 그의 인생에서 진정한 홍분가인(紅粉佳人)을 만나게 되니 바로 주남(周南)이다.

 

4

 

주남의 본명은 주숙운(周淑雲)이다. "주남"은 당연히 장한수가 고쳐준 이름이다. 이름은 <시경>에서 따온다.

고목에 꽃이 피게 된 그 해에 장한수는 36살이고, 주남은 16살로 춘명여중(春明女中)의 학생이었다.

그녀는 <아심침(夜深沉)>부터 장한수의 사생팬이었다. <제소인연>이 연재될 때는 더더욱 그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다.

1931년 그들은 한 재해구호자선활동때 만난다. 둘 다 경극애호가이다보니, 이 활동에서 장한수는 숭공도(崇公道) 역을 맡고, 주남은 소삼(蘇三) 역을 맡았다.

주남의 노래소리에 장한수는 깜짝 놀란다. 다시 자세히 보니 젊고 예쁘면서도 학식이 있고 기질도 있었다. 장한수는 일시에 늙은 사슴이 마구잡이로 머리를 부딛쳐가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는 편지를 책 속에 넣어서, 주남을 찻집으로 불러서 차를 마시면서 준다. 주남은 그것을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두 사람은 길지 않은 시간동안 얘기를 나눴지만, 서로 상대방이 자신이 힘들게 찾던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장한수는 자신은 그녀를 취할 면목이 없다고 말한다. 집안에 이미 처자식이 있어서. 그러나 주남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유부남 장한수에게 시집가겠다고 결정한다. 

 이런 식의 만남은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장한수와 주남은 교과서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결혼후 주남은 학업을 포기하고, 한마음으로 장한수를 따른다. 그들은 별도의 집을 얻어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1937년 항전발발후, 장한수는 일가족을 안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중경(重慶)으로 가서 신문사업무를 한다. 

주남은 시시때때로 남편의 안위가 걱정되어 두 아이를 데리고 천리먼길을 까서 남편을 찾아간다. 그후 네 가족은 환난을 함께 한다.

중경의 생활은 북경에 비할 수가 없었다. 거처하는 곳도 초가집이고, 먹는 것도 거친 밥이었다.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주남은 돼지를 기르고 야채를 심었지만,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면 그들은 여전히 같이 시를 짓고, 금을 타며 노래를 불렀다. 어떤 때는 두 사람이 함께 길거리로 나가 자선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생활이 8년간 지속된다. 비록 힘들었지만, 장한수는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주남은 장한수가 그리던 완벽한 반려자의 모든 조건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유일하게 골치아픈 일이라면, 호추하였다. 장한수가 다시 부인을 맞아들인 것에 불만을 가지고 이혼하겠다고까지 나선 것이다. 다만 그녀는 이혼하고나면 혼자 살아갈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꾹 참게 된다. 그 이후 그녀는 술로 세월을 보낸다.

아마도 후궁기화(後宮起火)의 무서움을 알아서인지 나중에 장한수도 이런 말을 하게 된다: "하나의 가정에 여러 부인이 있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5

 

"민국쓰레기남자랭킹"을 사람들은 즐겨 만들곤 했다. 확실한 쓰레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3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13명의 자식을 둔 장한수는 한번도 그 명단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가 처한 시대의 평가로 보면, 장한수는 좋은 남자였다.

본부인 서문숙에 대하여 그녀가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끝까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에서는 그녀를 잘 보살펴주었다. 부유할 때는 그녀를 북경으로 불러 함께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주고, 전시에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고향으로 보냈다. 비록 힘든 시기에도 그는 자신의 수입중 일부를 떼어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둘째부인 호추하에 대하여 그녀는 길거리를 떠돌던 호추하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집을 주었다. 최초 몇년간은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래서 호추하는 그가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옮겨간 것이 더욱 분하고 원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따로 살기는 해도, 장한수는 여전히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그녀와 아이들을 보러 갔고, 그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마음에 드는 음식들을 시켜먹게 해주었다. 비록 주머니에 돈이 딸리기는 해도, 절대 그녀와 아이들이 난감해하지 않게 해주었다.

거꾸로 장한수를 보면, 그도 역시 행운아이다. 세명의 부인은 모두 얻기 힘든 여자들이다.

장한수 말년의 가족사진

1956년 주남이 유선암을 앓는다. 장한수가 걱정할까봐 그녀는 그에게 말하지 않다가 결국 말기가 되어 1959년에 세상을 떠난다.

장한수는 깊이 슬퍼하며, 그녀를 위해 근 백 수의 도망시(悼亡詩)를 짓는다. 그리고 자주 삼륜차를 차고 그녀의 묘소로 갔고, 한번 가면 몇시간씩 앉아있다 오곤 했다.

주남이 입원한 기간동안 고향에 있던 서문숙이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한다. 장한수는 자신이 몸을 나눌 수 없어서, 아들 장소수(張小水)에게 700원을 가지고 가서 그녀를 잘 안장하도록 시킨다.

1967년 2월 15일, 장한수도 뇌일혈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73세였다.

호추하는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10여년후 그녀도 세상을 떠난다.

한명의 남자, 3명의 여인, 4가지 인생

사랑도 있고 미음도 있고, 희비도 교차한다.

지금 그들은 모두 떠났고,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았다.

다만 <금분세가>의 결말처럼, "자고로 애정에서의 득실은 도대체 남자의 잘못인가? 여자의 잘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