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년독파(靑年讀吧)
강호에 전설은 끊이지 않는다.
마치 장강의 파도처럼 한 물결이 지나가면 다음 물결이 밀려온다. 그렇게 물결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무수한 물결들 중에서 호남사람 류보는 비교적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요란하게 나타나서 비참하게 떠났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했다.
아래에서 이 호남의 천재의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인생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주저우신동(株州神童)
류보는 후난성(湖南省) 주저우(株州) 사람으로, 1964년 7월에 태어났다. 집안형편은 보통이었고, 부친은 주저우전력차량공장의 기차운전사였으며, 모친은 주저우기차역의 유지보수노동자였다.
류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며, 학업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1978년 대학입시가 부활된 다음 해, 나이 겨우 14살의 류보는 우한대학(武漢大學) 중문과에 입학한다.
이 소식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류보는 "신동"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더욱 놀라운 일은 류보가 대학을 졸업한 후 후난중의연구원(湖南中醫硏究院)의 석사과정에 합격한 것이다.
류보는 석사과정을 마친 후, 베이징대학 철학과의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그의 지도교수는 중국의 저명한 국학대사 계선림(季羨林)이다.
류보가 학업에서 이렇게 전공을 오락가락한 것은 아마도 그의 이후 계속 변신하는 인생을 암시한 것일까?
"신동"의 신분에 가장 적합한 것은 류보의 문학창작이었다. 20살때, 그가 창작한 시가(詩歌)는 이미 널리 알려졌고, 중국작가협회 회원이 된다.
2. 문화상인(文化商人)
1988년, 류보는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주저우신문도편보(株州新聞圖片報)>의 부총편집인이 된다.
류보의 기획하에, 이 신문은 1일 발행부수가 100만부가 넘는 신문업계의 기적을 이룬다. 이렇게 그는 비범한 사업적 재능을 보여준다.
1990년, 류보는 공직을 사임하고, 사업에 뛰어든다. 하이난(海南)으로 가서, 해남특구사보에서 편집일을 맡는다.
이어진 몇년간, 류보는 한편으로 신문을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업'을 했다. 부동산에 투자하고, 의료보건회사를 만드는 등. 특히 두드러진 것은 그의 뛰어난 사회능력으로, 적지 않은 금융기관의 고위층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이는 향후 자금조달의 견실한 기초를 이룬다.
그러나, 류보의 사업실적은 별 것이 없었다.
1992년, 돌파구를 찾지 못한 류보는 머리를 짜내서 최종적으로 "경세절초(驚世絶招)"를 생각해낸다: <전세장서(傳世藏書)>를 편집, 출판하는 것이었다.
이건 방대한 '경천지읍귀신(驚天地泣鬼神)'의 문화사업이었다. 이 총서는 모두 123책으로, 중국의 5천년 각문류, 각학과의 학술경전을 수집했다. 명나라의 '영락대전'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권위와 인기를 위해서 류보는 지도교수인 계선림으로 하여금 이 책의 주편(主編)을 맡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이 문화사업의 초기자금은 3,000만위안이었고, 은행대출로 충당한다. 이것도 류보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출금을 류보는 끝까지 갚지 못한다. 2002년이 되어, 류보가 외국으로 도망가기 전날, 은행은 대출금회수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문화전승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런 사업은 의미가 아주 크다.
그러나, 비지니스의 각도에서 보자면 무슨 수익이 있겠는가?
"신동"의 사고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류보는 스스로에게 좋은 방안이 있었다.
3. 문화거물
3년후, 류보의 <전세장서>는 차례로 완성된다.
이 총서는 모두 10,000부가 인쇄되었고, 총서의 시장판매가격은 6.8만위안이었다.
얼마나 팔렸을까? 극히 소수였다.
류보가 돈을 벌었을까?
기실, 류보는 판매문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994년, 류보는 하이난산다(三達)기업문화공사를 설립하고, <전세장서>를 회사의 자산으로 삼는다. 바꾸어 말하면, 회사는 <전세장서>프로젝트를 가지고 6.8억위안의 자산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부당 6.8만위안으로 1만부)
6.8억위안은 1990년대에 엄청난 금액이다.
1995년, 류보는 회사를 하이난청청(誠成)기업집단으로 개명한다. 회사는 이름없는 회사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회사로 되어버렸다.
류보는 저명한 문화계의 거물이 된 것이다.
류보는 돈도 벌고, 명성도 얻었다. 그는 세계화인협회 상무이사, 중화문화교류및합작촉진회 이사도 맡는다.
4. 미디어제국
<전세장서>로 '창조'한 자산가치는 류보가 자금조달하는데 담보물이 된다.
그래서, <전세장서>는 류보가 전설을 만드는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영예를 가져다 주었고, 더더구나 그가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연히 그의 뛰어난 사교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
1998년 8월, 류보는 우한의 실적이 좋지 않은 상장회사 "장인주식(長印股份)"의 20.91% 주식을 인수하여 제1대주주가 된 후 명칭을 '청청문화(誠成文化)'로 고친다.
류보는 상장회사의 동사회주석이 되었다.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1999년, 류보는 1,600세트의 <전세장서>의 평가금액을 6,526만위안으로 하여, 상장회사 "청청문화"의 870만자산과 교환한다. 이를 통해 "청청문화"는 장부상 5천만위안이상의 이익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류보가 <전세장서>를 출간한 것이 고명한 점이다.
종이매체분야에서, 류보는 전후로 국내에서 영향력이 큰 <희망>잡지를 인수하고, 그후에 <화하WATCH> <화성시점> <무대와인생> <저일대> <소년문적> <중국의약도간> <대중전시> <홍콩풍정> <다매체세계>등 10개의 잡지를 인수한다.
류보의 이러한 작업으로 청청문화는 '문화산업제1주'라는 명성을 얻는다. 1999년 12월부터 주가는 6.47위안에서 짧은 8주만에 24.38위안까지 근 4배가 오른다.
류보는 일시에 풍광무한(風光無限)해진다.
'주저우신동'이후 그는 다시 한번 전설을 쓴 것이다.
5. 쉬칭(許晴)
류보가 성공을 거둔 후, 곧이어 자신의 사랑을 만난다.
1998년 12월 류보는 베이징 차오양구의 친구모임에 나갔다가 유명한 여배우 쉬칭을 만나게 된다.
쉬칭은 베이징사람으로 집안내력이 대단했다.
그녀의 증외조부인 웅문경(熊文卿)은 호북성의 마지막 참의원 원장이었고, '공진회'의 주요책임자였으며, 신해혁명의 공신 황흥(黃興)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녀의 외할머니, 이모, 이모부는 모두 외교관이었다. 모친은 총정가무단 가무대의 대장이었으며, 부친은 하룡(賀龍)원수의 경위원이었다.
1980년, 쉬칭이 11살이 되었을 때, 전쟁주제영화 <철갑008>에 출연한다.
1992년, 쉬칭은 북경영화학원 연기과 본과를 졸업하고, 북경영화제작창의 배우가 된다.
쉬칭은 연기가 출중하고, 자태도 뛰어났다. 신장 168센티미터 체중 50킬로미터로 용모도 뛰어나고, 몸매도 좋았으며, 기질이 독특하여 연예계에서 발군의 미녀였다.
1992년, 쉬칭은 인기배우 왕즈원(王志文)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2년후 두 사람은 헤어진다.
류보는 쉬칭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여겼고, 첫눈에 반해서 애정공세를 펼친다.
류보는 재자(才子)이고 박학사딕했으며 용모도 우아하고 잘생겼다. 그래서 쉬칭도 마음이 동한다.
두 사람은 1998년부터 애인관계로 발전하는데 류보는 34살, 쉬칭은 29살이었다.
쉬칭과 함께 하기 위하여, 류보는 처와 이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이미 딸 하나가 있었지만.
쉬칭도 모든 사랑을 쏟아부었다. 이전에 한번도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그녀가, 직접 류보를 위해 밥을 하고 탕을 끓였다. 류보가 친구들과 거실에서 얘기를 나눌 때면, 그녀가 곁에서 차를 따라주었다. 현숙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쉬칭은 일찌기 공개장소에서 류보를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베이징대학의 박사생이다. 그는 아주 소박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는 항상 겸손하고, 인터뷰를 해본 적도 없으며, 선전을 하지도 않았다. 중국전통옷을 입고, 신발을 신기 좋아하는 그는 국학대사 계선림의 아끼는 제자이다."
자부심이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2001년, 류보는 병으로 1주일여 입원한 적이 있다. 쉬칭은 계속 병원에 머물면서 세심하게 돌봐준다. 집에서 밥을 짓고 탕을 끓인 후, 식기 전에 병원으로 가져다 주었다.
류보와 쉬칭은 서로 사랑하고 아꼈다. 주변인들이 선망할 정도로.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6. 일본으로 도망가다.
류보는 자본시장의 자금으로 크게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많은 프로젝트는 손실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산하에 있는 십여개의 잡지중 <희망>잡지가 약간 이익을 나타내는 외에 나머지는 모두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그리고 1999년, 류보는 하이난에 제약공장을 만들어 의료보건제품을 생산하고자 준비한다. 땅은 샀지만, 자금조달이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류보가 풍운을 질타했던 본전은 모두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투자한 돈은 대부분 수익을 내지 못했다. 심지어 원금까지 날려먹었다. 그래서 그는 자금압박이 갈수록 거세지게 된다.
그는 일찌기 신주를 발행할 생각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여, 더욱 설상가상이 된다.
2002년 상반기, 청청문화의 실적은 대폭 하락한다. 류보는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더욱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류보는 할 수 없이 2002년 청청문화의 대부분 주식을 양도해버리고 자신은 제2대주주로 물러난다.
다른 사람이 청청문화를 인수한 후, 류보가 재무적으로 조작한 것들이 점점 들통나게 된다.
2002년 10월, 류보는 은행의 거액대출을 상환하지 못하여, 사법기관의 소환을 받게 되고, 감시거주를 당하게 된다. 금융사기혐의로 인하여.
2003년 3월, 감시거주가 끝난 류보는 일본에 병치료를 하기 위해 간다는 이유로 출국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류보의 부채는 규모가 컸다. 2003년, 일찌기 한 권위있는 매체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류보가 진 부채는 40억위안에 이르고, 금액을 확정할 수 없는 담보대출도 더 있다고 했다.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 커서, 관련기관은 류보에 대한 채무회수작업을 계속했다. 11년후인 2014년 12월, 인터폴은 류보를 '신용사기죄'로 홍색지명수배명단에 올리게 된다.
이를 보면, 류보의 혐의는 비교적 심각했다. 그가 외국으로 도망친 이유를 알 것같다.
7. 타향에서 객사하다.
류보가 외국으로 도망친 후, 그외 쉬칭의 관계는 수수께끼가 된다.
어떤 사람은 류보가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쉬칭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 허칭이 일본으로 가서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쉬칭같은 미녀와 어울릴 자격이 없다고 느껴서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쉬칭은 시종 류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녀는 매년 많은 시간을 내서 비밀리에 그와 만나고 온다고 했다.
류보가 도망친 후, 쉬칭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녀와 류보는 일찌감치 2001년에 헤어졌다. 그러나, 2020년, 이미 나이 50이 넘은 쉬칭은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만일 류보가 죽지 않았다면, 그에게 시집갈 것이라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하든지간에 분명한 것은 류보가 일본에서 잘 지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업에 실패한 우울함 외에 그는 병마의 고통도 견뎌야 했다. 위궤양을 심하게 앓았다. 2001년, 그는 베이징에서 이로 인하여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었다.
2014년, 인터폴의 홍색지명수배가 나온 후, 류보는 일본에서 이리저리 숨어다니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위궤양을 호전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날로 심해졌다.
류보가 직면한 정신, 신체적 압력은 갈수록 커졌다.
떠난 시간이 길어질수록, 류보는 고향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일본에 간 후 그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고, 자신의 부모와 딸도 보지 못했다.
부모가 자신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지샌다는 말을 들으면 류보도 통곡했고, 자신이 착실하게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나가지 않다가 결국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게 된 것을 후회했다.
2017년 11월, 도망범 류보는 일본에서 병사한다. 나이 겨우 53세였다,
결국 그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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