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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백선용(白先勇): 나의 모친 마패장(馬佩璋)

by 중은우시 2023. 3. 2.

글: 백선용

 

모친 마패장 여사는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마유기(馬維琪)는 과거출신으로 흥안현령(興安縣令)을 지냈다. 모친은 장녀였으며, 친남동생이 한명있고, 서출남동생, 여동생 둘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모친을 매우 아꼈고, 그의 장상명주(掌上明珠)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모친이 시집을 가기 전에, 그녀는 소매에 열쇠를 가득 달고 다니면서, 집안일을 관장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마작을 두기만 할 뿐 집안일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은 젊었을 때부터 혼자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면을 보였다. 건괵불양수미(巾幗不讓鬚眉)의 기백을 보였다.

 

어렸을 때, 모친의 조모는 그녀에게 전족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발이 아프자 할머니를 발로 차고 방문을 뛰쳐나가 난리를 펴서 결국 전족을 하지 않았다. 모친은 어려서부터 구속받기를 거부하고,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몇년간 사숙(私塾)에서 공부했는데, 나중에 외삼촌에 따르면 그녀는 책을 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사숙의 여러 규칙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모친은 다시 신식학당 계림여자사범(桂林女子師範)에 입학했다. 그녀는 학생시위에도 참가했는데, 유모는 물주전자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더위를 먹을까봐 걱정되어서.

 

1925년 2월 14일, 모친은 부친에게 시집을 간다. 모친의 나이 22살, 부친의 나이 32살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관상을 볼 줄 알았고, 그는 부친에게 향후 재상의 운명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장상명주를 청년장교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마씨집안의 큰아가씨가 시집간다는 것이 당시 계림성을 뒤흔든 일대사건이었다. 관례에 따르면, 신부는 꽃가마를 타기 전에 몇차례 통곡을 하면서 친정을 떠나기 아쉽다는 것을 표시해야 했다. 모친의 넷째고모는 급히 모친의 뒤로 가서 몇번 꼬집었지만, 그녀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유모가 그녀를 위해 삶아준 닭 한마리도 다 먹는다.

 

모친은 평생동안 허례(虛禮)를 싫어했고, 가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진정진성(眞情眞性)의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순수한 마음을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모친의 가장 사랑스럽고 고귀한 점이다. 그녀는 '진인(眞人)'이었다.

백숭희(白崇禧)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일곱째동생 선경(先敬), 여섯째동생 선강(先剛); 가운데줄 왼쪽부터; 백선용, 모친 마패장, 부친 백숭희, 넷째형 선충(先忠); 뒷줄 왼쪽부터 셋째누나 선명(先明), 둘째누나 선혜(先慧), 큰누나 선지(先智), 큰형 선도(先道), 둘째형 선덕(先德), 셋째형 선성(先誠)

모친은 부친에게 시집온 후, 조용한 날이 그다지 없었다. 결혼후 8일만에, 부친은 유주(柳州)로 가서 침입해들어온 운남군(雲南軍)과 맞아 전투를 해야 했다. 그런데, 광서의 원로군벌 심홍영(沈鴻英)이 계림성이 빈 틈을 타서 계림성으로 진입하여 외할아버지 일가가 인질로 잡힌다. 모친은 독일병원의 지하실에 숨어서 붙잡히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결혼 다음 해에는 북벌이 시작되었고, 모친은 부친을 따라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계속 전투하면서 올라갔다.

 

1927년 영한(寧漢, 남경과 무한)분열로, 손전방(孫傳芳)의 부대가 역으로 공격한다. 부친은 북벌군을 지휘하여 가장 유명한 전투인 용담지역(龍潭之役)에서 손전방부대를 궤멸시킨다. 모친은 상해에 있었는데, 부친이 남경에서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사촌형인 해경강(海竞强)과 함께 차를 타고 남경으로 간다. 도중에 도망치던 병사들이 차량을 에워쌌다. 모친은 사촌형에게 명령한다: "총을 쏘라!" 두 사람은 참호를 넘어서 봉쇄선을 뚫었다. 머리 위로는 유탄이 날아다녔다. 남경에 도착하여 부친은 만나자, 부친은 깜짝 놀란다. "네가 어떻게 여기를 왔느냐?"

 

여러해 이후 사촌형은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모친을 칭찬했다: "여자영웅이다!" 전쟁으로 단련되면서 2,3년동안 모친은 금지옥엽의 천금소저에서 이미 풍랑을 거친 군인의 처로 거듭났다.

 

1929년 북벌이 막 완성되고, 장계전쟁(蔣桂戰爭, 장은 장개석, 계는 계계군대, 즉 백숭희가 속한 집단)이 발발한다. 부친은 황급히 배를 타고 천진을 떠난다. 그러나 모친까지 데려가지는 못했다. 모친은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차량을 구해, 품에는 무한에서 출생한 큰누나 선지를 안고 큰 눈을 맞으면서 당고(塘沽)에 도착하고, 배를 타서 홍콩으로 도망친다. 같은 해 중앙군이 광서를 공격하고, 부친과 모친은 해외로 망명한다. 안남(지금의 베트남)의 하노이로 피신간다. 모친의 운명은 기복이 심했는데, 부친의 일생 영욕과 관련이 있다. 

 

부친이 모친과 결혼할 때 나이가 10살이 많았다. 그리고 귀하게 자란 관료집안의 아가씨를 취하다보니 처음부터 모친을 특히 아꼈다. 모친은 성격이 과감하고 기도가 대범했다. 일반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부친과 함게 환난을 함께 했고, 대내적으로 그녀는 10명의 자녀를 양육한다. 그리고 여러 친척들도 돌보면서, 대가족을 혼자서 관리했다. 부친은 이렇게 남편을 잘 이해하고 자식들을 잘 기르는 현모양처에게 어느 정도 경외심이 있었던 것같다. 부친은 바깥에서는 백만대군을 호령하며 풍운을 질타하지만, 집안으로 돌아오면, 모친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모친은 식대체(識大體), 명대의(明大義)하는 사람이었다. 모친은 기꺼이 가정주부로 남았고, 10명의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그녀의 인생 목적이었다. 부친의 공무에 대하여 그녀는 본분을 지켜 한번도 간여하지 않았다. 여러번 광서 각계에서 그녀에게 국대(國大) 대표, 부녀대표를 맡아달라고 하였지만, 모친은 모두 거절한다. 그녀는 그녀에게 그런 직위를 주려고 하는 것은 부친과의 관계때문이지, 그녀 자신이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거절한 것이다. 이것도 부친이 모친을 존경한 점이다.

 

모친은 유머감각도 있었다. 정부에서 부친에게 승용차를 안배해주었는데, 오래된 닷지(Dodge)였다. 차를 몰면 이리저리 흔들렸고, 부친은 이 낡은 닷지를 타고 '총통부'로 출근했다. 나중에 여러 기관에서 차량을 교체하는데, 부친의 이 닷지만은 교체되지 않았다. 기사인 진의방(陳義方)까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낡은 닷지를 '총통부'의 주차장에 세워진 다른 차들 사이에 주차하면 영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마침내 미군이 남겨준 쉐보레로 바꾸게 된다. 새 모델이었고, 좌석도 낮고, 차문도 작았다. 한번은 부모님이 이 쉐보레를 타는데, 모친은 머리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간 후 고개를 돌려 부친에게 말했다: "어르신, 나는 그래도 옛날 그 차가 좋습니다. 차를 탈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 말을 하고 둘은 서로를 보면서 크게 웃었다.

 

모친이 가는 곳은 항상 따스한 기운이 넘쳤다. 그녀는 약소한 사람들을 동정했고, 설중송탄(雪中送炭, 눈이 올 때 땔감을 보내주다. 힘들때 도와준다는 의미임)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큰아버지네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다섯째누나 계영(桂英)이 미움을 받았다. 계영은 반항아였고 고집이 세서 항상 얻어맞았다. 모친은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계영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키워주었고, 우리와 같이 대했다.

 

한번은 한 후배가 우리 집 송강로(松江路) 127호로 모친을 찾아왔다. 그녀의 부친은 이전에 대륙에서 고위관료였고, 명성이 대단했었으며 상해의 집도 대단해서 타고 다니는 차가 캐딜락이었다. 나중에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아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대만에서는 빠듯하게 살고 있었다. 후배는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온몸이 땀투성이었으며 게다가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 모친은 그것을 보더니 그녀를 끌어안고, "동생, 어떻게 임신한 몸으로 자전거를 타는가?"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모친은 집안이 몰락한 그녀를 안타까워했고, 그녀 집안의 처지를 동정했다.

 

1955년 2월하순, 부친과 모친의 결혼30주년이었다. 이는 그들 두 사람에게 함게 30년을 지낸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부친은 62세, 모친은 52세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이제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살아갈 터였다.

 

그날, 부친과 모친은 한껏 꾸민다. 부친은 소매에 붉은 색의 꽃을 달았고, 모친은 머리에 큰 붉은 꽃을 달았다. 두 사람이 가장 멋진 모습으로 등장했고, 희기양양(喜氣洋洋)했다. 그날 친구, 옛부하들이 모두 왔다. 저녁식사때 모친이 먼저 말을 꺼낸다: "나와 백선생은 결혼한지 30년이 되었다. 우리는 '환난부부'라 할 수 있다.' 부친이 환난부부라는 말을 할 때 오열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그날 밤에 진심에서 우러나와 한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30년이 짧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 30년은 특히 길었다. 왜냐하면 그 30년간 두 사람은 함께 너무나 많은 우환, 너무나 많은 동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그렇게 복잡한 정치환경 속에서, 한걸음만 잘못 내딛었다면, 아마도 신패명렬(身敗名裂)했을 것이다. 군인의 처로서, 장군의 부인으로서 모친은 남다른 용기, 의지, 지혜, 견식이 필요했다. 그래야 각종 도전에 대응하며, 부친을 도와, 부친이 집안 일은 걱정하지 않도록 해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모친은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그 일들을 모두 해낸 것이다. 부친은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친에 대하여는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부친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날 저녁 부모님이 꼭 끌어안고 있던 일막은 정말 감동적인 '환난부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