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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금융

관진셩(管金生): 상하이 금융대부의 홍(紅)과 흑(黑)

by 중은우시 2022. 11. 4.

글: 풍성도(風聲島)

 

1

 

1995년 구정전날의 춘만(春晩)에서는 나잉(那英)의 노래 <무리간화(霧裏看花)>가 대강남북을 풍미하고 있었다.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나에게 지혜의 눈을 빌려줘. 내가 이 세계를 깨끗하게 볼 수 있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는 이미 중국사람들에게 부로 향하는 창을 활짝 열어주었고, 창밖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전해부터, 상하이주식거래소내에는 여러 칸의 "큰손의 방(大戶室)"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컴퓨터와 전용전화가 놓여 있었다.

일반투자자들은 거래소 밖의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 있을 때, 큰손들은 전용전화 한통으로 쉽게 거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주식시장이 호황을 맞이하면서, 황포강(黃浦江) 가의 고급호텔에는 속속 룸을 "큰손의 방"으로 개조했으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연속 수년간의 통화팽창으로, 사람들은 급여인상을 기다리지 못했고, 주식이 사람들의 부자로 되는 희망이었다.

모든 주식투자자들은 한쌍의 "지혜의 눈(慧眼)"을 갖고싶어했다. 복잡한 주식그래프에서 부의 비밀코드를 알아내고자 했다.

주식외에 부를 챙조하는 방법에는 국채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때 이미 주식투자에서 국채,선물투자로 옮겨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주식, 증권과 비교하여, 국채의 배후에는 국가가 가치와 이자를 보장했다. 이자율은 움직였지만 이로 인해서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시장은 원래 이 새로운 투자거리에 대하여 반응이 냉담했었다. 그러나 통화팽창율이 커지면서, 재정부는 국채에 대한 가치와 이자보장을 해주었다. 거래는 바로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때 국내의 선물거래는 거의 공백이었다. 앞장서서 설립한 상해증권거래소는 선구자였다.

상해증권거래소보다 2년먼저 설립된 완궈증권(萬國證券)은 게임규칙의 제정자였다. 막후에는 "중국증권의 대부"라 불리는 관진셩(管金生)이 있었다. 그는 당시 완궈증권의 총경리(사장)였다.

그는 가장 비정한 "금융대부"라고 불리웠다.

 

 

다만, 이때의 상하이 주식투자자들은 관진성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두 "양백만(楊百萬)"이라고 불리는 상하이사람은 알고 있었다.

"양백만"의 본명은 양화이딩(楊懷定)이며, 일찌기 창고관리원이었다.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자, 그는 분노하여 사직하고, 집에서 신문을 연구한다. 그는 하루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1988년 4월, 그는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뉴스 하나를 보게 된다: 국가가 국고권(國庫券) 거래를 개방한다.

국고권은 당시 국가가 건설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발행한 일종의 유상채권이었다. 리스크는 낮고, 수익은 높기로 유명했다.

1980년대초, 중국은 최초로 40억위안의 국고권을 발행한다. 당시는 사람들이 그다지 적극적으로 구매하지 않았고, 국가는 부득이 정부와 민간채널을 통하여 할당해야 했다.

그후 수년간, 국가는 계속하여 몇 라운드의 국고권을 발행한다. 점점 사람들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민간의 새로운 이재(理財)수단이 되었다.

당시 전국의 은행은 망통합이 되어 있지 않아서, 각 지역의 국고권은 가격차이가 컸다.

이익이 있으면 시장이 생긴다. 상해의 길거리에는 여러 국고권을 거래하는 사설 "타장모자(打桩模子)"(매매꾼)가 생긴다. 이들은 하나의 기둥(桩)처럼 길거리에 서서, 각종 유가증권을 저가로 매입하여 고가로 팔았다.

양백만은 생각한다. 시장이 열리면 반드시 거래가 수반된다. 거래가 있으면 반드시 이익도 남는다.

아는 사람을 통하여, 그는 허페이(合肥)는 당시 국고권가격이 겨우 98위안이고, 상하이의 가격은 112위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차액은 분명히 있었는데,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두 지역을 오가면서 '투기도파(投機倒把, 중국은 당시 투기거래를 처벌했다)'의 리스크를 안고 국고권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었다.

양백만은 겁을 내지 않았다. 어쨌든 백수였고, 여기에 인생을 걸어보는 것이 길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양백만은 즉시 사방에서 돈을 끌어모아 기차를 타고, 안후이와 상하이 두 지역을 오갔다.

안후이쪽에서는 누군가 시장가격보다 1-2위안 높은 가격을 국고권을 매수해주겠다고 하면, 기꺼이 파는 사람이 있었다.

거래가 정식으로 시작되면서, 양백만은 안후이에서 상하이로 가져오는 국고권이 갈수록 많아졌다.

최고로 많을 때는 상하이 국고권은 매일 거래금액이 70만위안의 거래액인데, 양백만이 혼자서 1/7을 차지했다.

엄청난 돈을 모은 후 양백만은 상하이사람들의 눈에 "살아있는 재신(財神)"이었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는 규칙의 틈에서 새어나온다. 상하이사람들의 하루빨리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불을 붙이게 된다.

 

3

 

1995년 구정이 지나고나서, 상하이의 길거리는 여전히 추위가 느껴졌지만, 상하이증권거래소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0.7위안짜리 와하하생수는 병당 2위안에 팔았고, 원래 3위안인 도시락은 10위안에 팔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혀 인색해 하지 않고 사갔다.

장내에서는 거래가 빈번했고, 대전이 일어나기 일촉즉발상태였다.

1995년부터, 장내에는 "327"이라는 명칭의 3년만기 국채가 6월에 만기도래하면 국가에서 132위안을 지급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록 재정부가 327국채에 대하여 이미 이자율을 조정해주었고, 액면이자율을 일찌감치 몇배 올렸지만, 투자자들과 시장에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격이 너무 낮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자 국가가 이자율을 다시 올린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그러나 관진셩은 이렇게 생각한다. 국가가 거시조정후, 통화팽창율이 이미 2.5%가량으로 통제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이자율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는 완궈증권에 모두 팔아버리도록 지시한다.

완궈증권과 같은 진영에 섰던 곳은 랴오닝궈파(國發)집단주식유한공사("요국발")이 있었다. 

요국발의 장문인인 가오링(高嶺) 형제는 일찌기 중국초기자본시장의 큰손투자자중 한명이었다. 주식, 선물, 채권, 자금대출등등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시장에는 그들과 대립하는 진영도 있었다. 재정부에 예속된 중국경제개발신탁투자공사("중경개")로 그들은 327국채를 선택해서 매입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파는 사람도 있는 것은 정상적이다. 어쨌든 누구의 눈이 정확한지를 보는 것이다. 누가 누구보다 나은지를 보는 것이다.

2월초부터, 327국채의 가격은 147.80위안에서 148.30위안의 사이에서 등락했다. 공매도측과 공매수측은 암중으로 힘겨루기를 했고, 완궈증권의 공매도수량은 계속 늘었다.

거래소의 관례에 따라, 이처럼 교착된 상태에서는 327국채는 최종적으로 협의를 통해 쌍방이 수량을 감소시키게 된다.

그런데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2월 23일, 재정부는 327국채에 148.5위안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자율은 94년의 8%에서 13%로 끌어올린 것이다.

소식이 나오자 327국채의 시장가격은 급속히 폭등한다.

오전시장이 열리자 중경개가 앞장서서 공세를 펼치고, 겨우 10분만에 327국채의 가격은 150위안가량까지 올라간다. 

마음이 조급해진 관진셩은 즉시 상하이증권거래소로 달려가서, 총경리 웨이원얜(尉文淵)을 만나 도움을 청한다. 거래정지를 해주든지, 재정부가 이자율을 올린다는 소식이 없다고 확인공시를 해주든지.

웨이원얜은 관진셩의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권한을 남용하여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쌍방은 기분이 좋지 않게 헤어진다. 

오후장이 개장되자, 중경개는 다시 이자율을 올린다는 소식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맹공을 퍼부은 나머지 151.98위안으로 마무리된다.

설상가상으로, 원래 함께 공매도를 펼치던 요국발이 돌연 창을 거꾸로 들고 공매수에 나선다. 327국채는 1분만에 2위안이 오른다. 10분후에는 3.77위안이 오른다.

관진셩은 수중에 327선물계약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1위안이 오를 때마다 손실이 10억여위안에 이르렀다. 만일 기한만료후 종결해야 한다면 완궈증권의 손실은 60억위안에 이를 터였다.

완궈증권의 총자산은 14억위안에 불과했다. 아예 이처럼 엄청난 손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파산을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바닥에 떨어질 상황이 되자, 관진성은 분노가 극에 달했고, 반격을 시작한다.

거래종료 8분전에, 관진성은 충분한 보증금이 없는 상황임에도 연속하여 수십만건의 매도주문을 낸다. 그리하여 가격을 148위안으로 눌러둘 수 있었다.

마지막 1분간 관진셩은 30만건의 수퍼매입주문을 내서, 가격을 147.4위안까지 끌어내린다.

완궈의 반격이후, 상대방진영은 즉시에 반응하지 못했다.

이번 주문의 총가치는 2,112억위안에 달했다. 알아야 할 것은 당시 327국채의 총금액은 겨우 240억위안이었다.

결국, 거래종료후 완궈는 60억위안의 거액손실을 역전시켜 42억위안의 거액수익을 낸다. 원래 희희낙락하던 중경개등 여러 공매수기관은 40억위안의 거액손실을 보았다.

상해거래소에는 광분하는 사람과 분노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어떤 사람은 하룻밤만에 거부가 되었고, 많은 사람은 원금을 모두 날리고 파산을 했다.

 

4

 

당시 장내에서 손님들과 같이 있던 웨이원얜은 멍해진다. 즉시 손님과 헤어져서 관진셩을 찾아 질문한다.

쌍방이 싸우고 있는 동안에, 무수한 고발전화가 상하이증권거래소와 국가의 관련부서로 걸려왔다.

어둠이 깔리면서, 상하이증권거래소의 등이 모두 켜진다. 사람들은 최종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10시, 상하이증권거래소는 문을 걸어닫고 긴급회의를 개최한 후, "그날 16시 22분 13초이후의 모든 거래는 이상이 있어, 무효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날 저녁 11시, CCTV는 정식으로 전국에 이 소식을 전한다. 이전의 최종거래가격인 151.30위안을 당일종가로 정했다.

이것은 관진셩의 최후의 발악이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완궈증권은 60억위안의 손실을 본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상하이증권거래소는 여전히 거래를 계속했지만,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 후, 관진셩은 사직하고, 웨이원얜은 면직당한다.

5월 19일, 관진셩은 부정부패와 공금유용죄로 하이난에서 체포된다. 결국 유기징역17년형을 받는다. 같은 달, 국채선물시장은 폐쇄된다.

같은 해, 완궈증권은 파산, 구조조정후, 션인(申銀)증권과 합병하여 션인완궈증권이 된다.

이번 사건은 중국증권사상 유명한 "223국채사건"이다.

전체 사건은 개시부터 종료까지, 수수께끼이다. 여러가지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마지막에 웃은 것은 중경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쌍방은 기실 모두 보증금이 부족했고, 악의로 가격조종을 한 문제가 있었다. 왜 완궈 한 곳만 제재를 받게 된 것일까?

"223국채사건"의 그날 정오, 관진셩은 중경개를 규정위반을 이유로 웨이원얜에게 거래잠정정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그중에 아마도 웨이원얜의 고충이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중경개는 재정부의 '친아들'이라 할 수 있다. 동사장(회장)은 막 재정부 부부장에서 물러난 인물이고, 총경리(사장)은 재정부 종합사의 전임 사장(우리나라의 국장)이었다.

어쨌든 중경개는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아주 민감한 2월초에 진입했고, 그 시간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통화팽창은 이미 통제되고 있는데, 재정부는 왜 굳이 이러한 때 이자율을 올렸을까?

사후, 많은 금융전문가들은 사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자율을 올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한꺼번에 500포인트(5%)나"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공매수한 여러 측에서 최소 70억위안의 이익을 냈는데, 중경개의 총경리인 한궈춘(韓國春)은 중경개가 실제로 얻은 것은 1억위안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돈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5

 

알려진 바로는 최후의 승자는 중경개와 손을 잡은 배후의 '물주'들이었다고 한다. 즉 나중에 자본시장을 질타하게 되는 웨이동(魏東), 위안바오징(袁寶璟), 저우정이(周正毅)와 류한(劉漢)등 자본계의 큰손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번 혼전에서 거액의 부를 모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본시장에 더욱 큰 야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자본계의 거물들도 끝은 좋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투신자살하고, 어떤 사람은 피살되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총살당했다.

배경이 두터운 중경개도 몇년 지나지 않아, "은광하(銀廣廈)"사건으로 돈을 모조리 잃고, 이후 사라진다.

사실상 외국매체는 당시 "223국채사건"이 "중국증권사상 가장 어두운 하루"라고 불렀다.

승리를 거둔 측은 자랑스럽지 못했다. 아마도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고, 권력을 조종하여 결과를 수정한 결과였다; 패배한 측은 시스템의 헛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욕을 먹었다. 다만 규칙내에서 기교를 부려 조작한 것이므로 멋진 투기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신선싸움에 백성만 재앙을 입었다.

이번 "223국채사건"에서 수만명의 투자자들이 파산했고, 천완닝(陳萬寧)이라는 증권거래원은 수천만위안의 손실을 입고, 직위를 조용히 떠나야 했다.

수년후, 그는 인터넷문학계를 종횡하면서 필명 "녕재신(寧財神)"으로 활동한다.

시간은 황포강의 탁류와 함께 흘렀고, 일찌감치 경심동백의 순간은 씻겨졌다.

관진셩에 관하여,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안타깝게 여긴다. "중국증권대부"에서 죄수가 되기까지, 순간의 결정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223국채사건"이 일어나기 1달전에, 베어링스은행의 거래원이 일본주식시장을 좋게 보아 수권을 받지 않고, 대량의 선물을 사들였다가 결국 판단착오로 은행이 도산하게 되었다. 

관진셩은 그때 그 소식을 들은 후 친구인 칸츠둥(闞治東)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 만일 그 정도로 큰 사건이 벌어진다면, 아마도 10년이상 기다려야 할 것같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 자신이 직접 중국판의 "베어링스사건"을 벌이게 된다.  끼친 영향도 전자에 못지 않았다.

기실, 관진셩의 전반생은 주식곡선같았다. 시작하자마자 호황이었다.

그는 원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중국자본시장의 "대부"라는 보좌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관진셩은 일찌기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사업에서 성취를 이루었는데, 그러한 성격이 결국은 자신의 앞길을 망쳐버렸다.

 

6

 

어떤 일은 운명적이다.

1947년 5월 19일, 관진셩은 장시성(江西省) 칭장현(淸江縣)의 궁벽진 산촌농가에서 태어난다.

점쟁이가 명이 거세다(命硬)고 했기 때문에, 태어난지 몇달만에 부모는 그를 다른 사람의 집으로 보내어 기르다가, 3살이 되어서야 다시 데려온다.

"명이 거세다"는 저주를 등에 지고, 소학교때는 그를 가장 사랑해주던 모친이 사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고, 동년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일찌감치 세태의 염량(炎凉)을 맛보았다.

그러나, 관진셩은 성격이 강했다. 누구든지 그를 때리면 그는 반드시 되갚았다. 코피가 나고 얼굴이 퉁퉁부어도 절대로 졌다고 인정하진 않았다.

관진셩은 모친이 그에게 해준 말을 기억한다. 점쟁이가 그는 명이 세고 복도 많다고 했는데, 반드시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진셩은 죽어라 공부해서 하루빨리 고향을 벗어나고자 했고, 운명을 고칠 기회를 잡고자 했다.

1965년, 관진셩은 만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상하이외국어학원 프랑스어과에 입학한다.

대학졸업후, 혼란한 시기의 관진셩은 적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상하이시의 직속기관에 배정받아 9년간 일한다.

상해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다니, 점쟁이의 말이 들어맞은 셈이다.

그러나 관진셩은 주위환경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모교의 프랑스문학전공 대학원에 입학한다.

졸업후 역시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공안기관에서 통역으로 지내다가 상하이국제신탁공사로 옮겨간다.

양호한 교육과 외국어를 배경으로, 관진셩은 이곳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잘 나갔고, 상사의 인정을 받는다.

1983년, 미중국제투자세미나가 상하이에서 개최된다. 관진셩은 회의의 통역 겸 사무총장으로 파견되어, 외국참가자들의 숙소와 식사를 책임졌다.

접촉을 통해, 회의에서 만난 외국의 전문가는 그에게 유럽유학을 권한다. 관진셩은 전혀 망설임없이 그 기회를 잡는다.

그후, 그는 상하이신탁투자공사의 파견으로, 벨기에 브뤼셀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경영과 법률의 두 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인재가 부족하던 시대에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관진셩은 회사에서 중요한 직위를 맡는다. 자본시장과 국제투자에 정통한 고급인재로서 상사와 회사로부터 높은 기대를 받았다.

여러 해동안의 공부와 외국금융시장을 직접 보고 온 관진셩은 이미 중국금융기구의 개혁에 대하여 고려하기 시작한다.

1987년, 관진셩은 귀국후 자주 회사부근의 소주하교로 가서 국고권을 거래했다.

역사를 잘 아는 그는 즉시 100여년전, 영국인이 오동나무 아래에서 동인도회사 주식을 거래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런 서방세계는 일찌감치 실외거래를 실내거래의 증권시장으로 변화시켰고, 중국은 아직 증권시장이 황무지였다.

이는 그로 하여금 중국증권시장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관련부서에 편지를 쓰고, 민간의 국고권거래를 통하여 2급시장을 규범화하여 무질서한 '암시장'거래를 조직적인 관방거래시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때 상하이는 중앙정부에 의해 개방이 한걸음 늦다는 질책을 받고 있었고, 상해의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관진셩의 건의는 마침 상하이에 '동방의 월스트리트'를 건설하려는 중앙정부 지도자의 구상과 맞아떨어졌고, 시범운영을 승인받는다.

1988년, 상하이에 최초의 주식제증권회사 완궈증권이 성립된다. 상하이국제투자신탁회사등 10개회사주주가 3,500만위안을 출자하여 설립되었고, 관진셩이 총경리에 오른다.

여기서 한마디 추가할 것은 관진셩은 증권회사건립을 주장했을 뿐아니라, 몇가지 지금도 중국증권거래시장에서 준수되고 있는 원칙도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주식제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과 은행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7

 

그 때의 관진셩은 중국증권시장의 설계자일 뿐아니라, 완궈증권이 설립된 후, 그의 말은 거의 업계내의 '금과옥조'가 된다.

그러므로 이때의 중국은 근본적으로 그처럼 금융을 아는 다른 인물을 구할 수 없었다. 외국어도 알고, 외국에서 금융거래를 훈련받은 전문인재는. 

1990년, 관진셩의 설계하에, 상하이증권거래소가 성립된다.

거래규칙, 설비구매부터 거래원교육훈련체계까지 전체 시스템과 프로세스는 그의 안배하여 집행된다.

완궈증권은 그때 전국 증권회사의 '풍향표'였다. 선전, 상하이의 이지(異地)거래나, 페이퍼리스거래는 모두 완궈증권이 가장 먼저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완궈증권은 상하이증권거래소의 관리를 받는다. 그러나 관진셩은 상하이증권거래소의 총경리 웨이원얜을 직접 "샤오웨이(小尉)"라고 불렀다.

웨이원얜은 관진셩을 "관종(管總)" 혹은 "라오관(老管)"이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관진셩의 업계내에서의 지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완궈증권의 직원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급여가 많다거나 복지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을 거친 건의문건은 즉시 감독관리부서에 의해 채택되어 동종업계에서 집행하는 규범과 조례가 된다는 것이었다.

완궈증권은 전성기때 모든 국내의 B주를 보유했을 뿐아니라, 동시에 70% 이상의 A주를 취급했다. 주간사로서의 업무는 중국총액의 60%를 점했으니, 독보적이었다.

이에 대하여 관진셩의 비서인 웨이저(衛哲)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B주에 뭐가 부족하면 우리가 방안에서 스스로 생각해 냈다."

중국증권시장의 개척자로서, 관진셩은 매일 국가의 각 부위로 가서 강연을 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거나, 각종 금융관련 회의에 출석하곤 했다. 

1급시장의 발행의식만 하더라도, 관진셩이 가장 바쁠 때는 매일 4개이상 참석하곤 했다.

"완궈증권, 증권왕국"이 대강남북 금융권에서 가장 익숙하게 듣는 광고어가 될 때, 어떤 사람은 관진셩에게 아부하면서 그의 이름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관진셩(管金生), 바로 금융을 관리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8

 

"223국채사건"의 전해에 완궈증권은 이미 해외로 진출하여,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 지점을 세웠다.

당시, 관진셩은 미국 지점설립을 호기만만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완궈증권이 줄곧 벤치마킹한 곳은 금융계에서 유명한 메릴린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1995년 2월 23일로 끝장난다.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관진셩은 금융을 모르는 것도아니고, 경솔하고 거친 사람이 아닌데, 왜 형세가 이미 분명해진 것을 알고 있고, 중경개가 배경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공매수를 고집하면서 절대 타협하지 않은 것일까?

사후에 어떤 기자가 관진셩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그렇게 고집하지 않고, 일찌감치 패배를 선언했더라면 완궈가 손해를 보긴 보겠지만, 그래도 완궈와 그는 살아남지 않았겠느냐고.

관진셩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반박했다: 불가능하다. 그건 나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완궈증권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다. 관진셩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폴레옹의 그 명언이다: 전사가 일단 전장터에 나가면, 그저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관진셩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중경개의 배후는 비록 재정부라고는 하지만, 관진셩은 재정부 및 뎌러 금융관리감독기관의 전문가이자 고문이었다. 여러번 교육훈련을 해준 바 있고, 그가 중경개 계통의 '스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327국채에서 '스승' 관진셩이 공매도를 선언하는 상황하에서 '학생'인 중경개가 아무런 사전통지도 없이 공매수를 시작했으니, 이미 그는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역겨운 것은 '학생'이 심각한 치팅을 하는 혐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독관'을 만나서 요구했지만 여전히 시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후 '학생'은 계속 핍박하면서 실로 이 '스승'을 눈아래 두지 않았다.

"223국채사건"이 발생한 날 정오, 가격은 중경개가 앞장서서 끌어올려 150위안이 된다. 이는 이미 관진셩에게 전혀 퇴로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패배를 인정하면 완궈에 큰 손실이 난다. 더더구나 관진셩의 금융계통에서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다.

분노정서에 휩싸인 그는 폭발해 버린다.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강대한 자금력으로 상대방을 직접 눌러버렸다.

결국 "223국채사건"의 배후에는 기실 관진셩의 방어전이 있었던 것이다.

 

9

 

관진셩이 체포된 후, 수감지는 상하이의 티란차오감옥(提籃橋監獄)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여러 동종업계사람들과 부하들을 만난다. 모두 경제범죄로 투옥된 것이다.

관진셩이 감옥에 들어온 후,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이곳에서 직접 "티란차오증권회사'를 차려도 되겠다고 했다. 이곳에 증권업계의 엘리트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까.

일찌기 잘 나갔던 사람들이지만, 큰 바람이 불어오자 결국은 쓸려나간 것이다.

감옥에서 관진셩은 우대를 받았다. 책도 볼 수 있었고, 신문도 읽을 수 있어, 외부세계를 알 수 있었다.

감옥관리당국에서도 그의 외국어실력을 이용하여 그에게 감옥도서관에 외국어자료번역업무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그는 수시로 자본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관진셩이 아쉬워하는 것은 그가 체포된 해의 여름, 미국인터넷회사 넷스케이프가 상장한 것이다.

상장당일, 넷스케이프의 주가는 23달러였다. 종가는 직접 74달러까지 치솟고, 시가총액은 23억달러에 이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론한다: GM이 23억달러를 달성하는데 43년이 걸렸는데, 넷스케이프는 단지 1분이 걸렸다.

2003년, 관진셩의 신체상황을 감안해서, 관련부서는 그의 '병보석'에 동의한다.

감옥에서 나온 관진셩은 거의 공개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0여년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그에게 223국채사건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한다.

2015년에 이르러, 머리카락히 하얗게 된 관진셩은 어느 금융포럼에 참가하여, 공개적으로 과거를 반성한다:

"나의 일생은 크게 손실을 보았다. 아주 큰 손실을. 그것은 바로 내가 내심의 교만과 청고(淸高)를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당초 스스로를 극복하고, 자신이 원치 않는 일도 했더라면, 정말 현실을 고칠 수도 있었고, 국면을 뒤집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2016년, 69세의 관진셩은 A주상장회사와 손을 잡고 PE투자를 시작한다고 선언한다.

옛날의 고자세와 비교하여 지금은 저자세로 진행한다. 신규투자는 의료, 화공, 네트워크 및 탄소중립분야에 걸쳤다. 그러나 공개된 정보는 많지 않다.

인터넷의 출현은 세계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고, 자본세계의 게임규칙을 완전히 바꾸었다.

사람들의 주식투자도구는 무거운 컴퓨터에서 가벼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고, 작은 모니터에서 주식그래프곡선을 여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관진셩이 열어놓은 증권시장에 국채선물은 없어졌지만, 귀금속선물, 에너지선물, 화공선물, 양식선물...모든 것들을 추자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시장은 사람들의 눈이 더욱 어지러워질수록 차가운 게임규칙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항상 잊고 지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