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중공특과(中共特科)": 비밀조직의 진실한 이야기

중은우시 2023. 2. 14. 23:22

글: 원천(源泉)

 

오늘 이야기나눌 것은 역사상의 "중공특과"이다. 이 조직은 중국공산당사에도 애매모호하게 기록한 신비스러운 조직이다. 

 

공산당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소련이 아직 설립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건립초기 심각한 생존위기를 맞이한다. 내부의견이 분열되고, 반대당은 강력했으며, 여러 방면에서 짜르체제를 옹호하는 전통역량이 있었다. 이때 레닌의 주도하에 볼셰비키당에는 "체카"라는 특무조직을 두어, 암살과 테러활동을 벌이는데, 극히 잔혹하고 극단적인 수단으로 반대파와 경쟁상대를 제거한다. 최종적으로 공산세력이 집권당이 된다. 그리고 소련공산당을 그대로 복제한 중국공산당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대륙의 저명한 다큐멘터리작가 왕판(王凡)이 최근 출판한 <역사의 세부사항을 듣는다>에서 여러 당사자들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의도는 진실되고 정확한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그중 "중공특과"라는 비밀조직에 관해서도 여러 상세한 기록이 있다. 

 

"중공특과"의 베일을 벗기다.

 

'중공1대'가 상해에서 거행되고, 이때부터 중공중앙기관은 다수가 상해에 설치된다. 1926년 여름, 북벌군이 무한(武漢)을 함락시킨다. 장국도(張國燾)의 제안에 따라, 중공중앙기관은 혁명의 전선과 중심인 무한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후 "영한합류(寧漢合流)"가 나타나고, 왕정위(汪精衛)는 "천명 백명을 잘못 죽이더라도, 한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면서 중공당원들을 체포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중공기관이 무한에 자리잡기는 어려워진다. 그리고 당시 상해는 '특구'여서 인구도 많고, 유동도 빨라, 호구조사를 하지 않아, 집을 임대하거나 업무를 처리하기가 모두 편리했다. 게다가 중공은 상해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 연락망과 관계망이 좋았다. 그래서 결국 지도자들은 다시 중공중앙기관을 상해로 다시 옮기기로 결정한다. 

 

당시 상해는 풍성학려(風聲鶴唳)의 때였다. 그래서 상해에 설립된 중공중앙특과는 리스크가 아주 큰 비밀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특과의 전신은 중앙군사위 직속의 특무공작과(特務工作科)이고, 과장은 고순장(顧順章)이다. 그 아래에 특무고(特務股), 정보고(情報股), 보위고(保衛股)와 토비고(土匪股, 토비들과의 연락을 책임짐)가 있었다. 중앙기관이 상해로 되돌아온 후, 특과는 중앙특별위원회가 지도하게 되며 주은래(周恩來)가 직접 지휘하게 되며, 고순장은 실제업무책임을 맡는다.

 

해외에 발표된 폭로글에 따르면, 경험과 실적이 없는 주은래가 왜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원인은 황포군관학교의 유일한 자금지원자였던 소련공산당의 정보책임자가 주은래를 극력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은래는 일찌감치 특과의 우두머리였고, 소련과의 통신을 맡았다. 이는 그가 소련공산당에서 학습하는 동안 이 분야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특과는 4개의 과로 나뉘어진다:

 

1과는 총무과로, 총무를 책임진다. 예를 들어 임대주택을 선정하고, 회의장소를 선정하고, 재무를 관장하는 등.

 

2과는 정보과이다. 정보과는 1928년 4월에 설립되며, 초대과장은 진갱(陳賡)이다. 그는 특과의 실제책임자인 고순장의 부수(副手)였다. 2과의 주요임무는 각종정보를 수집하여 적시에 적의 상황을 파악하고, 적의 정보기관에 역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진갱의 기획과 배치로 많은 공산당원들이 비밀리에 국민당의 정보기관에 잠입한다. 전장비(錢壯飛)는 국민당조직부 당무조사과 주임 서은증(徐恩曾)의 기요비서(機要秘書)가 되고; 이극농(李克農)은 상해의 국민당특무정보기구의 실제책임자가 되며; 호저(胡底)는 국민당 화북정보망의 실제책임자였고; 송재생(宋再生)은 국민당 송호경비사령부의 정치밀사원(政治密査員)이었다. 진갱의 작업을 통해 국민당중앙의 주상해특무기구 특파원 양등영(楊登瀛)도 책반을 통해 중공특과의 '내선(內線)'이 된다.

 

3과는 행동과이다. 과장은 고순장이 직접 맡았다. 3과의 주요역량은 현재 신비롭게 묘사되는 '홍대(紅隊)'이다. 주요임무는 중공중요지도자의 안전을 보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의보안, 체포된 지도자구출, 적의특무 및 중공의 반도를 암살하는 것등이다.

 

4과는 교통과이다. 과장은 이강(李强)이다. 주요임무는 상해 및 전국각지의 비밀교통망의 정상운행을 책임졌다. 동시에 중공의 최초 지하무선기지를 책임졌다. 만일 중요한 회의를 개최하게 되면 4과는 인원호송과 회의문건의 전달을 책임졌다.

 

중공의 중앙기관에는 방대하고 복잡한 조직들이 있었다. 회의를 책임지는 조직, 문서를 책임지는 조직, 보위를 책임지는 조직, 각지와의 교통연락을 책임지는 조직등 많은 업무인원이 있었다. 상해의 형세는 아주 준엄했고, 군경이 곳곳에 깔려 있으며, 숨은 정보요원들도 여기저기 있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었다. 많은 공산당원들은 체포후에 속속 '변절'했다. 그리고 더 많은 지하당원과 업무조직들이 일망타진되곤 했다.

 

중공이 상해에 둔 조직이 연이어 파괴되자, 상해에서 업무를 주재하던 주은래는 비밀기관을 사회화함으로써 은폐하는 아이디어를 낸다. 즉 설립한 업무조직을 공장, 상점,학교등 단위의 형식으로 엄호하는 것이다. 업무인원은 서로 다른 유형의 가정으로 꾸며서, 많은 '혁명반려'도 이때 업무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조합되고, 바꾸어지곤 했다. 

 

실패한 구출과 성공한 암살

 

중공특과 3과의 담충여(譚忠餘)는 '홍대'의 주요책임자중 하나이다. 3과 과장 고순장과 같은 고향사람이며 부수(副手, 2인자)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영향력이 컸던 "백흠(白鑫)암살행동"에 참여했다.

 

1929년 7월, 중공중앙군사위 비서 백흠이 비밀리에 국민당 상해시당에 자수한다. 그리고 국민당에 중공중앙 고위층책임자들이 8월 24일 신갑로(新閘路)에서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린다.

 

국민당 상해시당 및 공안부는 조계의 순포방(巡捕房)과 공동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중공중앙 정치국위원 팽배(彭湃), 정치국후보위원 양은(楊殷)등 5명을 체포한다. 이목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백흠도 함께 체포한다. 곡이어 특공조의 엄밀한 보호를 통해 중공 '홍대'의 암살을 막고자 했다. 

 

당시 중앙군사위서기인 주은래는 그날 저녁 특과책임자회의를 소집하여 구출작업을 개시한다. 중공특과는 국민당고위관료 양등영이라는 내선을 통해 팽배등이 체포된 것은 백흠이 국민당에 투항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특과는 이 내선을 통해 8월 28일 죄수들을 구류소에서 용화의 송호경비사령부로 압송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주은래는 특과전체가 출동하여, 풍림교(楓林橋)에서 호송차량을 무장납치하여 사람을 구출하기로 한다.

 

8월 28일 새벽, '영화촬영조'인원이 풍림교 주변에서 영화를 찍는 모습을 취한다. 지나가던 행인과 상인들도 평소보다 많았다. 이들은 모두 홍대인원들이 변장한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자전거를 타고 총기를 실은 상자를 가지고 현장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총기를 배달하는 인원이 늦게 도착했고, 곧이어 죄수호송차량이 지나가 버린다. 그 신비하고 용맹하다는 '홍대'의 대원들은 총구의 '황유(黃油)'도 미처 닦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건 완전히 실패한 '구출'작전이다. 팽배등은 8월 30일 총살형을 당한다. 주은래는 특과에 명령하여 반드시 백흠을 죽여,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지 보여주라고 한다.

 

백흠은 중공의 수단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홍대'의 암살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엄밀한 보호하에 바깥출입을 삼갔다.

 

그러나, 9월초, 백흠은 돌연 달생의원(達生醫院)에 나타난다. 원래 그는 병치료를 위해 의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는 원래 주치의인 가린(柯麟)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다만 가린이 비밀공산당원인지는 몰랐다. 이 병원은 중공의 연락거점이었던 것이다. 가린은 약처방을 내려준 후, 백흠을 병원에 남아 있게 한 후, 자신은 외출하여 소식을 전한다. 백흠은 의사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여겨 경계심이 생겼고, 인사도 하지 않고 병원을 떠난다. 그후에는 다시 병원을 찾지 않는다. 이렇게 특과의 병원에서의 암살행동도 실패로 끝난다.

 

시간이 다시 한달여 지나간다. 비밀내선인 양등영이 소식을 전해온다. 백흠이 11월 11일 이탈리아로 간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들은 후, 고순장은 인원을 데리고 그가 공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야할 길에 매복하여 백흠을 권총으로 사살해버린다.

 

고순장은 '공산당원색출전문가' 채맹견(蔡孟堅)'과 만나다.

 

그후, 중공조직은 상해에서의 처지가 더욱 힘들어지고, 기반을 잡기 어려워진다. 조직구성원들도 소비에트구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당시 향충발(向忠發), 주은래, 장문천(張聞天)등은 강서소비에트구로 가고, 장국도, 심택민(沈澤民)등은 악예환(鄂豫皖, 호북, 하남, 안휘)소비에트구로 가기로 의결한다. 

 

특과의 실제책임자인 고순장은 장국도를 호송하여 상해를 떠난다. 고순장은 원래 상해의 남양형제연초공사의 노동자였다. 그는 입당후 소련으로 가서 정치보위를 학습한다. 귀국후 중앙정치보위국 국장이 된다. 상해의 3차에 걸친 노동자무장봉기때 규찰대의 총대장을 맡았었고, "87"회의때 정치국위원에 당선되었다.

 

상해에서 한구로 가는 길에, 장국도는 고순장의 도움으로 평안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구에 도착한 후, 고순장은 원래 머물기로 했던 연락거점이 국민당특무에게 의심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장국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한때 상해에서 유명했던 마술가 '화광기(花廣奇)'로 지낸 바 있고,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거두었었다. 그는 장국도에게 자신에게 마술을 배운 상인의 집으로 갈 것을 건의했는데, 장국도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때 중공의 호북조직은 이미 '공산당원색출전문가'로 불리는 특무 채맹견에게 정탐되어 파괴되었다. 중공 한구지구의 책임자인 우숭신(尤崇新)은 이미 조식기밀을 모조리 불었는데, 고순장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장국도를 악예환소비에크구의 교통원에게 넘긴 후, 자신은 즉시 상해로 돌아가지 않고, 손이 근질근질했는지 아니면 돈을 벌고 싶어서였는지, 한구로 가서 무대에서 마술공연을 한다. 그러자 우숭신이 그를 알아차려 체포되고 만다. 그가 가지고 다니던 마술도구도 그 자리에서 압수당한다.

 

고순장이 체포된 후,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난관을 벗어날 궁리를 했다. 그러나, 채맹견은 그의 신분내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었고, 반복하여 이해득실로 설득한다. 고순장은 태도를 바꾸어 즉시 장개석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장개석에게 중공요원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얘기한다. 그는 중공의 주무한교통지점, 악서근거지와 홍2군주한구판사처, 그리고 그를 도와 장국도를 호송한 교통원까지 모조리 진술한다. 그리고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남경에 전보로 알리지 말고, 자신을 하루빨리 남경으로 압송해달라고 한다.

 

아쉽게도 채맹견등은 공을 세우려는 마음이 조급하여, 고순장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직접 남경 국민당중앙당부에 전보를 보낸다. 그리고 고순장을 체포했으며, 그가 국민당에 협조하기로 했으며, 중공조직요원을 일망타진할 계획까지도 내놓았다고 말한다. 고순장은 며칠 후 이 일을 알았고,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고 발을 구르면서 연이어 탄색했다: "끝났다! 끝났어! 주은래를 잡을 수 없겠구나!" 채맹견등은 무엇때문인지 몰랐는데, 고순장이 비로소 그에게 알려준다. 국민당중앙당부특무우두머리 서은증의 비서가 바로 중공비밀당원이라는 것을.

 

많은 공산당원들은 기실 나중의 중공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용맹하고 겁이 없지 않았다. 유호란(劉胡蘭)의 이야기에서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많은 중공당원들은 체포후에 '변절'했다. 나중에 향충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모택동도 체포된 바 있고, 이로 인하여 다른 지도자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자신이 체포된 후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하여 가볍게 언급할 뿐, 상세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주은래가 탈당한 '오호(伍豪)사건'을 모택동과 주은래 본인이 모두 극단적으로 중시했다. 아마도 그건 괜히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모택동이나 주은래같은 급의 사람들은 생명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것을 상호투쟁의 핵심카드로 삼았다. 중공은 계속하여 주은래탈당성명의 '오호사건'은 국민당의 '위조'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사실이 어떠한지는 고증이 더 필요하다.

 

채맹견이 남경에 전보를 보낸 것은 4월 25일 주말밤이었다. 이때 서은증이 믿고 있는 기요비서 전장비는 사무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전장비는 바로 중공이 국민당에 심어놓은 특무이다. 전장비는 연속하여 6건의 무한수정주임공서의 절대기밀급전을 받아본다. 긜고 이극농이 서은증이 외출했을 때 몰래 찍어둔 암호책을 이용하여 급전의 내용을 알아낸다. 내용을 보고 그는 등에 식은 땀을 흘린다. 전보에 명명백백하게 쓰여져 있었다: 고순장이 이미 배신했고, 중공수뇌를 일망타진할 것이며, 곧 남경으로 압송된다는 것이다.

 

전장비는 고순장이 중공당내에서 어떤 지위와 직책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중앙수뇌의 보위업무, 모든 특무공작, 자신과 이극농등 특무의 첩보공작을 고순장은 다 알고 있었다. 만일 이 소식을 적시에 중공고위층에 전달해서 긴급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결과는 극히 엄중할 것이다.

 

그는 서은증이 월요일전에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반드시 짧은 시간내에 정보를 내보내야 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사위인 유기부(劉杞夫)를 불러 밤을 새워 특급열차를 타고 상해로 가게 한다; 자신은 남경에서 뒷마무리를 했다. 일처리를 마친 후, 그는 서은증에게 서신을 한통 남긴다. 서은증이 만일 자신의 가족을 해친다면, 서은증 개인의 사적인 일들을 모조리 사회에 까발리겠다고. 그 후에 그는 상해로 도망친다.

 

유기부는 26일 새벽 상해에 도착한 후, 즉시 이극농을 찾아간다. 이극농은 이 시급한 정보를 얻은 후에 정보를 책임지는 진갱에게 바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소의 연락인을 찾아내어 그에게 진갱에게 전하게 하고, 주은래에게 보고하게 한다. 

 

27일, 고순장은 남경으로 압송된다. 장개석은 바로 그를 접견하고, 그는 장개석에게 중공수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상세히 설명한다. 장개석은 즉시 조사과 정보고 총간사 장충(張忠), 당파견조 조장 고건중(顧建中)으로 하여금 특무인원을 데리고 상해로 가서 영국, 프랑스 순포방과 협력하여 중공수뇌를 체포하는 계획을 실시하게 한다.

 

그러나 28일 새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순장이 진술한 바에 따라, 중공중앙, 중공무선전보국소재지, 그리고 주은래등의 주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사람들은 모두 숨어버린 후였다. 원래 이 이틀동안 중공은 상해의 중요기관, 주요지도자들을 모조리 주은래의 안배하에 긴급히 이전시켜버렸던 것이다.

 

고순장은 체포행동이 실패한 것을 보고, 다시 그가 상해에서 이용가능한 관계를 찾는다. 그러나 주은래의 지휘하에 중공지하당은 그와 연락이 가능한 모든 연락선을 차단한다. 고순장의 일가족도 주은래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죽여버린다. 손님들까지도.

 

주은래의 말: 중공수뇌의 절개는 기녀만도 못하다.

 

고순장이 중공조직고위층을 박살내려는 계획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중공지하당은 큰 타격을 입는다. 구출작업을 진행하여 곧 출옥할 예정이었던 중공초기지도자 운대영(惲代英)은 고순장이 찾아내어 소주군인감독에서 총살해버린다. 6월, 그는 사람을 데리고 홍콩으로 가서 또 다른 중공초기지도자 채화삼(蔡和森)을 체포한다. 국민당 특무기구에 잠입하여 요직을 맡았던 전장비, 이극농, 호저, 송재생등은 모두 다시 잠복해야 했고, 국민당의 정보를 팔아먹었던 양등영등은 체포된다.

 

1931년 6월 22일, 중공중앙총서기 향충발이 체포된다. 특과로 옮겨온지 얼마 되지 않은 반한년(潘漢年)이 소식을 듣고 즉시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주은래는 총서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구출작업을 개힌다. 그러나 금방 '향충발이 배신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어 온다. 향충발은 주은래의 주소도 알고 있고,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국민당에 투항한다면, 반드시 특무를 데리고 그를 체포하러 올 것이다. 주은래는 신속하게 이사를 가고, 향충발이 정말 '배신'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주은래는 특과 3과과장 담충여로 하여금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원래 주소를 감시하게 한다.

 

담충여가 1명의 홍대 대원을 이끌고 소사도로(小沙渡路)에 훈툰을 파는 노점을 연다. 한밤중에 그들은 한 무리의 특무가 사람 한명을 데리고 주은래의 주소로 와서 열쇠로 문을 여는 것을 본다. 확실히 향충발은 이미 국민당에 투항한 것이다. 주은래의 주소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특무들이 집을 나왔을 때, 훈둔파는 노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은래는 급히 다른 사람의 집으로 숨는다. 상황이 긴급하여 주은래는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움직였다. 날이 어두워지고난 후에 비로소 변장하고나서 움직였다. 그의 주변에서 일하던 동료는 그가 변장하면 일본인같다고 놀렸다.

 

향충발은 어떻게 체포되고 변절한 것일까? 이는 고순장의 변절과 관련이 있다. 주은래는 전장비가 보내온 정보를 받은 후, 즉시 향충발등 고위지도자들을 새로운 거처로 옮기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이미 중공총서기직에 3년이나 앉아있던 향충발은 당무와 업무를 내팽개치고 오랫동안 양수정(楊秀貞)이라는 화류계여자와 어울려지내고 있었다. 고순장은 일찌기 양수정에게 그녀의 집에서 심부름을 해줄 여자를 소개시켜준 바 있다. 향충발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고순장은 그 여자만 찾으면 향충발까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이미 이사를 간 그 여자를 찾아냈고, 그는 양수정이 수일후 한 재봉점에서 옷을 찾아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고순장은 잠복과 추적을 통해 양수정이 새 집을 찾아낼 준비를 한다.

 

며칠 후, 양수정은 과연 재봉점에 나타나 옷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여자를 시켜 양수정을 미행한다. 마침 양수정의 집에 와있던 향충발이 미행하는 것을 보았고, 고순장은 헛탕을 치게 된다. 주은래는 그 소식을 들은 후, 향충발에게 잠시 자신과 함께 은밀한 장소에 숨어있자고 말한다. 그러나, 6월 21일 향충발은 양수정을 반드시 만나보아야겠다고 말한다. 주은래는 부득이 그들이 만나는 것에 동의했다. 다만 반복하여 절대로 그 집에서 유숙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향충발은 주은래의 당부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양수정의 집에서 유숙한다.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돌아올 때, 체포당하게 된 것이다.

 

고문을 하기도 전에 향충발은 모조리 불어버린다. 임필시(任弼時)의 부인 진종영(陳琮英)이 어디있는지도 진술한다. 양수정과 진종영도 바로 체포된다. 그녀들 둘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향충발이 나타나자 사실대로 자백했다고 한다. 주은래는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나서 향충발의 절개는 기녀만도 못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순장, 향충발이 연이어 국민당에 투항하자, 3명으로 구성된 중앙특위는 이제 주은래 1명만 남게 된다. 많은 특무들도 모두 잠복했던 곳에서 벗어나 잠시 업무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고순장은 큰 공을 세워 진입부(陳立夫)에게 중용된다. 그러나, 고순장은 일찌기 자신의 부하인 전장비에게 놀아났던 전장비의 직속상사 서은증은 멸시했고, 서은증이 자신을 억누르는데 대하여 불만이 컸다. 그리고 군통의 우두머리인 대립(戴笠)과는 서로 긴밀하게 교류했다. 그가 한번은 불만을 터트리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모두 결함이 있으니 가장 좋기로는 새로운 단체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하여 원래 고순장과 전장비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서은증은 이것을 죄명으로 삼아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총살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