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유아주전대(自由亞洲電臺)
5년전 이강(易綱)이 "예상외로" 중국인민은행 행장에 임명된 후, 외부에서 원인을 분석할 때, 더욱 주목했던 것은 그가 중앙은행장을 맡기전 부행장으로서의 역할이었고, 그가 2014년초에 중국인민은행 부행장 겸 국가외환국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또 다른 중요한 직무를 맡았다는 것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바로 시진핑이 직접 주재하는 중앙재정영도소조의 산하에 설치된 상설판공실의 부주임이었다. 당시 주임은 류허(劉鶴)이었다. 한동안 이강은 해당 판공실의 유일한 부주임이었다. 이를 보면 시진핑이 이강을 얼마나 중시하고 신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중국인민은행 웹사이트에 올라온 이간의 이력은 이러하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인디애나대학 경제학과에서 조교수, 부교수를 지내고, 1992년 종신교수직을 획득하다"
중국인민은행에서 간행한 이강의 이력중 그는 1997년 중국인민은행에 입행했으며, '해외귀국교수'라는 배경때문에 시작점이 높아서, 부사장급(副司長級)으로 시작한다. 그는 중국인민은행 화폐정책위원회 부비서장의 위치에서 5년간 근무하다가 비서장으로 승진하여, 정사장급(正司長級)대우 겸 화폐정책사 부사장(副司長)이 되고, 1년후 화폐정책사 사장이 된다.
2004년 7월, 은행 당위위원이 되어, 당시 중국인민은행 행장인 저우샤오촨(周小川)의 행장조리가 된다. 3년후인 2007년 12월에는 은행 당위위원, 부행장이 된다. 이때 이강의 나이 43세였다. 10년만에 부사장(부국장)급에서 부부장(차관)급으로 쾌속승진한 것이다.
부행장으로 있는 동안, 그는 한동안 국가외환관리국 국장, 당조서기를 겸임했다. 2016년 3월, 이강은 중국인민은행 당위부서기 겸 부행장이 된다. 이때는 저우샤오촨이 물러나기까지 아직 2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때였다. 이를 보면 당시 이강은 이미 중국인민은행장 후임의 제1후계자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위의 글에서 이강이 중앙재정영도소조 판공실 부주임을 맡은 기간을 명확히 쓰지 않았다.
위키백과에 기재된 중앙재정영도소조판공실 항목에는 류허가 주임을 맡은 시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확하다. 2013년 3월이다. 다만 이강이 부주임을 겸임한 시기는 2014년 4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중국인민은행에서 발표한 이강의 이력에 따르면 그가 부주임을 겸임한 시기는 2013년 7월이다.
기실 위키백과뿐아니라, 중국대륙의 웹사이트에 올라온 일부 중국고위관료들의 당내직무의 췽미시기는 부정확한 것들이 아주 많다. 원인은 류허, 이강같은 류의 사람들이 부총리에 임명되는 것도 좋고, 행장 혹은 부행장에 임명되는 것도 좋고 모두 대외적으로 공개된 임명절차가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사람들이 당중앙의 어느 위원회, 어느 영도소조의 상설판공실 전임 혹은 겸임직무인 경우에는 공개된 임명절차가 없다. 그래서 그들이 이런 직무를 맡거나 겸임한 시기를 외부에서는 그들이 그 직무를 가지고 처음 공개활동을 한 날짜를 기준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민일보 산하의 <중국공산당신문망>은 2014년 4월 28일 <이강이 중앙재정영도소조판공실부주임이 되다>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복건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4월 25일, 복건성위중심조에서 전제(專題, 전문주제)학습회를 개최하였다. 중앙재정영도소소판공실부주임, 중국인민은행부행장, 국가외환관리국 국장 이강이 초청을 받아 <18기 3중전회정신을 관철 집행하고, 금융분야개혁을 전면적으로 심화하자>라는 주제보고를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는 이강이 처음 중앙재정영도소소판공실부주임의 신분으로 매체에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라, 위키백과를 포함한 대부분의 매체는 2014년 4월을 이강이 중앙재정영도소조판공실부주임에 임명된 시기로 보는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이강이 이 직무를 맡은지 이미 9개월여나 되었을 줄.
필자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강이 류허와 특수한 관계라는 것때문이다. 즉, 시진핑은 처음 국가주석에 당선됨과 동시에 류허를 직접 시진핑이 책임지는 중앙재정영도소조판공실주임으로 뽑았고, 이어서 류허는 이강을 시진핑의 곁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2018년 3월 20일 시나재경은 <독점해석: 왜 이강인가?>를 싣는다. 첫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이 중국인민은행의 새 장문인은 일찌기 변기의 물을 절약하는 연구를 위하여, 두번 소변을 보고난 후에 비로소 물을 한번 내렸다가 가족들에게 비난을 받았었다" 그 후에, 진짜 내용을 시작했다.
이렇게 적었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추측하던 인사배치가 마침내 확정되었다. 이강이 저우샤오촨의 뒤를 이어 중국인민은행 행장이 되었다. 이전에 떠돌던 여러 버전중에서 이강은 그다지 우선적으로 거론되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행장이 되었으니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자세히 분석해보면, 다크호스가 실은 다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강의 당선은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합리'를 주로 다음의 몇가지로 꼽는다: 첫째, 이강은 류허와 가깝다. 이강은 중국인민은행 부행장일 뿐아니라, 중앙재정영도소조 판공실 부주임이다.지금 중앙재정영도소조 판공실 주임 류허는 금융을 관장하는 부총리이다. 이강이 중국인민은행 부행장을 맡는 것은 과거의 밀접한 업무협력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류허, 이강은 각각 하버드대학, 일리노이대학을 졸업한 '해귀(海龜, 해외유학후 귀국한 사람)'이다. 그래서 공통점이 있다. 이강은 류허가 만든 중국경제50인논단의 오래된 회원이기도 하다.
둘째, 이강은 1997년에 중국인민은행에 입행했다. 중앙은행 부행장중에서 그가 저우샤오촨과 호흡을 가장 오래 맞춘 사람이다. 저우샤오촨이 중국인민은행 행장으로 있던 15년간 이강은 모두 함께 있었다. 그가 후임을 맡는다면,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국제화에 장점이 있다. 중국경제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중국은 이미 '대국금융'이다. 미주경제협상이건, 글로벌금융협력이건, 중국중앙은행장의 국제화능력은 아주 높게 요구된다. 이강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일찌기 미국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국제화소통이나 교류능력에서 저우샤오촨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이강은 영어발음도 아주 좋다. 금융이 글로벌화하는 지금 이강이 중앙은행을 대표하여 세계중앙은행장회의에 참석한다면 아주 적합할 것이다. 항상 저우샤오촨을 따라 글로벌회의에 참석해왔던 이강은 국제활동에 아주 능숙하다.
넷째, 연령. 이강은 저우샤오촨보다 10살이 어리다. 이것은 이강이 두 기에 걸쳐 인민은행행장을 맡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화폐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미 5년의 1기가 만료되었다. 이미 65세가 된 이강이 다시 한번 중국인민은행장을 맡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이강이 연임하지 않는다면,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글에서 논의할 이슈이다.
앞에서 미리 소개한 바 있지만, 이강이 5년전에 '의외로' 중국인민은행장에 임명되기 전에, 필자는 일찌기 대륙의 한 경제학자와 토론할 때 그는 당시 허난(河南)성위서기를 맡고있던 세푸잔(謝伏瞻)이 중국인민은행장으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언급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강이 저우샤오촨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19대가 개최되기 전에 '전체적으로 고려'했던 내용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19대에서 겨우 중앙후보위원에 당선된 것은 중앙위원의 "예선"에서 득표수가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위의 주장을 방증하는 것은 당시 중국인민은행의 또 다른 부행장인 판공셩(潘功勝)도 19기 중앙후보위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판공셩은 이강보다 9살이 어리다. 그의 이력에서 특별히 설명해야할 것은 1993년 민맹(民盟)에 가입하고, 나중에 1999년 중공에 가입한다. 그는 중국인민대학 경제학박사로, 캠브리지대학에서 포스닥 및 하버드대학의 연구원을 지낸다.
즉, 이강과 비교하여, 그는 중국정권이 스스로 배양해낸 '본토박사'이다. 이후의 해외에서의 '학력'은 모두 도금을 한 수준이다.
이 판공셩은 농업은행 부행장에서 중국인민은행 부행장으로 승진한 시기가 2012년 6월이다.그후 다시 이강이 더 이상 겸직하지 않는 국가외환국 국장, 당조서기를 맡아서 지금까지 오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역대 중공중앙위원과 중기위는 각 국가기관에 T/O를 대부분 중앙위원 1명, 중기위위원 1명을 안배한다. 동시에 중앙후보위원 1명이 배치되는 것은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2명의 중앙후보위원을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를 보면, 5년여전의 중공19대 개최전의 '두위원회 후보자건의명단(즉, 중앙위원, 중앙후보위원 및 중앙기율검사위위원)'에 당시 중국인민은행 당위부서기 겸 일상업무를 주재하던 부행장인 이강과 당시 중국인민은행 당위위원, 부행장이던 판공셩은 각각 중앙위원과 중앙후보위원 명단에 올랐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2018년 3월부터 중국인민은행에는 2명의 19기 중앙후보위원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중국인민은행 당위서기로 임명된 궈슈칭(郭樹淸)은 19기 중앙위원일 뿐아니라, 이미 2기나 중앙위원을 연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민은행에 대한 이런 안배는 외교부의 소위 "쌍수장제(雙首長制)"와 전혀 다르다. 당시의 궈슈칭은 중국은행보험감독관리위원회 주석, 당위서기의 신분으로 중국인민은행 당위서기, 부행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은감회직책의 제1조는 "법과 규정에 따라 전국은행업과 보험업에 대한 통일적 감독관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즉, 궈슈칭과 이강의 직무관계는 바로 은보감회와 중국인민은행의 직책관계인 것이다.
작년 10월 개최된 중공20대에서, 중앙금융계통대표단의 단장은 궈슈칭이고, 부단장은 이강, 이후이만(易會滿), 비서장 겸 대변인은 판공셩이다.
대회선거가 끝나고 사람들이 알게된 것은 19기 중앙후보위원이며 1964년 12월생인 이후이만이 중앙위원이 되고, 1963년 7월생인 판공셩은 중앙후보위원조차 되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20대이전에 중국인민은행 내부에서 돌던 소문인 판공셩이 중국인민은행 행장이 될 것이라는 것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외부에서 호사가들은 금융배경을 지니고 재경과 금융분야에서 업무경력이 있는 20기 중앙위원중에서 몇몇 인민은행 행장후보를 뽑아보았다. 그중 한명이 바로 중국증감회 주석인 이후이만이다.
이후이만은 하급은행직원에서 한걸음 한걸음 올라왔다. 어느 라인을 탔는지는 알 수 없지만, 5년여전에는 공상은행 행장의 신분에서 19기 중앙후보위원이 되고, 1년여후에는 중국증감회 주석이 되었다.
이강과 비교하면, 이후이만에게 가장 두드러진 점은 '본토학력' 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공표된 이력에 그의 대학경력은 없다. 단지 그가 재직중에 '연구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다고만 말한다. 그래서 만일 정말 이후이만을 중국인민은행 행장으로 앉힌다면 대외적인 업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정규학력은 시진핑의 눈에 별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외부에서 차기 인민은행 행장후보로 거론되는 또 다른 사람은 현임 중국정협 부비서장 겸 전국정협기관당조부서기인 저우자이(鄒家怡)이다.
이후이만과 비교하거나, 설사 20기 중앙위원내의 모든 금융과 재정공작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비교하더라도,이 추여사는 학력에서건 재정과 금융업무경력에서던 대외적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그녀는 1963년 6월생이고 대학본과는 국제관계학원을 나왔다. 그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에서 세계경제및정치학과 국제경제관계 전공으로 경제학석사학위를 받는다. 졸업후 재정부에서 일했으며, 전후로 재정부 세계은행사 종합처 부처장, 재정부 국제사 부사장, 주세계은행중국집행이사, 재정부 국제사 사장등의 직을 지냈다. 그리고 2015년 7월 재정부 부장조리, 당조서기가 되었다.
재정부 부장조리를 맡은 5개월만에 저우자이는 다시 그해 12월 재정계통에서 기율검사계통으로 옮겨가, 중앙기율검사위 주중앙외판기검조 조장이 된다. 1년여이후, 2017년 4월, 감찰부 부부장이 된다.
2018년 6월 저우자이는 다시 재정부로 돌아와 재정부 부부장, 당조성원이 된다. 이때부터 중앙재정계통내의 사람들은 이 저우자이가 2023년 차기 재정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20대를 개최하기 1년전에, 저우자이는 돌연 전국정협으로 옮겨가 전국정협 상무부비서장, 10기 중앙위위원 판즈강(潘志剛)의 위치를 맡는다. 관직은 정부장급(正部長級, 장관급)이다.
정상적인 상황하에서 전국정협의 상무부비서장 겸 기관당조 부서기는 중앙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저우자이는 20대에 중앙위원에 들어간 후 다시 14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된다. 이렇게 안배한 것을 보면, 다시 그녀를 국무원계통으로 부르려는 것같지는 않다.
20대이후, 외부에서 후계자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인물은 현임 베이징시장 인용(殷勇)이다. 1969년 8월생인 인용은 일찌기 중국인민은행에서 가장 나이어린 부행장이었다. 다만 20대에 중앙위원에 당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시 부시장에서 시장으로 승진한다. 그리하여 '전국31개성에서 가장 나이어린 성급정부1인자'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당당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5달만에 시장을 바꿀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앞에서 20대 중앙금융대표단을 언급했었다. 거기에 필자가 특별히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지난기와 비교하면 이번 대표단에는 '중앙지정대표'가 한명 추가되었다. 즉 전국정협 부주석 겸 국가발개위주임인 허리펑(何立峰)이다.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허리펑은 국무원부위의 책임자 신분으로 중앙과 국가기관대표단내에 T/O가 있거나, 혹은 전국정협 부주석의 신분으로 어느 지방대표단에서 T/O를 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20대에 그를 중앙금융계통대표단에 넣은 것은 허리펑이 이미 실질적으로 전체 중앙금융계통의 "총책임자"라는 것을 증명할 뿐아니라, 시진핑도 이강이 이번 기로 임기를 마친다는 전제하에서 금년 3월이후 허리펑이 부총리의 신분으로 인민은행 행장을 겸임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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