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신중국의 개국장수(開國將帥)중 '외국인'

중은우시 2022. 11. 9. 15:43

글: 조대부(趙大夫)

 

개국장수는 1955년-1965년, 군대계급제를 실행한 후, 장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은 해방군고위장군의 통칭이다. 1955년에서 1965년사이에 수여받은 원수(元帥)는 10명, 대장(大將)은 10명, 상장(上將)은 57명, 중장(中將)은 177명, 그리고 소장(少將)은 1,360명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개국장수중에 여러 명의 "외국국적자"가 있다는 것이다.

 

1. 개국상장 섭비(葉飛)

 

섭비(1914.5.7 - 1999.4.18), 원래 이름은 Sixto Mercado Tiongco이다. 1914년 5월 7일 필리핀 루손섬 케손주 티아옹시의 중국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섭손위(葉蓀衛)는 1900년 단신으로 필리핀에 갔고, 모친 Francisca Mercado는 스페인혈통의 필리핀인이다.

 

섭비는 1919년 부친 및 형 섭계존(葉啓存)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온다. 1926년부터 하문 중산중학과 성립제13중학을 다닌다. 1928년 5월, 섭비는 공청단에 가입하고, 연말에 학교를 떠나 비밀공작을 시작한다. 1929년부터 공청단 복건성위 선전부장과 대리서기, 복주중심시위서기를 맡는다. 그동안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1932년 3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섭비는 일찌기 중공비밀공작에 종사했고, 나중에는 민동(복건동부) 소비에트구로 파견되어 유격전을 이끈다. 항일전쟁기간동안 신4군 제3지대 6단 단장, 강남항일구국군 부지휘관, 신4군 소북지휘부 제1종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 신4군 제1사단 제2여단 여단장 겸 정치위원, 제1사단 부사단장, 소중군구 사령원, 소절군구 부사령원을 맡는다. 제2차 국공내전기간동안에는 화동야전군 제1종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 3야 10병단 사령원으로 금문전투를 지휘하나 패전한다. 건국후, 복건성위제1서기, 복건성장, 남경군구부사령원 겸 복건성군구사령원, 복주군구사령원 및 제1정치위원, 국가교통부 부장, 해군사령원, 전인대부위원장등의 직위를 맡았다.

 

섭비장군은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3야(제3야전군사령부)의 "한장(悍將)"이었다. 섭비장군은 필리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과국장군(跨國將軍)"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섭비장군은 5살때 중국으로 귀국한 후, 출국방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는 57명의 개국상장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외국국적의 신분을 가진 장군이었다.

 

2.  귀국한 이중국적의 소장 - 서개번(徐介藩), 당탁(唐鐸)

 

서개번은 전후로 황포군관학교 3기 보병과, 광동항공학교를 다닌다. 1926년 소련으로 파견되어 홍군항공이론학교, 제2비행학교, 모스크바동방학원에서 공부한다.

 

졸업후, 서개번은 소련보위부문에 배속되어, 전후로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에서 방첩업무에 종사한다. 그종안 소련공산당 당원이 되고, 1936년 소련국적을 취득한다.

 

"7.7사변"이 발발한 후, 서개번은 사직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그리고 중공대표단에 귀국하여 참전하겠다고 요청한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그를 공산국제(코민테른)에 간부부로 보낸다. 1943년 코민테른이 해산된 후, 그는 소련공산당 중앙연락부 국제부에서 비밀어무에 종사하고, 나중에는 중국문제 주임참모가 된다.

 

1948년 3월, 소련의 비준을 받아, 서개번은 22년간 떠나있었던 조국으로 돌아온다. 이때 소련국적의 처와 3명의 딸도 데려온다. 그후, 명을 받아 소련 치타로 가서 중국총영사관을 설립하고, 다시 명을 받아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지원군사령부 판공실주임 겸 통역을 맡았다.

 

1952년 11월 서개번은 명을 받아 하르빈군사공정학원의 창설작업에 참여하고, 장갑공정계주임이 된다. 1956년 그는 임표(林彪)의 전처인 장매(張梅)와 결혼하며, 장매가 낳은 딸을 자신의 친딸처럼 보살핀다.

 

1955년, 서개번은 대교(大校, 대령) 계급을 받고, 1961년 소장으로 진급한다. 1983년 4월 16일 병사하니 향년 82세이다.

 

당탁은 15세때 프랑스로 근공검학(勤工儉學)을 떠난다. 혁명활동에 참여했다가 귀국조치를 당한다. 1924년에는 국민혁명군 군사비행학교에 입학한다.

 

1925년, 당탁은 소련으로 가서 제2비행학교에 입학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29년 졸업하고, 소련공군 제6여단 제18비행대대에서 중위 비행사가 된다. 1934년, 소련공군의 최고학부인 쥬코브스티공군공정학원에 입학하고, 그동안 소련공산당원이 된다.

 

2차대전기간동안, 당탁은 벨로루시전투, 발트해전투, 동프로이센전투에 참전한다. 그는 전혀 다치지 않았고, 비행기를 잃지도 않았으며, 하루에 6번 출격한 기록을 세워 소련위국전쟁훈장, 홍기훈장, 레닌훈장을 받는다. 벨로루시 제3방면군 제1공군집단군 제74단 실습부단장까지 승진한다. 전후, 그는 소련의 페름공군기술학교의 중령 교관이 된다.

 

1953년, 당탁은 마침내 28년간 떠나있던 조국으로 돌아온다. 함께 돌아온 사람은 소련국적의 처와 2명의 아이였다. 그후 그는 명을 받아 하르빈군사공정학원의 창설업무에 종사하고, 당위위원, 공군공정계 주임이 된다.

 

1955년, 당탁은 소장계급을 받는다. 1983년 11월 20일 병사하니, 향년 80세이다.

 

3. 출국한 이중국적 소장: 주눈(祖農), 마르구브(馬爾果夫)

 

1955년, 주눈 타이포프(Zunun Taipov, 祖農 太也夫, 위구르족), 마르구브 이스하코프(Margub Ishakov, 馬爾果夫 伊斯哈科夫, 카자흐족)은 모두 소장계급을 받는다. 당시 마르구브는 32세로 개국장수들 중에서 가장 젊었다.

 

두 사람의 주요 전적은 1944년의 '삼구혁명(三區革命)'에 참가하였다. 즉 신장의 이리(伊犁), 타청(塔城), 아산(阿山, 지금의 알타이)지구의 군사투쟁에 참여한 것이다. 각지역의 무장(소련교민을 합쳐서)과 합친 '민족군'에서 주눈은 부총지휘관을 마르구브는 보병제1여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1951년 1월, 민족군은 중국인민해방군 제5군으로 재편되고, 주눈은 신장군구 부참모장이 되고, 마르구브는 이리군구 사령원이 된다. 

 

중소관계가 악화된 1962년 4월, 6.7만명의 변방주민(소련교민 포함)이 이리, 타청의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간다. 역사에서 "이타사건(伊塔事件)"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주눈, 마르구브는 이 일을 기획한 것으로 지목된다.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주눈, 마르구브등을 위한 송별회도 열렸다. 1988년 주눈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타에서 병사하니 향년 69세이다; 마르구브는 1993년 터키에서 병사하니 향년 70세이다.

 

4. 유일한 외국국적의 쌍료소장(雙料少將): 홍수(洪水)

 

홍수는 베트남국적으로 해방군 훈련총감부 조령국 부국장으로 소장계급이었다; 그는 제1차로 베트남인민군 소장에도 임명되어 "쌍료개국장군"으로 불린다.

 

홍수는 베트남 하노이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프랑스유학을 했으며, 나중에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호치민과도 알게 된다.

 

1926년, 홍수는 황포군관학교 제4기로 입학한다. 그동안 중국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에 모두 가입한다; 다음 해, 광주의거에 참가했다가 실패한 후 태국으로 피신한다; 1928년, 홍수는 다시 중국으로 가서, 전후로 홍11군, 홍12군에 근무한다. 그리고 명을 받아 서금으로 가서 홍군학교 선전과장이 된다. 그리고 인민해방군 최초의 극사(劇社)인 "공농극사(工農劇社)"를 만든다. 1934년 1월, 중화소베이트공화국 제2차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고, 홍수는 소수민족대표의 신분으로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된다.

 

홍수는 장정에도 참가해서, 설산을 넘고, 초원을 세번 넘는다. 항전기간 염석산(閻錫山)의 본거지인 산서(山西) 오대현(五臺縣) 4구(東治)의 동원위원회 주임이 되고, 나중에 진찰기군구의 <항적보> 총편집인이 된다.

 

항전승리후 홍수는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완산(阮山)으로 개명한다. 베트남 남방항전위원회주석을 맡으면서 제5, 제6전구사령원 겸 정치위원이 된다. 1948년 1월, 베트남인민군 소장계급을 받는다. 그는 1950년 세번째로 중국에 가서, 중앙통전부 2처 베트남과의 책임자가 된다. 나중에 해방군 훈련총감부 조령국 부국장, <전투훈련> 잡지사(지금의 해방군출판사)의 사장 겸 총편집인이 된다.

 

1955년, 홍수는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의 계급을 받는다. 그는 중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소장이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원래 그에게 중장계급을 부여하려 했는데, 베트남측에서 "베트남인민군이 그에게 수여한 계급과 같은 것이 좋겠다"고 하여 결국 소장으로 최종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행정급별로는 정군(正軍, 집단군의 군장 혹은 정치위원등이 이에 속함)이었다. 

 

1956년 10월 21일, 홍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병사하니, 향년 4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