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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by 중은우시 2020. 1. 16.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뒤에는 비참한 운명이 숨겨져 있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광서제는 가련한 남자이다. 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주로 아래의 몇 가지 방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첫째, 동년의 불행


재첨의 생부는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이다. 정상적인 황위계승이라면 재첨에게 순서가 돌아올 수 없다. 다만, 동치제는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재첨이 서태후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이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실 이는 전혀 행운이 아니고 오히려 비극이었다.


그가 입궁했을 때, 나이는 겨우 4살이다. 그의 부친은 서태후가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나서 통곡해서 거의 혼절할 정도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이 아이는 끝났다.


모친의 사랑과 부친의 관심을 받아야할 아이가, 돌연 가정의 즐거움과 따스함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다. 그리고 억지로 낯설고 차가운 환경 속에 내던져 진다. 부모를 만나지도 못하고, 형제자매를 볼 수도 없으며, 그저 괴상하게 말하는 태감과 차가운 궁녀들이 주변에 있을 뿐이다. 그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이 나이 겨우 4살짜리 아이에게 어떤 심리적 그늘을 드리웠을까? 상상해볼 수 있겠는가?


고궁에 가본 사람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발견할 수 있다. 기실 황궁은 아주 차가운 곳이다. 거기는 규칙이 삼엄하고, 말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 심지어 걸음 걷는 것도 모두 법도에 따라야 한다. 아이가 뛰어노는 것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아무도 그와 같이 놀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조용한 성격의 재첨은 입궁후에 이런 환경 속에서 생활하면서 더욱 '조용'해진다. <노태감의 회고>라는 글을 보면, 막 입궁했을 때의 재첨은 자주 병들고, 수시로 감기와 두통으로 구토하고 설사했다. 서태후마저도 이 아이가 나중에 장성할 수 있을지 우려했을 정도이다. 그는 간이 아주 작았다. 특히 번개를 무서워했다.  매번 번개치는 소리가 들리면 놀라서 소리치고 울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말없고 조용한 남자로 성장한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매일 가장 좋아하는 일은 집안에서 자명종, 팔음반을 해체하고 서양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한 태감의 회고에 따르면, 많이 분해하다보니, 나중에는 팔음반을 다시 조립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팔음반의 음계도 바꿀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입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스승을 구해준다. 그는 바로 옹동화(翁同龢)이다. 서태후의 독촉하에, 옹동화는 어린 황제에게 엄격한 공부규칙을 만든다. 이 5살짜리 어린 황제는 고대의 유가경전을 배워야 했을 뿐아니라, 글씨를 쓰는 법도 배우고, 시를 쓰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서태후는 수시로 그의 공부를 검사했다.


자금성은 제국권력의 중심이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는데는 부적합하다.


자신이 그 입장이라고 하고 생각해 보라. 광서제의 이런 동년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2. 사업의 불행


광서의 '사업'은 당연히 황제노릇을 하는 것이다. 즉, 국가를 잘 다스리는 것이다. 광서의 전기를 읽으면, 기실 그는 자질이 평범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그저 보통의 젊은이였던 것이다. 무슨 남다른 정치적 재능을 지니지도 않았다. 하물며 그는 서태후에게 견제를 받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실적을 낸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다. 18세가 되는 해에 그는 정식으로 친정(親政)을 한다. 자신이 국가정무를 처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가 축적되어 있던 대청왕조에서 그는 정신을 차려서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고 했다.


갑오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스승 옹동화의 영향을 받아, 그는 대일전쟁을 주장한다. 전쟁의 승리를 통해 사기를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홍장 등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고, 전쟁개시를 고집한다. 아쉽게도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 젊은 황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강유위등의 서적과 상소를 본 후에, 그는 구국도강의 방법을 찾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흥분된 마음으로 변법을 전개한다. 아쉽게도 그는 대청이라는 이 거대한 배를 이끄는 선장이 될 능력이 없었다. 광서제는 정치경험이 전무했고, 반대세력과 관료기득이익집단의 반대를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 광서24년 사월 이십삼일 <정국시조<定國是條)>를 반포한 날로부터 103일동안 연이어 286건의 개혁에 관한 유지(諭旨)를 내려보냈다. 그 결과는? 하나도 진지하게 집행되지 않았다. '백일유신'은 많은 대신들 그리고 서태후가 보기에 그저 한바탕 소란이었다. 유신변법이 실패한 후, 광서제는 연금된다. 그리하여 자유를 철저히 잃게 된다. 비록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폐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3. 애정의 불행


광서제가 가장 총애한 여인은 진비(珍妃)이다. <국문비승(國聞備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비만이 성격이 애교스러웠고,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쓰고, 바둑을 잘 두어 매일 황제를 좌우에서 모셨고, 황제와 함께 먹고 즐겼다. 덕종은 그녀를 더욱 총애했다." 다만, 서태후는 진비가 황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다. 황후는 반드시 서태후가족이어야 했다. 서태후가 광서제에게 골라준 황후는 서태후의 내질녀로, 도통(都統) 계상(桂祥)의 딸이었다. 광서15년 정월 이십칠일(1889년 2월 26일), 광서제는 자금성에서 혼례를 치른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워야할 때, 광서제는 특별히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서에 따라 각종 예의를 완성할 뿐이었다.


혼인후, 그는 진비를 총애하고, 점점 황후를 멀리한다. 이로 인하여 서태후는 불만을 가진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침입하고,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친다. 떠나기 전에 사람을 보내 진비를 궁안의 마른 우물에 밀어넣어 죽인다. 나이 겨우 24살때였다. 광서제에 있어서, 진비의 죽음이 그에게 준 타격은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것보다 컸다.


광서제는 38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자식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다. 자금성에서 그는 18살에 혼인했고, 적법한 처도 있었고, 그외에 여러 비도 두었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광서제의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를 보면, 광서제는 성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같다. 강희, 건륭과는 비교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전임황제인 동치제와 비교해도 그는 뒤떨어졌다. 그래도 동치제는 기녀들을 만나러 다니지 않았던가?


동년의 불행, 사업의 불행, 애정의 불행, 그리고 항상 서태후라는 늙은여자에게 압박을 받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조차 지켜내지 못했다. 광서제의 생활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타입슬립할 수 있다면, 누가 그의 비극을 체험해 보고 싶을 것인가?