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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시진핑)

시진핑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할까?

by 중은우시 2023. 1. 13.

글: 석산(石山)

 

최근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시진핑은 직접 발언하며, 특히 "배경있는 정치사기꾼"을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정치사기꾼'인가? 그리고 '배경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회의의 결의중 최우선적으로 요구된 사항은 바로 중앙의 명령을 집행하는데, "편향되지 않고, 변통하지 않고, 형식에 치우치지 말 것"이었다. 이건 아주 절대적인 표현이다. 이처럼 방향을 제시하는 문건에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서 여러 지방들은 서로 여건이 다르고, 상황도 시시때때로 천변만화한다. 자고이래로 "장수도 외지에 나가 있으면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즉 하급의 관리들이 구체적인 문제를 처리할 때는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애버리는 것이다. 왜 그럴까?

 

신년사에서, 시진핑은 전국에 비교적 유연한 발언을 했다. 중국은 아주 크기 때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것도 이해되며, 마땅히 컨센서스를 찾아야 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등등. 그런데 중앙기율검사위의 발언에서는 분명하고 살기등등했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

 

기실, 정치라는 것은 인성(人性)을 벗어날 수 없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욕망과 두려움은 도가(道家)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나는 음(陰)이고 하나는 양(陽)이다. 우리의 이 세계에서, 두려움은 음이고, 욕망은 양이다. 음과 양이 있어야 만물이 생긴다. 문제는 균형이다. 한자로 말하자면 그것은 "도(度)"이다. 너무 옆길로 샜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중공치하의 정치이다. 다만 이런 음양의 관점으로 보자면, 간단히 말해서 모든 정치와 정책은 시정자의 욕망과 두려움에 대응한다.

 

중앙기율검사위의 그 결정문을 보자. 아주 분명하게 시진핑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정치사기꾼을 두려워한다. 그는 배경이 있는 정치사기꾼을 두려워한다. 그는 하급의 관리들이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고, 그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편향되지 않고, 변통하지 않고, 형식에 치우치지 말 것"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만, 전국인민에게 보내는 신년사에서 그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고, 겁내지 않았다. 그래서 부드럽고 관용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은 정상이다"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결론을 말하자면, 시진핑과 그의 핵심일당은 중국의 백성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반인은 겁내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가장 꺼리는 사람은 당내의 고위관료집단인 것이다.

 

그럼, 중공20대 정치국상위의 면면을 보자.

 

리창(李强).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닝보농학원(寧波農學院, 中專(중등전문학교), 전신은 절강성농업기술학교, 나중에 절강농업대학에 병합되어 닝보분교가 된다)의 농업기계과에서 농업기계화를 전공했다.

 

딩쉐샹(丁薛祥). 16세의 딩쉐샹은 동북중형기계학원(東北重型機械學院, 현재의 燕山大學)의 기계제조과에서 단조공법및설비를 전공했다.

 

리시(李希). 1982년 서북사범학원의 중문과를 졸업했다.

 

이상의 세 사람은 문혁후에 대학교육을 회복한 후 대학입시에 참여하여 대학본과를 졸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한가?

 

차이치(蔡奇). 1975년 공농병(工農兵)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복건사범학원 교육과를 다녔다. 1978년 졸업후 학교에 남아 학교당위판공실에서 당공간부를 지낸다.

 

시진핑. 1975년 청화대학공농병학생이다.

 

자오러지(趙樂際). 북경대학 1976년 공농병학생이다.

 

왕후닝(王滬寧). 상해사범대학 1972년 공농병학생이다. 1982년 복단대학 국제정치학과 석사생이다.

 

많은 사람들은 공농병대학생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히 소개해보기로 한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고, 중국의 대학은 수업을 중단한다. 임표사건이후 1972년 대학에서는 차례로 수업을 재개하게 된다. 그럼 학생은? 모두 기층조직의 추천, 군대의 추천, 공장의 추천, 그리고 농촌의 추천으로 뽑았다. 그렇게 추천을 받아 들어간 학생들을 공농병학생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학입시를 치르지도 않았고, 기층에서 지식이 있고 문화가 있고, 정치적으로 신뢰할만하다고 여겨서 추천해주면 되는 것이다.

 

원래 이들 추천받은 사람들도 약간의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74년 요녕의 한 지식청년이 시험문제에 답을 적을 수 없자, 백지답안을 냈다. 다만 그는 답안지의 뒤에 성위에 보내는 서신을 썼다. 자신은 농촌생활과 혁명활동에 바빠서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 것이다. 그 결과 중공문혁파는 그를 전형으로 삼아 1975년이후에는 시험을 폐지해버리게 된다.

 

중공20대에 4명의 문혁 공농병대학생이 있다. 시진핑, 자오러지, 차이치는 1975년이후 공농병대학생이다. 왕후닝은 별개이다. 그는 1072년 공농병대학생이었지만, 1982년 다시 복단대학 국제정치학과의 석사생 시험에 합격한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도금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나중에 재직중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스개로 치부하면 될 것이다.

 

중국에서 문혁이 끝난 후, 대학교육과 대학입시가 회복되었다. 초기 몇년간은 경쟁이 극히 치열했다. 1977년 대학입시의 합격률은 5%였다. 1978년에는 6.5%였고, 1979년에는 5.9%였다. 이런 합격률도 선별된 사람들만이 참가한 시험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중국고등학생들은 기실 대학입시에 참가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학생들이 입학한 이후, 원래의 공농병대학생들과 동시에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그 차이가 천양지차인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래서 공농병대학생들은 학교에서건 졸업이후에 직장에 근무하면서이건 모두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고, 차별을 받았다.

 

이전의 중공지도자들과 비교해보자. 장쩌민은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했다(장쩌민은 일찌기 왕정위정권의 중앙대학을 다녔지만, 항전승리후, 중앙대학의 일부 학과가 상해교통대학에 합병된다. 그래서 장쩌민은 상해교통대학으로 간 것이다). 그후 소련에 유학했다. 해외유학파인 셈이다. 주룽지는 청화대학을 졸업했다.

 

후진타오는 청화대학 수리학과를 졸업했고, 원자바오는 중국지질대학을 졸업했다. 지질대학은 북경대학에서 갈라져 나온 곳으로 역시 대단한 대학이다.

 

사실상 등소평등 노인들은 중국의 50후(1950년대생)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문혁 홍위병의 주력이었고, 또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진타오이후, 원래 안배한 것은 공청단파의 사람들이다. 리커창, 쉬차이허우, 리위안차오, 심지어 보시라이까지. 모두 문혁후의 정규대학생이다. 다만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계획을 따르지 못한다. 시진핑이 취임한 후, 바로 권력을 안정시키고, 문혁파들을 중용하기 시작한다. 현재 7명의 정치국상위중에서 딩쉐샹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50후이다. 바로 문혁때의 청년들이다. 중국원로들의 안배에서 원래의 후계구도에는 이들이 없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대체로 현재의 중앙이 왜 그렇게 특별히 "양개확신"과 "양개유호"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신감에는 선천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중앙기율검사위의 연초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중에서 전체당에 "당의 정치건설을 강화하고, 정치판단력, 정치각성력, 정치집행력을 제고하며, 전체당이 정치입장, 정치방향, 정치원칙, 정치도로에서 시진핑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확보하고, 정치기율과 정치법도를 엄정하게 지킬 것을 요구했다" 한꺼번에 정치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나왔다. 한마디로 말하면 말잘듣고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형량의 기준은 바로 "편향되지 않고, 변통하지 않고, 형식에 흐르지 않는 것"이다. 그 뜻은 당중앙의 결정과 명령을 집행하는데 조금도 바꾸지 말고, 변통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공 고위층에 존재하는 또 다른 문제를 보자.

 

리창은 리커창에게 국무원총리를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그의 경력에는 문제가 있다.

 

리창은 저장(浙江)에서 용캉(永康)시위서기, 원저우(溫州)시위서기를 지낸다. 시진핑이 저장성위서기를 지낼 때, 리창을 성위 비서장으로 온다. 그후 저장성장을 지낸다.  그후 장쑤(江蘇)성위서기, 상하이시위서기를 지냈다. 이번에 정치국상위로 들어갔고, 3월에 국무원총리에 오를 것이다.

 

그의 경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3년간 저장성장을 지낸 외에 나머지는 모두 당위서기였다. 중공의 체제내에서, 당위서기는 비록 지방의 1인자이긴 하지만, 그의 업무범위는 행정수장과 다르다. 행정수장은 주로 일상적인 정부운영을 책임지고, 재무배분등을 한다. 집행층면의 일을 하는 것이고, 기술층면의 일을 하는 것이다.

 

둘째, 리창은 중앙에서 일한 경력이 없다. 특히 국무원 부위(部委)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 이전의 역대 총리는 모두 부장에서 부총리로 차례차례 승진했었다. 국무원은 비록 중공중앙에 종속되지만, 내외, 상하 및 각 지방의 서로 다른 이익집단에 관련되기 때문에, 협력, 조정해야하는 일이 아주 복잡하고 많다. 국무원 내부의 각 부위는 더더욱 끼리끼리 뭉쳐 있고, 이익집단이 많이 존재한다. 리창과 같은 외부인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EQ가 좋다고 하더라도 반년, 일년안에 다잡기는 힘들 것이다.

 

이번에 정부인사교체는 중국역사상 가장 완벽한 것이다. 리커창 총리가 물러나는 외에, 나머지 4명의 부총리를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교체한다. 여러 중요한 부위의 책임자들도 교체될 것이다. 시진핑이 또 다른 심복인 허리펑(何立峰)이 이런 국면하에서 아마도 큰 임무를 맡게 될 것이고, 국무원은 리창이 비록 총리이지만, 아마도 주로 허리펑이 결정권을 갖게 될 것이다.

 

허리펑은 비록 50후이지만, 지식청년이다. 그는 문혁후에 하문대학(廈門大學)에 입학했고, 전공은 재경(財經)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14년 국무원 발개위에 들어가, 국무원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리펑은 대학졸업후 하문대학에서 여러 해동안 일했으며, 시진핑의 부하이다. 지강신군(之江新軍)중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국무원에서, 그의 역할이 아주 클 것이고, 많은 결정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시진핑의 집권 10년동안 진행한 거대한 계획은 대부분 물거품이 되었다. 특히 마지막 3년간의 청령정책(제로코로나)은 경제를 크게 망가뜨렸고, 각지방정부들을 힘들게 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베이징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모두 집행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청령정책을 취하면서 어디든 코로나가 발생하면 파면하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안정시키라고 한다. 결국 청령을 위해 계속 조치를 추가하다가 나중에 되어서는 지방관리들이 뭐를 해도 안되니 그냥 도시를 봉쇄해 버리게 되고, 결국 경제는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러자 사회의 불만이 폭발했고, 베이징에서는 지방정부에서 조치를 강화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하더라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지방관리들의 최선의 방안은 그저 입으로만 구호를 크게 외치는 것이고, 실제업무처리에서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바로 탕핑(복지부동)한다.

 

그리하여 시진핑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관료체계의 자주동력을 상실한 후, 전체 체제가 이미 느슨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아가 체제의 지지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가장 두려워 하는 일이다. 앞으로 2년간은 중공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 각종 내외적인 갈등이 복잡다단하고, 사회적으로도 위기일발이다. 그러나, 체제내에서는 모두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 조금만 부주의하다가는 대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계획을 따르지 못한다. 그것이 시(時)이고 그것이 명(命)이다. 아마도 중공에게는 정말 마지막 시각이 온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