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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시진핑)

시진핑: 어릴 때를 보면 커서 어떻게 할지 알 수 있다.

by 중은우시 2023. 1. 27.

[필여해(畢汝諧)]  대륙에서 백지운동이 벌어지고 있어, 사람들은 다시 89년 64를 떠올린다. 총을 쏘고, 탱크, 장갑차를 끌고 나오고; 어쩔 수 없다. 뱀에게 한번 물린 사람은 평생 밧줄을 겁내는 법이다!

 

[친구] 네 생각에 시진핑이 사람들을 죽일 것같으냐?

 

[필여해] 얼마전에 영상을 하나 보았다. 시진핑이 피소육불소(皮笑肉不笑, 웃는 것같지만 웃지 않는)하면서 트뤼도(캐나다총리)와 언쟁을 벌일 때, "그럼 더이상 뭐라고 할 수 없겠다(那就不好說了)"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옛날을 생각해보면, 1968년의 베이징에서 간부자제들이 패싸움을 벌이기 전에 자주 화해할 수 있을지 떠보곤 했다. 완화될 여지가 있을지 없을지를 보는 것이다. 만일 얘기가 잘 되지 않으면 바로 던지는 말이 "그럼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겠다"였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주먹과 발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1968년 베이징이라는 시대배경은 시진핑의 성격에 깊이 낙인찍혀 있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시진핑의 이력을 보면 첫머리가 바로 1969년 1월에 업무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1968년에 베이징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한마디도 적지 않았다. 시진핑은 문혁때 소년시기를 보낸다. 그때 초보적으로 시진핑의 인생관,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내 생각에 이렇게 해볼 수 있을 것같다. 1968년 베이징의 간부자제들의 패싸움하던 상황을 잘 분석해보면 시진핑이 향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예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소련의 옛영화중에 레닌10월, 레닌1918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언젠가 시진핑1968이라는 영화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재미있을텐데. 이건 시진핑이 사회로 나오는 출발점이다! 1968년, 시진핑은 베이징시공안국 소관소(小管所), 유맹소투학습반(流氓小偸學習班)에 들어간다. 기실 '감옥'이다. 이 학습반에는 와룡장호로 대단한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시진핑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별 거아닌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시진핑의 누나인 시안안(習安安)은 외국어학원부속중학 1학년이었고, 외국어대학부속중학의 4명의 고위간부자제출신인 여학생이어서, 사소저(四小姐)로 불렸다. 당시 시중쉰은 낙양에 있어서 베이징에서는 무시당했다. 시안안은 작은 이익을 탐하길 좋아했고, 돈을 빌리면 갚지 않은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내에서 악명을 떨쳤다. 감가구(甘家口)일대의 깡패들은 모두 시중쉰의 딸 시안안과 알고 지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친구] 계속 말해달라. 다 까발려달라.

 

[필여해] 1968년 베이징에서 많은 대원(大院, 고관의 집)의 사내아이들은 과도, 면도칼을 품고 길거리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북경사람들의 말에 구모에 일모를 더하면 시모(時髦, 유행)라는 말이 있다. 그때는 길거리에서 낯선 남자아이들 사이에는 쉽게 충돌이 발생했다. 단순히 눈빛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1968년 베이징에서 쓰던 속어로 말하자면 '범조(犯照, 아마도 째려본다는 뜻일 듯)'이다. 그러면 바로 싸움이 난다. 간부자제들은 기실 이런 자들이다: 1대1로 싸우는 것은 겁낸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직 함께 모여서 패싸움일 때만 담량이 커지고 서로 자극하고, 서로 부추겨서 파괴적인 역량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겨우 평민자제들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문혁기간동안, 남자아이들이 싸울 때는 내가 너를 "화(花)"하겠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여기서 '화'는 간부자제들의 경우는 코피를 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평민자제들의 경우에 '화'는 머리통이 깨진다는 뜻이다. 북경말로 '개표아(開瓢兒, 바가지를 연다는 정도의 의미)'라는 것이다. 간부자제들은 잘 살고 힘이 넘치며, 평소에 팔다리운동도 하며 지냈다. 1968년, 북경의 간부자제들은 당국의 눈아래에서, 여러번 권투시합을 열었고, 천하가 어지럽기를 바라는 것같은 여자아이들은 치어리더까지 만들어 관전했다. 그러나, 패싸움 장면이 되면 모두 쓸모가 없어졌다. 체육단련과 싸움은 전혀 다르다. 싸움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싸움은 역도, 씨름, 권투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무슨 규칙도 없다. 맨발인 놈이 신발신은 놈을 겁내지도 않고, 힘센 놈은 무식한 놈을 무서워하고, 무식한 놈은 목숨을 돌보지 않는 놈을 무서워한다. 평민자제들은 보편적으로 영양부족이지만, 싸울 때는 죽기살기로 싸운다.

 

[친구] 그런 얘기는 아주 신선하다.

 

[필여해] 1968년, 한 남자아이가 만일 이름을 날리려면 가장 간편한 것은 1대1로 결투를 벌여서 이기는 것이다. 1968년 북경의 속어로 말하자면 '단주(單走)' '단도(單挑)' '단련(單練)'이다. 당시 칼을 지니고 길거리를 다니는 간부자제는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전체 북경에서 정말 칼로 사람을 찌른 간부자제는 모두 합쳐도 몇명되지 않는다. 지금의 정치국상위처럼 손가락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다! 나머지 모든 아이들은 그저 입으로 싸우 허풍대왕, 멍청이, 겁쟁이들이다. 그러나 과도를 들고 찌를 수 있는 평민자제는 수두룩했다. 1968년 북경의 간부자제들 중에서 진정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악독한 인물은 아무리 살펴봐도 오직 한명 장군집안출신의 담여광(譚餘光)이다. 강호의 별명은 소단자(小壇子)였다. 그리고 담여광도 오직 한명 안덕로중학 3학년짜리 깡패하나를 죽였을 뿐이다. 당시 북경석유대학부중에 유명한 노하(老賀)가 있다. 한때 북경 홍위병중 가장 대단한 세력이었다. 노하는 헛된 명성만 있었고, 기실 겁쟁이였다. 당시 우리는 모두 십여세였는데, 노하는 유급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이미 스물이 넘었다. 생각해보라 이 스물몇살짜리 아이가 중학생들 틈에 끼어있다고. 그럼 바로 태두급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비록 그의 부친은 겨우 대교(大校, 대령)였지만. 나중에 모두 알게 되었다. 노하는 기실 겁쟁이라는 것을. 한번은 간부자제들의 패싸움에 많은 사람들이 과도 면도칼, 비수등을 들었고, 앞다투어 노하에게 네가 오케이하면 우리는 사람을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당연히 이것은 허풍이다. 그러나 노하는 감히 오케이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담량이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노하는 간부자제들간의 패싸움에 고환을 맞아 터졌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장애인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등박방(鄧撲方)은 장애인협회를 하면서 노하의 옛날 북경홍위병내에서의 명성을 생각해서 그를 이사로 모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간부자제들이라는 것이 겨우 이런 수준인 것이다.

 

[친구] 그런 이야기는 모두 신선하다. 나는 처음 들어본다.

 

[필여해] 그리고 또 한명의 독안룡(獨眼龍) 한노독(韓老獨)이 있다. 101중학을 다녔다. 그의 부친은 주헝가리대사였다. 그는 어렸을 때 폭죽을 터트리다가 눈 하나를 다쳤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 기회를 틈타 자신은 싸우다가 눈하나를 다쳤다고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라. 그때 우리는 모두 장편소설 야화춘풍투고성(野火春風鬪古城)을 읽었고, 모두 거기에 나오는 한간사령(漢奸司令) 고대성(高大成)이 패싸움을 하다가 눈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무서워하지 않겠는가? 한노독은 그렇게 호가호위했고, 독안룡 고대성의 위풍으로 자연스럽게 북경 간부자제들의 대두목이 된다. 한노독의 구두선은 우리는 해전구의 깡패들을 모조지 쳐서 해전구에 살지 못하게 만들겠다였다. 이전 정말 엄청난 허풍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북경간부자제는 문혁때 살인방화의 큰 죄를 저질렀고, 그러나 많은 것은 스스로 허구로 만들어낸 허풍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비난하고, 욕한다. 그 결과 간부자제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기실 사실을 알아보면 아주 웃긴다. 한노독은 팔뚝이 얇아서 대마줄기같다. 정말 싸우면 아무 것도 못한다.

 

[친구] 네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다니, 그러다가 노하, 한노독등 노홍위병들에게 밉보이는 것아니냐. 그들이 너를 미워할텐데...

 

[필여해] 나는 늙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관속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목에 걸린 것처럼 뱉지 않으면 시원스럽지가 않다. 어렸을 때, 우리 집언 중앙선전부의 관사에 있었다. 중앙선전부 관사의 뒤에는 대묘군(大廟群)이 있었는데, 많은 도시빈민들이 살았다. 중앙선전부의 남자아이들과 대묘의 남자아이들간에는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11월, 한 겨울의 오후, 중앙선전부의 자제등과 대묘의 자제들이 중간 사람을 통하여 패싸움시간과 장소를 정해 자웅을 겨루기로 했다. 우리쪽의 몇십명의 사내아이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서 설날을 맞은 것처럼 즐거워하며 희희낙락 약속장소로 갔다. 그런데 대묘쪽에서는 두 명만 나왔다. 이건 분명 우리에 대한 모욕이다. 그중 한명은 성이 양(楊)씨이고, 다른 한명은 사탄에서 유명한 불량소년으로 별명이 서과피(西瓜皮)였다. 중앙선전부관사의 두목인 사대동(史大東)이 주먹을 쥐고 쓰다듬으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사람을 패겠다. 너희는 내가 어떻게 패는지 봐라. 그는 덩치가 크고 허리가 굵었다. 씨름, 권투 모두 잘해서 우리가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양모는 쇠방망이를 들더니 땅위에 선을 하나 긋고는 사납게 말한다: 오늘 누구든지 이 선을 넘어오면 내가 때려죽여버리겠다! 과피. 시작하자! 서과피도 천천히 쇠방망이를 들어올리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한다: 서두를 것없다. 누가 감히 이 선을 넘어오는지 보자. 누구든지 넘어오면 죽여버리겠다. 우리는 바로 몸이 굳어버렸다. 사대동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감히 그 선을 넘어가지 못하고, 몇마디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는 물러났다. 그리하여 우리 수십명은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쥐새끼처럼 관사안으로 줄행랑을 쳤다. 나는 흥분해서 사대동에게 물었다. 대동 너는 왜 나서지 않은 거냐? 대동은 기가 죽어서 말한다: 그놈의 쇠방망이로 나를 내려치면 내가 맨팔뚝으로 막아야 하는데, 분명 팔이 부러질 것이다. 보라. 이것이 바로 간부자제의 선천적인 유약함이다. 패싸움을 벌이기로 했으면,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사대동은 보기는 좋지만 쓸모없는 종이호랑이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보기만 좋고 쓸모는 없는 종이호랑이였던 것이다. 그후 중앙선전부의 사내아이들은 감히 대묘의 아이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피해다녔다. 간부자제는 목숨을 아까워해서 감히 목숨을 걸지는 못했던 것이다.

 

[친구] 허허. 두 악동이 중앙선전부관사를 눌렀구만.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필여해] 내가 다 말해주겠다. 1968년 북경에서 패싸움을 할 때, 간부자제들이 평민자제와 패싸움을 벌여서 이긴 적은 한번도 없다. 모두 평민자제들의 완승이었다! 선무구 달지교, 동성구 지안문 이 두 곳의 평민자제들이 가장 대단했고, 건드리지 못했다. 싸움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생사를 걸고 하는 것이다; 패싸움은 무엇인가. 두 패거리가 생사를 걸고 하는 것이다. 한번 싸우면 머리통이 허리띠로 옮겨간다. 간부자제들은 말싸움이야 괜찮지만, 근본적으로 목숨을 걸지는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 하모(賀某)라는 귀인이 있다. 바로 등소평 사위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직접 지안문의 장준령(張峻嶺) 한명이 쇠삽을 들고 여러명과 싸웠고, 누구든 붙으면 죽어라 그놈을 쳤다. 하모는 그의 그런 기세에 눌려서, 기꺼이 그에게 몸을 맡긴다. 그러나, 지금 평민자제들중에서 당시의 전적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간부자제들만이 인터넷에서 허풍을 떨 뿐이다. 내 추측으로 이들 양모라든지 서과피라든지는 모두 잘 살지는 못할 것같다. 모두 실업노동자이거나 길거리에서 노점상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간부자제들은 비교적 잘 지낼 것이고, 적지 않은 사람은 관료가 되었다. 양모라든지 서과피라든지 이들이 감히 당시에 용맹했다고 떠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보복이 두려울테니까. 이건 평민백성들의 관료에 대한 일종의 본능적인 두려움때문일 것이다.

 

[친구] 중노년에 들어선 후, 간부자제는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사회에서의 발언권을 장악했고, 그들 평민자제들은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군.

 

[필여해] 중앙선전부 관사의 이들 아이들은 평소에는 전부 대단하고 교만하다. 역시 중국공산당은 농민당이다 문화가 없다. 중공당내의 이런 한줌밖에 되지 않는 고급지식인들은 아주 귀하다. 모조리 중앙선전부로 갔다. 모택동이 이런 말을 했다. 중앙선전부는 염왕전(閻王殿)이라고. 염왕전의 아이들은 자부심이 충만했고, 두 눈은 치켜뜨고 모두 무시했다. 진천(秦川)의 작은아들 진초영(秦超英)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슨 공군관사, 해군관사냐 우리 이곳은 정일(陸定一)관사이다! 좋다. 그렇다면 대묘의 두 아이가 우리에게 레드라인을 그었을 때, 아무도 그것을 넘어가지 못했고 모조리 움츠려든 건 뭐냐.. 나는 일찌감치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중앙기관의 관사자제들과 부근주민의 아이들은 아주 깊은 원한을 맺었다. 중앙선전부의 자제들과 대묘의 자제들 이외에도, 중앙조직부의 자제들과 서단(西單)의 평민자제들, 국무원 상업부의 자제들과 서사(西四)의 평민자제들, 중앙당교의 자제들과 대유장(大有莊)의 자제들. 등등. 관사의 아이들은 평민 아이들을 무시했고, 그들을 후통촨즈(胡同串子)라고 욕했다. 그러면서 평민집안의 여자들은 건드렸다. 이렇게 하여 관료집안아이들과 일반백성집안아이들의 갈등은 심화된다.

 

[친구] 아마도 이것이 바로 관민간의 갈등이 첨예화된 최초의 근원일 것이다. 너는 하루종일 사회에서 굴렀기 때문에 문혁에 대한 최초의 현실주의비판소설 구급랑(九級浪)을 쓰게 된 것이구나. 그러다보니 중국문학사에 실리게 되고.

 

[필여해] 나는 이원적인 생활을 했다. 절반의 시간은 사회에서 구르고, 나머지 절반의 시간은 독서하고 글을 썼다. 혁명생산을 모두 한 것이다. 한번은 내가 소주대학 중문과주임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말했다: 소주의 작가 육문부(陸文夫)는 해방후에 단편소설 소항심처(小巷深處)를 썼다. 그 내용은 기녀가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였고, 태평성세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성공했다. 그러나 내가 쓴 중편소설 구급랑은 문혁기간 양가집의 어린 남녀가 나빠지는 이야기이고, 문혁의 난세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역시 성공했다. 문혁기간 이런 말이 있었다. 제내손실제외보(堤內損失堤外補)(안의 손실을 밖에서 메운다). 우리같은 무리들은 양모, 서과피같은 사람들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다. 1968년 북경의 속어로 말하자면 '질분아(跌份兒)'이다. 그래서 다시 더 약한 목표를 찾아서 치고, 분풀이를 해야 했다. 1968년의 북경 속어로 말하자면 '발분아(拔份兒)'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가서 더 약한 '발분아'한단 말인가. 같은 동의 진소보(陳小寶)에 따르면 그의 반에 단기서(段祺瑞)의 손자가 있는데 외톨이여서 괴롭히기 좋다고 했다. 지금 원은사영화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데 가서 한바탕 패주자고 있다. 모두 찬성했다. 단기서의 손자이면 뱃속에서부터 반동파이다. 시진핑의 말에 따르면, "그럼 더이상 뭐라고 할 수 없겠다(那就不好說了)". 1967년 12월, 어느 토요일 저녁, 우리들은 친구들을 불러모았는데 개략 150-160명이 되었다. 원은사영화관으로 영화 혁명과정 보러 가는 것처럼 했다. 밤의 마지막편.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겨우 참고 기다렸다가 사대동이 혼자 뛰어나가 단기서의 손자를 막아섰다. 미리 계획한대로 이때 누군가가 원은사영화관의 전기를 꺼서, 온통 암흑천지가 되었다.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암흑속에서 단기서의 손자를 때리고 걷어찼다. 둘러싼 사람들은 끼어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른 남자직원들도 때렸고 영화관의 설비도 부숴버렸다.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암흑속에서 도자기찻잔으로 유리창을 깰 때 나타났던 기이한 파란색을.

 

[친구] 이런, 청춘반항기의 소년들에게 싸우고 부수는 것이야말로 하늘아래 가장 통쾌한 일이지.

 

[필여해] 얼마나 부쉈는지 모르겠는데, 누구인지는 몰라도 동성분국에서 사람이 온다고 소리쳤다. 모두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부모가 다리를 두 개만 준 것을 한탄하면서. 원은사영화관의 일에 대하여 이들은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떠벌였다. 여러해가 지난 후, 나는 문혁기간 북경의 무투(武鬪)상황에 관한 글을 읽게 되는데, 원은사영화관사건도 언급이 되어 있었다. 이년전 노년이 된 진소보는 나에게 그는 실로 단기서의 손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계속 그에게 사죄하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간부자제는 겉으로는 무서워보이지만 속은 무르기 그지없다. 약한 사람은 못할게 굴면서 강한 사람에게는 꼼짝도 못한다. 평상시에 동존서(董存瑞)를 배우고, 황계광(黃繼光)을 배우고, 무송(武松)을 배우고, 황천패(黃天覇)를 배우지만, 일단 진짜 싸움이 벌어지면 쥐새끼처럼 겁쟁이가 된다. 일찌기 섭위평(聶衛平)과 시진핑이 함께 패싸움에 나선적이 있다. 싸움이 시작되자 시진핑은 바로 도망쳐버린다. 그는 겁쟁이다.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 시진핑이 막 취임했을 때, 섭위평이 그 말을 한 적이 있다.

 

[필여해] 국가계획위원회에 조씨성의 자매가 있었는데, 사내아이들처럼 칼을 들고 길거리를 다녔지만 한번도 사람을 찌른 적은 없다. 그런데, 소문이 대단하다고 나면서 강호에서는 사칠(傻七), 사팔(傻八)이라고 불렀다. 마치 양산박의 모야차(母夜叉), 모대충(母大蟲)처럼. 문혁후에 모든 일이 바로잡히고 나서, 나는 다시 그 유명한 사칠을 만난 적이 있다. 둘은 옛날 얘기를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1968년의 북경강호에서 간부자제들간의 패싸움에서 한번도 사람이 죽은 적은 없다. 그러나 평민자제들간의 패싸움에서는 수시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 들렸다. 그때는 의료수준도 낮아서, 파상풍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간부자제들은 생활조건이 좋고, 영양상태도 좋아서 일반적으로 같은 나이의 평민자제들보다는 키가 컸다. 그래서 평민자제들을 괴롭힐 수 있을 것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싸움은 목숨을 거는 것이고, 무슨 수단이든 다 쓰게 된다. 근본적으로 법률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평만자제들은 아무렇게나 돌맹이나 벽돌을 집어들고 직접 대가리를 내려친다. 얼굴에 피떡칠을 하게 만든다. 전체 북경에서 간부자제들 중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태평호에 유명한 깡패 악승(岳勝)이 있었는데, 한번은 북경사범대학 캠퍼스에서 포환을 들어서 노동자의 머리를 내려친 바 있다. 그 노동자는 바로 쇼크상태가 되었다. 악승은 이 싸움으로 유명해져서 북경의 간부자제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멀리 도망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태평장일대에는 무수한 악승이 나타났는데, 마치 이귀가 이규라고 사칭하는 것같았다.

 

[친구] 이런.

 

[필여해] 내가 이런 오래된 낡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바로 겁쟁이 시진핑은 간부자제의 선천적인 유약함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는 99% 대규모살인을 명령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대도살을 벌일 가능성은 1%뿐이다.

 

[친구] 흠흠. 너는 두 가지를 다 고려하는구나. 너는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필여해] 등소평이 64때 대도살을 벌였는데,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담량은 수십년간 단련된 것이다. 한걸음한걸음 발자국이 있고, 한단계 한단계 올라간 것이다. 일찌기 상해조계에서, 등소평은 사람이 작지만 담량은 컸다. 폭죽소리로 총소리를 감추면서 반도를 죽인 바 있다. 그후에 백색기의때도 사람을 죽이고, 다시 그후에는 여러 전투에서 대규모로 사람을 죽였다. 유등대군(劉鄧大軍)이 대규모로 사람을 죽이고, 해방후에는 반혁명을 진압한다고 대규모로 사람을 죽였다. 살인살인 또 살인을 저질러온 것이다. 개혁개방이 된 후, 등소평은 한때 보살처럼 가장하고, 착실한 사람처럼 가장하며 칼을 내려놓았다. 1983년 엄중단속때 다시 대규모로 사람을 죽인다. 마지막에 등봉조극한 것이 바로 64사태이다. 되돌아보면 겁쟁이 시진핑은 문혁때도 감히 패싸움에 끼지 못했고, 양가하에서도 돼지나 양도 잡지 못했다. 국방부장 비서로 있을 때도 표적을 맞추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흉악한 일도 근처에 가지 않았다. 그저 먹기만 해서 돼지가 되었다. 그렇데 갑자기 차갑게 변해서 대도살을 벌인다고. No No.

 

[친구] 히히 No No라고.

 

[필여해] 알아두어야 할 것은 노간부와 간부자제는 전혀 다른 족속이라는 것이다. 노간부는 살인으로 일어섰고, 간부자제는 평생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천양지차가 있다. 노간부는 많은 경우 노동자, 농민중 거친 사람들이다. 먹을 것도 없었다. 예를 들면, 강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 가난한 곳이다. 먹을 것도 없어서 홍군을 따라가면 먹을 것이 있었다. 그래서 살인방화를 하면서 혁명을 한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살아남았으면 1949년에 장군급이나 영관급이 되는 것이다. 북경에 들어온 후에 그들 대부분은 원래의 못생긴 마누라를 버리고, 다시 여학생과 결혼했다. 태어난 자녀들도 모두 도련님 아가씨이다. 어려서부터 어리광이나 부렸다. 시중쉰의 혼인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부인은 시골여자였다. 나중에 여학생 제심(齊心)과 결혼한다. 그렇게 하여 시진핑을 낳은 것이다. 너는 시진핑같은 자녀들이 살인방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노노. 허풍을 떨 수는 있을 것이다. 하룡(賀龍)은 두 자루의 과도를 들고 혁명을 했다. 그의 독생자 하붕비(賀鵬飛)는 못난이이다. 하룡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하붕비는 그저 꾹 참고 견딘다. 욕도 제대로 못한다. 소년 장우협(張又俠)은 하루종일 단련을 했다. 이두박근, 삼두박근 모두 발달했다. 그러나 그는 담량이 작다. 한번도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간부자제의 선천적인 연약성이다.

 

[친구] 오, 간부자제들은 선천적으로 연약하다고.

 

[필여해] 나는 믿는다. 시진핑같은 간부자제들은 선천적으로 연약하다. 그래서 그는 감히 대외전쟁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고, 대내적으로 피비린내나는 진압도 못할 것이다. 전쟁은 대규모로 적군의 군인을 죽이는 일이다. 동시에 상대방에게 도살을 당하기도 한다. 피비린내나는 진압은 대규모로 백성을 죽이는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을 죽이면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독함이 있어야 한다. 간부자제는 선천적으로 유약하여, 그들에게 대규모 살인을 벌일 악독함은 없다. 한 지도자의 군사적재능은 감출 수도 없고, 꾸며낼 수도 없다. 히틀러는 하사였고, 그의 군사지휘역량도 하사수준이었다. 모택동은 대원수의 계급을 거절했지만 그는 뼛속부터 말그대로 대원수이다. 시진핑의 군사직위는 국방부장비서였다. 계집아이도 국방부장 비서의 군사수준은 된다. 비서는 그저 모시는 상사의 결단을 듣는 것이고, 중요한 순간에 비서가 무슨 큰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왜 시진핑은 거의 모든 시정방침에서 오락가락하는지, 반복무상하는지에 대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일찌감치 양가하의 빛나는 사적을 크게 떠벌일때 시진핑이 시골사람들을 도와서 소를 잡고 양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골에 내려갔던 사람들은 알 것이다. 돼지를 잡는 것은 쉽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칼이 잘못들어가고, 돼지가 죽어라 발버둥친다. 돌진하면 돼지를 잡으려던 사람이 오히려 당할 수 있다. 양가하에서 시진핑은 칼을 들고 돼지를 잡은 그런 독한 일은 아예 해보지 않았다. 간부자제는 노간부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노간부의 살벌하게 과단성있는 철혈수완은 계승받지 못했다. 간부자제의 선천적인 유약함은 인생무대와 정치무대에서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친구] 좋다. 네가 시진핑은 겁쟁이라고 했고, 99%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 되돌아와서 1%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이유를 들어보자.

 

[필여해] 먼저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다. 1982년 8월 2일 저녁, 어느 정적(情敵|이 수십명을 이끌고 나에게 죄를 물으러 찾아왔다. 나는 고양이눈으로 보니 모든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큰일났다. 오늘 큰 일을 치르겠구나. 그대 북경에서 모든 풍류인물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질투로 인하여 싸우는 일이 잦았다는 것을. 두 가지 물건이 과도보다 더 위험했다. 하나는 술병이다. 깨부수면 유리칼이 되어버린다. 다른 하나는 쇳덩이를 넣은 낡은 가죽공이다. 이 두 가지는 쉽게 얼굴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오늘 정적이 이렇게 온 것은 내 얼굴을 망치려는 것이다! 나는 얼굴을 다쳐서는 안된다. 용모는 내 젊은시절의 통령보옥이었다. 안신입명의 근본이다! 나는 송단평, 추해평처럼 얼굴이 망가진 후에도 구차하게 세상을 살아갈 생각은 없다. 얼굴이 망가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통령보옥이 없으면 나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 세계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추팔괴 필여해를 받아줄 곳은 없을 것이다. 정적들은 먼저 큰 돌맹이로 우리 집문을 부쉈다. 나는 이것이 생사존망의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안의 모든 전등을 끄고, 과도를 품에 숨기고 암흑 속에 숨어 있었다. 그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즉시 정적의 머리를 칼로 내리쳤으며, 두번째 내려치기도 전에 여러 명에게 붙잡혔고, 과도도 빼앗겼다. 나는 정적의 뺨을 물어뜯고 놔주지 않았다. 죽어도 놓아주지 않았다! 이건 아주 총명한 행동이었다. 적과 나의 얼굴이 하나로 합쳐있으니, 나는 얼굴이 상할 악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벌떼처럼 몰려와서 술병으로 내 머리를 쳐서 피가 났지만, 이들은 나의 정적도 다칠 것을 겁내서 제대로 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상처를 크게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사태가 커지니 파출소의 민경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친구] 그들은 과도를 빼앗았으면서 왜 너를 찌르지 않았지? 네 목숨이 질기구나.

 

[필여해] 나는 미남이잖아. 봐라. 군벌이나 깡패들이 송단평, 추해당의 얼굴을 망가뜨린 것은 그들이 살아서 고통스러우라는 것이다. 그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민경들은 내 얼굴이 온통 피로 뒤덮인 것을 보고 내가 맞아서 피를 흘린 것인줄 알았지만, 기실 그건 정적의 피였다. 나의 통령보옥은 보전될 수 있었다. 나는 땅바닥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술병조각을 보면서, 암중으로 생각했다. 이게 뭐냐. 너희가 나같은 미남을 때리려고 왔으면 적어도 술병은 마오타이를 들었어야지. 나는 내가 칼로 한번 내려친데 대하여, 스스로 자부심을 느꼈다. 필여해는 송단평, 추해당같이 겉모습만 갖춘 얼빠진 남자가 아니다. 나 필여해는 칼을 들고 목숨을 걸 수 있는 당당한 남자이다!

 

[친구] 대단하다! 사대대장부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넌 정말 재주가 좋다.

 

[필여해] 나의 사건은 북경시 조양공안분국에 정식 기록이 있다. 정당방위로 기록되었다.

 

[친구] 정말 부럽다. 칼로 사람을 내려치다니. 그러고서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나도 법률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칼로 내려칠 수 있으면 좋겠다.

 

[필여해]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무서워했다. 당시 나는 북경의 간부자제들 속에서 미남자였다. 얼굴은 나의 목숨줄이다. 배우와 같이 하루에 세번 세수를 했고, 하루종일 거울을 봤다. 얼굴에 여드름만 나도 바짝 긴장했다. 어찌 주먹질을 하고 싸움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토끼도 급하면 사람을 문다. 이번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몰린 것이다. 이번에 ㅏㄹ을 내려친 것으로 나는 사람이 바뀌었다. 어떤 애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너의 눈빛은 온유하고 다정해서 무대위의 풍류소생같았는데, 지금은 수시로 흉광을 드러내서 겁난다. 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기개이다. 청나라말기의 시인 소만수(蘇曼殊)도 자객이 되지 않았던가.

 

[친구] 등탁에게 이런 시가 있다: 막위서생공의론(莫謂書生空議論), 두로척처혈반반(頭顱擲處血班班)

 

[필여해] 나는 필여해가 당대에 보기 드문 일찌기 칼을 휘두른 적이 있는 중국계작가라고 믿는다. 작가 노귀(老鬼)는 젊었을 때 싸움을 많이 했었지만, 그렇다고 칼을 휘둘러본 적은 없잖아.

 

[친구] 헛소리. 고성(顧城)은 마누라를 칼로 찔렀어. 너보다 훨씬 대단해.

 

[필여해] 남자가 여자를 죽이는 건 아무 것도아니다. 남자가 남자를 찔러야 실력이지.

 

[친구] 너는 여자를 건드리기 좋아하니, 남자들과의 충돌은 가급적 없도록 해라.

 

[필여해] Of course. 출국전에 나는 매번 수요일, 토요일 저녁이면 국제구락부와 화교빌딩의 8층으로 가서 춤을 추었다.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 나는 가짜사촌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무대 위에서는 두 가지 일밖에 없다. 하나는 여자와 어울리는 것, 다른 하나는 남자와 싸우거나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가짜사촌동생은 냉소하며 말했다. 어찌 무대뿐이겠는가. 천하가 바로 그 두 가지밖에 없지 않은가.

 

[친구] 허, 수십년동안 네가 이전에 패싸움을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같다.

 

[필여해] 문화혁명때의 황동한 일은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그냥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산회수삼천리(家山回首三千里)이고, 중국이 운명의 십자로에 놓였으며, 국세가 누란의 위기이다. 벙어리라도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친구] 아, 그 일들은 시진핑이 사람을 죽일지 말지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필여해] 어떻게 관계가 없을 수 있느냐. 내말을 계속 들어봐라. 네가 나 겁쟁이 필여해의 통령보옥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칼을 들고 맞서지 않을 것이다. 작은 것을 보면 큰 것을 알 수 있다. 네가 시진핑의 통령보옥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겁쟁이 시진핑은 절대로 대규모 도살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필여해는 포의지노(布衣之怒)이어서, 위해성이 크지 않다. 대단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시진핑은 천자지노(天子之怒)이다. 대단하고 피가 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사람들 목숨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내 생각에 만일 미래 민중운동이 서서히 고조되고,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면서, 점점 시진핑과 싸운다면, 그리고 계속하여 시진핑을 자극하면서, 또한 과도하게 시진핑을 격분시키지 않는다면, 겁쟁이 시진핑은 절대로 대규모 도살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햄릿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우유부단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을 것이다. 이미 요리는 다 식어버렸구나. 만일 누군가가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는 것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시진핑을 암살하려 한다면, 혹은 그의 딸을 암살하려 한다면, 성사여부를 불문하고, 아마도 겁쟁이 시진핑도 미친 듯히 도살하는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격정살인은 형법이론에서도 격정범죄의 일종이다. 모의살인과는 다르다. 즉, 원래 고의살인의 동기는 없었지만, 피해자가 자극을 받고, 도발을 받아 일시적으로 이성을 잃고 통제불능인 상태가 되어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친구] 아. 계속 시진핑을 자극하면서 또한 시진핑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군.

 

[필여해] 시진핑은 전형적인 간부자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로는 다 차지하고, 잘못은 다 떠넘기는. 방역이 효과있을 때는 그가 즉시 나서서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직접 영도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혼란이 오자, 그는 집단의 명의로 피해갔다. 그런데,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대도살령을 내린다면 다시 정치국상임위원회를 열어서 집단결의로 할 것인가? 시진핑은 황제가 되려고, 홍얼다이(태자당)인 보시라이도 제거하고, 런즈창도 제거해서 아주 득의만면하다. 주위는 온통 아부하는 자들 뿐이다. 이들 아첨꾼들은 평상시라면 괜찮지만 일단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 되면 누가 그를 대신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일을 처리해줄 것인가. 아무도 없다. 설사 북경홍위병의 제1호 살인범 담여광이라 하더라도, 깡패 하나를 죽일 때는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형사책임을 지는 것은 겁났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군용비수를 여러번 닦은 후에 용기를 내서 꼬마깡패를 한번 찔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있던 100여명의 간부자제들에게 모두 한번씩 찌르라고 한다. 그렇게 하여 법의학자들도 어느 칼이 치명적이었는지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건 담여광이 나중에 법적 제재를 피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만일 담여광에게 혼자서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면, 그는 때려죽여도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꼬마는 판야(板爺) 즉 삼륜수레를 모는 노동자의 아들이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소단자 담여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네가 오늘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내일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다! 어쨌든 나는 스무살까지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소단자 담여생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 만일 그 꼬마가 1968년 북경의 법도대로 고개를 숙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 말해달라. 당시 북경의 법도에서 어떻게 고개를 숙이는지.

 

[필여해] 방법은 많다. 예를 들어, 스스로 자기의 뺨을 몇대 때린다든지. 예를 들어 스스로 상대방을 형님이라고 불러준다든지, 가장 좋은 방법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서 부근의 집 지붕위로 던지고, 맨발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모두 '부형청죄(負荊請罪)'와 같은 효과가 있다. 그 꼬마의 이름은 주장리(周長利)였는데, 이익이 길지 못했다. 스무살도 되지 않아 죽었으니. 

 

[친구] 그걸 모두 글로 써라. 그러면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는데 고귀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여해] (삭제. 뒤의 부주(附注)를 보라)

 

[친구] 계속 얘기해봐라.

 

[필여해] 문혁후에 나온 소설, 영화, 드라마는 노홍위병, 간부자녀를 천병천장(天兵天將)처럼 대단하게 묘사하고 있고, 모두 사람을 죽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마왕처럼 그리고 있다. 그들은 노홍위병, 간부자녀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노홍위병, 간부자녀들은 중년이 되고나서, 이런 피비린내나는 폭력장면을 그냥 묵인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보라. 노하도 마찬가지이고, 한노독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다. 평생 그저그렇게 살았다. 문화대혁명때 이름을 날린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흘러가는대로 이전에 발생하지도 않았던 폭력을 묵인하고 지나간다. 노하는 문혁때의 허명을 가지고 등박방의 밑에서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왜 굳이 다른 말을 하겠는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면, 노하는 평생을 헛산 것이 될 것이다. 꼬마깡패를 죽인지 몇년이 지나지 않아 소단자는 암으로 죽어버렸다. 좋다 어떤 사람은 소단자가 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자신이야말로 꼬마깡패를 죽인 대공신이라고. 더럽기 그지없다. 간부자제들은 허풍을 떨기 좋아한다. 그런 병은 죽어도 고치지 못한다. 북경홍위병 간부자제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없이 날조한 역사이다. 엄청난 거짓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노홍위병 간부자녀들이 작고하게 되면서 이 허구의 역사가 다시는 들춰지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평범하고 유약한 사람이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면서 자신이 일찌기 살인도 저지르도 도둑질도 해보았고, 은행강도도 해보았다고 허풍을 떨다보면 결국 그 자신조차 믿게 되지 않는가.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평생을 헛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송빈빈은 나중에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가 되고 크게 성공했다. 게다가 여성이다. 문혁의 폭행으로 자신의 인생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송임궁(宋任窮)이라는 보통상장은 문혁후에 중공원로로 떠받들어진다. 그러니 체면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굳이 자신은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자신은 백조처럼 청순무결하다고 말하느 ㄴ것이다. 

 

[친구]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야.

 

[필여해] 간부자제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재주는 크지 않은데, 폼은 아주 크게 잡는다는 것이다. 혹은 재주는 별로 없는데, 성깔은 크게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도 그런 사람이다. 대규모도살은 경천동지읍귀신(驚天動地泣鬼神)할 일이다. 시진핑같은 겁쟁이가 정말 그런 경천동지읍귀신할 일을 벌일 배짱이 있을까? 그리고, 대규모도살은 스테이크를 굽는 것처럼, 적절하게 무르익어야 한다.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도살령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스스로 깨달을 수는 있지만 누가 가르쳐줄 수는 없는 그런 지식이다. 정교금의 삼부두처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된다. 89년의 64를 보라. 처음에 해방군이 북경으로 들어왔을 때는 가만히 있었다. 해방군은 합법적인 국가의 군사역량이다. 북경에 들어올 때는 일본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몰래 조용히 들어왔다. 총을 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시민들이 자꾸 가로막다보니, 결국은 마지막에 탱크를 몰고 와서 대규모도살극을 벌였다. 길거리에 나타나자마자 시민들을 향해서 총을 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들어오자마자 도살하고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인들도 어린아이에게는 사탕을 줄 줄 알았고, 노인들과는 사진을 같이 찍기도 하면서, 국제적으로 선전을 했다. 그리고 통제를 잃은 군중운동이 일어났을 때 언제 대도살령을 내려야할지를 알고 있었다. 대정치가들의 예민한 후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등소평은 89년 64때 견해는 이러했다: 이건 국제적인 대환경과 국내의 소환경이 결정한 필연적인 풍파이다. 네가 그의 견해에 동의하든 말든, 등소평은 대정치가로서 보여야할 판단력을 보였다. 또 다른 대정치가 팽진은 64대도살전날 이런 강호의 속어를 내뱉는다: 집에서는 부모를 의지하고, 나와서는 친구를 의지한다. 배가 뒤집히려고 한다! 문혁전에 하룡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팽진은 대발자(大脖子, 목이 굵은 사람)이다. 만일 목을 매려면 팽진같은 대발자를 찾아가라. 팽진은 알고 있었다. 89년 64에는 강호의 흑도수단을 쓰지 않으면 배가 뒤집혀버린다는 것을. 이건 대정치가가 가져야할 안목이고 악독한 심계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그런 정치적 안목이나 임기응변의 능력이 없다. 보라 그가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벌인 일련의 실수들을.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그는 소정치가인 것이고, 대발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목을 맬 사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아니다. 내가보기에 그는 숭정제같은 인물이다. 시진핑은 언젠가 구부러진 나무를 찾아서 목을 맬 것이다. 이번 백지운동에서 백성들은 분명히 우리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나와서 좀 편안히 숨을 쉬고 싶은 것이다. 시진핑은 이것을 색깔혁명이라고 판단했다. 허허, 그게 무슨 정치적 후각인가. 그건 정치소아과의 견해이다. 너무나 가소롭다.

 

[친구] 아니잖아. 백지운동에서 누군가 시진핑하야, 공산당해체를 외치지 않았어?

 

[필여해] 그건 극히 개별적인 이상현상이고, 근본적으로 절대다수의 보편적인 정서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건 1986년의 학생운동과 비슷하다. 누군가 공비타도를 외치지 않았어. 89년 64에 어떤 사람은 모택동상을 훼손시키기도 했고. 기실 절대다수의 학생은 공산당을 사랑하고 공산당을 따랐지. 나는 심지어 이렇게 의심했다. 사복경찰이 나와서 구호를 외친 것이 아닌지. 진압의 핑계를 잡기 위해서. 한마디로 말해서, 시진핑과 등소평은 같은 수준이 아니다. 숭정제와 홍무제가 같은 수준이 아니듯이.

 

[친구] 권력투쟁을 제외하고, 시진핑에게 어떤 특수한 능력이나 기능이 있지? 없어. 만일 시중쉰이라는 부친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지. nothing! 펑리위안도 그와 같이 살지 않았을 거야. 

 

[필여해] 그리고, 시진핑은 황제이지. 황관도 옥새도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산당황제. 시진핑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항상 공산당의 당장, 당규로 가림막을 치지. 봉건황제처럼 적나라하게 독재를 행하지도 못해. 매번 큰 일이 닥치면 당중앙이라는 집단을 기치론 내걸지. 모택동은 8기12중전회를 이용하여 유소기의 당적을 영구히 박탈했고, 당의 10대에서는 임표에 대하여 정치적 결론을 내렸어. 사인방을 타도할 때도, 화국봉, 섭검영은 11대라는 가림막을 썼어. 89년 64는 너무 긴급해서 등소평이 먼저 손을 쓰고 나중에 추인을 받았지. 역시 당중앙이라는 가림막을 사용했어. 장쩌민이 파룬공을 탄압하는 것, 후진타오가 류샤오보에 중형을 내리는 것도 역시 모든 상위가 하나하나 서명했어. 시황제의 주위에는 6명의 아부꾼이 있는데, 아부꾼들은 시진핑을 따르면서 잘먹고 잘살고 있지만, 만일 그들에게 혈채를 지라고 한다면? No No.

 

[친구] 허허 No No.

 

[필여해] 나같은 사람조차 시진핑같은 간부자제의 선천적인 연약성을 알아차리는데, 미국이야 당연히 너무나 잘 알고 있겠지. 바이든이 입을 열 때마다 북경과는 경쟁이지 충돌이 아니라고 하는데, 기실 따뜻한 물로 개구리를 삶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게속하여 시진핑을 자극하면서도 과도하게 자극하지는 않아서, 시진핑이 미쳐날뛰지는 않도록 하는 것이지.

 

[친구] 맞는 말이야

 

[필여해] 중국황제 시진핑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해외의 여러 전문가들은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시진핑은 벽이가, 기둥이다, 밧줄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시진핑은 그의 통령보옥만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겁쟁이이다. 바로 그 말이다.

 

[친구] 시진핑 한 사람이 14억명의 운명을 쥐고 있는데, 그에 대하여 조그만치라도 오판을 해서는 안된다.

 

[필여해] 1958년에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중국의 제3대, 제4대지도자들의 화평연변(和平演變)에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고도로 경계하게 된다. 그때부터 모택동은 각 계층의 후계자를 배양하는데 신경썼다. 모택동은 간부자제들에게 불만이었다. 참사의거를 일으킨 농민지도자로서 모택동은 부자는 삼대를 못넘긴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간부자제들은 아주 우려스럽다. 그들은 사회경험도 없고, 폼만 크게 잡을 줄 안다. 그들이 부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다록 교육해야 한다. 모택동은 후계자의 5대조건을 내걸었는데, 거기에 출신문제는 없었다. 중앙조직부장 안자문(安子文)은 천백만무산계급혁명사업의 후게자의 배양과 양성에 관한 중요보고서를 냈는데, 거기에도 출신문제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문혁전에는 파격적으로 일부 젊은이들을 발탁했는데, 거기에는 간부자제가 한명도 없었다. 27살의 농촌대대 당지부서기인 주명산(周明山)이 대표적이다. 당시로서는 수직발탁된 간부이다. 문혁초기, 북경의 대학, 중학에서 혁명을 일으키는데, 유등공작조(劉鄧工作組)는 많은 간부자제를 혁명위원회에 끌어들인다. 모택동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 중앙문혁조장 진백달(陳伯達)이 유등타도의 전략적 고려하에, 청화대학에서 현재 많은 학교의 혁명위원회의 책임자는 고위간부자제들이다. 이들 고위간부자제들은 물러나게 하고, 노동자빈농하농중농의 자제들을 참가시켜야겠다고 건의한다. 그리하여 유소기의 딸 유도(劉濤), 하룡의 아들 하붕비가 모두 청화대학 혁명위원회에서 쫓겨난다. 문혁후 모택동은 많은 공농병을 중앙위원회에 집어넣는다. 그때도 간부자제는 한명도 없었다. 9대, 10대때 모택동은 두번에 걸쳐 이납(李納, 모택동의 딸), 모원신(毛遠新)을 중앙위원회 후보명단에서 삭제해버린다. 나중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등소평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때 진운이 이런 말을 한다. 간부자제들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팔보산에 편안히 잠들 수 있다. 그 결과 제3제대에 대량의 간부자제를 심어놓게 된다. 그리고 정치적 장물분할의 방법으로 고위간부자제들을 관직에 앉혀 배양시킨다. 그렇게 하여 이런 겁쟁이가 중국황제에 오른 것이다. 시야(時也), 운야(運也), 명야(命也).

 

[부주(附注)]

 

[필여해] 다시 사대여자부속중학의 송빈빈(宋彬彬)을 얘기해보자. (이하생략)

 

[마비명(馬悲鳴)] 송빈빈은 변 부교장을 구타하는데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뒤의 방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고, 공작조가 철수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사람을 때린다는 소식을 들은 후, 두번이나 나가서 제지했다. 그러나 왕우금(王友琴)이 있던 고1 3반이 세번째로 구타했고, 결국 사람이 죽었다. 송빈빈은 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응급조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필여해] 여러 주장이 있고, 각각 서로 다르다.

 

[마비명] 내가 직접 송빈빈 본인에게 물어봤다. 그녀의 그날 행적은 시간대별로 맞추어진다. 그리고 사대여자부중의 여러 사람들도 확인해 주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평민자녀의 사삼파(四三派)였는데 확인해주었다. 송빈빈은 형사책임이 없다. 즉 왕우금도 직접 송빈빈이 구타하는데 참가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저 몽타쥬수법으로 송빈빈에게 책임이 있다고 암시할 뿐이다. 너의 이 글은 내가 원래 실으려고 했지만, 이 부분은 안되겠다.

 

[필여해] 이 부분을 삭제하는데 동의한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