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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일본은 남경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3. 2. 6.

글: 모유화설(毛有話說)

 

남경대학살은 2차대전때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범한 비인간적인 죄행이다. 1937년 12월 23일 남경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학살을 시작한 때로부터, 국제여론의 광범위한 주목과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38년 2월 11일 <대공보>는 사론 <적군기율문제의 본질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남경등지에서의 살륙강간은 인류역사상 부끄럽고 슬픈 한페이지이다. 일본군벌의 본질은 무한한 침략이고 그 침략수단은 이런 간음살인방화약탈이다. 전세계 백인과 일반 유색인종은 모두 이는 인류공동의 대적이라고 인정한다. 하루빨리 전세계의 정신을 동원하여 공론의 권위로 일본의 선량한 인민들이 깨닫게 함으로써 잔혹한 군벌들이 제재받도록 해야 한다.

 

다만, 전시에 군부의 신문출판에 대한 검열등의 원인으로 일반일본국민들이 '남경사건'을 알게 된 것은 이미 태평양전쟁이 후였고, 어느 정도 사건발생의 원인과 과정을 알게 된 것은 전후였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도대체 남경대학살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본문에서는 남경대학살의 역사적 사실 자체는 논의하지 않고, 일본사회와 보통일본인들이 남경대학살역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하여 대체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변화의 배후에 있는 사회사조와 국민심리의 흐름을 알아보고자 한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3가지이다: 기념비적이거나, 골동식이거나 비판식이다. 그의 뜻은 이러하다. 역사는 계속하여 사람들에 의하여 고쳐 쓰여졌다. 현대사학자이자 일본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국내에서 남경대학살에 대한 연구는 3개의 파로 나눌 수 있다. 체제파, 반체제파 및 '양자의 중간에 끼어있으면서 철저하게 실증을 통해서 연구를 진행하려고 하며 '골동식'으로 인식되는 역사가.' 하타 본인이 바로 마지막 파의 대표적 학자이다. 비록 그의 관점은 비교적 전형적인 소위 '자유주의사관'이지만 역사상대화의 위험이 없지 않다. 다만 본질적으로 보면, 여하한 역사고 일종의 역사이야기로 귀결된다. 일본국내의 남경대학살 논쟁사는 확실히 집권당과 재야당(여야간의 투쟁), 보수와 혁신(소위 보혁투쟁)간의 투쟁사이다. 그러다보니 냉전이데올로기와 중일관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1. 전시부터 동경재판까지: 논쟁이 없었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2차대전때의 일본은 군부가 극히 엄격한 신문출판검열을 진행했다. 군인의 폭행은 기실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이 모두 관련정보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전선최고지휘관인 상해파견군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이 해직되고 강제귀국당한 것도 기실 이와 관련이 있다. 마쓰이는 귀국전에 부하들에게 한 훈화에서 비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남경성에 진입할 때의 심정은 자부심이 넘쳤다. 다음 날 추도회에서의 심정도 자부심이 넘쳤따. 오늘은 가슴 가득 비분이 차있다. 왜냐하면 오십일동안 많은 금기를 범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사건은 사망장병의 공훈을 크게 훼손시킨다. 우리가 어떻게 영령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하여 확실한 것같다. 다만 마쓰이는 추가로 책임을 추궁받지는 않고, 그가 면직당한 사실도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정부와 군부는 국제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남경사건'에 관한 모든 보도를 봉쇄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1945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 연합군에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포츠담선언>에서는 "우리의 포로를 학대한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전범은 반드시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어, 정부와 군부는 전쟁책임을 추궁당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일체의 증거를 소각하는 것이었다. 학자 요시다 유타카(吉田裕)는 <패전전후공문의 소각과 은닉>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육해군중앙기관, 정부각성청부터 시정촌공소까지, 모두 군사관련문건의 소각을 명령받았다. 가장 철저했던 것은 육군이다. 참모본부 총무과장과 육군고급부관은 모두 모든 육군부대에 기밀문건자료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헌병사령부는 8월 14일, 15일 이틀간, 그리고 8월 20일까지 각 헌병대에 비밀문서자료소각지시를 하달하고, 소각업무는 극히 주도면밀하게 진행된다. 군부는 각 신문사에 압력을 가하여, 전쟁관련한 모든 문자와 사진을 소각할 것을 요구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진행한 것은 "남경사건'과 관련한 자료였다. 역사학자이며 우쯔노미야대학 교수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일찌기 표지만 남아 있는 남경학살을 기록한 문서를 본 적이 있다. "안의 관련내용부분은 소각되거나 은닉되었다." 이는 나중에 사건의 원래모습을 복원하는데, 특히 사망자수를 조사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가장 직접적인 손실은 동경재판이다. 공문서자료와 개인전쟁일기등 1차적자료의 부족으로, '남경대학살'의 사법심리는 부득이 피해자의 증언과 서면자료에 의존해야 했다. 거기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과장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향후 남경대학살부정론이 나타나는 화근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부 일본인들의 사상의식속에 부정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상황은 일본측에 불리한 일면도 있었다. 군부수뇌와 정부지도자들이 피고인석에 올라갔으므로, 만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자가 일본인이라면 '이적행위, 반도', '자기 사람을 배신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을 수 있어, 일본인은 강제로 법정에 끌려나오더라도 대규모 살륙 소위 '남경대학살'이 없다고 증언했고, 마쓰이등은 모두 현장에 없어서, 책임이 없다는 등으로 증언했다. 그외에 일본측은 여하한 '남경사건'의 참혹한 정도를 경감시킬만한 유효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그 결과, 동경재판은 기본적으로 중국측 피해자의 일방적인 증언, 증거를 기준으로 사실인정을 하게 되고, 판결문에도 직접 기재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조례>(1946년 1월,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가 공표함)와 직접증거법에 의해, 동경재판은 일본전범에 대하여 고발한 것은 주로 3가지 죄명이다: 반평화죄, 일반전쟁죄 및 반인도죄. 남경대학살은 뒤의 두 가지가 적용되었다. 일반전쟁죄는 중일양국이 모두 가입한 국제 <헤이그육전규칙>을 위반하여 포로, 투항군인과 일반시민을 도살하도록 명령하고 제지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책임추궁이다; 반인도죄는 비전투인원을 살해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이고, 이번이 나치독일전범을 처벌한 <뉴른베르크재판조례>에 근거했다. 전체 동경재판과정에서, 법정에 출석한 증인은 모두 40여명이고, 그중 1/4은 남경대학살과 관련하여 법정에 소환된 것이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소검찰관이 남경대학살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동경재판에서, 기소검찰관에 의해 '남경대학살'에 책임을 부담해야할 갑급 전범혐의자는 3명이었다: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전수상)과 무토 아키라(武藤章, 전화중방면군부참모장). 최종적으로 유죄로 판결되어 교살형에 처해진 것은 마쓰이 이와네와 히로타 고키였고, 무토 아키라는 무죄로 판결된다. 최대의 촛점은 사망자수의 인정이었다. 이와 동시에 남경재판(중화민국정부의 전범군사법정)에서 을,병급 전범피고인인 다니 히사오(谷壽夫, 전제6사단장), 다나카 군키치(田中軍吉, 전제6사단중대장)과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다케시(野田毅, 두 사람은 모두 제16사단보병제9연대의 위관장교로 100인참수경쟁을 벌였음)로 4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집행된다. 남경재판의 기소측이 인정한 것은 "최소30만명이 남경에서 일본부대에 의해 집단학살당했으며, 하나하나 참혹하게 죽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경재판에서 남경대학살의 피살자수를 인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비록 동경재판에서 중국검찰관이 "43만"이라는 숫자를 제시한 바 있지만,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채택한 숫자는 "20만이상"이었다. 그리고 마쓰이 이와네의 개인 반인도죄행과 관련하여 인정된 것은 "10여만명이 살해되고, 수천명의 부녀가 강간당했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피해자의 증언과 증거앞에, 동경재판군사법정은 '대학살'의 사실을 인정하는데 거의 아무런 곤란이 없었다. 동경재판의 법리적 근거에 대하여 의문을 계속 표시하면서(소위 '사후법'이라는 것이다),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을 25만자로 쓴(소위 <팔판결문> 합게 1,235페이지) 인도법률가 라다 비노드 팔 법관도 학살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논쟁은 단지 '사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냐에 있었다. 그중 비교적 대표적인 변호인측 주장은 소위 "20만인구설"이다. 즉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기 전에 남경시의 인구는 20만명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 아니라면, 20만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대학살부정론의 주요근거가 된다.

 

다만, 동경재판은 어쨌든 미국점령군이 주도하는 정치재판이다. 일본은 일부 기술적인 층면에서 서로 다른 인식, 주장을 가지고 있고, 법정에서 항변했지만, 남경대학살의 성격과 사실 자체는 법정판결결과를 받아들였다. 하물며 논쟁에도 논쟁할 실력이 필요하다. 피점령상태인 일본이 아무리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 있어서 원래 동경재판을 '일본인재교육'의 일환으로 여겼고, 일본의 비군사화, 민주화개조를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법정이 열리자, 철의 장막이 내려지고, 냉전이 급격히 진행된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교두보'로서 지연전략에서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전쟁책임을 철저히 추궁하려는 열정은 냉전이라는 현실에 양보하게 된다. 일본의 재무장과 반공국가화가 시급한 임무가 되어 버린다. 미국이 시작할 때는 기개당당하게 하였지만, 마지막에는 흐지부지된 것도 이것때문이다. 이런 정책전환의 결과로 원래 '재교육'의 도구로 사용할 예정이었던 '남경대학살'을 포함한 동경재판의 사료, 자료는 공개가 계속 늦추어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공미디어에 제공되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남경대학살이 일본의 '국민기억'이 되지 못하고, 나중에 '부정론', '환영론'이 나타나도록 만든 사회심리의 기초를 만들어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쟁하지 않는 것은 논쟁하지 않는 것이고, 그때는 아직 '부정론'이 형성되지 못했다. 남경대학살의 역사에 대한 역사서술과 문학표현은 여전히 금기시되었다. 전시에 작가 이시가와 다츠조(石川達三)이 소설 <살아있는 사병>에서 '황군병사의 비전투인원살륙, 약탈과 군기문란상황을 기술하여 안녕과 질서를 교란시켰다'는 이유로 군부의 처벌을 받고 연재가 중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1945년말, 가와데쇼보우신샤(河出書房新社)가 출판하여 5만권을 발행하여 베스트셀러가 된다. 동경재판을 전후하여, 미국, 일본외교관의 회고록도 출판되었다(예를 들어 이시이 이타로(石射猪太郞)의 <외교관의 일생>, 조셉 그루의 <일본체류10년>등). 모두 남경대학살을 기록했다. 1950년대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남경대학살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모란>(<문예> 1955년 7월호에 발표)을 쓴 바 있고, 홋타 요시에(堀田善衛)도 같은 주제의 소설 <시간>(신조사. 1955년)를 쓴 바 있다. 즉, 그때의 신문출판계에서 '남경사건'을 보도하고 표현하는 것이 금기시되지 않았다. 금기시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으로 정확한 입장이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1955년이후이다.

 

2. "55체제"에서 60년대까지: 봉쇄와 투쟁

 

1955년은 일본당대사의 분수령이다. 2월 중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 좌파가 대거 약진하고 인기를 얻는다; 10월, 한때 분열상태이던 사회당 좌우파가 연합을 하여 국회에서 중요한 정치역량이 된다. 사회당이 주도하는 좌익 '혁신'세력의 급속한 대두에 대응하기 위하여, 11월, 2개의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수합동'을 실현하고 합병하여 자유민주당(간칭 자민당)을 결성한다. 이렇게 하여 자민당이 여당이 되고, 사회당이 제1야당이 되는 구도가 '버블경제'붕괴시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55년체제"의 유래이다.

 

이 시기에 일본경제는 고도성장기를 구가한다. "55년체제"의 비호하에, 자민당우익을 대표로 하는 '중도보수노선'이 힘을 얻고, 경제성장으로 방대한 중산층이 형성되고, 냉전의 '교두보'라는 지연전략적 위치는 주류사회의 문화 이데올로기를 '반동, 보수'로 이끈다.

 

이런 분위기변화로 인한 첫 변화는 교과서문제에 반영된다. 전후, 일본은 전전의 교훈을 받아들여 민주주의가치를 지향하는 <교육기본법>이 제정되었다. 1949년부터, 교과서의 편찬업무를 민간에 넘긴다. 비록 여전히 교과서심의제도는 있었지만, 심의대상은 주로 내용이 아니라, 책의 오탈자등 편집착오와 숫자착오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데올로기는 점점 보수화한다. 1955년이전에 민간출판사가 발행한 초중고 역사교과서이건 아니면 문부성이 발행한 <일본역사>교과서이건 모두 '남경폭행사건'을 기록했다. 다만, 1955년, 당시의 민주당이 역사교과서의 '편향'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음 해, 문부성내에 소위 '교과서조사관제도'를 두고, 공공연히 내용과 관련표현의 '정도'에 간여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3.1운동'의 활동분자를 '폭도'로 적게 하고, '침략'을 '진입', '진출'로 고치게 하는 등이다. 그리고 여러 판본의 역사교과서는 '남경사건'에 대한 기술을 단지 '남경공략'이라는 표현에 그쳤고, 학살, 강간등 폭행은 언급할 수 없었다(예를 들어 대판서적 1955년판, 동경서적1964년판등), 당시의 좌파'혁신'여론에 의해 '문부성사관'이라고 비난받는다. 이것이 제1차교과서문제이다.

 

1962년 역사학자이자 동경교육대학 교수인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가 주편한 역사교과서 <신일본사>(삼성당출판)는 '

남경사건'의 묘사에서 '남경대학살'(Atrocity)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하여, '전쟁에 대한 표현이 지나치게 음암(陰暗)하다'는 이유로 문부성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 비록 나중에 수정하여 다음 해의 심의에는 통과되었지만, 이에나가는 '문부대신의 조치로 개인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문부성을 법원에 제소하며 국가배상을 청구하여, 개인과 국가간의 오래 시간을 끄는 소송전이 벌어진다.

 

전체 1960년대에는 이에나가 사부로를 포함한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국가권력 및 주류이데올로기와 끈질기게 투쟁했다. 비록 전체적인 분위기는 억압적이었지만, 그래오 여전히 어려움 속에서도 노력과 추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권위있는 <아시아역사사전>(10권본. 평범사. 1961년)은 '남경사건'이라는 항목에서 7줄에 달하는 기술을 했다; <매일신문>기자인 고토 히로사쿠(五島廣作)의 <남경작전의 진상>(동경정보사. 1966년); 역사학자이자 와세다대학교수인 호라 토미오(洞富雄)의 <근대전사의 수수께끼>(인물왕래사.1967년)등 저작이 있다. 모두 '남경사건'에 대하여 '남경대학살'로 부르고 있으며, 그 시기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만, 이와 도잇에 경제발전으로 일본이 자신감을 회복한 후, 전쟁역사기억은 점점 잊혀지게 되고, 일부 우익학자는 보수이데올로기에 의해 동경재판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하야시 후사오(林房雄)의 <대동아전쟁긍정론(정, 속)>(번정서방. 1964. 1965년)이 있다. 투쟁은 날로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3. 1970년대: 좌우대결

 

1972년 2월, 미국대통령 닉슨이 북경을 전격방문한다. 미중이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일본이 자극을 받아 급격히 추격하여 오히려 그해 9월 미국보다 앞서서 중국과 수교한다. <중일공동성명>에서 중국측은 "중일양국인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요구를 포기한다"고 하였고, 일본측은 "과거 전쟁이 중국인민에 조성한 중대한 손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심각한 반성을 표시한다"고 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마침내 장기간의 '비정상상태'를 벗어나, 화해국면에 들어선다. 대중경제무역, 문화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전쟁책임문제가 다시 한번 여론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지식계에서는 논쟁의 촛점이 된다.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좌파여론의 본산인 <아사히신문>기자 혼다 가츠이치(本多勝一)은 중국내지를 취재한다. 조사보고서를 먼저 신문에 연재하고 나중에 책으로 출판한다. 즉 <중국지려(中國之旅)>(아사히신문출판사. 1972년)이다. 이 유명한 비허구작품은 냉정한 신문전문인의 필법으로 일본군이 중국대륙에서 범한 여러가지 죄행을 까발린다. 평정산사건, 인체세균실험, 안산마그네사이트광산의 만인갱(萬人坑), 강제노역, 삼광정책등등. '남경대학살'에 관하여는 기자가 이틀의 시간을 들여 4명의 피해자를 인터뷰하고, 그들이 말하는 당시의 참상을 듣는다...이처럼 생생한 신문의 조사는 전후소비주의문화에 빠져 살고 있던 선진자본주의국가의 독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준다. 이어서, 혼다 가츠이치는 다시 두 부의 '남경대학살'을 주제로 한 저작을 내놓아, 일본의 국가범죄를 까발려 신문출판계의 '남경붐'을 불러일으킨다. 일시에 주류매체와 항간에는 많은 보도와 책의 제목에 '남경대학살'이 눈에 띄게 자극적으로 붙어 있게 된다. 이는 이전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현상이다.

 

다만 이와 동시에, 남경대학살에 대한 부정론도 점차 강화된다. 혼다 가츠이치의 <중국지려>가 출판된 후, 그중 무카이 소위와 노다 소위가 남경에서 '백인참(百人斬, 백명의 목을 베는)'경쟁을 했다는  것에 대하여 스즈키 아키라(鈴木明)라는 우익작가는 <남경대학살의 환영>이라는 책을 써서 공공연히 이 두명의 무카이와 노다가 을,병급전범으로 처형된 것이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백인참으로 상징되는 '남경대학살' 자체는 '환영(幻影)'이며, 철두철미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책이 출판되자 상당히 팔리고 또한 오야소이치(大宅壯一)비허구문학상(제4회)까지 받는다. 나중에 두 명이 전범의 후예를 부추겨서 명예권소송을 벌이는 해프닝까지 일어난다. 그 목적은 첫째, 전후미국이 주도한 자유민주주의가치를 전복시키려는 것이고, 둘째, 민중들에게 중일수교정상화를 전후하여 나타난 일본침략 및 가해역사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는 동향에 대한 거부감과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우익도 자신의 정치세력과 여론진지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론과 주장도 확대, 전파된다. 한동안 반쯤 숨어서, 혼잣말로 떠들던 '부정론'이 확대되고 날로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이제 자유주의와 우익보수의 두가지 완전히 대립되는 사조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고, 양측 모두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대치국면에서 승부는 별론으로 하고, 이로 인해서 나타난 하나의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는 '남경대학살'이 '금기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1970년대초부터, '남경사건'은 점차 정계와 역사학계의 분야로 들어오고, 일본민중이 널리 알게 되고, 대중매체가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이슈가 된 것이다. 중학교와 초등학교 교과서의 기술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남경대학살'이라는 용어가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각종 학술간행물이나 공공매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남경사건'이라는 용어와 혼용되는 역사명사가 되어 버렸다.

 

4. 1980년대: '남경대학살' 대논전

 

1980년대는 전체적으로 중일관계의 '밀월기'였다. 다만 동시에 교과서문제, 일본정계요인의 야스쿠니신사참배문제등 정치적 파장도 있었다. 특히 1980년대초 역사교과서문제는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중국에서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남경대학살의 역사기억을 다시 깨어나게 만들었다. 1985년, 남경대학살기념관(전체 명칭은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으로 등소평이 직접 글을 썼다)이 준공되고, "사망자 300000"이 중국어, 일본어, 영어의 3가지 문자로 기념벽에 새겨졌다. 대학살과 사망자수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사회는 오래동안 대논전을 벌이게 된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주로 3가지 대표적인 관점이 있다. 즉 본문의 맨앞에서 소개한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가 말한 소위 "체제파", "반체제파" 및 "양자의 중간에 끼어있으면서 철저하게 실증을 통해서 연구를 진행하려고 하며 '골동식'으로 인식되는 역사가"가 있다. 비교적 통속적인 표현대로 하자면, "학살파(반체제파)", "중간파(골동파)"와 "부정파(체제파)"가 있다. 

 

"학살파"는 "대학살파"라고도 부른다. 주요 대표학자는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혼다 가츠이치(本多勝一),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호라 토미오(洞富雄)등이다. 하나같이 일본의 "반체제파"학자들이다. 사망자수의 인정에 있어서, 이 파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측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접근한다. 예를 들어, 가사하라 도쿠시는 '호라 토미오의 '20만명보다 적지 않은 중국군민이 희생되었다'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있다"고 말한다; 혼다 가츠이치는 직업기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신문기자로서 중국측의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중간파"는 "중학살파" 혹은 "과소평가파"라고 부른다. 주요 대표학자는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등이다. 이 파는 '반체제파'학자가 아니지만 학살사실을 부인하지도 않는다.(하타의 말을 빌리면 4만명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학살은 학살이다). 다만 실증적인 방법으로 역사사실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면 하나이고, 둘이면 둘이다." 그들은 사망자수를 1.3만명(이타쿠라)에서 4.2만명(하타) 사이로 본다. 

 

"부정파"는 일본의 '체제파'학자들이 많다. 극단보수주의를 대표한다. 여기에는 스즈키 아키라(鈴木明),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등이다 '환영파'도 이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그들은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다. 중국측의 '백발삼천장'식의 문학적 과장, 정치적 선전이며, 미국중국의 함정이고 환영이며 허구라고 본다. 이 파의 특징은 무조건 부인하면서 숫자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개적인 변론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떤 때는 부득이 "예를 들어 3,000명에서 6,000명을 죽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대파에 의해 "그건 설마 학살이 아니란 말이냐?"라고 약점이 잡혔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대한 논리상 남에게 책잡힐 리스크는 안지 않고 단지 "성격을 부정"만 하지 "숫자를 얘기하지 않는다"

 

이번 대논전은 최종적으로 '학살파'(중간파 포함)의 승리로 끝난다. 부정파는 패배한다. 오늘날, 비록 구체적인 숫자상으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지만, 최소한 수만에서 십만이상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피살당했다는 것은 이미 일본학계와 매체계의 주류견해가 되었다. 각 대형출판사에서 여러종류의 남경대학살 사료집을 출판했는데, 그중 절대다수는 '학살파' 학자의 편찬이다. 각종 역사교과서에서 '남경대학살'의 기술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기술하지 않는 것과 부인하는 것이 문제이다. 마땅히 1980년대의 대논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주류사회의 입장은 아주 강한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어서, 뒤집어지기 쉽지가 않다.

 

5. 1990년대이후: 역류도 대추세를 뒤집기 어렵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헤이세이(平成)'으로 연호가 바뀌고, '버블경제'가 붕괴되며, "55년체제"가 종식되고, 중국이 굴기했다...일본의 국내환경과 지연형세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일본인의 초조감은 더욱 강해졌다. 이런 상황하에서, 남경대학살을 둘러싼 문제는 다시 한번 약간 역류와 회조(回潮)가 일어났다. 예를 들어, 보수파 정치단체인 "역사검토위원회"는 <대동아전쟁의 총결>(전전사. 1995년)라는 책을 내놓고, 침략역사를 부인했다; 중국영화 <남경1937>(오자우 감독, 1995년)의 일본상영을 저지한다; 새로운 교과서문제(1997년); 우익분자의 남경대학살자료집을 낸 출판사인 아오키서점공격사건(1999년)등등이 있었다. 그러나 주류사회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뿐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 속속 결심하고, 모두 '학살파'의 승소, '부정파'의 패소로 끝난다. 예를 들어, 이에나가 사부로가 문무성을 제소한 사건, '백인참'경쟁의 두 장교 후순이 혼다 가츠이치를 제소한 사건, 가짜피해자가 남경대학살 생존자 이수영(李秀英)여사를 제소한 사건등등. 가사하라 도쿠시는 이를 근거로 "이는 남경사건논쟁이 사법계에서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의 주류매체에서, 공공연히 남경대학살을 부정하는 언론은 찾압기 힘들다. 교과서제도도 상대적으로 '자유화'되어 서로 다른 입장의 학자들이 편찬을 주재한다. 다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내용도 심의를 통과하기 어렵다. 그리고 설사 심의를 통과하더라도 시장(학교)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예를 들어, 2000년 4월, 보수파일색인 '편찬위원회'가 쓴 <신역사교과서>는 문부과학성에 제출되었지만, '남경대학살'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수정해야만 했다. 수정후의 내용은 비록 여전히 애매하였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심의를 통과한다. 그러나, 2002년 4월 신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중학교육현장에서 '편찬회'판 역사교과서의 예매수량은 겨우 521권이었다. 채용율이 0.039%에 불과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입장이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공정함을 견지한 '동경서적'판 교과서의 채용율은 51.2%에 달한다. 정치적인 움직임에 따라 이후에도 새로운 역류와 회조가 나타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남경대학살의 역사인식과 기술에서 대폭 후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사하라 도쿠시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학계와 전체 학술계에서, 남경사건에 대한 논쟁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이 결과를 존중하도록 요구하고, 정치적으로 결정을 내려달라는 의견은 계속하여 자민당정부와 보수파정치가들의 반대에 부닥치고 있다." 그러므로, 남경대학살은 역사문제라기보다는 정치문제이다. 쌍방은 이 문제에 더 이상 큰 마찰음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중일관계가 삐걱거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할 점은 중일양국의 민주화정도와 문명정도가 접근하게 되면 남경대학살 역사문제상의 이견이 봉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일양국은 어쨌든 제도와 문화가 다르고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입장차이가 있다. 역사관의 일치를 억지로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교적 현명한 방법이라면 "구대동(求大同), 존소이(存小異)"하는 것이다. 즉 큰 원칙의 틀내에서, 역사의 구체적인 진실과 수치의 접근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억지로 상대방에게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남경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손택외(孫宅巍)는 이렇게 지적한다. 남경대학살의 역사연구에서 "3개의 오구(誤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즉, 영원불변의 숫자, 더욱 정확한 숫자와 더욱 많은 숫자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본군이 남경에서 광범위하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사실만 인정한다면 사망자수량문제는 나중에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침략자가 중국에 미치광이식의 학살을 진행한 사실만 인정한다면, 남경이ㅡ 중국사망자수량같은 민감한 문제는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손선생의 의견에 받아들일만한 건설적인 부분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